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에 해당되는 글 73건

  1.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2017.07.12
  2.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맛과 멋. 삶과 음악 속에 숨겨져 있는 편안하고 소박하며 친근한 그것. 2017.07.05
  3.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 2017.06.04
  4.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죽음에 앞서 깨달은 사랑의 참 뜻, 푸치니의 “투란도트” 2017.05.09
  5.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페라 “돈 카를로”와 영화 “사도세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까지 2017.05.07
  6.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집시 여인의 슬픈 이야기(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밥 딜런) 2017.04.21
  7.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뮤지컬 아이다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까지... 거장 베르디의 “운명” 2017.04.18
  8.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21세기 오페라의 흐름을 바꾼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2016.12.21
  9.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전하는 신년 메시지. 아메리칸 드림의 충격과 시작! 2016.01.29
  10.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첼로의 역사를 새로 쓴 카잘스. 역사에서의 B.C의 의미는? 그럼 테너와 소프라노, 첼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B.C의 의미는? (2) 2016.01.20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Posted at 2017.07.12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BBC 지식 채널의 "오지의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에 소개된 한 인도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때 그는 명문가의 엘리트였습니다. 아버지는 옥스포드를 나와서 주지사를 지냈고 그 또한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죄로 군복을 벗어야 했고 계급이 다른 농민의 딸과 사랑에 빠져 집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정착하여 집을 짓고 땅을 일구며 가축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남매를 낳아 사랑을 주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학교 가지 않겠다는 딸을 말리지 않았고 멀리 호주까지 가서 살겠다는 아들도 축복했습니다. 그렇게 모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그들은 틈만 나면 험한 길을 며칠이나 걸어서 부모를 찾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아버지가 부르시면 곁에 와서 살겠다고 합니다. 저녁상을 물리면 가족이 모두 둘러앉아 아버지의 하모니커 연주를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이 나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옷을 벗고 바위에 앉아 햇살을 받고 바람을 맞으며 어느덧 자연과 하나되는 느낌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가끔씩은 산 아래 마을에다 맡겨놓은 낡은 오토바이를 정성껏 닦고 손질해서 달리는 걸 즐깁니다. 다른 이들의 수고를 끼치지 않으려고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놓고 틈만 나면 들여다 보는 것도 또 다른 그의 낙입니다. 길게 눕지 않고 앉을 수 있도록 좁고 깊게 판 무덤에 들어가서는 그 아래 아름다운 자연과 자신이 일군 삶의 터전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 하나하나에 마음을 뺏긴 진행자가 끝으로 혹시나 살면서 후회는 없는지를 조심스레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딱 한가지 회한이라면 자신이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서 그의 삶이 깃든 이곳의 상공을 누비며 그 아래를 한 눈에 내려다보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몸담고 있는 학교에 몸이 불편한 청소부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몹시 절면서도 늘 바닥을 쓸고 휴지를 줍느라 잠시도 쉬지 않았고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피며 더러운 곳만 찾아다녔습니다. 무뚝뚝한 표정과 불편한 거동으로 어디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나타나는 그분을 다들 조금은 경계하며 어색하게 대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남다른 생각으로 이분을 지켜보았고 감사한 마음을 전달할 무언가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리를 끄느라 한쪽 신발 바닥이 먼저 닳아 망가진다는 걸 알고는 따로 밑창을 덧댄 운동화를 선물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학생을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영재로 입학한 발레전공 신입생인데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토록 따뜻한 시선과 속깊은 생각이라니! 정말이지 꼭 만나고 싶었는데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이제는 다리 저는 청소부 아저씨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바르고 어질며 따뜻한 사람들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아를에서 시내버스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버스에 오르더니 큰 가방을 열어 한참이나 뒤졌지만 차삯으로 쓸 동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버스 기사는 그냥 타도 된다는 손짓을 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러자 그 기사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와서 동전 찾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러기를 또 얼마가 지난 후 결국은 버스 기사가 먼저 동전을 찾아 머리 위로 흔들었고 그제서야 할머니 뒤로 줄을 서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성을 질렀습니다.

아를에서의 마지막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흐가 즐겨 찾았다는 근처 카페로 가서 라따뚜이를 주문했습니다. 그러자 웨이터는 그 메뉴가 없다면서 아마도 근처의 다른 음식점들도 다 마찬가지일 거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내일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다며 있는 동안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다 맛보았는데 라따뚜이만 못먹고 간다면 얼마나 아쉽겠냐며 짐짓 간절한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난처해진 그는 가서 물어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사정을 전해 들은 주방장은 아쉬운 대로 주방에 있는 야채를 써서 만들어보겠노라 말했습니다. 그렇게 라따뚜이를 맛있게 먹고 계산서를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카페 주인이 나와서 메뉴에 없는 음식이라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의 호의를 두번씩이나 그저 받을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 역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요리 "라따뚜이"

 

그때 카페 한 쪽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검고 긴 생머리에 크고 까만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인 프로방스 여인이었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과 마주앉은 그 여인은 아기 돌보듯 그를 대했고 그 모습이 너무 정겨워 카페 주인에게 혹시 아는 사람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말인 즉 그 두 사람은 근처에 사는 아버지와 딸인데 얼마 전까지 따로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그 부녀가 주문한 밥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그곳에서 받은 친절과 배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모르는 일이었고 문을 나서는 내게 카페 주인은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고 쏟아질 듯 알알이 넘쳐 가슴 속에 박혔습니다.

 

 



영화 "엘리노어 릭비"를 봤습니다 비틀즈 노래 제목과 영화 제목이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입니다 ", 외로운 사람들을 보아요. 외로운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외로운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일까요?" 비틀즈의 앨범 "리볼버"에 수록된 "일리노어 릭비"의 후렴구입니다. 이처럼 심각한 질문에 같은 앨범에 수록된 "옐로우 서브머린"은 아이처럼 해맑은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 노란 잠수함에서 살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우린 너나없이 한 배에 타고 망망대해를 나선겁니다. 그렇게 정처없이 흘러가고 있는겁니다. 영화에서 두 남녀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함께 있지 못합니다. 처음엔 여자가 걷는 길을 남자가 멀리서 뒤따르지만 나중엔 앞서 걷는 남자의 뒤를 여자가 떨어져 걷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하고 있지만 무작정 따라가는겁니다. 어디라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라서 중요합니다. 나란히 서서 손을 잡거나 어깨를 기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한 배를 탔다는 게 사랑이고 운명이고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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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맛과 멋. 삶과 음악 속에 숨겨져 있는 편안하고 소박하며 친근한 그것.[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맛과 멋. 삶과 음악 속에 숨겨져 있는 편안하고 소박하며 친근한 그것.

Posted at 2017.07.05 16:34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사람의 덕은 조화와 균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여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지도 않아 흔들림이 없이 늘 한결같음이 사람의 덕입니다. 덕이 있는 이들은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려도 솔깃해서 휩쓸리는 법이 없지만 덕이 없는 이들은 서로 뜻이 같아 함께 하면서도 늘 뽐내거나 시기하여 다투기 마련입니다.

 

조화와 균형, 즉 중용을 얻으려면 누구라도 가여워서 어여삐 여겨야 하며 날마다 돌아보며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낮추어 삼가할 따름이고 늘 마음을 가다듬어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음악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화와 균형이 음악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입니다.

