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독일은 왜 음악강국이며 문화 선진국인가[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독일은 왜 음악강국이며 문화 선진국인가

Posted at 2018.01.13 16:19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이건음악회"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건음악회는 주식회사 이건산업과 이건창호가 해마다 열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역량을 가졌지만 국내에 미처 소개될 기회가 없었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연주자들을 초청해서 서울과 부산, 인천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며 펼치는 연주회 시리즈입니다. 연주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옆에서 거들고, 또 연주회마다 해설을 맡아 연주자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모두 뜻깊고 소중하지만 그 가운데 2012년에 있었던 23회 음악회는 특별히 더 깊고 짙은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해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연주자 12명으로 이루어진 "베를린 필 브라스 앙상블"을 초청했습니다. 대게는 음악회를 시작하기 전, 이건의 박영주 회장이 초대하는 환영만찬이 있기 마련인데 그해는 왠일인지 독일 대사 관저에서 독일 대사가 주최하는 만찬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여느해처럼 이건 쪽에서 만찬을 준비하면서 독일대사를 초청했는데 오히려 그쪽에서 만찬을 열어 초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간곡히 전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게 독일 정부를 대신하는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해도록 도와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성북동 산자락에 턱하니 걸터앉은 독일대사 관저는 자리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주변에 우거진 수풀 하며 집 아래로 탁 터진 풍광이 넋을 잃을 정도로 아찔했습니다. 고즈넉한 집채는 그 둘레와 너무나도 잘 어우러져 있었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품으려는 듯 가지런한 정원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독일대사관 입구(출처 : http://m.blog.daum.net/jgkim21/14829717?categoryId=713430)


그날의 무대가 바로 그 정원이었습니다. 일찍 도착했더니 먼저 온 사람들이 정원에 서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오스트리아 대사도 있었는데 마치 이웃집에 마실들른 동네 사람처럼 수수한 차림에 넉넉한 몸가짐이었습니다. 독일 대사가 문밖으로 나와 모두를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오스트리아 대사와는 마치 어린 시절부터 친구인 것처럼 스스럼 없는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원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설명해주었습니다. 그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말투에는 그가 깃든 보금자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가득했고 어느 한 순간도 상대에 대한 존중 배려를 잊지 않았습니다.

 

정원을 다 돌아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벽마다 걸려있는 그림을 히나 하나 빠짐없이 설명했습니다.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독일 화가들의 작품이었지만 더러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신진 작가들의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작품을 소개할 때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고 그 모습은 마치 숙련된 영업사원이나 세련된 홍보사원을 보는 듯 능수능란했지만 시종일관 유머와 미소를 잃지 않는 여유를 보여주었습니다.

 

출처(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teodora0)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대사 관저가 살려고 지은 집이 아니라 보여주려고 만든 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겉만 번지르르 하게 짓지 말고 속속들이 자랑할 만한 것들로 꽉 채우고 잘 꾸며서 날마다 사람들을 불러 제대로, 또 부지런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대사라는 직업이 참으로 힘들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고 다른 나라에 가서 자신의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중요한 일인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속속들이 다 알아야 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른 나라 말로 저렇게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땀과 수고가 있었을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출처(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teodora0)

그러나 정작 이날의 감동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집안 곳곳에 서두르다 미처 숨기지 못한 듯 쌓아둔 이삿짐이 눈에 띄었고 아무도 차마 그 정체를 물어보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 쯤 벌써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부임했어야 하는데 갑자기 그 일정을 늦추었다고 했습니다. 베를린 필 브라스 앙상블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독일 정부에 요청하여 이임 시기를 연기했지만 그게 겨우 며칠 뿐이라 어쩔 수 없이 미리 이삿짐을 싸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적지않게 수고스럽고 번거로울 수 밖에 없는 이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했고 오히려 그의 표정에서는 미리 알았더라면 이 귀한 손님들을 보다 잘 준비해서 맞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초대받아 이 말을 들은 모두가 감동했지만 누구보다 가슴이 뭉클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베를린 필 브라스 앙상블 연주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했고 그렇게 또 예기치 않았던 음악의 감동이 정원 가득 울려퍼졌습니다.


 

그날 그들이 뜨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연주했던 음악이 누구의 무슨 곡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가슴이 벅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던 그 느낌만은 아직도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그날 독일대사관에 걸려 있던 그림들은 물론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들의 이름도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림 앞에서서 차근차근, 또박또박 설명을 하던 독일대사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독일 대사의 얼굴과 이름만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스 울리히 자이트 Hans Ulrich Seidt 입니다.

 

  1. 정성진
    아~ 브라스앙상블. 서로간에 악기의 소리조차 맞추기 어렵다는 금관악기들의 속삭임을 다음 이건음악회때 CD를 구입해 들어봐야 겠네요! 자기나라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맞이하기 위해 이임을 늦추는 대사! 언젠가는 우리나라 대사들중에도 나오리라는 희망을 품어봅니다! 항상 마음에 남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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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불굴의 의지로 절망을 이겨낸 음악사의 위대한 걸작[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불굴의 의지로 절망을 이겨낸 음악사의 위대한 걸작

Posted at 2017.12.15 16:06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일들 가운데 전쟁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끔찍한 일을 겪고도 주저앉거나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고 일어섰는가 하면 그 과정에서 참으로 놀라운 결실과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음악가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 가운데 작곡가 모리스 라벨과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출처 : 모리스 라벨 - 나무위키


라벨이라면 드뷔시와 더불어 프랑스 인상주의 악파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을 잘 아는 시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오히려 20세기 분석철학의 대가로 알고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텐데 사실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호였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후원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던 명문가였습니다친가쪽은 유태계였지만 개신교로 개종했고 외가는 대대로 카톨릭 집안이었으며 아버지 카를은 철강 업계의 거물이었고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피아니스트이자 예술 후원자였습니다


출처 :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 나무위키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물론 브루노 발터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음악가들이 그의 집안을 드나들었고 덕분에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던 어린 파울은  이들과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쇤베르크와 카잘스 등 음악가를 주로 후원했지만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클림트가 그의 여동생 마르가리테의 초상화를 그렸는가 하면 막내동생 루드비히는 부모에게 받은 유산을 예술가 후원금으로 내놓아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1887511일 비인에서 태어난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폴란드의 거장 테오도르 레세트츠키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1913년에 성공적인 데뷔 연주회를 치르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듬해 발발한 제 1차 세계대전은 전도유망한 이 젊은 피아니스트의 장래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기병대 소위로 입대한 그는 폴란드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전투에서의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지만 깨져버린 그의 꿈과 그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는 결코 아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bfmi.at/documentary_all_in_one_hand_the_pianist_paul_wittgenstein.html

