'홍승찬'에 해당되는 글 52건

  1. 앙상블 유니송 창단 20주년 기념음악회 - 피호영교수님의 협연으로 더욱 빛난 앙상블 유니송 20주년 콘서트 간단 리뷰 2017.07.31
  2.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2) 2017.07.12
  3.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 2017.06.04
  4.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뮤지컬 아이다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까지... 거장 베르디의 “운명” 2017.04.18
  5.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2017.03.23
  6.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지휘자는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이탈리아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아키야마 고지 감독 2017.03.21
  7.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하이페츠. 음악은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2017.03.20
  8.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나의 아버지, 테너 홍춘선 (8) 2017.02.06
  9.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러시아 음악의 향수, 소콜로프의 추억(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 2016.09.19
  10.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첼로의 역사를 새로 쓴 카잘스. 역사에서의 B.C의 의미는? 그럼 테너와 소프라노, 첼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B.C의 의미는? (2) 2016.01.20

앙상블 유니송 창단 20주년 기념음악회 - 피호영교수님의 협연으로 더욱 빛난 앙상블 유니송 20주년 콘서트 간단 리뷰앙상블 유니송 창단 20주년 기념음악회 - 피호영교수님의 협연으로 더욱 빛난 앙상블 유니송 20주년 콘서트 간단 리뷰

Posted at 2017.07.31 19:2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201627회 이건음악회 인연으로 피호영 교수님 초대를 받아 앙상블 유니송 창단 20주년 기념 초청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27회 이건음악회에서 연주하셨던 분들이 많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일단! 앙상블 유니송에 대한 간단한 소개 및 프로그램 소개 부터 해드리겠습니다.



[앙상블 유니송 프로필]
 
1997, 세계 최고의 명문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출신의 음악인들이 시작한 앙상블 유니송은 프랑스 파리 오디토리움 생 제르맹 데 프레에서의  창단 연주회를 시작으로 리옹 살 몰리에르, 파리 쌀 꼬르토, 파리 봉 파르퇴르 성당, 파리 생 에스프리 성당, 파리 미국인 교회, 불론뉴 쌀 파비옹, 앙드레 나바라 음악원, 프랑스 크레뛔이 오디토리움 등 프랑스 전국의 유명 연주홀에서 초청 및 기획 연주로 많은 호평을 받아온 음악 단체입니다.

특히 2004년에는 파리 13구 시청의 초청으로 연주한 앙상블 유니송에 대해 당시 블리시코 시장은 `우리 장소에서 유니송을 초청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 유니송은 이름처럼 음악으로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감동의 음악 앙상블` 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10, 유니송은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멤버들도 프랑스 국립음악원 출신들을 더하게 되어 실내악과 오케스트라를 겸비한 프로그램으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세종 체임버홀, 금호아트홀,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콘서트홀 등에서 연주회를 가지며 성신여대 피호영, 서울대 최우정, 연세대 신동일, 중앙대 지진경 교수 및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인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박지환, 뻬이 드라 로와르 국립오케스트라 박지윤, 로렌 국립오케스트라 고병우, 프랑스 깐느 오케스트라 허민석, 프랑스 마르세이유 오케스트라 김다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지현, 리옹 국립오케스트라 이승은, 암스테르담 오케스트라 이재원 등 국내외 정상급의 연주자들이 모여 구성된 최고 수준의 앙상블을 선보이는 음악단체입니다. 올해로 창단 20주년을 맞은 앙상블 유니송은 프랑스 플랜 국제 음악 페스티벌과 파리 생 메리 성당 연주회의 초청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단체로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휘자 Jacques Gandard

자크 강다르는 5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이후 다수의 음악콩쿨에서 수많은 상을 받은 그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진학하여 바이올린, 파이 음악의 분석, 조화, 대위법, 푸가와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해 공부하였다. 이후 여러 대가들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며 지휘법을 배우게 된다. 2001년에 젊고 유능한 신진 예술가들을 모아 카메라타 알라 Francese오케스트라를 설립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와 유럽에서 떠오르는 단체로 주목받게 되었고, 이탈리아, 스위스, 벨기에, 독일, 스페인, 인도, 한국 등 세계를 돌며 공연을 선보이게 된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레퍼토리는 바로크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교향곡, 오페라, 오라토리오 등 전 장르에 이르며 전 세계의 음악가와 청중들로부터 뛰어나 지휘로 극찬을 받고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세계 콩쿠르의 우승자를 초청하여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그의 끊임없는 음악에 대한 열정은 지휘뿐만 아니라 작곡가이자 편곡가로도 활동하게 만들었으며 특히나 그의 영화음악은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협연 피호영

약관 13세의 나이에 서울시향과 파가니니 협주곡을 협연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한 피호영은 이화, 경향 콩쿠르, 한국일보 콩쿠르, 중앙 콩쿠르를 차례로 석권하면서 어린 나이부터 바이올린계의 차세대 선두주자로 나섰다.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실기수석으로 졸업하면서 프랑스 정부 국비장학생으로 도불하여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겸 교수인 미셀 오클레에게 사사,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을 수석 졸업하였고 파리 에꼴 노르말 음악원 실내악 과정 또한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세계적인 교수인 이고르 오짐의 부름을 받아 스위스 베른 국립음악원을 졸업하고 스위스 베른 심포니와 협연하였다. 성신여대 음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중앙일보 선정 올해의 음악가, 한국 실연자 협회 클래식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고, 일찍이 5.16 민종상 음악부분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현재 앙상블 유니송 음악감동,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사와 DMZ 국제음악제 조직위원, 성신여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협연 Frederic Moreau

자신만의 해석과 카리스마 그리고 놀라운 기교로 청중을 사로잡는 음악가, 프레데릭 모로는 전세계의 프레스티지 콘서트홀과 수많은 페스티벌 등에서 개최되는 100여 개 이상의 콘서트에 매년 솔리스트로 초대되어, 현존하는 프랑스 동세대 아티스트들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바이올리니스트다. 18세 때, 국제콩쿠르에서 수상함으로써 독주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바이올린과 실내 관현악 부문에서 만장일치로 1등상을 수상했으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느 쟝 푸르니에, 미셸 오클레르, 레지스 파스키에, 티보르 바르가, 예후디 메뉴힌과 같은 유명한 거장들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사받았다. 음악 디렉터와 일렉트릭 아티스트로도 활동하며 바로크 음악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를 초월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마스터클래스와 순회 연주회를 진행하며 음악에 대한 사랑을 전파하고 있다.



[프로그램]

 M.Ravel

`Introduction and Allegro` for Harp, Flute, Clarinet and String Quartet.