 

출처 : http://blogs.discovermagazine.com/crux/2016/09/26/the-arrow-of-time-its-all-in-our-heads/#.WVyR6YTyiUl


세월이 흘러도 그 빛을 잃지 않는 클래식 음악의 묘미는 오래 묵은 장맛과 같아서 단 맛과 쓴 맛, 신 맛과 짠 맛이 치우침이 없이 골고루 어우러져 단 듯 달지 않고 쓴 듯 쓰지 않으며 신 듯 시지 않을 뿐더러 짠 듯 짜지 않아 담백하고 은근하여 뒷 맛이 오래 남습니다. 덕이 있는 이들이 서로 그러하듯 좋은 음악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또한 전혀 다르지만 서로 잘 어울려 하나인 듯 여럿인가 하면 어지럽게 흩어졌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하나가 됩니다. 덕이 쌓여 한결같은 이들이 풍기는 멋은 소박한 듯 단순하여 편안하며 친근한 것이고 잘 익은 장맛과 같은 클래식 음악의 감칠 맛은 싱거운 듯 담백하여 은근하며 물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처 : https://wallpapersafari.com/classical-music-wallpaper/


맛을 아는 이가 멋있습니다.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제대로 아는 이가 참 멋쟁이입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가릴 줄 안다는 말이고 가린다고 함은 티끌만한 다름도 놓치지 않고 가볍게 여기지 않음입니다. 하여 스스로는 그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를 맛으로 느끼며 간직하고 음미하지만 그것을 애써 드러내어 따지려 들지는 않습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그 맛의 좋고 나쁨을 가려서 높고 낮음을 매기는 것이 아닙니다. 깔끔한 맛을 즐기다가 더러는 텁텁한 맛을 찾기도 하고 톡 쏘고 사라지는 맛을 봤으면 밋밋하지만 그윽하게 남는 맛에 끌리기도 합니다. 감칠 맛만 맛이 아니라 허튼 맛도 맛이고 곰삭은 맛이 있으면 떫은 맛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만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 아니라 이건 이래서 이렇고 저건 저래서 저러니 이건 이럴 때 이렇게 써야 하고 저건 저럴 때 저렇게 써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서 가릴 따름입니다.

 

맛을 가려 멋을 아는 사람은 작고 흔한 것들도 허투루 여기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압니다. 그 무엇이나 누구라도 나름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음을 알기에 모두가 함께 어울려 더불어 살고자 합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leepansoo/8626129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오되 바람이 지나가면 대숲은 그 소리를 머금지 아니하고 차가운 연못 위로 기러기 날아가되 기러기 지나가면 연못은 그 그림자를 붙들지 않는다. 이처럼 군자는 일이 있으면 마음이 일고 일이 끝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운다." 채근담에 있는 말입니다 비워야 채우고 버려야 담을 수 있습니다 죽지 않고선 다시 태어날 수 없지요 날마다 씻어서 날마다 거듭나야 합니다.

 

옛 말씀에 이르기를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늘 가락을 품고 있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거늘 오늘도 어김없이 가벼운 재주를 부려서 얕은 지식을 팔고 있습니다. 날마다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하거늘 늘 눈앞의 삶에 무너지고 맙니다. 군자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만 아무에게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인은 서로 같은 이들끼리 모여서도 함께 어울리지 못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쫓아 작은 것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끝내 서로 다투기 마련입니다.

 

출처 : http://www.bbc.com/earth/story/20160616-the-moon-that-has-been-lurking-around-earth-for-a-century


내가 홀로 똑바로 서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존중합니다. 이태백이 이르기를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거닐고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뭇가지를 흔든다."고 했습니다. 달이 기울면 다시 차고 비가 그치면 해가 뜨기 마련입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덧 술 익는 마을에 닿을 겁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풍류가 무엇입니까? 뭔가에 마음을 빼앗겨 넋을 놓을 만큼 아찔하나 그저 곁에 둘 뿐이지 결코 취하려 들지 않고 늘 아끼며 보살피는 것입니다. 하여 애틋한 마음은 날로 더하나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아 넘치거나 소홀함이 없어야 하고 단지 속으로 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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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

Posted at 2017.06.04 19:0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음악사를 통 털어 가장 위대한 업적을 쌓은 세 사람의 독일 출신 작곡가라면 아무래도 바흐, 베토벤, 브람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사람 이름의 성이 모두 알파벳 B로 시작하는 까닭에 '3B'라 부르기도 합니다. 최초의 전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우가 처음 이 말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독일 출신의 작곡가라는 것 말고도 참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놀라운 능력과 업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늠하는 잣대로 삼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먼저 그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 일찍 독립해서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갔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 음악가,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어떤 난관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집념, 근면과 성실로 불멸의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genie.co.kr/magazine/subMain?ctid=8&mgz_seq=3522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바흐는 어려서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큰 형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그러나 빠듯한 살림에 조카들이 늘어나자 따로 나가 살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생계형 음악가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찍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해서 열 세 자녀를 낳았고 부인을 사별한 후 재혼한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를 두었습니다. 무려 스물이나 되는 자녀들을 누구보다 잘 양육하고 교육하였기에 장남 빌헬름 프레데만과 차남 카를 필립 엠마누엘, 그리고 막내인 요한 크리스찬이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음악사에 길이 그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대학도시 라이프치히에 정착하게 된 것도 성장한 자녀들의 교육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습니다.

 

이미지출처 : http://www.christianitytoday.com/history/people/musiciansartistsandwriters/johann-sebastian-bach.html

 

베토벤 역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처음 음악가의 길을 개척하여 크게 성공하였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무능하고 심약했던 탓에 알콜 중독자로 살면서 가족들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괴롭히며 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베토벤은 형제들을 감싸고 돌봤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는 그 자신은 물론 두 동생까지 돌봐야했고 죽는 날까지 그 책임을 다하느라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말년에는 심신이 다 고갈되어 도저히 하루도 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도 형제들을 통 털어 유일한 혈육으로 남은 철부지 조카 카를의 앞날을 걱정하고 준비하느라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바쳤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지나치리만큼 절약했지만 그렇게 모은 돈은 고스란히 철부지 조카에게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lifesitenews.com/opinion/the-problem-with-the-beethoven-argument

 

브람스의 아버지 또한 음악가였습니다. 콘트라베이스와 호른을 연주했으며 어린 브람스에게 음악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 대신 14살부터 함부르크 항만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렸으며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의 반주자로 발탁되었고 이후에는 당대를 풍미했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반주자로 음악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사귄 요아힘과 평생 우정을 나누었고 슈만에게 브람스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요아힘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와 동생들이 늘었지만 가족을 돌보는 브람스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계모와 이복동생들까지 보살폈습니다. 무작정 믿고 전 재산을 맡긴 출판업자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해도 원망하는 법이 없었고 스스로는 검소하게 살면서 그렇게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여유까지도 늘 누군가에게 베풀었습니다. 슈만이 그에게 빛을 주었듯이 그 또한 드보르작을 비롯한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존경했던 스승의 부인이자 마음속으로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던 클라라와 그 가족들을 죽을 때까지 돌보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thefamouspeople.com/profiles/johannes-brahms-395.php

 

후대에 귀감이 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이들 세 작곡가 역시 모두 고귀하고 숭고한 가치와 신념을 가졌고 음악으로 그것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에서 진정 놀라운 것은 그들의 두 눈은 언제까지나 저 높은 곳의 별을 바라보며 두 손을 뻗어 끝내 닿으려 했으면서도 두 발은 늘 꿋꿋하게 땅을 딛고 서서 그들을 향해 몰아치는 세찬 바람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맞으며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라면 곧 몽상가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는 것이 예술이며 이상으로 현실을 이끄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 믿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라고 생각하여 현실을 파고들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깨닫도록 하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살다 보면 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겪습니다. 현실은 이상을 용납하지 않고 이상은 현실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세 작곡가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상반된 두 세상을 다 아우르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현실에서 이상을 찾았고 이상으로 현실을 구했습니다. 이상이 있었기에 현실을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이 거칠수록 이상은 더 높아만 갔습니다. 남다른 재능이 축복이자 저주인 것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 또한 장벽이면서 또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느라 단련된 힘으로 누구보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흐와 베토벤, 브람스는 남다른 재능을 책임이라 생각하여 세상을 향한 축복으로 만들었고 그들에게 닥친 현실 또한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여 위대한 선물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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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죽음에 앞서 깨달은 사랑의 참 뜻, 푸치니의 “투란도트”[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죽음에 앞서 깨달은 사랑의 참 뜻, 푸치니의 “투란도트”

