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에 해당되는 글 77건

  1.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전설의 시대를 만든 거장의 신화. 에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 2017.09.20
  2.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일생을 바꾼 단 한 번의 인연, 소설가 최인호 2017.09.13
  3.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자화상 2017.08.20
  4.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작은 것 부터 실천하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리더쉽 2017.08.02
  5.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2) 2017.07.12
  6.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맛과 멋. 삶과 음악 속에 숨겨져 있는 편안하고 소박하며 친근한 그것. 2017.07.05
  7.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 2017.06.04
  8.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죽음에 앞서 깨달은 사랑의 참 뜻, 푸치니의 “투란도트” 2017.05.09
  9.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페라 “돈 카를로”와 영화 “사도세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까지 2017.05.07
  10.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집시 여인의 슬픈 이야기(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밥 딜런) 2017.04.21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전설의 시대를 만든 거장의 신화. 에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전설의 시대를 만든 거장의 신화. 에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

Posted at 2017.09.20 15:2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에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므라빈스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거장들 가운데 가장 높은 반열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삼가고 자중하여 내세우지 않고 드러나려 하지 않았던 은둔자이자 수도자였던 지휘자입니다. 그는 190364,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고 공부했으며 그곳 오케스트라인 레닌드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오늘날의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평생을 떠나자 않고 그곳에만 50년을 바쳐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를 만들었으며 1988119, 그곳에서 죽었고 또한 바로 그곳에 묻혔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도 그랬지만, 오늘날 너나 없이 세속적인 욕망을 쫓아 현실과 타협하여 일탈조차 마다하지 않는 세태를 마주할 때마다 누구보다 고귀했던 그의 존재가 더욱 그리워지고 그가 남긴 향기의 여운이 점점 더 짙어갑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를 잃었고 그가 누렸던 여유와 풍요 또한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로 말미암아 한 때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허드렛일을 해야 했고 먼저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들어가 체르노프에게 작곡을, 그리고 가우크에게 지휘를 배웠습니다. 그는 원래 작곡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창작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소비에트 공산정권 치하에서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에 지휘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악 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1923년부터 1931년까지 발레단에서 음악 코치로 일했습니다. 지휘자로는 1929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1931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이듬해부터 역시 레닌그라드에 있는 국립 크로프 오페라 발레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비에트 연방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주목을 받아 곧 바로 레닌그라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을 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취임 당시 수준 이하의 평가를 받았던 악단을 다듬고 또 단련하여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음악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늘 단원들의 한결같은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어떤 지휘자도 이루지 못한 므라빈스키만의 보람이자 자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의 관현악 앨범

출처 :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영국의 BBC 방송이 만든 므라빈스키의 다큐멘터리 영상에는 그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가 여럿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의 기일이면 생전에 그와 함께 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 서로의 추억을 떠올리며 업적을 기립니다. 그 가운데 은퇴한 한 여성 단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처음 오케스트라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저 남들보다 바이올린을 잘 켜는 연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므라빈스키와 함께 하는 시간을 지나면서 나는 진정한 음악가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단원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언젠가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연주하기로 했을 때, 거듭되는 연습과 리허설에 단원들은 지쳤지만 므라빈스키는 전혀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단원들의 악보를 집으로 가져가서 세세한 지시를 꼼꼼하게 적어서 다음날 다시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여러 번의 리허설을 거친 다음 마지막 리허설에 이르렀을 때 단원들 모두가 느끼기를 너무나도 완벽한 연주였기에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고 마치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음악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허설이 끝나자 므라빈스키는 그날 연주를 취소했고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그가 말하기를 이처럼 완벽한 연주는 다시 있을 수가 없으므로 리허설만큼 연주회가 잘 될 리가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출처 : http://music.kyobobook.co.kr/ht/record/detail/4543638700219

 

러시아의 역사를 통털어 최고의 지휘자인만큼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에 관한 한 그의 해석과 연주를 으뜸으로 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특별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 음악과 우정을 함께 나누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만큼은 이후로도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15곡의 교향곡 가운데 5, 6, 8, 9, 10, 12번의 여섯 곡을 초연하였고 그 밖의 많은 곡들이 므라빈스키의 지휘봉 아래 세상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그가 생전에 가장 많이 연주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이었고 그 다음으로 자주 연주한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가 심혈을 기울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이 스탈린의 눈에 거슬려 당국의 호된 비판을 받게 되자 모두가 그를 멀리했지만 므라빈스키만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초연을 성공으로 이끌어 위기에서 그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다시 한 번 그의 교향곡 8번으로 사면초가에 빠졌을 때 므라빈스키만이 홀로 그를 지지하며 나섰다고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갈수록 깊어졌지만 한 차례 위기를 겪으며 잠시 흔들리기도 합니다.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13번을 완성하여 초연을 부탁했지만 므라빈스키가 거절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멀어진 것입니다. 므라빈스키가 생각하기에 그 곡은 전과 달리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화해했지만 그만큼 소비에트 체제와 이념에 관한 한 므라빈스키의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이념은 악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연적인 확고함과 결단력을 제공한다." 소비에트 시절 체제의 핍박을 받았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 "수용소 군도"에 나오는 말입니다. 소비에트 당국이 그를 축출하고자 탄핵을 결의하는 문서에 동료 예술가들의 서명을 강요했을 때도 지휘자 므라빈스키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솔제니친이 저술을 통해 저질렀다는 반국가적, 반사회적, 반체제적 행위에 대해 므라빈스키는 그의 책은 소비에트 안에서 출판이 금지되었기에 읽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며 끝까지 거부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출처 : http://kathyhong.tistory.com/archive/201402

 

지휘자의 역사를 통털어 20세기 전반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의 시대였고 후반은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에 협력하였고 카라얀은 나치에 가담했습니다. 번스타인은 사회주의에 동조하였지만 문제가 되자 부인하며 애매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토스카니니만이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게 맞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치와 신념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만이 지배하고 결정해야 하는 오케스트라와 음악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므라빈스키는 평생을 소비에트 체제 속에서 살면서도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다만 50년을 한 오케스트라에 그의 모든 것을 바쳐 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지 않을 때 그는 늘 시골의 오두막에 머무르며 밤이면 책을 읽고 낮이면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자연을 바라보거나 그 속을 말없이 거닐었습니다. 그리고 꺾이지 않는 그의 뜻은 말 대신 음악에 담아 절절하게 쏟아냈습니다. 음악이 있었기에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신념이 있었기에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음악가이자 예술가였습니다. 무엇보다 참으로 아름다운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 그 사람다운 삶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려주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꿉니다.