Hp 피여나 / 1st Vn 피호영 / 2nd Vn 이상희 /  Va Erwan Richard / Vc 장하얀 / Cl 안종현

Fl 이은준

 

J.Brahms

Piano Quartet No.3 in C Minor, Op.60

Pf 이은지 /  Vn 고병우 /  Va Erwan Richard /  Vc 이숙정

 

J.S. Bach

Concerto for two Violins and Strings in D Minor, BWV 1043

1st Vn 피호영 / 2nd Fredric Moreau

 

J. Suk

`Serenade` for String Orchestra in E flat major, Op. 6



이렇게 공연 시작! 기대반 졸지말아야된다는 걱정반으로 공연장에 착석 하였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건 직원이지만 클래식자도 모르는 클래식 초짜 입니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걱정했던것과 다르게 100분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여 흥미진진하게 하프,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소리에 매료되어 공연을 관람 하였습니다. (Good Good)

특히 살면서 처음 실제로 들어보는 하프 소리는 너무너무 신기하고 매력적 이였습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홍승찬 교수님, 장하얀님, 피호영 교수님, 장린님, 류경주님 과 사진도 촬칵촬칵!! 연주가 끝나고 힘드실텐데 웃으면서 흔쾌히 촬영까지 해주시는 센스!! 역시 팬이에요~~ㅋㅋㅋ (지난 27회 이건음악회 때, 그리고 2017년에 있었던 독주회를 보며 완전 팬이 됐습니다. 멋지세요 피호영 교수님!)


다음에도 꼭 초대해주시면 꼭 가겠습니다.!! 혹시 티켓이 더 들어온다면, 이건음악회 팬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도 하겠습니다.  참 멋진 공연 준비해주신 앙상블 유니송, 피호영교수님 외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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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Posted at 2017.07.12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BBC 지식 채널의 "오지의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에 소개된 한 인도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때 그는 명문가의 엘리트였습니다. 아버지는 옥스포드를 나와서 주지사를 지냈고 그 또한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죄로 군복을 벗어야 했고 계급이 다른 농민의 딸과 사랑에 빠져 집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정착하여 집을 짓고 땅을 일구며 가축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남매를 낳아 사랑을 주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학교 가지 않겠다는 딸을 말리지 않았고 멀리 호주까지 가서 살겠다는 아들도 축복했습니다. 그렇게 모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그들은 틈만 나면 험한 길을 며칠이나 걸어서 부모를 찾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아버지가 부르시면 곁에 와서 살겠다고 합니다. 저녁상을 물리면 가족이 모두 둘러앉아 아버지의 하모니커 연주를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이 나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옷을 벗고 바위에 앉아 햇살을 받고 바람을 맞으며 어느덧 자연과 하나되는 느낌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가끔씩은 산 아래 마을에다 맡겨놓은 낡은 오토바이를 정성껏 닦고 손질해서 달리는 걸 즐깁니다. 다른 이들의 수고를 끼치지 않으려고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놓고 틈만 나면 들여다 보는 것도 또 다른 그의 낙입니다. 길게 눕지 않고 앉을 수 있도록 좁고 깊게 판 무덤에 들어가서는 그 아래 아름다운 자연과 자신이 일군 삶의 터전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 하나하나에 마음을 뺏긴 진행자가 끝으로 혹시나 살면서 후회는 없는지를 조심스레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딱 한가지 회한이라면 자신이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서 그의 삶이 깃든 이곳의 상공을 누비며 그 아래를 한 눈에 내려다보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몸담고 있는 학교에 몸이 불편한 청소부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몹시 절면서도 늘 바닥을 쓸고 휴지를 줍느라 잠시도 쉬지 않았고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피며 더러운 곳만 찾아다녔습니다. 무뚝뚝한 표정과 불편한 거동으로 어디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나타나는 그분을 다들 조금은 경계하며 어색하게 대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남다른 생각으로 이분을 지켜보았고 감사한 마음을 전달할 무언가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리를 끄느라 한쪽 신발 바닥이 먼저 닳아 망가진다는 걸 알고는 따로 밑창을 덧댄 운동화를 선물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학생을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영재로 입학한 발레전공 신입생인데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토록 따뜻한 시선과 속깊은 생각이라니! 정말이지 꼭 만나고 싶었는데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이제는 다리 저는 청소부 아저씨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바르고 어질며 따뜻한 사람들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아를에서 시내버스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버스에 오르더니 큰 가방을 열어 한참이나 뒤졌지만 차삯으로 쓸 동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버스 기사는 그냥 타도 된다는 손짓을 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러자 그 기사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와서 동전 찾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러기를 또 얼마가 지난 후 결국은 버스 기사가 먼저 동전을 찾아 머리 위로 흔들었고 그제서야 할머니 뒤로 줄을 서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성을 질렀습니다.

아를에서의 마지막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흐가 즐겨 찾았다는 근처 카페로 가서 라따뚜이를 주문했습니다. 그러자 웨이터는 그 메뉴가 없다면서 아마도 근처의 다른 음식점들도 다 마찬가지일 거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내일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다며 있는 동안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다 맛보았는데 라따뚜이만 못먹고 간다면 얼마나 아쉽겠냐며 짐짓 간절한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난처해진 그는 가서 물어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사정을 전해 들은 주방장은 아쉬운 대로 주방에 있는 야채를 써서 만들어보겠노라 말했습니다. 그렇게 라따뚜이를 맛있게 먹고 계산서를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카페 주인이 나와서 메뉴에 없는 음식이라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의 호의를 두번씩이나 그저 받을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 역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요리 "라따뚜이"

 

그때 카페 한 쪽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검고 긴 생머리에 크고 까만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인 프로방스 여인이었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과 마주앉은 그 여인은 아기 돌보듯 그를 대했고 그 모습이 너무 정겨워 카페 주인에게 혹시 아는 사람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말인 즉 그 두 사람은 근처에 사는 아버지와 딸인데 얼마 전까지 따로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그 부녀가 주문한 밥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그곳에서 받은 친절과 배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모르는 일이었고 문을 나서는 내게 카페 주인은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고 쏟아질 듯 알알이 넘쳐 가슴 속에 박혔습니다.

 

 



영화 "엘리노어 릭비"를 봤습니다 비틀즈 노래 제목과 영화 제목이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입니다 ", 외로운 사람들을 보아요. 외로운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외로운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일까요?" 비틀즈의 앨범 "리볼버"에 수록된 "일리노어 릭비"의 후렴구입니다. 이처럼 심각한 질문에 같은 앨범에 수록된 "옐로우 서브머린"은 아이처럼 해맑은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 노란 잠수함에서 살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우린 너나없이 한 배에 타고 망망대해를 나선겁니다. 그렇게 정처없이 흘러가고 있는겁니다. 영화에서 두 남녀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함께 있지 못합니다. 처음엔 여자가 걷는 길을 남자가 멀리서 뒤따르지만 나중엔 앞서 걷는 남자의 뒤를 여자가 떨어져 걷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하고 있지만 무작정 따라가는겁니다. 어디라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라서 중요합니다. 나란히 서서 손을 잡거나 어깨를 기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한 배를 탔다는 게 사랑이고 운명이고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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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강소나무
    홍교수님 글을 읽으면 자주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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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

Posted at 2017.06.04 19:0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음악사를 통 털어 가장 위대한 업적을 쌓은 세 사람의 독일 출신 작곡가라면 아무래도 바흐, 베토벤, 브람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사람 이름의 성이 모두 알파벳 B로 시작하는 까닭에 '3B'라 부르기도 합니다. 최초의 전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우가 처음 이 말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독일 출신의 작곡가라는 것 말고도 참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놀라운 능력과 업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늠하는 잣대로 삼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먼저 그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 일찍 독립해서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갔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 음악가,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어떤 난관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집념, 근면과 성실로 불멸의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genie.co.kr/magazine/subMain?ctid=8&mgz_seq=3522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바흐는 어려서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큰 형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그러나 빠듯한 살림에 조카들이 늘어나자 따로 나가 살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생계형 음악가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찍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해서 열 세 자녀를 낳았고 부인을 사별한 후 재혼한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를 두었습니다. 무려 스물이나 되는 자녀들을 누구보다 잘 양육하고 교육하였기에 장남 빌헬름 프레데만과 차남 카를 필립 엠마누엘, 그리고 막내인 요한 크리스찬이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음악사에 길이 그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대학도시 라이프치히에 정착하게 된 것도 성장한 자녀들의 교육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습니다.