Posted at 2017.05.09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오늘날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아마도 1800년대 이후 백여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오페라일 것입니다. 롯시니에서 시작된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르네상스는 벨리니와 도니제티를 거쳐 베르디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렀고 푸치니가 그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그런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가 "투란도트"였고 이 작품을 끝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는 다시 긴 겨울잠에 들어가 지금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이전에 작곡한 오페라들은 다 버려도 좋다'고 했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고 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그 나머지 작업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했습니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에 감상적이고 진부한 음악이라는 전문가들의 비난을 의식했던지 현실에서 동떨어진 옛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는가 하면 공이나 실로폰과 같은 이국적인 악기와 불협화음에 원시적인 리듬까지 과감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을 앞세웠던 전작들과는 달리 남자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Music&document_srl=3396918&search_target=tag&search_keyword=%EB%A9%94%ED%8A%B8%EC%98%A4%ED%8E%98%EB%9D%BC

 

 

중국의 아름다운 공주 투란도트는 할머니가 적군에게 유린당한 과거의 악몽을 떨치지 못해 남성을 혐오하고 결혼을 기피합니다. 그럼에도 구혼자들이 줄을 잇자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서 그 답을 맞추면 결혼을 하고 아니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조건을 내걸었고, 많은 이들이 도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여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때 나라를 잃고 떠돌던 타타르의 왕자 티무르가 나타나 공주의 수수께끼를 풀었지만 얼음같은 공주의 마음은 왕자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왕자는 다음날까지 공주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면 목숨을 내놓고 아니면 결혼해야 한다는 제안을 합니다. 궁지에 몰린 공주는 수소문 끝에 왕자의 시녀인 류를 잡아들여 모진 문초로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려 하지만 왕자를 몰래 짝사랑했던 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왕자를 지킵니다. 왕자의 용기와 류의 사랑에 감복한 공주는 결국 마음을 열어 왕자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출처 : https://kr.pinterest.com/pin/407364728772437860/

 

 

이 대강의 줄거리는 중동에서 전해오는 "투란도흐트 Turandokht"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루이 14세 때의 작가 들라크루아가 페르시아의 옛 이야기들을 모아서 펴낸 "천일일화"에 수록한 것을 베네치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가 희곡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가 다시 각색한 것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푸치니의 손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원래의 이야기는 왕자가 수수께끼를 풀면 바로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었으나 푸치니의 고집으로 하룻밤의 시간이 더해지면서 거기에 류의 희생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밋밋하고 뻔한 줄거리를 보완하는 한편, 전작들에서 줄곧 이어져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푸치니 오페라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토스카""라보엠", "나비부인"과 같은 푸치니의 대표작들은 한결같이 사랑에 모든 것을 걸지만 끝내 목숨을 잃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푸치니 자신의 여성편력 때문인지 오페라 역사를 통 털어 푸치니만큼 다양한 성격의 여성들을 작품 속에 다루면서 그만큼 감성적으로 또 섬세하게 그 심리를 잘 드러내어 전달한 이는 따로 없었습니다. 작품을 쓸 때마다 푸치니는 늘 누군가와 열애중이어서 그 상대의 성격이 작품 속 여주인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투란도트"의 초연을 지켜 본 청중들이라면 누구나 가엾은 류의 모습에서 바로 일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푸치니 스캔들의 불쌍한 희생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는 하녀 도리아 만프레디와 남편 사이의 불륜을 의심하여 못견딘 나머지 도리아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집에서 내쫓았는가 하면 교회에까지 고발하고 망신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따돌림을 견디다 못한 도리아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가족들의 요청으로 부검을 한 결과 도리아가 처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난의 화살은 엘비라에게 쏟아졌습니다. 엘비라는 무고죄로 고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푸치니가 유족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하여 처벌만은 면하게 됩니다. 이 일이 있고 얼마지 않아 "투란도트"를 보게 된 관객들이 왕자의 시녀 류에게서 푸치니의 하녀 도리아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인물 사이에는 너무나 다른 면면이 있어 그후로도 그 부분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아와 푸치니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푸치니가 과연 그의 작품 속에 구태여 연인이 아닌 다른 인물을 투영하려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고 투영한 게 사실이라면 그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죄책감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고 도리아의 짝사랑, 혹은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인 사랑을 까닭으로 짐작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2008년 이탈리아의 파울로 벤베누토 감독이 영화 "푸치니의 여인"을 발표하면서 세상은 다시 한번 도리이의 비극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 동안 감춰졌던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풀리지 않았던 의혹도 말끔하게 해소되었습니다. 벤베누토의 말에 따르면 영화 스탭 중의 한 사람이 푸치니가 살던 토레 델 라고의 집 근처의 식당에 들렀다가 푸치니의 사생아라는 사람이 그 식당에 자주 들렀다는 말을 들었고 결국 그의 자취를 추적하다 그의 딸, 즉 푸치니의 손녀인 나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디아로부터 건네받은 40여통의 편지는 모두 푸치니가 나디아의 할머니 줄리아 만프레디에게 보낸 편지였고 그 편지를 몰래 전한 사람이 바로 줄리아의 사촌동생이자 푸치니의 하녀였던 도리아였던 것입니다. 줄리아는 푸치니가 살던 집과 호수를 사이에 두고 멀리 보이는 선술집을 혼자 꾸려갈 만큼 억척스러우면서도 늘 밝고 푸근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줄리아와 사랑에 빠졌을 때 푸치니는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를 작곡하고 있었고 오페라에서 선술집을 운영하는 씩씩한 여주인공 미니는 당연히 줄리아를 모델로 삼아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남몰래 편지 심부름을 하던 도리아는 그들 사이의 비밀을 혼자 가슴 속에 묻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푸치니는 이 착하고 가엾은 하녀의 어이없는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그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고 어떻게든 그 넋을 위로하고자 마지막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세웠던 것입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푸치니의 운명 또한 여기까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왕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류가 목숨을 끊는 장면까지 작곡을 한 다음 아들과 함께 벨기에까지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후두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불과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대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프랑코 알파노에게 마무리 작업을 맡겨 예정보다 1년 늦게 초연을 했지만 그 첫 공연에서 토스카니니는 류가 죽는 장면을 끝으로 음악을 멈추고는 객석을 향해 "친애하는 푸치니 선생은 여기까지 쓰시고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오페라에서 정작 푸치니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왕자와 공주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혼자만의 쓸쓸한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저 없이 기꺼이 바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참 사랑의 희생과 헌신이었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그토록 많은 사랑을 했으면서도 이처럼 고귀한 사랑에는 결코 단 한번도 이르지 못했기에 더더욱 큰 아쉬움을 이렇게라도 토로하려 했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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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페라 “돈 카를로”와 영화 “사도세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까지[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페라 “돈 카를로”와 영화 “사도세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까지

Posted at 2017.05.07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출처 : 나무위키