파울 비트겐슈타인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초인적인 의지와 불굴의 집념은  최악의 상황에서 그를 다시 일으켜세웠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왼손만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계속 걷기로 마음을 굳혔고 끊임없이 나무 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마침 포로들의 처우를 감시하던 중립국 덴마크 외교관이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수용소에 있으면서 피아노 연습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비인으로 돌아간 비트겐슈타인은 가장 먼저 그의 스승 요제프 라보르와 함께 기존의 피아노 작품을 왼손만으로 칠 수 있도록 편곡하는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만든 곡으로 연주회를 열어 점점 알려지고 호응을 받게 되자 그는 유명 작곡가들에게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위촉하기 시작했습니다. 벤자민 브리튼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파울 힌데미트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등이 그를 위해 작품을 썼고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와 모리스 라벨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라벨의 협주곡이 가장 두드러졌고 비트겐슈타인의 이름 또한 이 곡으로 말미암아 널리, 또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s://crosseyedpianist.com/tag/paul-wittgenstein/

Paul Wittgenstein


라벨의 협주곡이 오늘날까지도 깊은 공감을 얻으며 널리 사랑받는 까닭은 아무래도 그 스스로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어 다른 누구보다 그의 느낌과 생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몸이 약해 가까스로 입대한 라벨은 비록 총을 들고 전투에 나서진 않았지만 운전병으로 전장을 누비며 부상병을 후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기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신음하고 절규하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공포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이전의 어떤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충격 때문인지 종전 이후 라벨이 내놓은 작품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www.icareifyoulisten.com/2013/03/french-composers-names-maurice-ravel/

모리스 라벨


187537일 스페인과 인접한 프랑스의 소도시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난 모리스 라벨의 아버지는 철도 기사로 프랑스계 스위스인이었고 어머니는 바스크 혈통의 스페인계였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파리로 이사를 가서 줄곧 그곳에서 자라고 공부했던 라벨은 상당한 수준의 음악애호가였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작곡가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화성을 배웠습니다. 열네살에  파리 음악원 피아노 전공 예비과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였고 2년 후에는 정규과정에 들어가 피아노와 화성을 배웠으며 포레에게서 작곡을 사사하였습니다. 재학 당시 작곡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벌써부터 악단의 주목을 받았고 피아노곡 "물의 유희"와 현악 사중주곡으로 일찌감치 그 이름을 드높였습니다.

비록 프랑스의 작곡가 지망생이면 누구나 동경하는 "로마대상"에 여러 차례 응모하여 우승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오히려 그 결과가 부당하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 음악원 원장이 사임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면서 라벨의 명성과 위상은 더욱 더 확고해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디아길레프가 위촉한 발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발표하여 그것이 그의 정점인가 싶었지만 피아노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과 관현악곡 "라 발스", 그리고 라벨의 상징과도 같은 "볼레로"는 물론 최후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피아노 협주곡"이 모두 전장에서 돌아와서 죽기 전까지 내놓은 그의 대표작들입니다.


출처 : http://totallyhistory.com/maurice-ravel/


전쟁의 경험과 기억이 라벨에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쳤는지를 가늠할 순 없지만 그 이전의 작품들과 이후의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확실하게 달라진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감정의 개입을 자제하여 정교하고 치밀하게 짠 틀 속에 가지런히 두려는 의지는 전과 다름 없지만 촘촘한 틀 사이로 뭔가 터질듯이 삐져 나오는 싶더니 더러는 그 속이 휑하니 비어서 가슴이 시리고 허전합니다. 그러더니 끝내 그 틀마저 비틀어서 쥐어짜는 듯한 아픔이 살갗으로 스며들어 온몸이 오그라듭니다.

이런 느낌은 달랑 한 악장으로 이루어졌지만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콘트라베이스에 실린 콘트라바순의 소리는 마치 심해를 미끌어지듯  헤엄치는 고래의 울음인 듯 끝없이 가라앉아 너무나 깊고 어두운가 하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과 조각난 기억과 감정이 여기저기 흩어져 아스라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피아노의 카덴차가 나타나 흐느끼다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Joseph-Maurice Ravel - Bolero


라벨은, 또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삶의 고통을 견디고 이겨냈던 겁니다. "가장 어렵고도 본질적인 것은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고난 중에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모든 것이며 또한 신이기 때문이며, 삶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살아서 지옥을 건넌 자만이 죽어서 천국에 들 수 있다고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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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하고자 했던 바로크 음악의 정신[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하고자 했던 바로크 음악의 정신

Posted at 2017.12.08 10:16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르네상스 시대 이후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일컫는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잘못된 추론을 뜻하는 라틴어나 속임수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 어느 것이든 썩 좋은 뜻이 아님은 틀림없습니다. 원래는 그 시대 사람들이 당대의 건축물을 일컸던 말이 점점 같은 시대의 모든 예술을 아우르는 용어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음악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아닌가 싶지만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말 그대로 뭔가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20세기에 새로운 음악이 나타났을 때 현대음악이라 부르며 낯설고 어렵게만 생각하던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17세기 사람들은 이전까지 음악이라면 주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출 때 함께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그저 가만히 앉아서 들어야 하는 것이 어색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느렸다가 빨라지고 큰 소리가 갑자기 작아지는가 하면 다 함께 연주하는 부분과 몇몇이 따로 연주하는 부분, 여러 가락이 서로 얽혀서 들리는 음악과 한 선율만 뚜렷하게 들리는 음악을 나란히 이어놓는 것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바로 바르크 시대의 기악을 대표하는 협주곡, 즉 콘체르토 양식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콘체르토는 경쟁하다, 대립하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처럼 바로크 협주곡은 서로 대조적인 부분들을 교대로 등장시켜 음악의 흐름을 만드는 음악입니다. 처음엔 합주 협주곡, 즉 콘체르토 그로소라고 하여 악단의 모든 악기가 연주하는 부분과 그 가운데 몇몇 악기들만 따로 연주하는 부분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모양새였지만 이후에 하나의 악기와 악단 전체가 서로 맞서는 솔로 콘체르토, 즉 독주 협주곡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무게의 중심이 점점 후자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협주곡의 변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안토니오 비발디였고 그를 모방하고 연구하여 바로크 협주곡을 완성의 단계로 이끈 이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입니다.

 

출처 : https://earlymusicmuse.com/baroquemusic/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일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대대로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지만 어려서 수도원에 들어갔고 커서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나 병약하여 미사를 집전하기조차 어려웠고 그 때문에 베테치아의 소녀들을 위한 고아원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바이올린 교사로 부임하였고 나중에는 합주장, 합창장을 거쳐 원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당시 고아원은 일요일마다 자선음악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부족한 재원을 충당했기 때문에 비발디는 원생들로 이루어진 합주단과 합창단을 연습시켜야 했고 그들이 연주할 음악을 작곡해야 했는데 그가 남긴 500여곡에 이르는 협주곡들은 그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처럼 누구보다 많은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협주곡 양식을 다루는 비발디의 뛰어난 솜씨는 처음부터 두드러지게 돋보였습니다