 

이미지출처 : http://www.christianitytoday.com/history/people/musiciansartistsandwriters/johann-sebastian-bach.html

 

베토벤 역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처음 음악가의 길을 개척하여 크게 성공하였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무능하고 심약했던 탓에 알콜 중독자로 살면서 가족들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괴롭히며 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베토벤은 형제들을 감싸고 돌봤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는 그 자신은 물론 두 동생까지 돌봐야했고 죽는 날까지 그 책임을 다하느라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말년에는 심신이 다 고갈되어 도저히 하루도 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도 형제들을 통 털어 유일한 혈육으로 남은 철부지 조카 카를의 앞날을 걱정하고 준비하느라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바쳤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지나치리만큼 절약했지만 그렇게 모은 돈은 고스란히 철부지 조카에게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lifesitenews.com/opinion/the-problem-with-the-beethoven-argument

 

브람스의 아버지 또한 음악가였습니다. 콘트라베이스와 호른을 연주했으며 어린 브람스에게 음악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 대신 14살부터 함부르크 항만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렸으며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의 반주자로 발탁되었고 이후에는 당대를 풍미했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반주자로 음악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사귄 요아힘과 평생 우정을 나누었고 슈만에게 브람스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요아힘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와 동생들이 늘었지만 가족을 돌보는 브람스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계모와 이복동생들까지 보살폈습니다. 무작정 믿고 전 재산을 맡긴 출판업자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해도 원망하는 법이 없었고 스스로는 검소하게 살면서 그렇게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여유까지도 늘 누군가에게 베풀었습니다. 슈만이 그에게 빛을 주었듯이 그 또한 드보르작을 비롯한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존경했던 스승의 부인이자 마음속으로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던 클라라와 그 가족들을 죽을 때까지 돌보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thefamouspeople.com/profiles/johannes-brahms-395.php

 

후대에 귀감이 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이들 세 작곡가 역시 모두 고귀하고 숭고한 가치와 신념을 가졌고 음악으로 그것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에서 진정 놀라운 것은 그들의 두 눈은 언제까지나 저 높은 곳의 별을 바라보며 두 손을 뻗어 끝내 닿으려 했으면서도 두 발은 늘 꿋꿋하게 땅을 딛고 서서 그들을 향해 몰아치는 세찬 바람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맞으며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라면 곧 몽상가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는 것이 예술이며 이상으로 현실을 이끄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 믿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라고 생각하여 현실을 파고들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깨닫도록 하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살다 보면 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겪습니다. 현실은 이상을 용납하지 않고 이상은 현실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세 작곡가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상반된 두 세상을 다 아우르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현실에서 이상을 찾았고 이상으로 현실을 구했습니다. 이상이 있었기에 현실을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이 거칠수록 이상은 더 높아만 갔습니다. 남다른 재능이 축복이자 저주인 것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 또한 장벽이면서 또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느라 단련된 힘으로 누구보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흐와 베토벤, 브람스는 남다른 재능을 책임이라 생각하여 세상을 향한 축복으로 만들었고 그들에게 닥친 현실 또한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여 위대한 선물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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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뮤지컬 아이다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까지... 거장 베르디의 “운명”[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뮤지컬 아이다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까지... 거장 베르디의 “운명”

Posted at 2017.04.18 1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죽어서는 물론이고 살아서도 베르디만큼 명성과 인기를 누렸던 작곡가는 없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는 오페라 작곡가의 대명사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베르디의 삶을 두고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부러워하고 우러러볼 만한 그의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합니다. 어쩌면 알고도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오페라를 두고는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유형의 비극이 다 들어있다고 하면서 정작 그 자신이 겪으며 감당해야 했던 비극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작품을 통해 다루고자 했고, 또 다루었던 그 많은 비극들이 결국은 그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출처 : http://www.cdandl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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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출세작은 나부코였습니다.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열망이 바빌론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이스라엘인들의 처지에 투영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고 오페라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의 국가인 것처럼 널리 불려졌습니다. 이후에도 롬바르디아인에르나니등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이탈리아 인들은 Viva Verdi!(베르디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베르디를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이는 그 자신에 대한 동포들의 감사와 애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이탈리아의 엠마누엘레 왕(Vittorio Emmanule Re Di Italia)의 앞 글자를 모으면 Verdi가 되었기에 이를 드러나지 않게 외치려는 까닭도 있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성공을 거두게 되자 독립에 대한 염원을 작품에 담고자 한 베르디의 선택이 무엇보다 흥행을 염두에 둔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지만 그 자신의 삶에서 오히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베르디가 태어났을 때 그의 고향은 프랑스에 속해있었고 그리고 얼마지 않아 나폴레옹 군대에 쫓긴 오스트리아군이 그의 집까지 유린하면서 그 또한 어머니와 함깨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토록 열망했던 밀라노 음악원 입학이 좌절된 것도 단지 그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 뿐만 아니라 밀라노에서 그는 엄연히 외국 여권을 소지한 외국인이라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다른 나라의 지배와 간섭을 받지 않는 하나의 나라 이탈리아를 염원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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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닥친 두 번째 비극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어서 그 누구라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가 성장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돌봐주었던 부호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두 아이와 아내까지 차례로 잃어야 하는 비극이 닥쳤던 것입니다. 이후 소프라노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를 만나 위로를 얻고 도움을 받아 재기할 수 있었지만 그토록 참담한 아픔과 슬픔이라면 그 누구라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특히 베르디와 같이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성격의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한 떨칠 수 없는 악몽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오페라에서 다룬 그 수많은 비극적인 운명에는 언제나 혈육,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가슴 아픈 일들이 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리골레토의 주인공 곱사등이 리골레토는 아내도 없이 애지중지 홀로 키운 외동딸을 자신의 잘못으로 죽게 만들었고 트로바토레에서는 집시 여인 아주체나가 자신이 낳은 아들과 기른 아들 모두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고 마는 운명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돈 카를로의 펠리페 왕 또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운명의 힘은 이와는 반대로 자식으로 말미암아 아비가 죽게 되면서 주인공 모두가 파멸에 이르는 가혹한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프라노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출처 : 위키피디아