2015년 개봉한 영화들 가운데 "사도세자"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사도세자라면 그 영화를 보지 못했어도 그 줄거리는 대충 짐작할 만큼 우리에겐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유럽의 역사에서도 그와 비슷한 인물이 있어 그들 또한 우리처럼 비운의 왕세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초 무적 함대의 신화를 만들어 스페인의 전성 시대를 열었던 펠리페 2세의 아들 카를로스 황태자가 사도세자와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그 역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처럼 카를로스 왕자는 성안에 감금되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의 기막힌 사연이 소설로, 드라마로, 또 영화로 숱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카를로스 왕자의 안타까운 이야기 역시 여러 장르의 예술이 거듭 다루었던 주제였고 그 가운데는 오페라도 빠지지 않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가 바로 비운의 왕자 카를로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독일의 문호 프리드리히 쉴러가 쓴 희곡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를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입니다. 베르디를 좀 안다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남긴 오페라들 가운데 "돈 카를로"를 최고의 역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고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출처 : 오페라 돈 카를로스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들 중에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많은데 특히 아버지와 딸, 혹은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리골레토"의 주인공 리골레토는 애지중지 홀로 키운 외동딸 질다를 끝내 잃고 맙니다. "아이다"에서는 이집트 파라오와 그의 딸 암네리스, 에디오피아의 왕 아모나스로와 그의 딸 아이다가 서로 다른 부녀의 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제르몽은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여 알프레도와 비올레타 사이를 갈라놓고 맙니다. 이처럼 베르디 오페라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유독 많은 것은 아무래도 그 자신이 결혼하고 얼마지 않아 어린 아들과 딸을 차례로 잃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견뎌야 했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부모의 사랑은 어딘가 모르게 죄다 일그러져 있습니다. 리골레토는 질다를 가두다시피 숨겨서 키웠지만 결국은 만토바 공작에게 순결을 짓밟히자 복수에 눈이 멀어 자신의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하면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는 딸로 하여금 연인을 속여 적군의 비밀을 알아내도록 윽박지르는 것조차 서슴치 않습니다. 비올레타를 설득해서 알프레도를 떠나게 만든 제르몽 역시 겉으론 아들의 장래를 위한다지만 사실은 자신과 집안의 체면을 지키려는 생각이 앞섰던 것입니다.

 

출처 : 유튜브

오페라 "돈 카를로"는 베르디가 줄곧 다루었던 빗나가고 비뚤어진 부정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요즈음 한창 우리 사회의 문제로 떠오른 막장 드라마의 원조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스페인 왕자 카를로(카를로스)는 아버지 펠리페 왕이 배필로 정해준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타(엘리자베트)를 퐁텐블로 숲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두번째 왕비를 잃은 펠리페 2세는 어이없게도 이미 아들과 약혼한 엘리자베타와의 결혼을 발표합니다. 충격을 받은 왕자를 친구인 로드리고가 위로를 하지만 이제 어머니가 되어 가까이에 있는 엘리자베타를 향한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왕의 정부 애볼리가 연인의 아들 카를로를 사랑한다는 설정입니다. 질투에 눈이 먼 애볼리의 간계로 펠리페는 아들과 왕비의 불륜을 의심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카를로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됩니다.

 


 

카를로의 친구 로드리고를 빼고 오페라에 등장하는 주요 배역들은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그러나 펠리페왕이 아들의 약혼녀와 결혼했다는 것과 아들을 죽게 했다는 것을 빼면 오페라의 이야기와 역사적인 사실은 사뭇 다릅니다. 심지어 오페라에서는 카를로가 최후를 맞으려는 순간, 펠리페의 부왕이자 카를로의 할아버지인 카를 5세가 무덤에서 나와 손자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결말을 짓습니다. 이런 억지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까닭은 요소요소에서 빛을 발하는 음악의 힘이고 그렇게 되도록 심혈을 기울인 베르디의 열정입니다. 베르디가 어린 자식들과 부인을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위로와 헌신으로 재기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르디를 만나기 전 스트레포니와 다른 남자들 사이에 있었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에 숱한 질타와 비난이 쏟아졌고 심지어는 오랜 동거 끝에 뒤늦은 결혼을 결심했을 때도 반감과 반대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베르디의 가장 큰 상처는 그들의 결합을 그렇게 심하게, 또 끝까지 반대한 사람들 중에 자신의 부모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갈등과 배신감이 얼마나 컸던지 그 사건 이후 부모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는 서로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법적인 관계까지 정리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보면 "돈 카를로"에 집념을 불태운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충격인 것은 위대한 음악가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 선하고 고귀한 삶을 살았던 그가 천륜이라고 하는 부모자식의 인연을 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어려운 것이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습니다. 가까우니 잘 알고 아는 만큼 아끼는 마음에 잘 챙기고 보살펴 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서 오히려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생텍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처럼 정말로 소중한 것은 바로 곁에 있는데 정작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꼼꼼하게 살펴서 그 마음을 마음으로 따뜻하게 어루만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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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집시 여인의 슬픈 이야기(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밥 딜런)[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집시 여인의 슬픈 이야기(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밥 딜런)

Posted at 2017.04.21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일 트로바토레"(1853)"리골레토"(1851)"라 트라비아타"(1853) 사이에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로 이들 세 작품은 오늘날 베르디의 오페라들 가운데 가장 많이, 또 자주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 오페라의 이야기는 모두 빗나간 부정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리골레토는 외동딸 질다를 짓밟은 만토바 백작에게 복수하려다 결국은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듭니다. "라 트라비아타"에서 제르몽 남작은 서로 사랑하는 비올레타와 그의 아들 알프레도를 헤어지게 만들어 결국은 비올레타의 죽음을 재촉하고 맙니다. "일 트로바토레"에서 루나 백작과 만리코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아픈 까닭이 집시 여인의 주문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만으로 힘 없는 노파를 화형에 처합니다. 아마도 그 무렵 베르디가 이런 이야기에 한결같이 이끌렸던 것은 그토록 그에게 헌신하고 희생했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의 결혼을,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출처 : 문화뱅크(http://www.imwbk.com/bd/bbs/board.php?bo_table=gallery&wr_id=30&page=5)

 

이 오페라는 스페인의 작가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1813-1884)1836년에 발표한 [엘 트로바도르]를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트로바토레(이탈리아어), 트로바도르(스페인어)는 프랑스의 트루바두르, 트루베르와 마찬가지로 모두 중세시대의 "음유시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같은 시대 독일에는 "민네징거"라 불렸던 음유시인들이 있었는데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가 바로 그들의 이야기로 등장인물 대부분은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들입니다.

 

음유 시인이라고 함은 이런 느낌??

출처 : http://kairiseimach.lofter.com/

 

십자군 전쟁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음유시인들은 대부분 멀리 떠나 오랜 전쟁에 참전했던 탓에 생존의 기반을 잃고 돌아갈 곳이 없어진 기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곳 저곳의 궁정을 떠돌며 전투의 무용담과 이국에서의 모험담,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를 노래에 실어 들려주었고 그 때문에 기사가 아니라 음유시인으로 불렸던 것입니다. 이 오페라에서 음유시인, 트로바토레는 주인공 만리코입니다. 집시 여인 아주체나의 아들인 그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루나 백작에 맞서고 있지만 내세울 혈통도 없고 받쳐주는 기반도 없는 떠돌이 기사입니다.

