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광복절의 교훈, 폴란드의 교훈[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광복절의 교훈, 폴란드의 교훈

Posted at 2018.09.14 11:37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광복절의 교훈, 폴란드의 교훈

 

일년 365일 가운데 해가 바뀌고 때가 바뀌는 날이 아닌 다음에야 815일 만큼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광복절인 그날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어 죽고 죽이고 다치고 아프게 했던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기쁘지만 기뻐할 수 없는 날이고 슬프지만 슬퍼할 수 없는 날이라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날이 바로 815일입니다.

 

출처 : http://sharehows.com/gwangbokjeol-with-numbers


세계 어느 곳의 누구라서 해서  더하고 덜하지 않겠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서서 가장 참혹하고 처참한 일들을 거듭 겪어야 했던 나라라고 하면 폴란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독일과 러시아 양국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두 동강이 난 채로 짓밟히고 무너졌지만 전쟁이 끝나기까지 나라 안팎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펼치며 누구보다 큰 희생을 치뤄야 했던 이들이 폴란드 국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소련이었던 러시아와 중국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나라라고 하지만 국민 전체 숫자에 비례한 희생자의 수를 따진다면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출처 : http://histclo.com/essay/war/ww2/cou/pol/w2p-dev.html


폴란드의 비극은 그때 뿐만이 아닙니다.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탓에 주변국들의 흥망성쇄와 이해관계에 따라 늘 전쟁과 부침을 거듭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남의 나라  전쟁에까지 앞장 서서 용맹을 떨친 이들이 폴란드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은 끝내 되돌릴 수 없었고 마침내 1795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의 합의로 나라가 셋으로 쪼개져서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다시 나라를 찾기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무모하리 만큼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저항과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잃은 1795년부터 세계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한 폴란드 이주민들의 숫자는 오늘날 천만명을 훌쩍 넘어 현재 이천만으로 추정되는 화교 다음의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 http://www.allworldwars.com/German-World-War-I-Postcards-Part-I.html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총칼을 빼앗긴 폴란드 군인들 가운데는 다른 나라의 군대에 들어가 앞날을  도모하는 이들이 많았고 때마침 적국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나중에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나폴레옹 군대에 합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들 대부분은 나라를 잃기 직전 얀 헨릭 돔브롭스키 장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코슈추슈코 봉기에 참여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거사가 실패하자 돔브롭스키 장군은 나폴레옹과의 담판 끝에 폴란드 군단을 결성하여 롬바르디아 공화국 수비대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폴란드 망명 단체를 이끌었던 시인 유제프 비비츠키는 누구보다 이 소식을 반기며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797년 작자 미상의 마주르카 선율에 가사를 붙여 폴란드 군단을 위한 군가를 만들었고 이것이 폴란드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돔브롭스키 마주르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1927년 마침내 이 노래는 폴란드의 국가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

(폴란드어: Jeszcze Polska nie zginęła 예슈체 폴스카 니에 즈기네와 또는 《동브로프스키의 마주르카》(폴란드어: Mazurek Dąbrowskiego 마주레크 동브로프스키에고는 폴란드의 국가이다


마주르카는 폴란드 고유의 민속 춤곡으로 근대 이후 폴레네이즈와 더불어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져 폴란드를 대표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조국 폴란드를 사랑했던 쇼팽도 파리에 살면서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마주르카를 작곡하여 짧은 생애 동안 50곡이 넘는 마주르카를 남겼습니다. 오늘날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선망하는 쇼팽 콩쿠르의 참가자들이 결선에 오르기까지는 쇼팽이 작곡한 여러 장르의 소품들을 차례로 섭렵하여 기량을 겨루게 되지만 언제나 그 마지막 관문에는 마주르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열음(Yeol eum Son)-Chopin Mazurka no.4(쇼팽 마주르카4번)


폴란드인들에게 마주르카는 마치 우리 겨레의 아리랑인 듯 애틋하기까지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도 그렇고, 그래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 또한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백여년의 차이가 있지만 주변국들의 이해 관계가 맞닿아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맥없이 나라를 잃어야 했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랬지만 그들 가운데도 누구는 러시아에 기대고 누구는 프로이센에 기대어 꼴난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나라를 잃고서도  다시 프랑스를 믿고 나폴레옹을 따랐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언제나 배신 뿐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셋으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지만 일본이 청나라, 러시아와 싸워서 이기지 못했다면, 그래서 끝내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섰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디로 굴러갔을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나라를 되찾고자 일본과 싸우는 남의 나라 군대에 들어가 앞장 서서 싸워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기막힌 처지까지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옛날 고구려가 만주를 넘어 중원을 위협했던 것처럼 폴란드도 한 때는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넓고 비옥한 땅을 가진 강대국이었고 러시아를 수없이 침략하고 약탈했던 나라였습니다. 1795년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어깨를 맞대며 폴란드를 나눠가졌던 독일(당시의 프로이센)은 그 일이 있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는 처지였지만 훗날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한 나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도 다시 나라를 찾았지만 이런 역사의 흔적은 이들 나라의 국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출처 : https://www.allenrec.com/thinking-of-relocating-to-poland/