특히 그 많은 협주곡 가운데 처음으로 출판한 "조화의 영감"12곡은 다양한 악기구성과 조합, 음악을 펼치는 여러가지 전개방식을 시도하고 있어 바로크 협주곡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그 가운데 1, 7, 10번은 네 대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앞세운 곡이고 4번은 네 대의 바이올린, 8번은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곡이며 2번과 11번은 두 대의 바이올린과 첼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곡들입니다. 또한 8번처럼 바이올린의 현란한 기교를 적절하게 펼쳐야 하는 곡이 있는가 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으면서 상큼하고 밝은 느낌이 두드러지는 10번이 있고, 6번의 경우는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이 처음으로 협주곡에 도전할 때 많이 선택할 정도로 쉽지만 아기자기한 곡입니다. "조화의 영감"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 중의 여섯 곡을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으로 편곡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기꺼이 스스로의 음악 속에 받아들여 발전시켰고 그로 말미암아 바로크 협주곡 양식의 궁극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OoFb_iMKu5s


음악사의 바로크 시대에 벌어진 양상은 마치 춘추전국 시대의 군웅할거를 보는 듯합니다. 나라마다 도시마다 뛰어난 음악가들이 있었고 그들의 음악은 남다른 모습으로 나름의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때문에 같은 악기를 다르게 부르는 일도 있었는데 피아노의 전신 악기인 쳄발로가 그랬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쳄발로, 독일에서는 하프시코드, 프랑스 사람들은 클라브생이라 불렀던 겁니다. 먼저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과 도시들이 그렇게 경쟁하며 서로를 닮아갔고 그 때문에 나날이 변화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서 보고 배웠던 프랑스와 독일이 또한 같으면서 다르기도 한 그들만의 음악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물결은 헨델과 같은 작곡가와 더불어 섬나라 영국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크라면 우리는 바흐와 헨델, 비발디를 떠올리지만 이들은 모두 바로크 시대의 끝자락에 걸친 인물들입니다. 말하자면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다음 시대를 열어준 셈이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마지막 대업을 완성한 이가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입니다.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난 1750년은 150년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 해로 삼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 놀라운 그의 업적 또한 중국의 역사에 비견하자면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운 진시황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여 말살한 시황제와는 달리 그는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를 받아들이고 배우면서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후대에 남겼습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12EZZlr9DCY


비단 바흐뿐만 아니라 바로크 시대의 뛰어난 음악가들은 누구나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위대한 유산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와 다른 남을 존중하고 받아들여 그것으로 전보다 나은 나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음악 안에서도 전혀 다른 것들이 나란히 번갈아가며 나타나게 하여 서로가 겨루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로크 협주곡의 원리이자 바로크 음악의 가치, 바로크 시대의 정신입니다.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 10번의 1악장 들으면서 누구나 나와 다른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모두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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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케스트라의 콘서트홀은 연주자의 악기와 같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케스트라의 콘서트홀은 연주자의 악기와 같다

Posted at 2017.11.23 09:5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연주자에게 악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악기가 나쁘면 좋은 소리가 나지 않아 좋은 음악을 들려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악기를 사려고 가진 돈을 다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빚을 내서 평생을 갚느라 허덕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출처 : https://nmbx.newmusicusa.org/whats-a-musician-worth/


연주자에게 악기만큼 중요한 것이 공연장입니다. 악기의 울림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 공연장이 그대로 받아서 제대로 청중에게 전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연장의 울림이 좋고 나쁘고의 차이는 혼자 연주할 때보다 여럿이 함께 연주할 때, 특히 여러 종류의 악기들이 어우러져 연주할 때 더 잘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에게 있어 전용 콘서트홀은 악기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London_Symphony_Orchestra


연주자가 좋은 악기를 사기 위해 집을 팔고 빚을 내는 것을 이해한다면 오케스트라가 좋은 콘서트홀을 갖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콘서트홀을 가질 형편이 못되면 빌려 쓰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늘 머물면서 필요할 때면 언제나 연습하고 연주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면 콘서트홀의 조건에 적응한 최상의 음향을 만들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출처 : http://tch15.medici.tv/en/concert_halls/mariinsky-3


공연장을 짓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드는 까닭에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다수 지방자치 단체들은 연주회 뿐만 아니라 오페라와 발레, 연극과 무용 뿐만 아니라 뮤지컬 공연까지 가능한 다목적 공연장을 만들어서 운영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공연의 어느 장르에도 딱 들어맞지 않아 공연의 완성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공연을 만들 수 있는 여건도 갖추지 못해 제대로 가동되고 활용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말하자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에 몇몇 지방자치 단체들이 먼저 나서서 특정 장르에 적합한 공연장을 새로 짓거나 짓고자 노력중인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가 대구시민회관입니다. 오래 전 다목적 공연장으로 지어 낡고 낙후된 공연장을 연주회 전용 콘서트홀로 리모델링한 경우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적합한 음향조건을 갖춘 까닭에 이곳에 상주하여 전용홀로 쓰고 있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역량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가 하면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도 날마다 늘어나 연주회 마다 연일 매진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 http://www.daegucity.net/bbs/board.php?bo_table=B85&wr_id=1


대구가 이렇다면 다른 지자체라고 안될 까닭이 없고 서울이라면 더더욱 서둘러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막 세계 무대의 문턱에 올라서려는 순간,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는 서울시향이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전용 콘서트홀 건립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비전이 필요하고 희망이 절실한 지금이야말로 놓치지 말아야 할 바로 그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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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재즈 음악의 탄생(뉴올리언스와 루이암스트롱...)[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재즈 음악의 탄생(뉴올리언스와 루이암스트롱...)

Posted at 2017.11.21 13:39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루이 왕의 땅이라는 뜻의 루이지애나의 항구도시 뉴올리언즈는 새로운 오를레앙이라는 이름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 이민자들의 도시입니다. 이곳에 남부 농장으로 팔려갈 흑인 노예들이 들어오면서 흑인 인구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혈통과 흑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크리올이라 불린 이들은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 악사로 생계를 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재즈 음악 역사의 첫 장을 열게 됩니다

 

출처 : http://www.lifeinus.com/Travel/168/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말할 수 없이 고달팠던 흑인들은 노예 시절부터 늘 조물주의 부르심을 받아 요단강을 건너가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장례식이 다른 어떤 의식들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 나름의 독특하고 성대한 장례식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 장례식의 볼거리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밴드를 앞세운 장례식 행렬로, 뉴올리언즈를 배경으로 한 헐리우드 영화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흑인들의 장례 행렬을 이끄는 밴드라면 당시 흑인들의 교회음악인 흑인영가를 연주했을 것입니다. 악보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읽을 줄도 모르는 그들 사이에서는 트럼펫보다 좀 더 크고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 코넷이 먼저 첫 소절을 연주하면 나머지 악기들이 적당히 알아서 따라가는 것이 나름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더운 날씨에 묘지까지 이어지는 긴 장례식 행렬의 앞에 서서 무거운 악기를 연주하며 걸어가야 하는 악사들에게 느리고 단조로운 음악을 되풀이하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아마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축 처지는 음악의 리듬을 살짝 비틀고 밋밋한 가락에도 곁가지를 솜씨 있게 덧붙이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흥겨운 음악으로 탈바꿈했을 것이고 그것이 사람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점 더 많이, 또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jazzartsgroup.org/new-orleans-the-birthplace-of-jazz-by-byron-stripling/