 

"일 트로바토레"에 나오는 이름들은 모두 가공의 인물들이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와 장소는 모두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때는 1411년으로 스페인이 아직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기 이전, 우르헬과 카스티야 두 가문이 아라곤 왕국의 왕위계승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오페라의 주인공 만리코와 루나 백작이 각각의 진영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정적이면서 이 두 사람은 레오노라라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연적이기도 합니다. 이 오페라의 이야기는 이 세 사람의 삼각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갈등, 희생과 파멸을 다룬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일 뿐 그 속에 감춰진 또 다른 사연이 이들의 운명을 막다른 길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그 운명의 열쇠는 또 한 사람의 등장인물인 집시 여인 아주체나가 쥐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m.aspx?CNTN_CD=A0002266629#cb

 

막이 오르면 캄캄한 밤, 루나 백작의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백작의 심복인 페란도가 이 집안에 얽힌 옛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루나 백작에게는 가르시아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먹을 것을 훔치러 몰래 집에 들어온 집시 노파가 아기였던 그 동생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다 사람들에게 들켜 도망 간 뒤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답니다. 루나 백작의 아버지는 그것이 집시의 저주 때문이라며 그 노파를 붙잡아 화형에 처했는데, 그날 밤 아기가 없어지고 불에 탄 아기의 백골만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아기가 없어지던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은 2막에서 듣게 됩니다. 새벽에 집시들이 숲 속 대장간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망치로 모루를 두드리며 대장간의 합창을 부르는데, 불꽃을 바라보던 아주체나는 무엇인가에 홀려 넋이 나간 듯 만리코에게 그 때의 일을 들려줍니다. 화형을 당한 집시 노파가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고 복수를 위해 루나 백작의 동생을 죽이려 했으나 실수로 자신의 아들을 불 속에 던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리코에게 루나 백작을 죽여 어미의 복수를 해달라며 애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만리코는 어쩌면 자신이 아주체나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일의 전모는 오페라의 마지막 가서야 밝혀지게 됩니다. 레오노라와의 결혼식을 앞둔 만리코는 아주체나가 루나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구하러 나섰지만 그 또한 루나의 포로가 됩니다. 루나를 찾아간 레오노라는 연인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루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몰래 독약을 마시고 서서히 죽어갑니다. 레오노라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루나는 분을 참지 못해 만리코를 처형하는데, 그때 잠에서 깨어난 아주체나가 루나에게 만리코가 그의 동생임을 밝히고 "어머니! 드디어 복수가 이루어졌어요!" 라고 외칩니다.

 

라벨라오페라단 2013 베르디 일트로바토레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결국 아주체나의 복수극이었고 그녀가 뜻한 바대로 복수를 이루었으니 아주체나의 승리로 끝난 것일까요? 이 모든 비극의 가장 큰 희생자는 누구일까요?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레오노라일까요? 혈육에게 죽임을 당한 만리코일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여인을 두 번이나 연적에게 빼앗기고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인 루나일까요? 그들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한들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겪고 제 손으로 자식을 죽였으며, 원수의 자식을 제 자식인 양 애지중지 키워서 원수의 손에 죽게 만든 것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요?

 

오페라의 역사를 통털어 이 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를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음악이 또한 절절하게 가슴을 파고 듭니다. 사람들은 만리코의 아리아 "타오르는 저 불길을 보라"와 레오노라의 아리아 "사랑은 장밋빛 날개를 타고"를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가슴을 저미는 장면이라면 루나의 감옥에 함께 갇히게 된 만리코와 아추체나가 함께 부르는 이중창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두운 지하 감방에서 아주체나는 자신도 어머니처럼 불길 속에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만리코가 어머니를 마치 아기를 달래듯이 위로하고 두 사람은 집시 마을에서 행복하게 지내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워합니다. 아주체나는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듭니다. 합창 또한 이 오페라의 큰 매력으로 "대장간의 합창"이 유명하지만 모든 것이 파멸로 치닫는 마지막에 이르러 저 멀리 수도원에서 들리는 "미제레레"가 안개처럼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Verdi (베르디) - Chidel Gita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중 대장간의 합창) 

 

"미제레레"는 불쌍히 여겨 자비를 주십사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가여운 존재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가엾게 여겨야 합니다. 오페라를 보며 저렇게 끔찍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까 싶지만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시인 프란시스 톰프슨의 말입니다. 타인의 고통인 줄 알았던 것이 하나 둘씩 나의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남이 만들어 내가 겪는 고통인가 했더니 세상 모든 고통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시대의 음유시인 밥 딜런

 

음유시인이라니 까마득히 오래 전이구나 싶지만 지금도 우리가 겪는 답답하고 기막힌 일들을 시로 읊고 노래로 불러 공감하고 위로하는 음류시인이 어딘가에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밥 딜런도 한때 우리 시대의 음류시인이라 불렸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마지막 후렴을 자꾸 입속으로 중얼거리게 됩니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이 대답인지, 대답이 바람인지... 그렇습니다. 바람이 대답이고, 대답이 곧 바람입니다.

 

Blowing In The Wind (Live On TV, March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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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뮤지컬 아이다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까지... 거장 베르디의 “운명”[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뮤지컬 아이다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까지... 거장 베르디의 “운명”

Posted at 2017.04.18 1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죽어서는 물론이고 살아서도 베르디만큼 명성과 인기를 누렸던 작곡가는 없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는 오페라 작곡가의 대명사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베르디의 삶을 두고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부러워하고 우러러볼 만한 그의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합니다. 어쩌면 알고도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오페라를 두고는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유형의 비극이 다 들어있다고 하면서 정작 그 자신이 겪으며 감당해야 했던 비극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작품을 통해 다루고자 했고, 또 다루었던 그 많은 비극들이 결국은 그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출처 : http://www.cdandl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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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출세작은 나부코였습니다.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열망이 바빌론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이스라엘인들의 처지에 투영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고 오페라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의 국가인 것처럼 널리 불려졌습니다. 이후에도 롬바르디아인에르나니등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이탈리아 인들은 Viva Verdi!(베르디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베르디를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이는 그 자신에 대한 동포들의 감사와 애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이탈리아의 엠마누엘레 왕(Vittorio Emmanule Re Di Italia)의 앞 글자를 모으면 Verdi가 되었기에 이를 드러나지 않게 외치려는 까닭도 있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성공을 거두게 되자 독립에 대한 염원을 작품에 담고자 한 베르디의 선택이 무엇보다 흥행을 염두에 둔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지만 그 자신의 삶에서 오히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베르디가 태어났을 때 그의 고향은 프랑스에 속해있었고 그리고 얼마지 않아 나폴레옹 군대에 쫓긴 오스트리아군이 그의 집까지 유린하면서 그 또한 어머니와 함깨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토록 열망했던 밀라노 음악원 입학이 좌절된 것도 단지 그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 뿐만 아니라 밀라노에서 그는 엄연히 외국 여권을 소지한 외국인이라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다른 나라의 지배와 간섭을 받지 않는 하나의 나라 이탈리아를 염원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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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닥친 두 번째 비극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어서 그 누구라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가 성장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돌봐주었던 부호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두 아이와 아내까지 차례로 잃어야 하는 비극이 닥쳤던 것입니다. 이후 소프라노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를 만나 위로를 얻고 도움을 받아 재기할 수 있었지만 그토록 참담한 아픔과 슬픔이라면 그 누구라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특히 베르디와 같이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성격의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한 떨칠 수 없는 악몽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오페라에서 다룬 그 수많은 비극적인 운명에는 언제나 혈육,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가슴 아픈 일들이 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리골레토의 주인공 곱사등이 리골레토는 아내도 없이 애지중지 홀로 키운 외동딸을 자신의 잘못으로 죽게 만들었고 트로바토레에서는 집시 여인 아주체나가 자신이 낳은 아들과 기른 아들 모두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고 마는 운명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돈 카를로의 펠리페 왕 또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운명의 힘은 이와는 반대로 자식으로 말미암아 아비가 죽게 되면서 주인공 모두가 파멸에 이르는 가혹한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프라노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출처 : 위키피디아