 

 

https://youtu.be/mqZ3UfpO4tA

차이코프스키 - 교향곡 6번 / 므라빈스키 유튜브 동영상

 

00:10 - I. Adagio. Allegro non troppo

17:44 - II. Allegro con grazia

25:50 - III. Allegro molto vivace

34:10 - IV. Finale. Adagio lamentoso. An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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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 Evgeny Mravinsky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 /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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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일생을 바꾼 단 한 번의 인연, 소설가 최인호[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일생을 바꾼 단 한 번의 인연, 소설가 최인호

Posted at 2017.09.13 11:1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어느날 무심코 TV를 보고 있는데 소설가 김홍신이 나와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어느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면접 시험을 보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면접관이 입사 원서에 적힌 신상 기록에서 아버지가 김홍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짐짓 모르는 척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인지 물었다고 합니다. 뜻밖에도 아들은 최인호라고 대답을 했고 당황한 면접관은 그렇다면 김홍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반전을 시도했다고 합니다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아들이 대답하기를 "같이 살아보면 압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옆에 앉은 딸 아이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배시시 웃고 있었습니다그래도 설마 나는 아니겠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실없이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소설가 김홍신

출처 : 유튜브


그날 밤 안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문득 소설가 최인호가 생각났습니다. 몸담고 있는 학교의 최고경영자 과정을 맡고 있었을 때 강의를 부탁한 인연으로 딱 한 번 만나서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강의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대화중에 그가 던진 한 마디 충고 만은 뇌리에 박혀 절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늘 "지갑을 열고 역사책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시큰둥 했었습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역사책은 하도 읽어서 알만큼 알고 가진 것이 많지 않으니 지갑을 열어도 내놓을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내 속을 꿰뚫어보고 있었던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이미 읽은 역사책도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를 것이고 가진 돈이 많지 않아 크게 베풀지 못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밥 한 끼, 차 한 잔 사는 거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바로 이거다 싶었고 정말로 그래야지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실로 돌아와 오래 전 읽었던 역사책을 다시 꺼내들었더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전에 알았던 그 이야기가 전과는 전혀 다르게 읽혔습니다. 먼나라에서 까마득히 오래 전에 벌어졌던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내가 겪는 일이었고 내 바로 가까이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부터 하나 둘씩 불러내어 밥을 먹기 시작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끼니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일을 기쁨과 보람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언젠가 프로방스를 여행했을 때의 일입니다. 아를에서 보낸 마지막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흐가 즐겨 찾았다는 근처 카페로 가서 라따뚜이를 주문했습니다그러자 웨이터는 그 메뉴가 없다면서 아마도 근처의 다른 음식점들도 다 마찬가지일 거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그래서 그에게 내일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다며 있는 동안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다 맛보았는데 라따뚜이만 못먹고 간다면 얼마나 아쉽겠냐며 짐짓 간절한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난처해진 그는 가서 물어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사정을 전해 들은 주방장은 아쉬운 대로 주방에 있는 야채를 써서 만들어보겠노라 말했습니다그렇게 라따뚜이를 맛있게 먹고 계산서를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카페 주인이 나와서 메뉴에 없는 음식이라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뜻밖의 호의를 두번씩이나 그저 받을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 역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때 카페 한 쪽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검고 긴 생머리에 크고 까만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인 프로방스 여인이었습니다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과 마주앉은 그 여인은 아기 돌보듯 그를 대했고 그 모습이 너무 정겨워 카페 주인에게 혹시 아는 사람인지 물어보았습니다그의 말인 즉 그 두 사람은 근처에 사는 아버지와 딸인데 얼마 전까지 따로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그 부녀가 주문한 밥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그곳에서 받은 친절과 배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습니다물론 그 두 사람은 모르는 일이었고 문을 나서는 내게 카페 주인은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습니다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고 쏟아질 듯 알알이 넘쳐 가슴 속에 박혔습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 "저녁에"입니다. 언젠가 기특한 후배가 있어 저녁을 사주고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뿌듯해 하늘을 쳐다보니 나도 모르게 이 시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최인호는 부인과 연애하던 시절 명동의 수 많은 인파 속에서 서로를 찾을 때 이 시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감히 내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최인호와 나는 딱 한 번을 만났다. 그렇게 한 번을 만나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에 누군가의 일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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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자화상[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자화상

Posted at 2017.08.20 11:1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2015년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떠오릅니다. 우승 그 자체로도 놀라운 쾌거였지만 주인공 조성진에게 쏟아진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열광은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콩쿠르 실황을 담은 음반은 나오자마자 품절이 되었고 이후 예정된 조성진의 연주회 티켓 또한 예매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매진되었습니다.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eong-Jin_Cho_20161116_03.png


그런데 조성진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쇼팽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유독 조성진에게만 최저 점수를 준 필립 앙트르몽입니다. 물론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여론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노망 아니냐'는 핀잔은 점잖은 편이고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더러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파리 고등 음악원에서 조성진이 사사중인 스승이 앙트르몽의 숙적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었습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64LLbbY3m50


이제 여든이 넘어 무대에서 만날 일은 없지만 필립 앙트르몽은 한 때 프랑스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1975년에는 내한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지휘자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 마르그리트 롱에게 배웠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서는 라흐마니노프의 친구였던 조르지 샤브샤바지에게 사사하며 러시아 음악에도 정통하게 되었습니다.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지휘자로도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았으며 지금도 프랑스 음악계의 원로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 해석과 연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드뷔시의 "영상"과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를 녹음한 음반은 지금도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고 있고 빈 챔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녹음한 차이코프스키의 "피렌체의 추억""현을 위한 세레나데" 역시 명연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hottracks.co.kr/ht/record/detail/0886975534722


이렇게 능력있고 유명한 사람의 판단이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 전문가로서 이름을 걸고 내놓는 평가와 점수라면 일단 존중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미흡하여 납득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다면 따로 더 묻거나 따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텐데 그것이 바로 언론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언론의 인터뷰나 심층 취재도 없었고 이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토론의 장도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몇몇 네티즌들이 이런 세태를 한탄하며 예술의 기량을 가늠하는 콩쿠르에 절대적인 객관성과 잣대가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에도 이런 저런 콩쿠르에서 유사한 일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에만 유독 내 편이라는 입장에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blog.koreadaily.com/view/myhome.html?fod_style=B&med_usrid=kws579&cid=909434&fod_no=4