이것이 바로 재즈 음악의 시작이었습니다. 재즈의 바탕이 된 음악이라면 흑인영가와 더불어 블루스와 랙타임을 들 수 있습니다. 랙타임은 선술집에서 주로 흑인 연주자들이 피아노로 연주하던 단조로운 2박자의 음악으로 우리 귀에 익숙한 영화 "스팅"의 주제 음악이 바로 그것입니다. 랙타임 연주자들은 센 박자 다음에 여린 박자가 나오기 마련인 원래 순서의 앞뒤를 바꾸는 싱코페이션, 즉 엇박자를 연주함으로써 리듬에 변화를 주었는데 이런 식의 변주가 재즈 음악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블루스는 백인들의 온갖 멸시를 견디며 고달픈 나날을 살아야 했던 흑인들의 탄식과 푸념을 담은 신세타령과도 같은 음악입니다




날마다 힘겨운 노동을 견디기 위해 햇살 따가운 들판에 서서 누군가 먼저 부르면 모두가 함께 따라 부르던 노동요의 가락은 저도 모르게 그들 입안에서 맴돌았을 겁니다. 고된 하루 일을 겨우 끝내고 오두막으로 돌아오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가누기조차 힘든데 문득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에 설움이라도 복받치면 입안에 맴돌던 가락에 한숨과 넋두리를 실어 흐느끼듯 읊조렸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블루스가 되었습니다. 블루스의 음계는 7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서양 음악의 장음계에서 세번째와 일곱번째 음을 반음씩 내린 것으로 이 또한 재즈 음악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렇듯 전부터 있었던 흑인 음악의 여러 장르들을 받아들여 점점 그 모양새를 갖추게 된 재즈 음악은 주제로 선택하여 먼저 들려주는 기존 음악의 골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즉흥적으로 변형시켜 연주하는 음악을 일컫게 됩니다. 뉴올리언즈 흑인들의 장례 행렬을 이끄는 밴드의 음악에서 시작된 재즈 음악은 점점 뉴올리언즈 사람들의 삶의 구석구석을 파고들더니 결국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과 전 세계로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재즈 음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을 떨친 거장은 루이 암스트롱입니다. 당대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트럼펫 연주자였으며 음악의 가락을 가사 없이 입으로 따라 부르는 스캣송을 널리 퍼뜨려 재즈 보컬의 전형으로 만든 장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밴드의 악사들이 함께 연주하는 방식을 벗어나 하나의 악기가 따로 그 솜씨를 마음껏 펼치는 새로운 재즈의 연주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한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뉴올리언즈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곳에서 활동하며 실력과 명성을 닦았습니다. 가정을 팽개친 아버지 대신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살림은 말할 수 없이 궁핍했고 집안에는 늘 남자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남자의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선 소년 루이는 새해 첫날을 맞이하는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허공에다 마구 총을 쏘았고 그 때문에 소년원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소년원은 삶의 피난처이자 탈출구였습니다. 그곳 밴드에서 처음으로 코넷을 배울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음악가의 길에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소년원을 나선 그는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 하는 절박한 형편임에도 악기만은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꾸면서 점점 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음악가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s://www.amazon.com/Louis-Armstrong/e/B000APTKDS


이후 그의 삶은 재즈의 역사와 함께 흘러갑니다.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에의 밴드도 재즈 음악을 연주하였고 그렇게 강줄기를 따라 미시시피강 유역의 여러 도시에 전파되기 시작한 재즈 음악은 드디어 시카고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리고 뉴욕으로 전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바다 건너 유럽으로 건너갔고 파리와 베를린 같은 대도시들도 재즈의 열기에 몸살을 앓게 됩니다. 고향을 떠난 루이 암스트롱은 시카고에서는 킹 올리버 밴드와 호흡을 맞추었고 뉴욕에서는 프레처 헨더슨 악단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즈 음악에 대한 관심과 호응이 팽창하면서 활동 무대도 점점 넓어져 그의 음악은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고 음반과 영화를 통해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치면서 이후의 어떤 재즈 음악가도 이루지 못한 부와 명성을 누렸습니다.

 



지금껏 아무도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지만 재즈 음악의 탄생 시기는 대략 190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반세기도 채 지나기 전에 재즈 음악은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로 퍼져나가 지구촌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놓고 맙니다. 그리고 마침내 흑인들만의 음악이 아닌 모든 인종을 아우르는 음악이 되었고 감히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클래식 음악의 영역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처럼 이전의 그 어떤 음악도 이루지 못한 기적과도 같은 일이 가능했던 까닭을 짐작해 보면 아마도 그 음악에 너무나도 고난한 삶의 흔적과 상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용광로와도 같은 뉴올리언즈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너무나도 다른 여러 인종과 문화와 가치들이 하나로 녹아들어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오날날까지도 꺼지지 않는 불씨로 살아남아 새로 태어나는 세계의 거의 모든 음악에 그 영항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 그림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늘 좋은 포스트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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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

Posted at 2017.11.17 08:0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살면서 가끔씩은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사는지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영화 속의 명장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쇼생크 탈출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장면들로 먼저 영화 쇼생크 탈출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젊은 은행가 앤디 듀프레인은 아내와 아내의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아 쇼생크 감옥에 갇힙니다. 간수들의 부당한 처사와 다른 죄수들의 폭력까지도 꿋꿋이 견디며 힘겹게 버티던 어느 날, 간수 한 사람을 도와 세금을 덜 내도록 한 것이 알려지면서 교도소장과 다른 간수들의 세금 감면은 물론 교도소장이 죄수들에게 일을 시켜 착취한 돈을 세탁하고 관리하는 일까지 맡게 되어 그들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출처 : http://www.imdb.com/title/tt0111161/


그런데 그는 그렇게 얻은 여유와 혜택을 활용해 동료 죄수들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힘을 씁니다. 여기저기 편지를 써서 도서관을 꾸미고 책을 기증받는가 하면 새로 들어온 젊은 죄수를 가르쳐 검정고시에 합격시킴으로써 이를 지켜본 죄수들 모두에게 보람과 긍지를 안기기도 합니다그러던 어느 날, 간수의 방에서 뜻밖에도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녹음한 음반을 발견한 앤디는 그 음반을 틀고 마이크를 연결해 스피커를 통해 교도소 전체에 음악이 흐르도록 합니다. 순간 교도소 안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음악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제껏 그 안의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 노래는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부르는 "편지의 이중창"입니다. 백작이 자신의 집사 피가로의 약혼녀인 수잔나를 유혹하려 들자 수잔나와 백작부인이 백작을 골려주려고 몰래 만나자는 거짓 편지를 쓰면서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Mozart - The Marriage of Figaro (모짜르트 '피가로의 결혼)

 

그러나 그들에게 그 내용이나 가사는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음악은 마치 천사의 목소리를 듣는 듯 맑고 깨끗하여 그들 마음의 모든 찌꺼기를 단번에 씻어내는 듯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때 들리는 흑인 죄수 레드의 독백이 그들 모두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두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엇을 노래했는지 모른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경우도 있는 법이다. 노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비천한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높고 먼 곳으로부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우리가 갇혀 있는 삭막한 새장의 담벽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쇼생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 