그에게 닥친 세 번째 비극은 두 번째 아내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습니다. 당대의 소프라노였던 주세피나는 두 아이와 아내마저 잃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베르디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세피나는 이미 유부남인 테너 모리아니와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두었으니 두 사람의 관계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두 사람의 보금자리에 욕설과 돌멩이가 날아들었고 베르디는 결국 고향에서 떨어진 산타가타에 농장을 마련하였고 그제서야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이루고자 했던 그의 소박한 소망인 농부의 꿈을 이루었고 그토록 원했던 잠시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살며 서로를 의지한 지 12년이 지난 다음에야 결혼실을 올리고 누구에게나 떳떳한 부부로 맺어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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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베르디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트라비아타는 두 사람의 가슴 아픈 사랑이 빚어낸 결실입니다. 그 자신이 베르디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 스트레포니는 파리로 떠났고 그 뒤를 따라간 베르디는 아무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도시에서 두 사람의 사랑에만 모든 것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듀마의 소설 카멜리아의 여인을 연극으로 만든 공연을 관람하였고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극중의 남녀 주인공이 마치 두 사람인 듯 여긴 베르디가 당장에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트라비아타뿐만 아니라 베르디의 오페라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은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다의 두 남녀 주인공이야말로 개선장군과 노예라는 신분으로 보나 적대국인 이집트의 장군과 에디오피아의 공주라는 처지를 생각한다 해도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 작품에도 아버지와 딸이 기구한 운명으로 다시 만나고 이집트에 정복당한 에디오피아 사람들의 처지는 바빌론에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다름이 없고 오스트리아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이탈리아 사람들과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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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di Opera Aida

출처 : wikiwand


이후 베르디는 내놓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었고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드물게도 아흔에 가까운 천수를 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살면서 결국은 그의 운명과도 같았던 평생의 반려 스트레포니를 먼저 보내야했습니다. 그 안타까움이야말로 그의 삶에 드리워진 마지막 결정타였고 이제는 더 이상 걷어버리고 싶지 않은 검은 장막이었을 것입니다. 그 장막 속에 그의 모든 슬픔과 기쁨을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인 부세토 근교의 산타가타에 마련한 농장에 칩거하였습니다. 통일 이탈리아의 첫 번째 국회의원으로 추대되어 잠시 권좌의 단 맛도 보았지만 재차 추대되었을 땐 정중히 사양하였습니다. 성공한 자신과는 달리 불우한 처지의 동료 음악가들의 노후를 위해 사재를 털어 양로원을 지었습니다. “휴식의 집이라 이름붙인 이 양로원을 두고 그는 자신이 남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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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슬픔과 참을 수 없는 아픔을 겪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이겨내기 마련이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야 하니 그렇다는 말이고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저 그런 척하려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면서 속으로만 힘겨워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더러 그렇다는 것이고 베르디가 특별히 더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갔다면 스트레포니와 함께 있을까요? 아니면 마르게리타와 두 아이를 보살피고 있을까요? 그 선택이 두려워 아직도 이승을 떠돌고 있다면 산타가타 농장에서 흙이라도 만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휴식의 집에 깃들어 차라리 오갈 데 없어 그곳에 머무르는 동료들을 부러워하고 있을까요? 오페라 운명의 힘에서 여주인공 레오노라가 부르는 아리아 주여, 제게 평화를 주소서를 들으시겠습니다. 레오노라는 사랑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사고로 죽게 하고 멀리 집을 떠나 연인과도 헤어졌지만 복수를 하려는 오빠의 집념에 쫓겨 수도원을 찾습니다. 이 노래는 날마다 은둔과 고행으로 속죄하지만 끝내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레오노라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신곡에서 단테는 살아서 지옥을 건넌 자만이 죽어서 천국에 든다고 했습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없고 지옥 없는 천국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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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21세기 오페라의 흐름을 바꾼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21세기 오페라의 흐름을 바꾼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Posted at 2016.12.21 11:3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지난 312, 우리나라 오페라 애호가들 그토록 기다렸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내한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 이후 안나 네트렙코만큼 주목받았던 소프라노가 있었나 싶습니다. 노래와 연기, 외모까지 모두 다 가졌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고 타고난 끼와 재능에다 재치와 순발력까지 갖추고도 그 의욕과 열정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미모라면 일찍이 그 이름이 같은 안나 모포가 있었지만 노래와 연기, 무엇보다 성량이 전혀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노래는 물론 연기만으로도 감동을 준 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는 평생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출산을 하고 다시 나타난 지금은 불어난 몸매가 아쉽기도 하고 소리의 탄력도 예전만은 못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안나 네트렙코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디바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안나 네트렙코의 존재가 지금처럼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알려진 것은 2000년대 초반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초청되어 도밍고가 발굴한 테너 롤란드 비야존과 몇차례 호흡을 맞추면서부터입니다.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청순하지만 적극적인 성격의 시골처녀 아디나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베르디의 "트라비아타"에서는 무채색의 무대를 배경으로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나와관능적이면서 가련하기까지 한 화류계 여인 비올레타의 강렬한 이미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서구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팔방미인 소프라노의 출현을 반기면서 호들갑을 떨었고 "마린스키 극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한 소녀가 우연히 마에스트로 게르기에프의 눈에 띄어 일약 스타가 되었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사실이고 게르기에프에게 발탁되어 오페라 무대에 선 것도 사실이지만 청소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자주, 또 가까이서 오페라를 만드는 현장을 보고싶은 열망에서 택한 일이었고 게르기에프와 처음 호흡을 맞춘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역은 1993년 글린카 콩쿠르에서 우승한 다음 해의 일이었습니다.




네트렙코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크게 성공한 예술가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그 역시 어린 나이에 가수가 되려는 꿈을 품었고 피나는 노력으로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어 마침내 성공에 이르렀을 것이라 짐작하겠지만 정작 그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1971918일 흑해 연안의 러시아 도시 크라스노다르에서 지질학자인 아버지와 통신기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발레와 체조, 농구를 배워 수준급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고 연극 "오셀로"를 본 이후로는 한 동안 연극 무대를 동경한 연기자 지망생이었습니다. 당연히 연극 학교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학이 어려울 거라는 주변의 만류로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 전문대로 방향을 틀었고 일년 만에 그 보다 더 높은 수준의 림스키코르사코프 콘서바토리에 편입했습니다. 연기자의 꿈을 접고 택한 성악가의 길에서 재능을 발견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지만 정작 그 자신은 가수가 되지 못했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집안에 집시의 피가 흘러 언제나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꾸며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네트렙코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줄곧 새로운 영역과 역할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산으로 잠시 공백기가 있었지만 이후 다시 나타나서는 전보다 한층 더 진지하고 성숙한 역할에 몰입하여 묵직하고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에서 네트렙코는 헨리 8세에게 버림받는 비운의 여인 앤 볼린의 참담한 심정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서 최고의 열연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네트렙코에 열광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빼어난 외모와 도발적인 무대 매너에 현혹되어 정작 부족한 기본기를 간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대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같이 콜로라투라의 기교가 필요한 역할에서 칼라스와 그루베로바를 비교한다면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의 영역에서라면 누군가 한 사람이 모든 작품의 모든 역할을 다른 누구보다 잘한다는 건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러는 그가 명품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고 동거와 결별, 결혼과 이혼에 이은 재혼까지 문제삼는 시각도 없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소위 말하는 유명 연예인들의 그렇고 그런 행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오페라 가수, 예술가의 품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사람들 중에는 그가 비인에서 살면서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한 사실에 분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이 인류의 미래를 열어가는 시대입니다. 연예인과 예술가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고 결혼이든 국적이든 개인의 선택을 두고 다른 누군가가 이렇고 저렇고 따지던 시대는 이미 아주 먼 옛날입니다. 네트렙코의 말대로 그 자신 변신을 거듭하다 무엇을 선택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언니처럼 모델로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고 연기자로 나서거나 그림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틀림 없는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네트렙코는 자신이 원하는 하루 하루의 삶을 마치 그날이 주어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스스로를 던져 만들어갈 것이며 언제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리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가지를 사방으로 멀리 뻗을수록 줄기는 더욱 단단해져 그를 있게 한 러시아의 흙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사회주의 소비에트 시절을 살면서 엘리트 교육의 혜택을 누렸으니 그 때를 결코 잊지는 못할 것입니다. 21세기의 카라얀을 꿈꾸는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황제) 게르기에프의 간택을 받았으니 그 또한 숙명입니다