쇼팽 콩쿠르만 하더라도 지난 1980년 이보 포글레비치가 결선에 오르지 못하자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이에 항의하며 중도에 심사위원직을 사퇴하는 일이 있었으며 2005년 쇼팽 콩쿠르에서 형 동민과 함께 3위에 입상하여 주목을 받았던 임동혁은 바로 전에 있었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3위에 오르자 심사 결과에 불복하여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 피아노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전신이었던 외젠 이자이 콩쿠르에 참가하여 겨우 7위에 입상했으나 당시 그 과정을 지켜보며 미켈란젤리에게 열광했던 청중들과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심사 결과에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전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열린 첫 해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한 사람에게만 최고점을 주고 나머지 참가자들 모두에게 최저점을 주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조성진의 쾌거로 함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필립 앙트르몽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성진이라는 이름 앞에 늘 따라다니는 쇼팽 콩쿠르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쇼팽 콩쿠르를 수식한 "세계 3대 피아노 콩쿠르"라는 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조성진을 알게 되고 찾게 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우승한 쇼팽 콩쿠르의 높은 위상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피아니스트로는 처음으로 우승했다는 사실이 더욱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쇼팽 콩쿠르는 세계 무대를 꿈꾸는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음에 품을 만큼 권위있는 콩쿠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콩쿠르의 역대 우승자와 입상자들의 활약과 명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은 소위 3대 콩쿠르라며 함께 언급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도 마찬가지지만 쇼팽 콩쿠르와는 달리 이들 콩쿠르는 피아노 외의 다른 부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87%BC%ED%8C%BD_%EA%B5%AD%EC%A0%9C_%ED%94%BC%EC%95%84%EB%85%B8_%EC%BD%A9%EC%BF%A0%EB%A5%B4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앞서 언급한 세 콩쿠르 말고 다른 콩쿠르들 가운데 이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피아노 콩쿠르는 없는지, 그래서 4대도 아니고 꼭 3대라고 해야 하는 까닭이 있는지, 그리고 이렇게 꼭 3대니 10대니를 따져 나머지와 구분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기준은 무엇인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우리나라에서 유독 이런 식의 구분과 표현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 때는 "세계 3대 교향악단"이란 말이 자주 입에 오르내렸고 오래 전에는 "3대 교향곡"이니 "3대 협주곡"이란 말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에 이렇듯 쉽게 나누어서 분명하게 구분지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모두가 동의하거나 누구나 찬성할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될까요? 호로비츠를 흠모하던 한 피아니스트가 영광스럽게도 그의 말년에 집에 초대되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누군가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자 호로비츠는 '누군데 저 곡을 저렇게 엉망으로 치는지 모르겠다'며 얼굴을 찌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피아노 소리가 그치자 방송 진행자가 말하길 "지금 들으신 음악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연주였습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TWe-DnTMuhk


사람들의 눈과 귀가 온통 조성진에게 가 있는 동안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조용히 우리나라를 다녀갔습니다. 지금의 조성진처럼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리즈 콩쿠르 최연소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었고 그 사이에 꾸준한 노력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더니 이번에 도이치 캄머 필과의 협연으로 들려준 슈만의 협주곡에서는 드디어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만의 당당하고 확고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벌써 스스로의 길을 찾아 흔들리지 않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 제 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 갈라 콘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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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작은 것 부터 실천하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리더쉽[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작은 것 부터 실천하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리더쉽

Posted at 2017.08.02 08:02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으로 있을 때 오페라 마술피리의 출연자 모두를 오디션으로 뽑자고 했습니다. 먼저 공연기획팀 직원들의 추천과 회의를 거쳐 지휘자와 연출자를 선정하고 그 두 사람과 함께 오디션 심사에 들어갔지만 감독인 저는 그저 지켜볼 뿐 연출자와 지휘자의 생각이 다를 때가 아니면 절대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견해가 엇갈리는 경우가 없었고 감독이 개입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최선이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은 듯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것은 그때도 다들 말하길 전에는 없던 일이라 했고 지금껏 지켜보니 이후로도 없는 일인 듯 싶어서입니다. 이렇게 쉬운 일을 자꾸만 어렵게 만듭니다. 맡겨두면 될 일을 나서서 그르칩니다.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출처 : http://www.loveandong.kr/guide/cul_02/play_view.php?lcode=4&idx=4532


학교 산학협력단 단장으로 있을 때 직원을 새로 뽑을 일이 있었습니다. 면접심사를 준비하면서 면접 받는 분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각자의 심사시간을 따로 정해 알리라고 했고 봉투에 소정의 교통비를 챙겨 지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심사가 끝나면 곧바로 통보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나고 얼마지 않아 면접심사에 지원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한 응모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혹시나 절차나 결과에 대한 유감이나 항의인가 싶어 순간 긴장했으나 뜻밖에도 감사의 인사를 받고 의아했습니다. 그는 비록 떨어졌지만 여러모로 존중하고 배려해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채용공고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봤지만 교통비를 챙겨주는 곳은 여기 말고 단 한 곳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외롭고 답답하고 두렵기만 했습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의정부 국제음악극축제의 예술감독으로 있을 때 사무국 직원들에게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습니다. 축제를 찾는 관객들도 중요하고 의정부 시민들도 중요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함께 일하는 우리 직원들이 가장 중요하기에 무엇보다 먼저 우리 모두가 신나서 함께 즐겁게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직원들 모두가 서로를 아끼고 도우며 열심히 일할 것이니 축제가 잘못될 까닭이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울러 직원들에게 말하길 그래도 혹시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책임질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전적으로 감독이 감당할 일이고 그래서 감독을 두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감독을 그만둔 지금도 축제보다는 함께 일했던 직원들의 근황이 더 궁금하고 그들이 다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독이고 팀원이기 전에 이렇듯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사람 사는 세상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고 그걸 앞장 서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또한 책임지고 이끄는 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몸 담고 있는 학교의 예술경영전공을 전담하는 조교를 처음 뽑았을 때입니다. 그 조교를 불러 미리 당부했습니다. 더 좋은 자리가 있거나 혹시 사정이 있어 그만두게 되면 후임자는 반드시 전임자가 구해야 할 것이며 인수인계 또한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니 주임교수는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인수인계를 할 때 후임자에게 또한 나중에 사임하게 되면 전임자가 했던 그대로 따라 해야 함을 주지시켜 이를 원칙으로 삼아 전통으로 이어가자고 했습니다. 그 이후 몇 번이나 조교가 바뀌는 동안 한번도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 일을 가장 잘 한다 싶은 적임자가 그 자리에 있었고 덕분에 학과 운영이 너무나 순조로웠습니다. 무슨 일이든 지금 하고 있는 사람이 그 일을 가장 잘고 있기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일에 관해 확고한 권한을 주고 그에 따른 책임을 주지시켜 스스로 알아서 해나가게 한다면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가져오게 하고 일감을 나눠주거나 지시를 하지 말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대한 동경을 키워줘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배가 만들어지냐고요? 까짓 것 늦어지면 어떻고 못 만들면 또 대수인가요! 그렇게 서로 마음이 맞아 함께 꿈을 키우고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한다면 그게 기쁨이고 보람이지요! 쯧쯧...철이 없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요? 그런 물정이라면 모르고 살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전엔 한 때 그런 줄만 알고 그리 살기도 했지만 이제사 그게 아닌 줄 알았습니다. 진작에 알았을 걸 그랬냐고요?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렇게 죽는 날까지 철들지 않고 살렵니다. 생텍쥐베리는 "어린 왕자"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잘 안보인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는 말도 하죠. 늘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제일 소중한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그 마음도 얻지 못하는 겁니다. 마음을 줘야 얻습니다.