 

출처 : http://www.imdb.com/title/tt0111161/


하지만 앤디에게 그 댓가는 혹독했습니다허락 없이 음악을 틀었고 음악을 멈추라는 간수들의 독촉에도 모르는 척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은 벌로 흠씬 두들겨 맞고 2주 동안 독방 신세를 지게 됩니다. 창백하고 초췌한 몰골로 독방에서 나온 앤디에게 동료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지냈냐고 묻습니다. 앤디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놀라서 녹음기를 가져갔냐고 다시 묻자 그는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여기에 있어. 그것이 음악의 아름다움이야.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지.”라고 웃으면서 말합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이번에는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이야기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0년대말의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 약간은 모자란 듯 얼치기지만 늘 즐겁고 낙천적인 귀도가 삽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집안에 약혼자까지 있는 아름다운 선생님도라를 사랑하여 순수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만으로 마음을 얻고 함께 도망까지 가야 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결혼에 이르러 아들 조슈아를 낳고 행복하게 삽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나치가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유태인인 귀도와 아들 조슈아는 수용소로 끌려가고, 유태인이 아니 도라도 고집을 부려 그들을 따라나섭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귀도는 어린 아들을 안심시키려고 그들 모두는 게임을 위해 특별히 선발된 사람이라며 누구든 주어진 어려움을 다 이겨내 1,000점을 먼저 따는 사람이 진짜 탱크를 상으로 받게 된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출처 : http://kimsigyun.com/?p=687


그러던 어느 날, 귀도는 독일군 장교 숙소에서 열리는 파티에 불려가 시중을 들게 됩니다. 음식을 나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에 축음기를 발견한 그는 건너편 여자 수용소에 있을 아내를 생각하여 소리가 그쪽을 향하도록 축음기를 돌려놓고 음반에 바늘을 올려놓습니다. 그러자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에 나오는 '뱃노래'가 흘러나옵니다어둡고 추운 수용소의 침상에 힘없이 누워 있던 도라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는 홀린듯이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고 어느덧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호프만의 이야기'중 '뱃노래'-오펜 바흐(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오펜바흐는 19세기 파리에서 활약한 오페레타 작곡가입니다. "지옥의 오르페오", "아름다운 핼렌"과 같은 작품들이 인기를 끌며 명성과 부를 누렸지만 오페라가 아니라 그보다 가볍고 통속적인 오페레타로 성공했다는 자격지심에 반드시 오페라를 써서 인정받겠다는 일념으로 작곡한 야심작이 바로 "호프만의 이야기"입니다.옛 연인이며 오페라 가수인 스텔라의 초대를 받고 뉘른베르크의 한 술집에 나타난 호프만은 스텔라를 기다리는 동안 그곳에 모인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했던 세 번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가 3막에 펼쳐지는데 베네치아가 무대입니다줄리에타의 유혹에 넘어간 호프만은 결투 끝에 줄리에타의 연인 쉴레밀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줄리에타를 뒤에서 움직인 악당 다페르투로의 음모였음이 밝혀지고 달빛 흐르는 밤, 줄리에타는 다페르투토라와 함께 곤돌라를 타고 그가 보는 앞에서 사라집니다. '뱃노래'는 줄리에타가 호프만의 친구인 니콜라우스와 함께 곤돌라를 타고 부르는 이중창으로 여기서 니콜라우스는 남자지만 오페라에서는 메조소프라노가 남장을 하고 그 역할을 맡습니다. 혹시나 그들이 처한 참혹한 현실을 아들이 눈치챌까봐 귀도는 날마다 기지를 발휘해서 동분서주 합니다


출처 : http://bach1685.tistory.com/105


마침내 독일이 패망하자 귀도는 먼저 조슈아를 숨겨두고 아내 도라를 구하려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하지만 끌려가면서도 숨어서 지켜보는 아들을 생각해 짐짓 즐거운 일인 양 윙크를 하면서 태연하게 걸어갑니다. 조슈아는 날이 밝을 때까지만 들키지 않으면 게임에서 이긴다는 귀도의 말을 정말로 믿고 나무 궤짝에 꼼짝 않고 숨어 있다가 다음날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피는데 그 앞으로 거짓말처럼 연합군의 탱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타납니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ji-na


한때는 거리마다 음악이 넘쳐 홍수처럼 범람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관공서에서는 새마을 노래를 틀었고 동네 가게에서는 유행가가 흘러나왔습니다. 골목길을 리어카로 돌아다니는 행상들까지 음악을 앞세워 나 여기 있다며 외쳤습니다. 확성기로 울려퍼지는 행진곡을 들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등교를 했고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는 교실 스피커에서도 잔잔하게 음악이 흘렀습니다. 하도 들으니 저절로 다 외웠지만 그때는 무슨 곡인지도 모르고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다 나중에야 그 곡이 조셉 수자의 행진곡이라는 것을 알았고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지금 이랬다가는 소음 공해에다 저작권 침해라며 난리도 아닐겁니다. 누구나 스마트폰과 이어폰만 있으면 지구상의 무슨 음악이든 골라 들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때가 몹시 그립습니다.어느덧 거리의 캐롤마저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전에는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리기 시작하면 이제 한 해가 저무는구나 싶어 묘한 감상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12월도 그저 열두달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매듭지어야 할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무겁고 몸이 지치는 나날들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혼자 듣는 음악 말고 함께 듣는 음악이 그립습니다. 때로는 시간을 내서 공연장을 찾지 않아도 함께 들을 수 있는 음악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쁘게 길을 걷다가도 어디선가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이 들리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잠시나마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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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이루지 못한 금호문화재단 이사장 (고)박성용 회장의 꿈[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이루지 못한 금호문화재단 이사장 (고)박성용 회장의 꿈

Posted at 2017.11.16 09:04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오래 전 브리태니커 사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최소한 그 사전을 만든 사회와 문화권에서는 예술의 후원자들을 예술가들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예술 후원자들의 이름과 업적이 사전 안에 수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떤 이가 여기에 해당될까 생각해보지만 그다지 많은 사람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음악 분야로 좁혀 보면 그 숫자는 더 줄어들고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박성용 회장입니다. 금호그룹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금호현악사중주단을 창단하여 지원했고 무엇보다 금호문화재단과 금호아트홀을 통해 우리의 음악영재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박성용 회장의 잘 알려진 삶과 업적이 아니라 그 분을 직접 만나서 보고 들은 것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고 박성용 회장(출처 - http://www.ohmynews.com)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문을 열고 얼마지 않아 발전재단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금호그룹의 박성용 회장은 재단의 이사로 추대되었고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저와의 인연은 그때부터였습니다. 늘 재단 회의에서만 뵙다가 금호그룹 회장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선 회장실이라면 당연히 꼭대기 층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낮은 층에 자리 잡고 있어 의아했습니다. 비서실을 찾았더니 한 사람의 비서가 회장실뿐만 아니라 부회장실까지 다 담당하고 있어 당황했고 회장실로 들어섰더니 너무나 단촐하고 소박한 집기를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출처 : http://www.kartsfund.kr/