그에게 닥친 세 번째 비극은 두 번째 아내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습니다. 당대의 소프라노였던 주세피나는 두 아이와 아내마저 잃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베르디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세피나는 이미 유부남인 테너 모리아니와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두었으니 두 사람의 관계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두 사람의 보금자리에 욕설과 돌멩이가 날아들었고 베르디는 결국 고향에서 떨어진 산타가타에 농장을 마련하였고 그제서야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이루고자 했던 그의 소박한 소망인 농부의 꿈을 이루었고 그토록 원했던 잠시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살며 서로를 의지한 지 12년이 지난 다음에야 결혼실을 올리고 누구에게나 떳떳한 부부로 맺어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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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베르디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트라비아타는 두 사람의 가슴 아픈 사랑이 빚어낸 결실입니다. 그 자신이 베르디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 스트레포니는 파리로 떠났고 그 뒤를 따라간 베르디는 아무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도시에서 두 사람의 사랑에만 모든 것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듀마의 소설 카멜리아의 여인을 연극으로 만든 공연을 관람하였고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극중의 남녀 주인공이 마치 두 사람인 듯 여긴 베르디가 당장에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트라비아타뿐만 아니라 베르디의 오페라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은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다의 두 남녀 주인공이야말로 개선장군과 노예라는 신분으로 보나 적대국인 이집트의 장군과 에디오피아의 공주라는 처지를 생각한다 해도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 작품에도 아버지와 딸이 기구한 운명으로 다시 만나고 이집트에 정복당한 에디오피아 사람들의 처지는 바빌론에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다름이 없고 오스트리아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이탈리아 사람들과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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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di Opera Aida

출처 : wikiwand


이후 베르디는 내놓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었고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드물게도 아흔에 가까운 천수를 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살면서 결국은 그의 운명과도 같았던 평생의 반려 스트레포니를 먼저 보내야했습니다. 그 안타까움이야말로 그의 삶에 드리워진 마지막 결정타였고 이제는 더 이상 걷어버리고 싶지 않은 검은 장막이었을 것입니다. 그 장막 속에 그의 모든 슬픔과 기쁨을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인 부세토 근교의 산타가타에 마련한 농장에 칩거하였습니다. 통일 이탈리아의 첫 번째 국회의원으로 추대되어 잠시 권좌의 단 맛도 보았지만 재차 추대되었을 땐 정중히 사양하였습니다. 성공한 자신과는 달리 불우한 처지의 동료 음악가들의 노후를 위해 사재를 털어 양로원을 지었습니다. “휴식의 집이라 이름붙인 이 양로원을 두고 그는 자신이 남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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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슬픔과 참을 수 없는 아픔을 겪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이겨내기 마련이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야 하니 그렇다는 말이고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저 그런 척하려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면서 속으로만 힘겨워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더러 그렇다는 것이고 베르디가 특별히 더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갔다면 스트레포니와 함께 있을까요? 아니면 마르게리타와 두 아이를 보살피고 있을까요? 그 선택이 두려워 아직도 이승을 떠돌고 있다면 산타가타 농장에서 흙이라도 만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휴식의 집에 깃들어 차라리 오갈 데 없어 그곳에 머무르는 동료들을 부러워하고 있을까요? 오페라 운명의 힘에서 여주인공 레오노라가 부르는 아리아 주여, 제게 평화를 주소서를 들으시겠습니다. 레오노라는 사랑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사고로 죽게 하고 멀리 집을 떠나 연인과도 헤어졌지만 복수를 하려는 오빠의 집념에 쫓겨 수도원을 찾습니다. 이 노래는 날마다 은둔과 고행으로 속죄하지만 끝내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레오노라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신곡에서 단테는 살아서 지옥을 건넌 자만이 죽어서 천국에 든다고 했습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없고 지옥 없는 천국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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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Posted at 2017.03.23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현대음악은 말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음악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대게는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이 모색하여 시도하고 있는 새롭고 실험적인 음악들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등장해서 유명해진 존 케이지의 “433란 곡은 아시다시피 433초간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곡입니다



악기에서 나는 소리만이 음악이 아니라 청중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물론 침묵의 순간 흐르는 시간 그 자체도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곡에서는 악기를 부수거나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음악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너무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것을 현대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조차 현대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때문에 연주회를 통해 들을 기회가 많지 않을 뿐더러 음반으로 만들어지는 일은 더더욱 드뭅니다. 그런데 1991년 이런 통념과 편견을 깨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폴란드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Henryk Gorecki)의 교향곡 3번을 녹음한 음반이 빌보드 차트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31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이 음반은 순식간에 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현대음악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작곡가인 구레츠키는 단순하면서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음악을 추구했고 이 작품 또한 그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곡은 오래 전부터 폴란드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성가와 민요의 가사와 선율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향곡이라고 하지만 3개의 악장 모두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사의 단어와 구절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이 작품의 매력은 음악보다 오히려 가사에 담긴 내용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얼핏 구레츠키가 추구한 보편적인 설득력이 슬픔이라는 정서에 모아지면서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Henryk Górecki


 

1악장의 가사는 폴란드의 수도원에 전해지고 있는 성십자가 탄식 기도문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나의 아들,

내 몸에서 태어난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상처를 나에게 나누어 다오.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너를 품고 있었던,

진심으로 너를 돌보았던 어미에게

너의 목소리라도 들려주어 기쁘게 해다오.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기막힌 심정이 절절히 녹아 있는 곡이죠. 세상의 어머니들이라면 가슴이 먹먹하게 듣게 되는 곡입니다.

 



다음 2악장은 2차 세계대전의 악명 높은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18세의 유태인 소녀가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에 남아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벽에 쓴 낙서를 가사로 삼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먼저 떠나가지만 엄마 울지 마세요.

고결하신 성처녀 아베 마리아여 저를 도와주소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토비체에서 공부를 하고 그곳 국립음악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구레츠키는 아마도 이 역사의 비극적인 현장에서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악장은 폴란드의 또 다른 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같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던 폴란드는 숱한 전쟁에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젊은 목숨들이 희생당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3악장에선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절한 슬픔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디로 갔는가 내 사랑하는 아들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내 아들은 잔인한 적에게 죽임을 당했겠지

, 너 몸쓸 인간아 가장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나에게 말해다오,

왜 내 아들을 죽였는지

이제 다시는 아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으니

내가 울고 울어 내 늙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강을 만들어도

그들은 내 아들을 살리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국경을 넘고 인종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의 마을을 움직이는 감정은 슬픔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면 누가 뭐래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공감하여 마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작곡가 구레츠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슬픔은 형벌이자 동시에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슬픔은 오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인생의 일부로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지나간 슬픔들, 그리고 앞으로 부딪혀야 할 또 많은 아픔과 슬픔들을 구레츠키의 슬픔의 노래로 그랬듯이 우리 또한 이겨내고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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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지휘자는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이탈리아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아키야마 고지 감독[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지휘자는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이탈리아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아키야마 고지 감독