 

출처 : 아이클릭아트  

 

다그쳐서 되는 일보다 부추겨서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스스로도 아는 잘못은 나무랄 일이 아니죠. 때로는 모르는 척 덮어주고 찾아서 고치도록 기다리는 게 낫습니다. 재촉하면 조바심이 나고 질책하면 의욕마저 잃어 하던 일도 그르치기 마련입니다. 나무라기보다 추켜세우고 말을 앞세우기 전에 들어줘야 합니다. 그래야지 마음먹어도 잘 안되는 것은 참지를 못하고 믿지를 못해서입니다. 믿을 만하니 믿고 참을 만해서 참는 게 아니라 믿을 밖에 다른 도리가 없고 참는 것 보다 더 나은 수가 없어서입니다. 참아주니 고맙고 믿어주니 더 힘을 내는 겁니다. 그랬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럴 때까지 또 그래야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마땅히 언제나 어디서나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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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사랑, 운명, 인생 그리고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Posted at 2017.07.12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BBC 지식 채널의 "오지의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에 소개된 한 인도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때 그는 명문가의 엘리트였습니다. 아버지는 옥스포드를 나와서 주지사를 지냈고 그 또한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죄로 군복을 벗어야 했고 계급이 다른 농민의 딸과 사랑에 빠져 집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정착하여 집을 짓고 땅을 일구며 가축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남매를 낳아 사랑을 주고 자유를 주었습니다. 학교 가지 않겠다는 딸을 말리지 않았고 멀리 호주까지 가서 살겠다는 아들도 축복했습니다. 그렇게 모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그들은 틈만 나면 험한 길을 며칠이나 걸어서 부모를 찾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아버지가 부르시면 곁에 와서 살겠다고 합니다. 저녁상을 물리면 가족이 모두 둘러앉아 아버지의 하모니커 연주를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이 나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옷을 벗고 바위에 앉아 햇살을 받고 바람을 맞으며 어느덧 자연과 하나되는 느낌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가끔씩은 산 아래 마을에다 맡겨놓은 낡은 오토바이를 정성껏 닦고 손질해서 달리는 걸 즐깁니다. 다른 이들의 수고를 끼치지 않으려고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놓고 틈만 나면 들여다 보는 것도 또 다른 그의 낙입니다. 길게 눕지 않고 앉을 수 있도록 좁고 깊게 판 무덤에 들어가서는 그 아래 아름다운 자연과 자신이 일군 삶의 터전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 하나하나에 마음을 뺏긴 진행자가 끝으로 혹시나 살면서 후회는 없는지를 조심스레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딱 한가지 회한이라면 자신이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서 그의 삶이 깃든 이곳의 상공을 누비며 그 아래를 한 눈에 내려다보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몸담고 있는 학교에 몸이 불편한 청소부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몹시 절면서도 늘 바닥을 쓸고 휴지를 줍느라 잠시도 쉬지 않았고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피며 더러운 곳만 찾아다녔습니다. 무뚝뚝한 표정과 불편한 거동으로 어디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나타나는 그분을 다들 조금은 경계하며 어색하게 대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남다른 생각으로 이분을 지켜보았고 감사한 마음을 전달할 무언가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리를 끄느라 한쪽 신발 바닥이 먼저 닳아 망가진다는 걸 알고는 따로 밑창을 덧댄 운동화를 선물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학생을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영재로 입학한 발레전공 신입생인데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토록 따뜻한 시선과 속깊은 생각이라니! 정말이지 꼭 만나고 싶었는데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이제는 다리 저는 청소부 아저씨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바르고 어질며 따뜻한 사람들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아를에서 시내버스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버스에 오르더니 큰 가방을 열어 한참이나 뒤졌지만 차삯으로 쓸 동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버스 기사는 그냥 타도 된다는 손짓을 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러자 그 기사는 할머니 곁으로 다가와서 동전 찾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러기를 또 얼마가 지난 후 결국은 버스 기사가 먼저 동전을 찾아 머리 위로 흔들었고 그제서야 할머니 뒤로 줄을 서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성을 질렀습니다.

아를에서의 마지막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흐가 즐겨 찾았다는 근처 카페로 가서 라따뚜이를 주문했습니다. 그러자 웨이터는 그 메뉴가 없다면서 아마도 근처의 다른 음식점들도 다 마찬가지일 거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내일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다며 있는 동안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다 맛보았는데 라따뚜이만 못먹고 간다면 얼마나 아쉽겠냐며 짐짓 간절한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난처해진 그는 가서 물어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사정을 전해 들은 주방장은 아쉬운 대로 주방에 있는 야채를 써서 만들어보겠노라 말했습니다. 그렇게 라따뚜이를 맛있게 먹고 계산서를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카페 주인이 나와서 메뉴에 없는 음식이라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의 호의를 두번씩이나 그저 받을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 역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요리 "라따뚜이"

 

그때 카페 한 쪽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검고 긴 생머리에 크고 까만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인 프로방스 여인이었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과 마주앉은 그 여인은 아기 돌보듯 그를 대했고 그 모습이 너무 정겨워 카페 주인에게 혹시 아는 사람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말인 즉 그 두 사람은 근처에 사는 아버지와 딸인데 얼마 전까지 따로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그 부녀가 주문한 밥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그곳에서 받은 친절과 배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모르는 일이었고 문을 나서는 내게 카페 주인은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고 쏟아질 듯 알알이 넘쳐 가슴 속에 박혔습니다.

 

 



영화 "엘리노어 릭비"를 봤습니다 비틀즈 노래 제목과 영화 제목이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입니다 ", 외로운 사람들을 보아요. 외로운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외로운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일까요?" 비틀즈의 앨범 "리볼버"에 수록된 "일리노어 릭비"의 후렴구입니다. 이처럼 심각한 질문에 같은 앨범에 수록된 "옐로우 서브머린"은 아이처럼 해맑은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 노란 잠수함에서 살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우린 너나없이 한 배에 타고 망망대해를 나선겁니다. 그렇게 정처없이 흘러가고 있는겁니다. 영화에서 두 남녀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함께 있지 못합니다. 처음엔 여자가 걷는 길을 남자가 멀리서 뒤따르지만 나중엔 앞서 걷는 남자의 뒤를 여자가 떨어져 걷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하고 있지만 무작정 따라가는겁니다. 어디라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라서 중요합니다. 나란히 서서 손을 잡거나 어깨를 기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한 배를 탔다는 게 사랑이고 운명이고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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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강소나무
    홍교수님 글을 읽으면 자주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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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맛과 멋. 삶과 음악 속에 숨겨져 있는 편안하고 소박하며 친근한 그것.[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맛과 멋. 삶과 음악 속에 숨겨져 있는 편안하고 소박하며 친근한 그것.

Posted at 2017.07.05 16:34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사람의 덕은 조화와 균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여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지도 않아 흔들림이 없이 늘 한결같음이 사람의 덕입니다. 덕이 있는 이들은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려도 솔깃해서 휩쓸리는 법이 없지만 덕이 없는 이들은 서로 뜻이 같아 함께 하면서도 늘 뽐내거나 시기하여 다투기 마련입니다.

 

조화와 균형, 즉 중용을 얻으려면 누구라도 가여워서 어여삐 여겨야 하며 날마다 돌아보며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낮추어 삼가할 따름이고 늘 마음을 가다듬어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음악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화와 균형이 음악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입니다.