그 다음 만남은 어느 어색한 회의에서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수출 천억불을 달성했다고 해서 그 업적을 널리 알리고 자랑하는 문화행사를 만들자는 자리였습니다. 주무 장관과 관계 기관 종사자, 그리고 재계의 몇몇 분들이 참석하였고 그 가운데 박성용 회장도 있었습니다. 회의라기보다 정부의 의지와 행사의 내용을 전달하고 협조를 구하는 모임이었기에 다들 별 다른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고 주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모양새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제가 자연스럽게 국가 경제와 기업 경영으로 모아지자 다들 한마디씩 거들면서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마침내 박성용 회장에게 순서가 돌아가자 그는 돌연 정부의 경제 정책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박 회장 스스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앉은 식탁 위에 흩어진 빵부스러기를 손바닥으로 긁어 모아 입안에 털어 넣는 행동까지도 전혀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한 적이 있지만 참 잘 먹었다 싶은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점심은 주로 광화문 회사 근처의 평범한 이탈리아 음식점이었고 그는 늘 똑 같은 파스타를 주문했기에 초대 받은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그랬듯이 식탁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입안에 털어 넣었고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이렇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지만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대기업 회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린다 싶은 화려함이나 위압감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검소하고 소탈한가 하면 고지식하기까지 한 성격이 마치 학자를 보는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만난 자리에서 '경영자보다는 교수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꺼냈더니 금방 손사래를 치며 '짧지만 공직자로도 일해보고 다른 일도 해봤지만 대학에서 교수로 있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말하길 '한 시간 강의를 준비하려면 일주일을 꼬박 연구실에 틀어박혀 준비를 해야 했다''그 때는 정말 잠잘 시간도 없었다'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출처 : http://www.dailian.co.kr/news/view/36120


어느 해인가 금호문화재단이 선정하는 "금호음악인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의 일입니다. 열띤 토론으로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겨우 수상자를 결정할 수 있었고 바깥은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진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전하길 그때까지 박성용 회장이 퇴근하지 않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박 회장의 관심과 열의에 감탄을 했고 어느 심사위원은 '진즉에 말하지 그랬느냐''그랬으면 좀 더 일찍 끝냈을 텐데'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심사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에야 그 자리에 잠시 들린 박 회장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는 것처럼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담당자에게 심사비가 적으니 더 올리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에게 저녁식사까지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따라 나서면 어느 식당을 갈지, 가면 무슨 음식을 먹게 될지를 너무나도 잘 일고 있었기에 사양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dailian.co.kr/news/view/36120


마지막 식사 초대는 너무나도 뜻밖이었습니다. 한 동안 보지 못했고 딱히 만나야 할 일도 없는데 함께 저녁 하자는 전갈이 왔고 그렇게 불려 간 자리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고급 식당이었습니다. 이 분이 어쩐 일인가 싶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혹시나 어려운 부탁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 동안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얼마지 않아 미국에 다녀 올 텐데 돌아오면 온갖 꽃과 나무를 다 가꾸는 식물원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미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진행 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분의 관심은 오직 음악이었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재능 있는 어린 음악도를 발굴하여 그 성장을 돕는 일을 무엇보다 큰 기쁨으로 여기는 분이었는데 느닷없이 식물원을 만드는 데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전에 음악 이야기를 나눌 때만큼이나 신이 나서 눈빛이 반짝이는 걸 보면 틀림없이 뜻한 바 그대로 이루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도 채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는 식물이 왜 좋은지 속마음을 살짝 비추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다해 아끼고 보살펴도 그걸 몰라주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식물은 언제나 정성을 들이는 만큼 크게 잘 자라서 보답을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부고가 날아들었습니다. 그제서야 미국으로 간다는 일이 암수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며 그 꿈을 이루려는 뜻을 꺾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때는 그를 보며 학자나 교수가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잘 맞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가끔씩 그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는 호미를 들고 모습입니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1. 정성진
    저 역시 Mecenat하면 떠오르는 분이 박성용회장님입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문 처럼 기억되어야 할 분인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듯 해 안타깝기도 합니다. 음악영재 발굴부터 명품 고악기 무상임대등의 사업을 통해 세계속으로 달려나간 우리 음악인들을 보면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고인의 뜻이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더 많은 기업들이 '금호'나 '이건'처럼 국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사업에 눈길을 돌리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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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

Posted at 2017.10.25 07:3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 경기에서는 투수가 마운드에 오를 때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면 그 선수만의 음악을 틀어줍니다. 대게는 해당 선수의 취향이나 이미지에 맞는 음악을 고르기 마련인데, 힙합이나 록 음악, 혹은 라틴 음악과 댄스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지만 지금껏 클래식 음악을 쓰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피츠버그의 지역 언론 피츠버그 포스트 가제트의 클래식 음악 전문 칼럼니스트 리즈 블룸은 야구보다 더 클래식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칼럼을 통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선수들의 등장 음악으로 어울릴 만한 클래식 음악을 제안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건너가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강정호 선수에게는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니진스키가 안무한 <봄의 제전> 발레 장면(출처 : http://blog.daum.net/spdjcj/2524)

 

1913년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이 초연한 발레 "봄의 제전"은 막이 열리고 얼마지 않아 객석이 술렁이고 야유가 쏟아지며 더러는 도중에 나갔는가 하면 심지어는 관객들 사이에 언쟁과 폭력이 벌어져 경찰까지 나서야 했던 희대의 화제작이었습니다. 봄을 맞이한 원시부족의 젊은이들이 남녀가 서로 어울리는가 싶더니 짝을 찾는 약탈이 벌어지고 뒤이어 등장한 원로들은 그들 가운데 순결한 처녀를 골라 봄의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설정부터가 파격인데다가 갈등과 반전도 없이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라는 것도 전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막이 오르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나른하고 몽롱한 파곳 소리에 이어 갑자기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들이 선율도 화성도 팽개치고 마치 태고의 전사들이 결전을 앞두고 흥분하여 방패를 두들기며 발을 구르는 듯 도발적이고 충동적인 리듬을 거듭 반복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당시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짱 다리로 걷다가 제자리에서 뜀박질까지 하는 부족 처녀들의 군무는 우아한 발레는 고사하고 아무리 봐도 도저히 춤이라고 할 수 없는 기괴한 몸짓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연을 준비한 당사자들은 이런 파장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주목을 받으리라 기대했다는 사실입니다. 소동이 벌어지자 디아길레프는 객석의 조명을 켰다가 다시 끄기를 반복하며 관객들을 진정시키려 했다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알고보니 그것이야말로 디아길레프가 의도했던 치밀한 각본이었다는 정황과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야말로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노이즈 마케팅'의 원조였던 셈입니다.