Posted at 2017.03.21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2014년 일본 프로야구의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한 재팬 시리즈의 패권은 퍼시픽 리그의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재팬 시리즈를 석권하자마자 우승팀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아키야마 고지 감독의 사임 소식이 들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 까닭이 투병중인 아내의 병간호 때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일본 열도는 물론 지구촌 곳곳에 잔잔한 감동이 멀리 퍼져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선수들이 전하는 바로는 일본시리즈를 앞둔 선수단 회식 자리에서도 조금도 힘들거나 흔들리는 내색 없이 승패의 책임은 내가 질테니 여러분은 스스로 어필하는 무대가 되길 바란다는 말로 선수들을 감싸고 격려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으니 문득 40년 전에 있었던 비슷한 일이 떠오르면서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의 남다른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1984, LA 필의 음악감독이었던 이탈리아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역시 아키야마 고지와 같은 이유를 들어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내를 돌봐야 하기에 더 이상 음악감독직을 수행할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단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아내가 나를 돌봐주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내를 돌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지휘자로서 이제 막 정상에 올라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에 그의 이러한 결정은 당시에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뭉클한 감동은 그로부터 11년이 더 지난 1995,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가지 밀라노 근교에 살면서 간병에 전념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LA 필의 감독이었던 당시 줄리니가 부지휘자로 발탁하여 기회를 주고 길을 열어주었던 이가 바로 정명훈이었고 이후로도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정명훈은 중요한 순간마다 그를 찾아 의견을 구했다고 합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줄리니 덕에 빛을 본 지휘자라면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1956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연주하기로 예정되어있었던 줄리니가 갑작스런 병을 얻어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이팅크가 그를 대신하여 지휘대에 올랐고 그 때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해에는 네델란드 방송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1961년 마침내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가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는 동안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장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 그가 물러나고 한참이 지난 2008년 드디어 세계적인 음악잡지 그라모폰이 세계적인 음악평론가들의 투표로 선정한 세계 최고 교향악단 톱20”에서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젖히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하였고 지금까지도 그 위치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Cherubini - Requiem in C minor


이렇듯 그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오늘이 있기까지 기여를 한 여러 가지 역할을 살펴보면 당장은 음악적인 능력에서의 공헌이 두드러지겠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그 못지않게 단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결과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 때 오케스트라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단원들의 수를 줄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 했을 때 하이팅크는 그들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받는 자신부터 먼저 해고하라며 단호하게 맞서서 단원들을 지켜냈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라얀이 죽고 그 뒤를 이어 누가 베를린 필에 입성하게 될 지를 두고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수 많은 지휘자들이 거론되었습니다. 한다하는 지휘자들의 이름이 다 오르내리다 결국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택되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베를린 필 단원들이 뜻을 모아 그들의 새로운 리더로 영입하려 했던 지휘자는 다름 아닌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이팅커가 지휘자라면 누구도 뿌리치지 못할 이 달콤한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너무 많으니 더 젊고 의욕적인 지휘자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까지 덧붙였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아니지만 당시 그 과정에 참여했던 베를린 필 단원에게 직접 들은 것이고 그 자리에 다른 단원들도 함께 있었으니 아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음악적인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그렇게 뜻을 모았겠지만 무엇보다 그들 모두가 신뢰하여 의지할 만한 인품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사이먼 래틀


이제 얼마 후면 베를린 필은 지금의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을 보내고 새로운 수장을 맞이해야 합니다. 몇몇 단원들의 말에 따르면 래틀은 소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언제나 방문을 열어두고 있어 누구라도 미리 약속하지 않더라도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상임지휘자로 거론되는 인물 가운데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자꾸 마음이 기웁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에서 자란 그는 중동전쟁이 한참일 때 비행기로 날아가 포화 속에서의 연주도 마다하지 않았을 만큼 조국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조국에 맞서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유태인을 학살했던 히틀러가 그 누구보다 좋아했기에 이스라엘에서는 연주가 금지되었던 바그너의 음악을 온갖 반대와 협박까지 무릅쓰고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연주한 것도 그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부당한 박해를 가하자 그에 대한 저항으로 팔레스타인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 나라 뿐만 아니라 중동 모든 나라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중동 여러 나라의 청소년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다니엘 바렌보임


아키야마 고지 감독의 사임 소식에 이어서 또 한 사람의 일본 야구인의 소식이 마음을 움직입니다. 지난 시즌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에 뉴욕 양키즈의 선발 투수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했던 구로다 히로키가 느닷없이 친정팀인 히로시마 카프스로 돌아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양키즈는 벌써부터 히로키를 잡아두려고 설득을 했고 샌디에고 파드레즈는 198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36억원을 제시한 히로시마 카프스와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198억원을 마다하고 36억원을 선택한 까닭이 정말 흐뭇하고 뭉클합니다. 2007년 더 큰 가능성에 도전하기 위해 그가 줄곧 몸담았던 히로시마 카프스를 떠나 LA 다저스로 갈 때 그는 그를 응원했던 팬들에게 힘이 남아 있을 때 히로시마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의리의 남자´ 구로다, 日시리즈 마치고 은퇴


스포츠와 음악, 야구와 오케스트라, 같은 듯 같지 않고 다른 듯 다르지 않은 세계입니다. 같다면 그 어느 것이나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뜻을 모으고 있는 힘을 다하는 일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줌으로써 마치 그것이 스스로의 일인 듯 마음을 움직여 사로잡고 흔드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깊숙이 와 닿아 감동이 되고 위로가 되려면 이끄는 사람부터 그러고자 하는 마음을 한결같고 굳게 지켜서 그를 따르는 다른 이들의 믿음을 얻어 모두가 하나가 될 때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고스란히 그것이 전달되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데 단지 그것을 마음에 새겨 지키려는 이가 없어 이리도 어지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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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하이페츠. 음악은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하이페츠. 음악은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Posted at 2017.03.20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어느 여름날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몸담고 있는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경상남도 한 농촌의 마을회관으로 내려가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예술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술 하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 공연을 보여주고 들려주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학생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 예술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하려는 뜻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허설을 마치고 공연을 막 시작하려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중이라고는 일곱 명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코흘리개 다섯에 할머니 두 분이었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농번기라 휴일도 없이 모두 일하러 나갔고 일손을 거들지 못해 어린 손주라도 돌보겠다며 집에 남은 할머니 두 분이 마실을 나선 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쪽 형편을 헤아려 찾아간다는 것이 전혀 사정도 모르고 헛발질을 한 셈이었으니 처음부터 잘못 계획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서른 명이 넘는 출연진에 일곱 명의 청중이라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맥이 빠져 공연을 못하겠다는 학생들에게 공연의 성패는 청중의 수가 아니라 감동의 크기라고 말하며 여기 있는 한 사람마다 잊다 못할 추억을 남기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대 옆에 따로 의자를 놓고는 공연이 진행되는 순서마다 어린이 한 명씩을 차례로 불러 그 의자에 앉히고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크게 부르며 이제 연주할 곡을 잘 듣고 기억하라며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너만을 위한 곡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일곱 명의 청중은 머리를 무엇에 맞은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이었고 공연이 끝나고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그들을 두고 떠나는 학생들이 더 뭉클하고 뿌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관객들이 이것 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오래 전 그 누군가는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앞에 놓고서도 연주를 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였습니다. 그날 연주회는 전장의 군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이었습니다. 그것도 비가 쏟아져 진창이 되어버린 야외에서의 연주였습니다. 이런 날씨에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하지 말자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을 만큼 아프지 않은 이상 연주를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관객이라고는 객석 저 멀리 우산을 쓴 병사 한 사람이 전부였지만 그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최선을 다한 연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껏 했던 연주들 가운데 최고였다."고 말했습니다.