 

출처 : http://blogs.discovermagazine.com/crux/2016/09/26/the-arrow-of-time-its-all-in-our-heads/#.WVyR6YTyiUl


세월이 흘러도 그 빛을 잃지 않는 클래식 음악의 묘미는 오래 묵은 장맛과 같아서 단 맛과 쓴 맛, 신 맛과 짠 맛이 치우침이 없이 골고루 어우러져 단 듯 달지 않고 쓴 듯 쓰지 않으며 신 듯 시지 않을 뿐더러 짠 듯 짜지 않아 담백하고 은근하여 뒷 맛이 오래 남습니다. 덕이 있는 이들이 서로 그러하듯 좋은 음악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또한 전혀 다르지만 서로 잘 어울려 하나인 듯 여럿인가 하면 어지럽게 흩어졌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하나가 됩니다. 덕이 쌓여 한결같은 이들이 풍기는 멋은 소박한 듯 단순하여 편안하며 친근한 것이고 잘 익은 장맛과 같은 클래식 음악의 감칠 맛은 싱거운 듯 담백하여 은근하며 물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처 : https://wallpapersafari.com/classical-music-wallpaper/


맛을 아는 이가 멋있습니다.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제대로 아는 이가 참 멋쟁이입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가릴 줄 안다는 말이고 가린다고 함은 티끌만한 다름도 놓치지 않고 가볍게 여기지 않음입니다. 하여 스스로는 그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를 맛으로 느끼며 간직하고 음미하지만 그것을 애써 드러내어 따지려 들지는 않습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그 맛의 좋고 나쁨을 가려서 높고 낮음을 매기는 것이 아닙니다. 깔끔한 맛을 즐기다가 더러는 텁텁한 맛을 찾기도 하고 톡 쏘고 사라지는 맛을 봤으면 밋밋하지만 그윽하게 남는 맛에 끌리기도 합니다. 감칠 맛만 맛이 아니라 허튼 맛도 맛이고 곰삭은 맛이 있으면 떫은 맛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만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 아니라 이건 이래서 이렇고 저건 저래서 저러니 이건 이럴 때 이렇게 써야 하고 저건 저럴 때 저렇게 써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서 가릴 따름입니다.

 

맛을 가려 멋을 아는 사람은 작고 흔한 것들도 허투루 여기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압니다. 그 무엇이나 누구라도 나름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음을 알기에 모두가 함께 어울려 더불어 살고자 합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leepansoo/8626129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오되 바람이 지나가면 대숲은 그 소리를 머금지 아니하고 차가운 연못 위로 기러기 날아가되 기러기 지나가면 연못은 그 그림자를 붙들지 않는다. 이처럼 군자는 일이 있으면 마음이 일고 일이 끝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운다." 채근담에 있는 말입니다 비워야 채우고 버려야 담을 수 있습니다 죽지 않고선 다시 태어날 수 없지요 날마다 씻어서 날마다 거듭나야 합니다.

 

옛 말씀에 이르기를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늘 가락을 품고 있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거늘 오늘도 어김없이 가벼운 재주를 부려서 얕은 지식을 팔고 있습니다. 날마다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하거늘 늘 눈앞의 삶에 무너지고 맙니다. 군자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만 아무에게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인은 서로 같은 이들끼리 모여서도 함께 어울리지 못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쫓아 작은 것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끝내 서로 다투기 마련입니다.

 

출처 : http://www.bbc.com/earth/story/20160616-the-moon-that-has-been-lurking-around-earth-for-a-century


내가 홀로 똑바로 서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존중합니다. 이태백이 이르기를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거닐고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뭇가지를 흔든다."고 했습니다. 달이 기울면 다시 차고 비가 그치면 해가 뜨기 마련입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덧 술 익는 마을에 닿을 겁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풍류가 무엇입니까? 뭔가에 마음을 빼앗겨 넋을 놓을 만큼 아찔하나 그저 곁에 둘 뿐이지 결코 취하려 들지 않고 늘 아끼며 보살피는 것입니다. 하여 애틋한 마음은 날로 더하나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아 넘치거나 소홀함이 없어야 하고 단지 속으로 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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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

Posted at 2017.06.04 19:0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음악사를 통 털어 가장 위대한 업적을 쌓은 세 사람의 독일 출신 작곡가라면 아무래도 바흐, 베토벤, 브람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사람 이름의 성이 모두 알파벳 B로 시작하는 까닭에 '3B'라 부르기도 합니다. 최초의 전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우가 처음 이 말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독일 출신의 작곡가라는 것 말고도 참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놀라운 능력과 업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늠하는 잣대로 삼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먼저 그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 일찍 독립해서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갔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 음악가,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어떤 난관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집념, 근면과 성실로 불멸의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genie.co.kr/magazine/subMain?ctid=8&mgz_seq=3522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바흐는 어려서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큰 형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그러나 빠듯한 살림에 조카들이 늘어나자 따로 나가 살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생계형 음악가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찍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해서 열 세 자녀를 낳았고 부인을 사별한 후 재혼한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를 두었습니다. 무려 스물이나 되는 자녀들을 누구보다 잘 양육하고 교육하였기에 장남 빌헬름 프레데만과 차남 카를 필립 엠마누엘, 그리고 막내인 요한 크리스찬이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음악사에 길이 그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대학도시 라이프치히에 정착하게 된 것도 성장한 자녀들의 교육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습니다.

 

이미지출처 : http://www.christianitytoday.com/history/people/musiciansartistsandwriters/johann-sebastian-bach.html

 

베토벤 역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처음 음악가의 길을 개척하여 크게 성공하였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무능하고 심약했던 탓에 알콜 중독자로 살면서 가족들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괴롭히며 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베토벤은 형제들을 감싸고 돌봤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는 그 자신은 물론 두 동생까지 돌봐야했고 죽는 날까지 그 책임을 다하느라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말년에는 심신이 다 고갈되어 도저히 하루도 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도 형제들을 통 털어 유일한 혈육으로 남은 철부지 조카 카를의 앞날을 걱정하고 준비하느라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바쳤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지나치리만큼 절약했지만 그렇게 모은 돈은 고스란히 철부지 조카에게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lifesitenews.com/opinion/the-problem-with-the-beethoven-argument

 

브람스의 아버지 또한 음악가였습니다. 콘트라베이스와 호른을 연주했으며 어린 브람스에게 음악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 대신 14살부터 함부르크 항만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렸으며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의 반주자로 발탁되었고 이후에는 당대를 풍미했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반주자로 음악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사귄 요아힘과 평생 우정을 나누었고 슈만에게 브람스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요아힘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와 동생들이 늘었지만 가족을 돌보는 브람스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계모와 이복동생들까지 보살폈습니다. 무작정 믿고 전 재산을 맡긴 출판업자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해도 원망하는 법이 없었고 스스로는 검소하게 살면서 그렇게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여유까지도 늘 누군가에게 베풀었습니다. 슈만이 그에게 빛을 주었듯이 그 또한 드보르작을 비롯한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존경했던 스승의 부인이자 마음속으로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던 클라라와 그 가족들을 죽을 때까지 돌보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thefamouspeople.com/profiles/johannes-brahms-395.php