라틴 혈통의 다정다감한 바리톤 가수 두 남자와 살다가 헤어져서 지금의 남편인 테너 유시프 에이바조프와 결혼한 것도 어쩌면 러시아어가 아니면 서로 통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간절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생각보다 너무 먼 바다로 나왔으니 어느덧 지난 날이 그립고 살던 곳이 그립겠지만 누구든 한 번 시작한 시간의 항해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며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이미 시작된 변화를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운명입니다. 네트렙코가 오페라 무대에 등장한 이후 벌써 제 2, 3의 네트렙코가 그 뒤를 이으며 네트렙코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 또한 그 누구도 멈추거나 돌이킬 수 없는 오페라의 흐름이고 네트렙코의 운명입니다.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고, 그는 소비에트가 길러 러시아가 자랑하는 21세기 오페라의 새로운 아이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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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전하는 신년 메시지. 아메리칸 드림의 충격과 시작![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전하는 신년 메시지. 아메리칸 드림의 충격과 시작!

Posted at 2016.01.29 15:3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전하는 신년 메시지






새로운 한해가 되었는데 벌써 1월이 끝나갑니다. 삶이 점점 더 팍팍해져서 그런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나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바다 건너 멀리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이 오늘날 우리네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는데도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그 시절을 되새겨 볼 여유조차 없었나 봅니다. 50년 전인 1962년, 헐리웃을 훌쩍 넘어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시대의 반항아 제임스 딘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고 세기의 연인 마릴린 먼로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대중예술의 시대를 열어놓았습니다. 같은 해 비틀즈는 2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마침내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해 비틀즈와 함께 브리티쉬 록의 신화를 써내려간 롤링 스톤즈의 역사가 시작되었죠. 그리고 브로드웨이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드디어 1961년 영화로 만들어져서 미국 전역은 물론 지구촌 곳곳에 배급되어 ‘아메리칸 드림’의 충격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듬해인 1962년부터였습니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이전의 뮤지컬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았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고전을 당시의 뉴욕으로 배경을 옮겨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도 전에 없던 일이었고 주로 노래와 연기로 이끌어 가던 “북 뮤지컬”의 전통을 벗어나 춤을 가장 먼저 앞세운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으로 생각했고 안무와 연출까지 도맡았던 제롬 로빈스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뿐만 아니라 “왕과 나”, “피터팬”, “지붕 위의 바이올린”과 같은 뮤지컬의 안무를 맡기도 했지만, 현대무용과 발레 안무가로도 그 못지않은 업적과 명성을 쌓은 인물입니다. 그 탁월한 능력으로 이미 1949년 미국 발레의 초석을 놓았던 조지 발란신이 그를 뉴욕시립발레단의 공동 예술감독으로 임명했을 정도였지요. 로빈스와 의기투합하여 대본을 맡았던 아서 로렌츠는 희곡과 뮤지컬 대본뿐만 아니라 연출자로 토니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히치콕의 영화 “터닝 포인트”의 시나리오를 써서 골든 글로브 상을 받았을 만큼 발군이었고 작사를 맡은 스티븐 손드하임은 당시는 무명이었지만 이후 그의 작업이 바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역사라고 할 만큼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참여한 주도적 인물들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또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은 작곡을 맡은 레너드 번스타인이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또 클래식 음악 작곡가로서 미국의 자존심을 대표하고 있는 그가 대중들을 위한 쇼비지니스의 세계에 뛰어든 셈이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작업에 참여한 인물들 모두가 당대의 최고들이었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제작자들이 선뜻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그 면면들이 너무나도 개성이 강했고 작품의 성격 또한 전에 없이 실험적이었기에 제작비 부담이 컸고 또 그만큼 위험도 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뮤지컬의 연극적인 요소가 강조되던 때에 춤을 앞세운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레너드 번스타인이 추구하는 클래식 음악이 뮤지컬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지요. 결국 투자자를 얻지 못한 채 작업에 들어가야 했고 때문에 리허설에 들어가기 두 달 전에 제작자가 그만두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이때 손드하임이 유능한 젊은 제작자 해롤드 프린스를 영입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막이 올라가자 이번에는 작품에 대한 서로 상반된 평가가 맞서면서 브로드웨이가 발칵 뒤집어집니다. 그러나 호평이든 혹평이든 이 작품이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시도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춤으로 시작하여 춤으로 끝나는 것부터도 그렇고 뮤지컬이라면 지금도 헤피엔딩이 당연한 것임에도 비극적인 결말을 시도한 것도 논란을 피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고전적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져다가 당시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민감한 갈등을 드러내고 비판했다는 것이 파격이고 충격이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손드하임은 거리의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를 그대로 가사에 사용함으로써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했고 번스타인의 음악이 그 가사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었지요. 단순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풍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현대음악 기법에 녹여낸 번스타인의 음악이야말로 이후로도 비교될 만한 작업이 없을 정도로 압권이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달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지고지순한 남녀의 사랑에 앞서 사회적 갈등을 부각시킨 작품입니다. 이민의 역사가 거듭되어 온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늘 되풀이되어온 일이지만 당시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이 빈민가를 형성하며 사회적인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줄리엣에 해당하는 마리아는 바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온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딸로 옷 가게 점원으로 일합니다. 반면 로미오에 해당하는 토니는 폴란드계 이민자의 아들로 리프와 함께 제트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서유럽 이주민들에 이어 미국으로 들어온 동유럽 이주민들이 이제 막 하층 계급을 형성하여 겨우 자리를 잡고 있을 무렵 푸에르토리코 이주민들이 밀려들어오면서 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게 된 것입니다.




폴란드계의 제트파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샤크파와 구역을 놓고 서로 대립합니다. 제트파의 두목 리프는 샤크파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지금은 무리에서 빠진 토니가 다시 합류하기를 바랍니다. 체육관 댄스파티에서 제트파와 샤크파가 만나 긴장감은 고조되는데 그곳에서 토니는 제트파의 두목 베르나르도의 여동생 마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사소한 갈등 끝에 제트파와 샤크파가 결투를 벌이기로 한 날 마리아의 간청으로 이들의 싸움을 말리러 온 토니는 베르나르도가 친구인 리프를 죽이자 순간 싸움에 휩쓸려 베르나르도를 찌르고 맙니다. 토니가 오빠를 죽였다는 말을 들은 마리아는 크게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지지만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고 함께 그곳을 떠나기로 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전하러 제트파에 간 아니타는 제트파 일당에게 능욕을 당하자 분노로 이성을 잃고 토니에게 샤크파의 치노가 마리아를 죽였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토니는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도 죽여달라며 치노를 찾는데 살아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서려는 순간 치노가 쏜 총에 맞아 마리아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둡니다.




영화로 이 뮤지컬을 본 사람들은 마리아 역을 맡은 나탈리 우드가 토니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토니와 마리아가 함께 부르는 사랑의 이중창 ‘투나잇 Tonight'과 마리아를 처음 본 순간 사랑을 느끼게 된 토니가 부르는 노래 ’마리아 Maria'도 너무나 아름답지요. 그리고 댄스파티에서 푸에토리코 처녀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과 허상을 비꼬는 듯 주고 받는 ‘아메리카 America'도 빼놓을 수 없는 명곡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분명하게 담고 있는 노래는 바로 토니와 마리아가 함께 부르는 ’섬웨어 Somewhere'일 것입니다.