 

출처 : https://brunch.co.kr/@yoonballet/36

 

"봄의 제전"은 발레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기존의 통념들을 뒤집으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태초의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리듬이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면서 선율과 화성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게 되었고 기존의 규칙적인 박자에서 벗어난 다양한 리듬들이 시도되고 수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원시주의"라 일컬어진 새로운 음악의 선구자로 떠올랐고 한 옥타브 안의 12 반음을 빠짐없이 사용한다는 "12음 기법"의 창시자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더불어 20세기 현대음악의 가장 중요한 창시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출처 :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1111)

 

비단 음악이나 발레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이 처한 상황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중이었고 더 이상 타협이나 절충으로 늦추거나 돌이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음악에서 쇤베르크의 선택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새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고 스트라빈스키의 대안은 지금까지에 연연하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의 이런 생각은 내면에 잠재된 천성이나 본능도 아닐 뿐더러 자라면서 다져진 신념이나 철학도 아니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갔다고는 하나 사실은 시대의 흐름을 먼저 읽고 그 길목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전작인 "불새""페트루슈카"에서는 러시아의 설화와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했는가 하면 1차 세계대전으로 대규모 공연이 어렵게 되자 고전주의 시대 이전의 실내악을 되살리는 "신고전주의"를 내세웠고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12음 기법"을 활용하는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창작은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이자 삶의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작업할 때도 그는 마치 직장인처럼 날마다 같은 시간에 작업실로 들어갔다가 같은 시간에 나오는 습관을 지켰으며 기존의 다른 음악에서 무엇인가를 가져다 쓰는 일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표절과 인용에 관한 한 음악사를 통털어 헨델과 쌍벽을 이루는 경지라고 하지만 서로가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표절에 대한 인식이 후대로 갈수록 엄격해졌음을 감안하면 스트라빈스키가 단연 한수 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1882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러시아를 대표한다고 할 만큼 뛰어난 베이스 가수였던 페드로 스트라빈스키의 아들로 태어난 이고르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대에 진학했지만 타고난 피는 속일 수 없어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음악에만 온통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러다 당대를 대표하는 러시아 작곡가이자 명교수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눈에 든 그는 스승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가르침을 받아 나날이 성장했고 마침내 20세기 발레의 모든 것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개척했던 제작자이자 흥행사 디아길레프의 인정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과 함께 파리를 정복하고 세계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마치 아버지라도 되는 듯이 스트라빈스키를 끔찍이 아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였건만 그토록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디아길레프에게는 간절한 꿈을 접도록 냉정하게 충고했다고 하니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를 일입니다.

 

러시아의 작곡가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출처 : http://blog.daum.net/2102023/2)

 

"봄의 제전"의 기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어낼 능력을 가졌던 스트라빈스키가 있었고 그에게 재능의 씨앗을 심어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마침 같은 시대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준 림스키코르사코가 있었는가 하면 역시 그의 가능성을 인정하여 마음껏 그 능력을 펼칠 기회를 준 디아길레프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에는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예술가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무모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순 없지만 강렬하게 그들을 이끄는 본능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것은 지성에 길들여져 오래도록 숨죽이고 있었던 야성이었습니다. 야성을 깨워 지성을 마주하니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찾았습니다. 리즈 볼룸이 강정호의 등장음악으로 "봄의 제전"을 추천한 까닭을 짐작해 봅니다. 메이저 리그에 주눅들지 말고 야구의 기본과 스스로의 본능에 충실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리고 스트라빈스키가 저 혼자 이국 땅 파리를 정복하지 않았듯이 그 나머지는 동료들의 능력과 도움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겠지요. 꿈보다 해몽이었나요? 음악이든 야구든 사람 사는 게 어디 다를 리가 있을까요? 힘들수록 복잡할수록 근본을 찾아 초심으로 돌아가야겠지요. 혼자가 아니라 함께 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러질 못하니 그게 또한 사람이겠지요. 그러니 날마다 기억을 하고 또 다짐을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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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전설의 시대를 만든 거장의 신화. 에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전설의 시대를 만든 거장의 신화. 에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

Posted at 2017.09.20 15:2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에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거장들 가운데 가장 높은 반열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삼가고 자중하여 내세우지 않고 드러나려 하지 않았던 은둔자이자 수도자였던 지휘자입니다. 그는 190364,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고 공부했으며 그곳 오케스트라인 레닌드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오늘날의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평생을 떠나자 않고 그곳에만 50년을 바쳐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를 만들었으며 1988119, 그곳에서 죽었고 또한 바로 그곳에 묻혔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도 그랬지만, 오늘날 너나 없이 세속적인 욕망을 쫓아 현실과 타협하여 일탈조차 마다하지 않는 세태를 마주할 때마다 누구보다 고귀했던 그의 존재가 더욱 그리워지고 그가 남긴 향기의 여운이 점점 더 짙어갑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를 잃었고 그가 누렸던 여유와 풍요 또한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로 말미암아 한 때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허드렛일을 해야 했고 먼저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들어가 체르노프에게 작곡을, 그리고 가우크에게 지휘를 배웠습니다. 그는 원래 작곡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창작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소비에트 공산정권 치하에서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에 지휘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악 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1923년부터 1931년까지 발레단에서 음악 코치로 일했습니다. 지휘자로는 1929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1931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이듬해부터 역시 레닌그라드에 있는 국립 크로프 오페라 발레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비에트 연방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주목을 받아 곧 바로 레닌그라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을 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취임 당시 수준 이하의 평가를 받았던 악단을 다듬고 또 단련하여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음악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늘 단원들의 한결같은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어떤 지휘자도 이루지 못한 므라빈스키만의 보람이자 자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의 관현악 앨범

출처 :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영국의 BBC 방송이 만든 므라빈스키의 다큐멘터리 영상에는 그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가 여럿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의 기일이면 생전에 그와 함께 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 서로의 추억을 떠올리며 업적을 기립니다. 그 가운데 은퇴한 한 여성 단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처음 오케스트라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저 남들보다 바이올린을 잘 켜는 연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므라빈스키와 함께 하는 시간을 지나면서 나는 진정한 음악가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단원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언젠가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연주하기로 했을 때, 거듭되는 연습과 리허설에 단원들은 지쳤지만 므라빈스키는 전혀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단원들의 악보를 집으로 가져가서 세세한 지시를 꼼꼼하게 적어서 다음날 다시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여러 번의 리허설을 거친 다음 마지막 리허설에 이르렀을 때 단원들 모두가 느끼기를 너무나도 완벽한 연주였기에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고 마치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음악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허설이 끝나자 므라빈스키는 그날 연주를 취소했고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그가 말하기를 이처럼 완벽한 연주는 다시 있을 수가 없으므로 리허설만큼 연주회가 잘 될 리가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출처 : http://music.kyobobook.co.kr/ht/record/detail/4543638700219

 