 

후대에 귀감이 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이들 세 작곡가 역시 모두 고귀하고 숭고한 가치와 신념을 가졌고 음악으로 그것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에서 진정 놀라운 것은 그들의 두 눈은 언제까지나 저 높은 곳의 별을 바라보며 두 손을 뻗어 끝내 닿으려 했으면서도 두 발은 늘 꿋꿋하게 땅을 딛고 서서 그들을 향해 몰아치는 세찬 바람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맞으며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라면 곧 몽상가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는 것이 예술이며 이상으로 현실을 이끄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 믿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라고 생각하여 현실을 파고들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깨닫도록 하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살다 보면 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겪습니다. 현실은 이상을 용납하지 않고 이상은 현실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세 작곡가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상반된 두 세상을 다 아우르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현실에서 이상을 찾았고 이상으로 현실을 구했습니다. 이상이 있었기에 현실을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이 거칠수록 이상은 더 높아만 갔습니다. 남다른 재능이 축복이자 저주인 것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 또한 장벽이면서 또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느라 단련된 힘으로 누구보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흐와 베토벤, 브람스는 남다른 재능을 책임이라 생각하여 세상을 향한 축복으로 만들었고 그들에게 닥친 현실 또한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여 위대한 선물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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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죽음에 앞서 깨달은 사랑의 참 뜻, 푸치니의 “투란도트”[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죽음에 앞서 깨달은 사랑의 참 뜻, 푸치니의 “투란도트”

Posted at 2017.05.09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오늘날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아마도 1800년대 이후 백여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오페라일 것입니다. 롯시니에서 시작된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르네상스는 벨리니와 도니제티를 거쳐 베르디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렀고 푸치니가 그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그런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가 "투란도트"였고 이 작품을 끝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는 다시 긴 겨울잠에 들어가 지금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이전에 작곡한 오페라들은 다 버려도 좋다'고 했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고 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그 나머지 작업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했습니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에 감상적이고 진부한 음악이라는 전문가들의 비난을 의식했던지 현실에서 동떨어진 옛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는가 하면 공이나 실로폰과 같은 이국적인 악기와 불협화음에 원시적인 리듬까지 과감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을 앞세웠던 전작들과는 달리 남자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Music&document_srl=3396918&search_target=tag&search_keyword=%EB%A9%94%ED%8A%B8%EC%98%A4%ED%8E%98%EB%9D%BC

 

 

중국의 아름다운 공주 투란도트는 할머니가 적군에게 유린당한 과거의 악몽을 떨치지 못해 남성을 혐오하고 결혼을 기피합니다. 그럼에도 구혼자들이 줄을 잇자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서 그 답을 맞추면 결혼을 하고 아니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조건을 내걸었고, 많은 이들이 도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여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때 나라를 잃고 떠돌던 타타르의 왕자 티무르가 나타나 공주의 수수께끼를 풀었지만 얼음같은 공주의 마음은 왕자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왕자는 다음날까지 공주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면 목숨을 내놓고 아니면 결혼해야 한다는 제안을 합니다. 궁지에 몰린 공주는 수소문 끝에 왕자의 시녀인 류를 잡아들여 모진 문초로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려 하지만 왕자를 몰래 짝사랑했던 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왕자를 지킵니다. 왕자의 용기와 류의 사랑에 감복한 공주는 결국 마음을 열어 왕자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출처 : https://kr.pinterest.com/pin/407364728772437860/

 

 

이 대강의 줄거리는 중동에서 전해오는 "투란도흐트 Turandokht"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루이 14세 때의 작가 들라크루아가 페르시아의 옛 이야기들을 모아서 펴낸 "천일일화"에 수록한 것을 베네치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가 희곡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가 다시 각색한 것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푸치니의 손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원래의 이야기는 왕자가 수수께끼를 풀면 바로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었으나 푸치니의 고집으로 하룻밤의 시간이 더해지면서 거기에 류의 희생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밋밋하고 뻔한 줄거리를 보완하는 한편, 전작들에서 줄곧 이어져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푸치니 오페라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토스카""라보엠", "나비부인"과 같은 푸치니의 대표작들은 한결같이 사랑에 모든 것을 걸지만 끝내 목숨을 잃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푸치니 자신의 여성편력 때문인지 오페라 역사를 통 털어 푸치니만큼 다양한 성격의 여성들을 작품 속에 다루면서 그만큼 감성적으로 또 섬세하게 그 심리를 잘 드러내어 전달한 이는 따로 없었습니다. 작품을 쓸 때마다 푸치니는 늘 누군가와 열애중이어서 그 상대의 성격이 작품 속 여주인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투란도트"의 초연을 지켜 본 청중들이라면 누구나 가엾은 류의 모습에서 바로 일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푸치니 스캔들의 불쌍한 희생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는 하녀 도리아 만프레디와 남편 사이의 불륜을 의심하여 못견딘 나머지 도리아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집에서 내쫓았는가 하면 교회에까지 고발하고 망신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따돌림을 견디다 못한 도리아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가족들의 요청으로 부검을 한 결과 도리아가 처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난의 화살은 엘비라에게 쏟아졌습니다. 엘비라는 무고죄로 고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푸치니가 유족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하여 처벌만은 면하게 됩니다. 이 일이 있고 얼마지 않아 "투란도트"를 보게 된 관객들이 왕자의 시녀 류에게서 푸치니의 하녀 도리아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인물 사이에는 너무나 다른 면면이 있어 그후로도 그 부분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아와 푸치니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푸치니가 과연 그의 작품 속에 구태여 연인이 아닌 다른 인물을 투영하려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고 투영한 게 사실이라면 그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죄책감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고 도리아의 짝사랑, 혹은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인 사랑을 까닭으로 짐작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2008년 이탈리아의 파울로 벤베누토 감독이 영화 "푸치니의 여인"을 발표하면서 세상은 다시 한번 도리이의 비극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 동안 감춰졌던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풀리지 않았던 의혹도 말끔하게 해소되었습니다. 벤베누토의 말에 따르면 영화 스탭 중의 한 사람이 푸치니가 살던 토레 델 라고의 집 근처의 식당에 들렀다가 푸치니의 사생아라는 사람이 그 식당에 자주 들렀다는 말을 들었고 결국 그의 자취를 추적하다 그의 딸, 즉 푸치니의 손녀인 나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디아로부터 건네받은 40여통의 편지는 모두 푸치니가 나디아의 할머니 줄리아 만프레디에게 보낸 편지였고 그 편지를 몰래 전한 사람이 바로 줄리아의 사촌동생이자 푸치니의 하녀였던 도리아였던 것입니다. 줄리아는 푸치니가 살던 집과 호수를 사이에 두고 멀리 보이는 선술집을 혼자 꾸려갈 만큼 억척스러우면서도 늘 밝고 푸근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줄리아와 사랑에 빠졌을 때 푸치니는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를 작곡하고 있었고 오페라에서 선술집을 운영하는 씩씩한 여주인공 미니는 당연히 줄리아를 모델로 삼아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남몰래 편지 심부름을 하던 도리아는 그들 사이의 비밀을 혼자 가슴 속에 묻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푸치니는 이 착하고 가엾은 하녀의 어이없는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그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고 어떻게든 그 넋을 위로하고자 마지막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세웠던 것입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푸치니의 운명 또한 여기까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왕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류가 목숨을 끊는 장면까지 작곡을 한 다음 아들과 함께 벨기에까지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후두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불과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대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프랑코 알파노에게 마무리 작업을 맡겨 예정보다 1년 늦게 초연을 했지만 그 첫 공연에서 토스카니니는 류가 죽는 장면을 끝으로 음악을 멈추고는 객석을 향해 "친애하는 푸치니 선생은 여기까지 쓰시고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오페라에서 정작 푸치니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왕자와 공주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혼자만의 쓸쓸한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저 없이 기꺼이 바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참 사랑의 희생과 헌신이었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그토록 많은 사랑을 했으면서도 이처럼 고귀한 사랑에는 결코 단 한번도 이르지 못했기에 더더욱 큰 아쉬움을 이렇게라도 토로하려 했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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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페라 “돈 카를로”와 영화 “사도세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까지[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페라 “돈 카를로”와 영화 “사도세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까지