There's a place for us

Somewhere a place for us

Peace and quiet and open air

Wait for us somewhere

There's a time for us

Someday a time for us

Time together with time spare

Time to learn, time to care

Someday!

Somewhere!

we'll find a new way of living

We'll find a way of forgiving

Somewhere...

There's a place for us

A time and place for us

Hold my hand and we're halfway there

Hold my hand I'll take you there

Somehow!

Someday!

Somewhere!


우리를 위한 곳

어딘가 우리를 위한 곳이 있을거야

평화롭고 고요하고 활짝 열린 그곳이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겠지

우리를 위한 시간

언젠가는 우리를 위한 시간이 있을거야

우리가 함께 지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아껴줄 수 있는 시간이

언젠가!

어딘가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용서하는 방법을 알게 될거야

어딘가에서는...

우리를 위한 곳

우리를 위한 시간

내 손을 잡으면 이미 그곳으로 가고 있을거야

내 손을 잡으면 내가 그곳으로 데려다 줄게

어떻게든!

언젠가는!

어딘가에는!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모두들 해묵은 마음의 찌꺼기는 다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넉넉한 마음으로 모두가 함께 껴안을 수 있는 그런 한 해이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어딘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마음에서 사랑과 평화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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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첼로의 역사를 새로 쓴 카잘스. 역사에서의 B.C의 의미는? 그럼 테너와 소프라노, 첼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B.C의 의미는?[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첼로의 역사를 새로 쓴 카잘스. 역사에서의 B.C의 의미는? 그럼 테너와 소프라노, 첼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B.C의 의미는?

Posted at 2016.01.20 10:0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역사에서 기원전을 뜻하는 B.C.는 예수 탄생 이전, 즉 Before Christ를 줄여서 만든 말이지요. 여기에 빗대서 테너들에게 B.C.는 Before Caruso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프라노들에게 있어서 B.C.라면 당연히 Before Callas라고 해야겠지요. 그만큼 엔리코 카루소와 마리아 칼라스는 독보적인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역사에서의 B.C는 예수 탄생 이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음악의 다른 분야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를 찾는다면 어떤 분야의 누구를 언급할 수 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파블로 카잘스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첼로에서 B.C.는 Before Casals인 셈이지요. 첼로의 역사는 카잘스 이전과 카잘스 이후가 있다고 할 만큼 그의 존재와 업적은 두드러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연주가 그만큼 뛰어나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첼로 연주자들의 레퍼토리 가운데 다른 어떤 작품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 세상에 알렸고 또 평생을 바쳐 이 곡의 해석과 연주방법을 연구하여 후대에 남겼다는 것이 더욱 크게 평가받은 결과일 것입니다.

 

 

첼로에서의 B.C는 파블로 카잘스 탄생 이전을 의미합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뿐만 아니라 바흐가 남긴 작품과 그 영향은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절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피아니스트들의 구약성서라 일컬어지고 있지요. 그러나 피아노의 경우 베토벤의 소나타 32곡을 신약성서라며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나란히 언급하고 있지만 첼리스트들에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함께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작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위대한 걸작은 바흐가 죽고 백년이 훨씬 넘는 동안 그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유럽의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겨우 열세 살의 어린 소년 카잘스의 눈에 띄게 된 것이지요. 그것도 우연히 말입니다. 그 해가 바로 1899년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첼로의 원년은 1899년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첼로의 역사는 1899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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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잘스는 연주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은 카잘스를 회상하며 “그의 단순함과 우아함, 고결함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파블로 카잘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엘 벤드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꽤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 지휘자였지만 살림은 늘 궁핍하였습니다. 그러나 11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음악교육에 소흘함이 없었고 그것이 훗날 카잘스에게 긍지이자 자랑으로 기억되어 늘 “나의 음악적 재능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노래와 건반악기를 배웠지만 바이올린과 첼로는 거의 스스로 터득하여 연주하였고 유랑악단과 어울려 엉터리 첼로를 곧잘 연주하는 아들에게 아버지 카를로스는 제대로 된 첼로를 사주었고 어머니는 그를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원에 입학시켜 정식으로 첼로를 배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지요.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날마다 카페 ‘토스트’에서 스스로 편곡한 곡들을 연주하였고 이를 지켜 본 작곡가 알베니스가 추천서를 써 주어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틈만 나면 들리곤 했던 헌책방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인쇄본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이후 연주자로서 그의 삶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왕실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카를로스 3세 훈장’을 받았고 유럽 각지는 물론 미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쳐 1904년 백악원 초청 연주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실내악에도 관심을 두어 1905년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1915년 드디어 첫 음반작업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1936년부터 3년여에 걸쳐 드디어 오랜 세월 연구와 연습을 거듭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첫 음반을 녹음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이어서 녹음한 베토벤 소나타 전곡과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그 해석에 있어 가장 권위있는 잣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음악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삶을 사는 가운데 1936년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과 1939년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은 너무나 큰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스페인 공화정을 지지했던 그는 1938년 10월 리체우 극장에서의 연주회를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스스로의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고향이 그리워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과 맞닿아 있는 프라드에서 살았고 1950년부터는 이곳에서 페스티발을 열어 세계적인 거장들과 명연주자들을 수없이 불러들였지만 프랑코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초청은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몬트세라트 수도원에 있는 카잘스의 동상

 

그 뿐만 아니라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에서도 연주회를 갖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코르토와도 절교를 했다가 1958년에야 다시 화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신념과 고집으로 말미암아 미국에서의 연주도 거부했지만 그가 호감을 가졌던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다시 한 번 백악관 연주회를 가졌고 당시의 실황을 담은 음반은 시대의 유물로 남았습니다. 특히 앙코르로 연주한 카탈루냐의 민요인 ‘새의 노래’는 동포와 인류의 자유를 염원한 카잘스의 상징으로 남아 지금도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많은 첼리스트들이 앞다투어 연주하고 있지요.

 

Folklore Catalan : Εl Cant dels Ocells - Pablo Casals

카잘스의 1950년 프라데 페스티벌 연주

 

카잘스는 죽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습했고 이것이 그에게는 날마다의 명상이자 기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처음에는 기술적으로 연주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도 하나 둘 극복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음악적인 해석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10월 22일 카잘스는 푸에르토 리코의 산 후안에서 수도자와도 같은 96년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토록 그가 기다렸던 프랑코 정권의 종말이 찾아왔고 1979년에는 비록 시신으로나마 그의 고향 카탈루냐의 엘 벤드렐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베를린 필 12 첼리스트들’은 연주여행을 다닐 때마다 틈을 내서 벼룩시장의 중고음반 가게를 들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은 오래된 무명 가수들의의 음반에서 좋은 곡을 찾으면 그것을 새롭게 편곡해서 연주회마다 들려준다고 하지요. 첼리스트들은 다 그런가봅니다. 첼리스트는 아니지만 저도 유럽의 대도시, 특히 파리를 방문할 때면 어김없이 벼룩시장을 찾습니다. 카잘스처럼 엄청난 보물을 찾는 요행을 바래서가 아니라 손 때 묻은 책 학 권, 빛 바랜 엽서 한 장을 버리지 않는 그들의 생각과 삶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딱히 벼룩시장을 찾지 않더라도 거리마다 사람마다 묵어서 은근한 멋을 풍기는 무엇인가를 걸치고 있어 흐뭇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2첼리스트(출처 : 다음 블로그)

 

 좋은 것은 당장은 드러나지 않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지요. 클래식 음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그렇고 카잘스의 연주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걸까요? 카잘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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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근데 마지막 동영상은 카잘스가 아니라 마이스키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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