19세기가 파가니니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누가 뭐래도 하이페츠의 시대였습니다. 하이페츠에 한발 앞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크라이슬러조차도 어린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제 바이올린을 연주할 필요가 없어졌다." 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그를 가르쳤던 거장 레오폴트 아우어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하이페츠의 이름을 뺀 까닭을 묻자 "하이페츠는 신의 제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습니다.1901, 러시아의 빌니우스에서 태어나 세 살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하이페츠는 일리아 말킨을 거쳐 러시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가 되었지만 여덟 살에 벌써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했고 열 살에는 이미 유럽을 누비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2년 어깨를 다쳐 어쩔 수 없이 악기를 놓을 때까지 평생을 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어디서든 최고의 찬사를 누렸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어느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어떤 연주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차갑다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사실 그의 가슴은 누구보다 뜨거웠고 그래서 어려운 형편의 제자들을 아무도 모르게 도왔는가 하면 자선 공연이나 위문 공연이라면 언제든 주저하지 않고 나섰습니다. 1923년 일본 공연을 불과 몇 주 앞두고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폐허가 된 일본을 방문하여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서 예정에 없던 자선 연주회를 열었는가 하면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선의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에 앞장섰고 연주회 도중 폭격을 받아 대피하는 위험을 겪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는 늘 무표정한 모습이었지만 위문공연 당시 병사들과 어울려 함께 찍은 사진에서만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Jascha Heifetz plays Tchaikovsky Violin Concerto: 1st mov.



제가 좋아하는 김사인 시인의 시 조용한 일입니다. 이제 곧 가을입니다. 여러분도 늘 음악이 이처럼 철 이른 낙엽이었으면 합니다. 슬며시 곁에 내려서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그냥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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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나의 아버지, 테너 홍춘선[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나의 아버지, 테너 홍춘선

Posted at 2017.02.06 10:5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어려서 살던 집엔 대문 옆에 화장실이 따로 하나 더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홀로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 창문을 열고 담배 연기를 뿜으며 짜릿한 일탈을 만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 화장실 문을 연거푸 노크하더니 다급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엄마 깼다." 아버지였습니다. 벌써부터 알고 계셨지만 모르는 척 하셨던 겁니다. 그날 이후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입시를 앞둔 고 3 무렵도 마냥 느긋하기만 했습니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잠들어서는 해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잠결에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한참을 지켜보며 서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더니 아버지였습니다. 안방으로 건너오라 하시기에 정말이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휙 돌아서서 나가시면서 뜻밖에도 "명화극장 한다."는 말씀을 여운처럼 남기셨습니다. '명화극장'은 일요일 저녁마다 해외 명화를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혼자 살 때의 일입니다. 일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자는데 전화벨 소리에 단잠을 깼습니다. "점심 먹자." 아버지였습니다. 도착해서 전화할 테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대구에서 두시간 반만에 운전을 해서 도착하신 아버지는 골목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허름한 설렁탕집으로 들어가시더니 앉자마자 뜬금 없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니 사람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와 그리 좋아하는지 아나?"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었더니 "임마, 그건 세상에 없는 일이라서 그런기다." 라고 하셨습니다. 장남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마냥 기다릴 수가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소설과 영화에 푹 빠져 있었으니 혹시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느라 연애를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셨던 겁니다. 듣고 있는 아들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그렇다면 설마 결혼을 놓고 계산을 하느라 짝을 찾지 못하는가 싶어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니 요즘 젊은 놈들이 얼마나 한심한지 아나? 마누라가 아니라 원더우먼을 찾으니 그기 어디 있나? 날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가 좋거든 집구석에 들어가면 바깥 일은 입도 뻥긋하지 마라. 출세가 좋고 돈이 좋아서 그걸 거들어주길 바라면 마누라가 아를 안놓던지, 빨래를 안하던지, 밥을 안한다고 해도 암 말도 하믄 안된다. 간혹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여자가 있긴 있더라. 그런데 임마, 그기 니하고 무슨 상관이고?"

 

홍승찬 교수

 

70년대초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대구에서 서울을 이웃집 드나들 듯 다니셨습니다. 대구 효성여대(지금의 대구 카톨릭 대학교) 음대 학장이면서 국립 오페라단 주역이셨던 아버지는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 차를 운전해서 국립극장으로 가서 오페라 무대에 서셨고 밤늦게 다시 차를 운전해서 대구로 내려가는 강행군을 날마다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런 악조건에도 남들이 꺼리는 초연을 주로 도맡으셨고 그렇게 십년이 넘도록 우리나라 오페라 공연의 역사를 새로 쓰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몸담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행정 책임자로서 또한 믿을 수 없는 성과와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단과대학 음악학부에서 예술대학으로, 다시 음악대학으로 확대 개편하는 과정의 책임을 맡아 이끄셨는가 하면 학교 안에 여학생들만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직접 지휘자로 나서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를 오가며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u&no=22016

 