Posted at 2017.05.07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출처 : 나무위키


2015년 개봉한 영화들 가운데 "사도세자"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사도세자라면 그 영화를 보지 못했어도 그 줄거리는 대충 짐작할 만큼 우리에겐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유럽의 역사에서도 그와 비슷한 인물이 있어 그들 또한 우리처럼 비운의 왕세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초 무적 함대의 신화를 만들어 스페인의 전성 시대를 열었던 펠리페 2세의 아들 카를로스 황태자가 사도세자와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그 역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처럼 카를로스 왕자는 성안에 감금되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의 기막힌 사연이 소설로, 드라마로, 또 영화로 숱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카를로스 왕자의 안타까운 이야기 역시 여러 장르의 예술이 거듭 다루었던 주제였고 그 가운데는 오페라도 빠지지 않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가 바로 비운의 왕자 카를로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독일의 문호 프리드리히 쉴러가 쓴 희곡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를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입니다. 베르디를 좀 안다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남긴 오페라들 가운데 "돈 카를로"를 최고의 역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고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출처 : 오페라 돈 카를로스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들 중에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많은데 특히 아버지와 딸, 혹은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리골레토"의 주인공 리골레토는 애지중지 홀로 키운 외동딸 질다를 끝내 잃고 맙니다. "아이다"에서는 이집트 파라오와 그의 딸 암네리스, 에디오피아의 왕 아모나스로와 그의 딸 아이다가 서로 다른 부녀의 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제르몽은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여 알프레도와 비올레타 사이를 갈라놓고 맙니다. 이처럼 베르디 오페라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유독 많은 것은 아무래도 그 자신이 결혼하고 얼마지 않아 어린 아들과 딸을 차례로 잃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견뎌야 했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부모의 사랑은 어딘가 모르게 죄다 일그러져 있습니다. 리골레토는 질다를 가두다시피 숨겨서 키웠지만 결국은 만토바 공작에게 순결을 짓밟히자 복수에 눈이 멀어 자신의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하면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는 딸로 하여금 연인을 속여 적군의 비밀을 알아내도록 윽박지르는 것조차 서슴치 않습니다. 비올레타를 설득해서 알프레도를 떠나게 만든 제르몽 역시 겉으론 아들의 장래를 위한다지만 사실은 자신과 집안의 체면을 지키려는 생각이 앞섰던 것입니다.

 

출처 : 유튜브

오페라 "돈 카를로"는 베르디가 줄곧 다루었던 빗나가고 비뚤어진 부정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요즈음 한창 우리 사회의 문제로 떠오른 막장 드라마의 원조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스페인 왕자 카를로(카를로스)는 아버지 펠리페 왕이 배필로 정해준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타(엘리자베트)를 퐁텐블로 숲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두번째 왕비를 잃은 펠리페 2세는 어이없게도 이미 아들과 약혼한 엘리자베타와의 결혼을 발표합니다. 충격을 받은 왕자를 친구인 로드리고가 위로를 하지만 이제 어머니가 되어 가까이에 있는 엘리자베타를 향한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왕의 정부 애볼리가 연인의 아들 카를로를 사랑한다는 설정입니다. 질투에 눈이 먼 애볼리의 간계로 펠리페는 아들과 왕비의 불륜을 의심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카를로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됩니다.

 


 

카를로의 친구 로드리고를 빼고 오페라에 등장하는 주요 배역들은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그러나 펠리페왕이 아들의 약혼녀와 결혼했다는 것과 아들을 죽게 했다는 것을 빼면 오페라의 이야기와 역사적인 사실은 사뭇 다릅니다. 심지어 오페라에서는 카를로가 최후를 맞으려는 순간, 펠리페의 부왕이자 카를로의 할아버지인 카를 5세가 무덤에서 나와 손자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결말을 짓습니다. 이런 억지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까닭은 요소요소에서 빛을 발하는 음악의 힘이고 그렇게 되도록 심혈을 기울인 베르디의 열정입니다. 베르디가 어린 자식들과 부인을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위로와 헌신으로 재기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르디를 만나기 전 스트레포니와 다른 남자들 사이에 있었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에 숱한 질타와 비난이 쏟아졌고 심지어는 오랜 동거 끝에 뒤늦은 결혼을 결심했을 때도 반감과 반대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베르디의 가장 큰 상처는 그들의 결합을 그렇게 심하게, 또 끝까지 반대한 사람들 중에 자신의 부모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갈등과 배신감이 얼마나 컸던지 그 사건 이후 부모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는 서로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법적인 관계까지 정리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보면 "돈 카를로"에 집념을 불태운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충격인 것은 위대한 음악가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 선하고 고귀한 삶을 살았던 그가 천륜이라고 하는 부모자식의 인연을 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어려운 것이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습니다. 가까우니 잘 알고 아는 만큼 아끼는 마음에 잘 챙기고 보살펴 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서 오히려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생텍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처럼 정말로 소중한 것은 바로 곁에 있는데 정작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꼼꼼하게 살펴서 그 마음을 마음으로 따뜻하게 어루만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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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집시 여인의 슬픈 이야기(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밥 딜런)[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집시 여인의 슬픈 이야기(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밥 딜런)