러시아의 역사를 통털어 최고의 지휘자인만큼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에 관한 한 그의 해석과 연주를 으뜸으로 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특별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 음악과 우정을 함께 나누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만큼은 이후로도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15곡의 교향곡 가운데 5, 6, 8, 9, 10, 12번의 여섯 곡을 초연하였고 그 밖의 많은 곡들이 므라빈스키의 지휘봉 아래 세상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그가 생전에 가장 많이 연주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이었고 그 다음으로 자주 연주한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심혈을 기울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이 스탈린의 눈에 거슬려 당국의 호된 비판을 받게 되자 모두가 그를 멀리했지만 므라빈스키만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초연을 성공으로 이끌어 위기에서 그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다시 한 번 그의 교향곡 8번으로 사면초가에 빠졌을 때 므라빈스키만이 홀로 그를 지지하며 나섰다고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갈수록 깊어졌지만 한 차례 위기를 겪으며 잠시 흔들리기도 합니다.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13번을 완성하여 초연을 부탁했지만 므라빈스키가 거절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멀어진 것입니다. 므라빈스키가 생각하기에 그 곡은 전과 달리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화해했지만 그만큼 소비에트 체제와 이념에 관한 한 므라빈스키의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이념은 악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연적인 확고함과 결단력을 제공한다." 소비에트 시절 체제의 핍박을 받았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 "수용소 군도"에 나오는 말입니다. 소비에트 당국이 그를 축출하고자 탄핵을 결의하는 문서에 동료 예술가들의 서명을 강요했을 때도 지휘자 므라빈스키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솔제니친이 저술을 통해 저질렀다는 반국가적, 반사회적, 반체제적 행위에 대해 므라빈스키는 그의 책은 소비에트 안에서 출판이 금지되었기에 읽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며 끝까지 거부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출처 : http://kathyhong.tistory.com/archive/201402

 

지휘자의 역사를 통털어 20세기 전반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의 시대였고 후반은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에 협력하였고 카라얀은 나치에 가담했습니다. 번스타인은 사회주의에 동조하였지만 문제가 되자 부인하며 애매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토스카니니만이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게 맞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치와 신념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만이 지배하고 결정해야 하는 오케스트라와 음악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므라빈스키는 평생을 소비에트 체제 속에서 살면서도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다만 50년을 한 오케스트라에 그의 모든 것을 바쳐 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지 않을 때 그는 늘 시골의 오두막에 머무르며 밤이면 책을 읽고 낮이면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자연을 바라보거나 그 속을 말없이 거닐었습니다. 그리고 꺾이지 않는 그의 뜻은 말 대신 음악에 담아 절절하게 쏟아냈습니다. 음악이 있었기에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신념이 있었기에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음악가이자 예술가였습니다. 무엇보다 참으로 아름다운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 그 사람다운 삶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려주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꿉니다.

 

 

https://youtu.be/mqZ3UfpO4tA

차이코프스키 - 교향곡 6번 / 므라빈스키 유튜브 동영상

 

00:10 - I. Adagio. Allegro non troppo

17:44 - II. Allegro con grazia

25:50 - III. Allegro molto vivace

34:10 - IV. Finale. Adagio lamentoso. Andante

=======================================================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 Evgeny Mravinsky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 /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1. 조실래
    인간이 지휘한 것이 아닌 것 같은 음반들이 있죠. 푸르트벵글러의 1942년 베토벤 교향곡 9번, 첼리비다케의 모차르트 레퀴엠(뮌헨 필), 므라빈스키의 차이코프스키 "비창" 1975년 일본 방문 라이브 공연...그 중 므라빈스키의 비창은
    정말 처절하고 비장하다 못해 귀신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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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일생을 바꾼 단 한 번의 인연, 소설가 최인호[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일생을 바꾼 단 한 번의 인연, 소설가 최인호

Posted at 2017.09.13 11:1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어느날 무심코 TV를 보고 있는데 소설가 김홍신이 나와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어느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면접 시험을 보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면접관이 입사 원서에 적힌 신상 기록에서 아버지가 김홍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짐짓 모르는 척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인지 물었다고 합니다. 뜻밖에도 아들은 최인호라고 대답을 했고 당황한 면접관은 그렇다면 김홍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반전을 시도했다고 합니다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아들이 대답하기를 "같이 살아보면 압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옆에 앉은 딸 아이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배시시 웃고 있었습니다그래도 설마 나는 아니겠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실없이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소설가 김홍신

출처 : 유튜브


그날 밤 안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문득 소설가 최인호가 생각났습니다. 몸담고 있는 학교의 최고경영자 과정을 맡고 있었을 때 강의를 부탁한 인연으로 딱 한 번 만나서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강의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대화중에 그가 던진 한 마디 충고 만은 뇌리에 박혀 절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늘 "지갑을 열고 역사책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시큰둥 했었습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역사책은 하도 읽어서 알만큼 알고 가진 것이 많지 않으니 지갑을 열어도 내놓을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내 속을 꿰뚫어보고 있었던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이미 읽은 역사책도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를 것이고 가진 돈이 많지 않아 크게 베풀지 못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밥 한 끼, 차 한 잔 사는 거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바로 이거다 싶었고 정말로 그래야지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실로 돌아와 오래 전 읽었던 역사책을 다시 꺼내들었더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전에 알았던 그 이야기가 전과는 전혀 다르게 읽혔습니다. 먼나라에서 까마득히 오래 전에 벌어졌던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내가 겪는 일이었고 내 바로 가까이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부터 하나 둘씩 불러내어 밥을 먹기 시작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끼니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일을 기쁨과 보람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언젠가 프로방스를 여행했을 때의 일입니다. 아를에서 보낸 마지막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흐가 즐겨 찾았다는 근처 카페로 가서 라따뚜이를 주문했습니다그러자 웨이터는 그 메뉴가 없다면서 아마도 근처의 다른 음식점들도 다 마찬가지일 거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그래서 그에게 내일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다며 있는 동안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다 맛보았는데 라따뚜이만 못먹고 간다면 얼마나 아쉽겠냐며 짐짓 간절한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난처해진 그는 가서 물어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사정을 전해 들은 주방장은 아쉬운 대로 주방에 있는 야채를 써서 만들어보겠노라 말했습니다그렇게 라따뚜이를 맛있게 먹고 계산서를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카페 주인이 나와서 메뉴에 없는 음식이라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뜻밖의 호의를 두번씩이나 그저 받을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 역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때 카페 한 쪽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검고 긴 생머리에 크고 까만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인 프로방스 여인이었습니다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과 마주앉은 그 여인은 아기 돌보듯 그를 대했고 그 모습이 너무 정겨워 카페 주인에게 혹시 아는 사람인지 물어보았습니다그의 말인 즉 그 두 사람은 근처에 사는 아버지와 딸인데 얼마 전까지 따로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그 부녀가 주문한 밥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그곳에서 받은 친절과 배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습니다물론 그 두 사람은 모르는 일이었고 문을 나서는 내게 카페 주인은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습니다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고 쏟아질 듯 알알이 넘쳐 가슴 속에 박혔습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 "저녁에"입니다. 언젠가 기특한 후배가 있어 저녁을 사주고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뿌듯해 하늘을 쳐다보니 나도 모르게 이 시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최인호는 부인과 연애하던 시절 명동의 수 많은 인파 속에서 서로를 찾을 때 이 시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감히 내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최인호와 나는 딱 한 번을 만났다. 그렇게 한 번을 만나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에 누군가의 일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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