날마다 오케스트라 연습이 밤늦게까지 이어지자 집에 가는 차편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학교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의 귀가를 돕겠다고 나섰고 학생들 하나하나 집앞까지 다 가서 내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명절에도 집에 없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늘 집에 있던 승합차에 고기와 떡, 막걸리를 싣고 학교로 가셨습니다. 남들 쉬는 날에도 학교에 나와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직원들을 다 불러서 가져간 음식과 술을 나누고 선물을 돌렸습니다. 학교에서 일하는 누구라도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지만 지금도 일 때문에 가끔 대구에 내려갑니다. 언젠가 동대구역에 내려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자꾸 백미러로 저를 쳐다보기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조심스럽게 "혹시 홍학장님 자제분 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개인택시 하기 전에 효성여대에서 운전기사로 일했었다며 큰 딸 대학 등록금이 없어 못보낼 형편이었는데 아버지 도움으로 졸업까지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사코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면서 이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이렇듯 열 사람이 해도 모자랄 일을 홀로 다 감당하셨기에 무쇠같은 체력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짐작할 따름이지만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쳐 더 힘드셨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 그 마음 같을 순 없었을 텐데 이미 모든 걸 꿰뚫어보시고도 안타까움과 미련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셨던 겁니다. 서른 다섯, 처음 교수가 되어서 아버지께 달려갔습니다. 소파에 앉아 저녁신문을 보고 계시기에 임명장을 내밀었더니 힐끗 보시고는 다시 신문을 펼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난 그 나이에 학장 했다."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대화는 병원 침대맡이었습니다. 마침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으셨구나 싶어 얼른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혹시 꼭 보고 싶은 분 한 분만 말씀하세요. 제가 경찰청이든 어디든 다 쑤시고 뒤져서 모셔 올게요!" 잠시 일그러진 얼굴이 펴지면서 벌어진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제서야 드디어 아버지가 마음 속에 간직한 누군가를 알게 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미소짓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바뀌더니 짧게 단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누우셨습니다. "없다."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돌아가신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출근하는 길, 꼬리를 물고 선 차 속에서 서리 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속에서 얼마나 추우실까 생각하니 어느덧 눈물이 흘러 시야를 가렸습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눈물을 닦으려는데 끝내 설움이 복받쳐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갈 땐 뭐라도 손에 들고 가게 됩니다. 끼니가 될 만한 것이 아니면 군것질 거리라도 꼭 챙깁니다. 밤에 살찌는데 왜 이런 걸 가져오느냐 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말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선술집에 안주로 나오는 갖가지 구이 종류를 따로 챙겨오셨습니다. 밤늦게 잠든 우리를 깨워서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잠이 덜 깨서 눈을 감은 채 입만 벌리고 받아먹었습니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에 고기가 불에 그을린 연기 냄새까지 뒤섞인 아버지의 체취가 코 끝을 찔렀습니다. 눈을 떠서 볼이라도 비비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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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경희
    이건음악회에서 홍교수님의 진솔하고 인간적인 멘트가 인상 깊었는데,
    그 뒤에 아주 훌륭한 아버지가 계셨군요 노래도 잘 들었습니다 ^^
  2. 고은희
    동화같은 따뜻한 이야기네요.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을 많이 공유하고 있는 선생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3. 윤현준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4. 효성여고
    1977년 효성여고 2학년때.
    홍춘선 교수님을뵈었습니다.
    학교 강당에서 전교생에게 음악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 주셨죠. 그때의 그노래 중에 '오 솔레미오' 마이크 없이도 큰 강당을 가득채우던
    아름다웠던 노래의 감동은 경이로움과 충격이었고, 효성여대 오케스트라를 데려오셔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을 설명까지 해주시며 들려주셨죠.
    그 시절로서는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에 눈을 뜨게 해 준 분이었습니다.
  5. 효성여대 피아노과 81학번학번
    뵙고싶은 교수님. 훌륭하신 선생님. 참 교육자이신 교수님 소식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네요~그 옛날교수님과 수업하던 생각이나 흐뭇함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수업하시랴 오케스트라에 합창지도에... 정말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실 만큼 많은 활동하시며 손수 전체 음대를 이끌어 가시며 활동하시든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많은 학생 이끌고 경주로 연주여행 간 생각이 나네요.연주 뒷풀이로 호텔나이트로 학생들 모두 데리고 가셔서 우린 생애 처음 스트립쇼를 보며 그 놀라움을... 지금도 그때를 잊을수가 없네요.지방 여대에서 피아노밖에 모르고 교복입고 다니던 학창시절... 그래도 누구하나 위험해 질까봐 학생들 뒤에서 챙겨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 중 제일은 교수님이 부르시던 오페라곡.독일가곡들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어요. 그 큰 몸집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테너의 목소리를 우린 가까이서 듣고 공부하였으니 참 행복하였네요.이렇게 소식 접할수 있어 감사합니다.홍춘선교수님 당신은 참 멋지고 아름다우신 분이싶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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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러시아 음악의 향수, 소콜로프의 추억(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러시아 음악의 향수, 소콜로프의 추억(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

Posted at 2016.09.19 11:35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지난 세기 러시아의 무대예술은 세 번씩이나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먼저 세기 초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간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과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와 라흐마니노프가 발레와 음악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나 처음으로 세상 밖에 그 모습을 드러낸 철의 장막 안의 예술가들의 기량은 아득하게 높은 수준에 있어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세기말이 다가올 무렵 결국 소비에트는 무너졌고 예술가들의 삶도 맥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살기 위해 그들은 다시 한 번 나라 밖으로 나서야 했지만 전과 달리 이번에는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술가의 긍지와 예술을 향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음악원이 문을 열면서부터 해외의 저명 음악인들을 교수로 초빙했고 그 가운데는 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도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소콜로프 내외를 맞이해서 교수 아파트로 이동하던 중 해가 저물었기에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노라며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테이크라고 대답했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내외가 함께 말 한 마디 없이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러시아의 경제 사정이 어떤지를 실감할 수 있었고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들의 처지가 딱하기만 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소콜로프는 뛰어난 러시아 음악가로 러시아에 명성을 안겨준 화려한 독주자중 한명이다. 소련 국립 교향악단에 견습생 시절 당대 명지휘자 니콜라이 아노소프에 의해 파격적으로 발탁되어 주목을 받기시작하였다. 1963년 소련 연방 콩쿨에서 우승한후 전-소련 방송 교향악단과 소련 국립교향악단의 독주자로 활동하며 소련의 대표 클라리네티스트로 자리하였다. 1984년 소련 공훈 예술가로 추대되었다. 


블라디미르 소콜로프(Vladimir Sokolov)


식당을 나서면서 그는 갑자기 가르치게 될 학생들을 내일이라도 당장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개학까지는 여러 날이 남았고 여독이 풀리고 시차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는 전혀 문제 없다며 오히려 학교가 문 여는 시간이 몇 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그렇게 일찍 출근한 적이 없어 모른다고 했더니 그는 가능한 한 이른 시간에 학생들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아홉시에 연구실로 모이도록 연락하고 8시 반까지 데리러 오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다음날 약속 시간에 집으로 가 벨을 눌렀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문이 열렸습니다. 현관에는 낡았지만 깔끔한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한 소콜로프가 한 손에는 악기 가방을, 다른 손에는 악보 가방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운전석 옆자리에 탄 그는 너덜해진 악보꾸러미를 가방에서 꺼내 다시 정리를 하면서 중간 중간 악보의 음표들을 소리 내어 읽었고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몸까지 흔들어대는 백발의 이국 신사를 지나가는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신기한 듯 쳐다보았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마침내 학생들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소콜로프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내게 다가와 낮고 작은 목소리로 어떻게 악기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악기를 두고 다닐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당황하여 아마도 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라 그럴거라고 궁색한 대답을 했더니 부드럽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얼마든지 기다릴테니 각자 돌아가서 악기와 지금 연습하는 곡의 악보까지 챙겨서 다시 오라고 말하고는 이번에는 학교가 문닫는 시간을 물었습니다. 사실은 열두시로 알고 있었지만 얼떨결에 열시라고 말했고 그는 그 시간에 데리러 와주면 고맙겠다는 정중한 부탁을 했습니다. 약속한 열시에 노크를 하고 연구실 문을 열었고 거기에는 아침에 만난 학생들이 모두 붉게 상기된 얼굴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소콜로프만 아침보다 더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이 세상에 없고 단지 함께 했던 짧은 시간만 추억으로 남아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가 보여준 참 예술가이자 스승으로서의 모습만은 오늘도 흐트러지려는 나를 문득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지 않아 우리 발레 스타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톡 공연을 갈 일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수리를 못해 잿빛으로 색이 바래고 무대 바닥이 삐걱거리는 목조 극장을 가득 메운 남루한 옷차림의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했고 그 추운 날씨에도 신문지에 싼 시든 꽃을 들고 밖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가 출연자들에게 하나씩 전하면서 어떤 장면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또 얼마나 좋았는지 들려주었고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진정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을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알았습니다. 이처럼 러시아 어디를 가든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술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 예술가들을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를 그토록 놀라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았던 위대한 러시아의 예술가들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득 지휘자 페도세예프가 페테르스부르크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 첫 내한 연주회를 가졌을 때의 감동이 떠오릅니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얼마지 않아서였습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지휘자보다 나이가 더 지긋해 보이는 악장이 지휘자의 악보를 따로 챙겨 들고 나와 지휘대 위에 펼쳐놓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은 페도세예프의 손 끝을 따라 줄타기를 하는 듯 팽팽했습니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았고 주저앉을 듯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온 몸으로 흐느꼈지만 결코 소리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격변과 혼란 속에서도 페도세예프와 오케스트라는 그들의 음악과 본분을 잃지 않았고 음악가가 지켜야 할 긍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단원들은 악장을 따랐고 악장은 지휘자를 깎듯이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한 마음으로 차이콥스키를 사랑했습니다. 음악에도 국경이 있다는 걸 그날 깨달았습니다. 차이콥스키는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우리가 반드시 지키고 간직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것이 사람마다의 본분이고 책임이며 지켜야 할 긍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고 살아가는 까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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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첼로의 역사를 새로 쓴 카잘스. 역사에서의 B.C의 의미는? 그럼 테너와 소프라노, 첼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B.C의 의미는?[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첼로의 역사를 새로 쓴 카잘스. 역사에서의 B.C의 의미는? 그럼 테너와 소프라노, 첼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B.C의 의미는?