Posted at 2017.04.21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일 트로바토레"(1853)"리골레토"(1851)"라 트라비아타"(1853) 사이에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로 이들 세 작품은 오늘날 베르디의 오페라들 가운데 가장 많이, 또 자주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 오페라의 이야기는 모두 빗나간 부정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리골레토는 외동딸 질다를 짓밟은 만토바 백작에게 복수하려다 결국은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듭니다. "라 트라비아타"에서 제르몽 남작은 서로 사랑하는 비올레타와 그의 아들 알프레도를 헤어지게 만들어 결국은 비올레타의 죽음을 재촉하고 맙니다. "일 트로바토레"에서 루나 백작과 만리코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아픈 까닭이 집시 여인의 주문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만으로 힘 없는 노파를 화형에 처합니다. 아마도 그 무렵 베르디가 이런 이야기에 한결같이 이끌렸던 것은 그토록 그에게 헌신하고 희생했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의 결혼을,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출처 : 문화뱅크(http://www.imwbk.com/bd/bbs/board.php?bo_table=gallery&wr_id=30&page=5)

 

이 오페라는 스페인의 작가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1813-1884)1836년에 발표한 [엘 트로바도르]를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트로바토레(이탈리아어), 트로바도르(스페인어)는 프랑스의 트루바두르, 트루베르와 마찬가지로 모두 중세시대의 "음유시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같은 시대 독일에는 "민네징거"라 불렸던 음유시인들이 있었는데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가 바로 그들의 이야기로 등장인물 대부분은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들입니다.

 

음유 시인이라고 함은 이런 느낌??

출처 : http://kairiseimach.lofter.com/

 

십자군 전쟁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음유시인들은 대부분 멀리 떠나 오랜 전쟁에 참전했던 탓에 생존의 기반을 잃고 돌아갈 곳이 없어진 기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곳 저곳의 궁정을 떠돌며 전투의 무용담과 이국에서의 모험담,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를 노래에 실어 들려주었고 그 때문에 기사가 아니라 음유시인으로 불렸던 것입니다. 이 오페라에서 음유시인, 트로바토레는 주인공 만리코입니다. 집시 여인 아주체나의 아들인 그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루나 백작에 맞서고 있지만 내세울 혈통도 없고 받쳐주는 기반도 없는 떠돌이 기사입니다.

 

"일 트로바토레"에 나오는 이름들은 모두 가공의 인물들이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와 장소는 모두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때는 1411년으로 스페인이 아직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기 이전, 우르헬과 카스티야 두 가문이 아라곤 왕국의 왕위계승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오페라의 주인공 만리코와 루나 백작이 각각의 진영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정적이면서 이 두 사람은 레오노라라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연적이기도 합니다. 이 오페라의 이야기는 이 세 사람의 삼각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갈등, 희생과 파멸을 다룬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일 뿐 그 속에 감춰진 또 다른 사연이 이들의 운명을 막다른 길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그 운명의 열쇠는 또 한 사람의 등장인물인 집시 여인 아주체나가 쥐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m.aspx?CNTN_CD=A0002266629#cb

 

막이 오르면 캄캄한 밤, 루나 백작의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백작의 심복인 페란도가 이 집안에 얽힌 옛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루나 백작에게는 가르시아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먹을 것을 훔치러 몰래 집에 들어온 집시 노파가 아기였던 그 동생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다 사람들에게 들켜 도망 간 뒤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답니다. 루나 백작의 아버지는 그것이 집시의 저주 때문이라며 그 노파를 붙잡아 화형에 처했는데, 그날 밤 아기가 없어지고 불에 탄 아기의 백골만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아기가 없어지던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은 2막에서 듣게 됩니다. 새벽에 집시들이 숲 속 대장간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망치로 모루를 두드리며 대장간의 합창을 부르는데, 불꽃을 바라보던 아주체나는 무엇인가에 홀려 넋이 나간 듯 만리코에게 그 때의 일을 들려줍니다. 화형을 당한 집시 노파가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고 복수를 위해 루나 백작의 동생을 죽이려 했으나 실수로 자신의 아들을 불 속에 던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리코에게 루나 백작을 죽여 어미의 복수를 해달라며 애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만리코는 어쩌면 자신이 아주체나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일의 전모는 오페라의 마지막 가서야 밝혀지게 됩니다. 레오노라와의 결혼식을 앞둔 만리코는 아주체나가 루나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구하러 나섰지만 그 또한 루나의 포로가 됩니다. 루나를 찾아간 레오노라는 연인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루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몰래 독약을 마시고 서서히 죽어갑니다. 레오노라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루나는 분을 참지 못해 만리코를 처형하는데, 그때 잠에서 깨어난 아주체나가 루나에게 만리코가 그의 동생임을 밝히고 "어머니! 드디어 복수가 이루어졌어요!" 라고 외칩니다.

 

라벨라오페라단 2013 베르디 일트로바토레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결국 아주체나의 복수극이었고 그녀가 뜻한 바대로 복수를 이루었으니 아주체나의 승리로 끝난 것일까요? 이 모든 비극의 가장 큰 희생자는 누구일까요?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레오노라일까요? 혈육에게 죽임을 당한 만리코일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여인을 두 번이나 연적에게 빼앗기고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인 루나일까요? 그들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한들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겪고 제 손으로 자식을 죽였으며, 원수의 자식을 제 자식인 양 애지중지 키워서 원수의 손에 죽게 만든 것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요?

 

오페라의 역사를 통털어 이 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를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음악이 또한 절절하게 가슴을 파고 듭니다. 사람들은 만리코의 아리아 "타오르는 저 불길을 보라"와 레오노라의 아리아 "사랑은 장밋빛 날개를 타고"를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가슴을 저미는 장면이라면 루나의 감옥에 함께 갇히게 된 만리코와 아추체나가 함께 부르는 이중창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두운 지하 감방에서 아주체나는 자신도 어머니처럼 불길 속에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만리코가 어머니를 마치 아기를 달래듯이 위로하고 두 사람은 집시 마을에서 행복하게 지내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워합니다. 아주체나는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듭니다. 합창 또한 이 오페라의 큰 매력으로 "대장간의 합창"이 유명하지만 모든 것이 파멸로 치닫는 마지막에 이르러 저 멀리 수도원에서 들리는 "미제레레"가 안개처럼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Verdi (베르디) - Chidel Gita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중 대장간의 합창) 

 

"미제레레"는 불쌍히 여겨 자비를 주십사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가여운 존재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가엾게 여겨야 합니다. 오페라를 보며 저렇게 끔찍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까 싶지만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시인 프란시스 톰프슨의 말입니다. 타인의 고통인 줄 알았던 것이 하나 둘씩 나의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남이 만들어 내가 겪는 고통인가 했더니 세상 모든 고통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시대의 음유시인 밥 딜런

 

음유시인이라니 까마득히 오래 전이구나 싶지만 지금도 우리가 겪는 답답하고 기막힌 일들을 시로 읊고 노래로 불러 공감하고 위로하는 음류시인이 어딘가에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밥 딜런도 한때 우리 시대의 음류시인이라 불렸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마지막 후렴을 자꾸 입속으로 중얼거리게 됩니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이 대답인지, 대답이 바람인지... 그렇습니다. 바람이 대답이고, 대답이 곧 바람입니다.

 

Blowing In The Wind (Live On TV, March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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