Posted at 2016.01.20 10:0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역사에서 기원전을 뜻하는 B.C.는 예수 탄생 이전, 즉 Before Christ를 줄여서 만든 말이지요. 여기에 빗대서 테너들에게 B.C.는 Before Caruso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프라노들에게 있어서 B.C.라면 당연히 Before Callas라고 해야겠지요. 그만큼 엔리코 카루소와 마리아 칼라스는 독보적인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역사에서의 B.C는 예수 탄생 이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음악의 다른 분야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를 찾는다면 어떤 분야의 누구를 언급할 수 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파블로 카잘스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첼로에서 B.C.는 Before Casals인 셈이지요. 첼로의 역사는 카잘스 이전과 카잘스 이후가 있다고 할 만큼 그의 존재와 업적은 두드러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연주가 그만큼 뛰어나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첼로 연주자들의 레퍼토리 가운데 다른 어떤 작품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 세상에 알렸고 또 평생을 바쳐 이 곡의 해석과 연주방법을 연구하여 후대에 남겼다는 것이 더욱 크게 평가받은 결과일 것입니다.

 

 

첼로에서의 B.C는 파블로 카잘스 탄생 이전을 의미합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뿐만 아니라 바흐가 남긴 작품과 그 영향은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절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피아니스트들의 구약성서라 일컬어지고 있지요. 그러나 피아노의 경우 베토벤의 소나타 32곡을 신약성서라며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나란히 언급하고 있지만 첼리스트들에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함께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작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위대한 걸작은 바흐가 죽고 백년이 훨씬 넘는 동안 그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유럽의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겨우 열세 살의 어린 소년 카잘스의 눈에 띄게 된 것이지요. 그것도 우연히 말입니다. 그 해가 바로 1899년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첼로의 원년은 1899년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첼로의 역사는 1899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셈이지요.

 

Bach : Das Wohltemperierte Clavier I - Prelude & Fuga No.1 In C Major BWV 846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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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잘스는 연주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은 카잘스를 회상하며 “그의 단순함과 우아함, 고결함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파블로 카잘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엘 벤드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꽤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 지휘자였지만 살림은 늘 궁핍하였습니다. 그러나 11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음악교육에 소흘함이 없었고 그것이 훗날 카잘스에게 긍지이자 자랑으로 기억되어 늘 “나의 음악적 재능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노래와 건반악기를 배웠지만 바이올린과 첼로는 거의 스스로 터득하여 연주하였고 유랑악단과 어울려 엉터리 첼로를 곧잘 연주하는 아들에게 아버지 카를로스는 제대로 된 첼로를 사주었고 어머니는 그를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원에 입학시켜 정식으로 첼로를 배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지요.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날마다 카페 ‘토스트’에서 스스로 편곡한 곡들을 연주하였고 이를 지켜 본 작곡가 알베니스가 추천서를 써 주어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틈만 나면 들리곤 했던 헌책방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인쇄본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이후 연주자로서 그의 삶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왕실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카를로스 3세 훈장’을 받았고 유럽 각지는 물론 미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쳐 1904년 백악원 초청 연주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실내악에도 관심을 두어 1905년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1915년 드디어 첫 음반작업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1936년부터 3년여에 걸쳐 드디어 오랜 세월 연구와 연습을 거듭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첫 음반을 녹음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이어서 녹음한 베토벤 소나타 전곡과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그 해석에 있어 가장 권위있는 잣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음악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삶을 사는 가운데 1936년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과 1939년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은 너무나 큰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스페인 공화정을 지지했던 그는 1938년 10월 리체우 극장에서의 연주회를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스스로의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고향이 그리워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과 맞닿아 있는 프라드에서 살았고 1950년부터는 이곳에서 페스티발을 열어 세계적인 거장들과 명연주자들을 수없이 불러들였지만 프랑코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초청은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몬트세라트 수도원에 있는 카잘스의 동상

 

그 뿐만 아니라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에서도 연주회를 갖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코르토와도 절교를 했다가 1958년에야 다시 화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신념과 고집으로 말미암아 미국에서의 연주도 거부했지만 그가 호감을 가졌던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다시 한 번 백악관 연주회를 가졌고 당시의 실황을 담은 음반은 시대의 유물로 남았습니다. 특히 앙코르로 연주한 카탈루냐의 민요인 ‘새의 노래’는 동포와 인류의 자유를 염원한 카잘스의 상징으로 남아 지금도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많은 첼리스트들이 앞다투어 연주하고 있지요.

 

Folklore Catalan : Εl Cant dels Ocells - Pablo Casals

카잘스의 1950년 프라데 페스티벌 연주

 

카잘스는 죽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습했고 이것이 그에게는 날마다의 명상이자 기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처음에는 기술적으로 연주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도 하나 둘 극복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음악적인 해석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10월 22일 카잘스는 푸에르토 리코의 산 후안에서 수도자와도 같은 96년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토록 그가 기다렸던 프랑코 정권의 종말이 찾아왔고 1979년에는 비록 시신으로나마 그의 고향 카탈루냐의 엘 벤드렐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베를린 필 12 첼리스트들’은 연주여행을 다닐 때마다 틈을 내서 벼룩시장의 중고음반 가게를 들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은 오래된 무명 가수들의의 음반에서 좋은 곡을 찾으면 그것을 새롭게 편곡해서 연주회마다 들려준다고 하지요. 첼리스트들은 다 그런가봅니다. 첼리스트는 아니지만 저도 유럽의 대도시, 특히 파리를 방문할 때면 어김없이 벼룩시장을 찾습니다. 카잘스처럼 엄청난 보물을 찾는 요행을 바래서가 아니라 손 때 묻은 책 학 권, 빛 바랜 엽서 한 장을 버리지 않는 그들의 생각과 삶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딱히 벼룩시장을 찾지 않더라도 거리마다 사람마다 묵어서 은근한 멋을 풍기는 무엇인가를 걸치고 있어 흐뭇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2첼리스트(출처 : 다음 블로그)

 

 좋은 것은 당장은 드러나지 않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지요. 클래식 음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그렇고 카잘스의 연주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걸까요? 카잘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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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근데 마지막 동영상은 카잘스가 아니라 마이스키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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