공교롭게도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국가가 처음 만들어진 것도 1797년의 일입니다. 그해 212, 프란츠 1세의 생일을 맞이한 황제 프란츠 1세에게 하이든이 바친 곡에 로렌츠 레오폴트 하슈카(Lorenz Leopold Haschka, 1749-1827)가 가사를 붙여 신이시여, 프란츠 황제를 지켜주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라는 노래가 되었고 이후 황실의 공식행사마다 황제의 이름만 바꾸어 이 노래를 부르면서 공식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이든은 황제에게 바친 그 선율을 현악사중주(Op. 763) 2악장의 주제 선율로 사용하였고 그 때문에 이곡은 황제라는 부제가 붙어 오늘날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독일에게 합병된 오스트리아는 그들의 국가마저 독일에게 빼앗겼고 한 때 오스트리아의 국가였던 그 노래는 이제 가사만 바뀌어 독일의 국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대신 오스트리아는 1946년 이후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칸타타” 1단결의 노래의 음악에 여류시인 프레라도비치의 가사를 붙인 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 Land am Strom)”를 새로운 국가로 제정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는 늘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인가 하면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영원한 강자도 없을 뿐더러 영원한 약자도 없습니다세상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키려면 변해야 합니다. 변하려면 버려야 합니다.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어야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루터의 종교개혁이 출판과 음악에 미친 영향[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루터의 종교개혁이 출판과 음악에 미친 영향

Posted at 2018.08.21 08:46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루터의 종교개혁이 출판과 음악에 미친 영향

 

2017년은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 맞서 개혁을 외친 지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종교만 바꿔놓은 게 아니라 독일과 유럽을, 그리고 세상을 온통 뒤집어놓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졌고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의 조상쯤으로 떠받들고 있는 바흐의 종교음악 대부분이 루터 파 교회의 예배를 위해 작곡한 곡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당장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렇듯 직접적인 것보다는 간접적인 영향이 오히려 더 큰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출처 : https://bit.ly/2ORl49H)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성서의 왜곡을 바로잡고자 비텐부르크에 있는 만인성자교회의 문앞에 "95개의 논제"를 써서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정작 독일 국민의 95퍼센트는 그것을 전혀 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당시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루터도 그 논제를 라틴어로 썼고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한 신과의 직접 소통과 구원을 설파했던 루터는 이를 위해 당장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서둘렀고 번역한 성서를 출판하고 보급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집집마다 성경책이 있어 누구나 독일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상 또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일이 독일 밖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유럽은 전에 없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됩니다.

 

출처 : https://bit.ly/2Bsc2hw


종교개혁과 성서의 보급은 인쇄술과 출판업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보의 인쇄와 출판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 덕에 바흐는 평생 독일 땅을 벗어나지 않고도 유럽 각지의 수 많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악보로 만날 수 있었고 그렇게 알게 되어 습득한 그들의 서로 다른 기법과 양식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를 잃은 바흐는 오르트루프(Ohrdruf)에 있는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1671~1721)에게 맡겨졌습니다. 형으로부터 오르간을 배우긴 했지만 바흐의 작곡 공부는 거의 독학이었고 그것은 주로 형이 가지고 있던 여러 작곡가들의 악보를 손으로 베끼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는 형이 사보를 허락하지 않은 대가들의 곡들도 많았는데 프로베르거(Johann Jakob Froberger 1616~67)와 케를(Johann Kaspar Kerll 1627~93),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와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등의 작품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형이 잠든 늦은 밤에 책장에서 몰래 악보를 꺼내 달빛을 등불 삼아 악보를 베끼는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훗날 바흐의 업적을 만든 바탕이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77


바로크 시대를 지나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서자 악보는 더 이상 음악가들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산업의 발달로 경제력을 갖게 된 중산층과 시민계급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음악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여유를 누렸다고는 하지만 음악가를 고용하여 집에 둘 형편은 아니었기에 스스로 악기를 배워서라도 음악을 즐기려 했고, 그러려면 당연히 악보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이든의 명성은 그렇게 온 유럽에 널리 퍼졌습니다. 여기저기서 하이든의 악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급기야 하이든이 쓰지도 않은 작품을 하이든의 곡이라고 속여서 파는 업자들이 생겨났고 그 때문에 오늘날 하이든은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작곡가들 가운데 위작이 가장 많은 작곡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에스테르하치 후작 가문에서 평생을 바쳐 일하다가 런던으로 갔을 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하이든에게 열광하며 환영했던 것도 다 바다를 건너서까지 널리 퍼진 하이든의 명성 때문이었습니다. 비인으로 돌아와 임종을 맞았을 때 비인을 포위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선발대를 먼저 하이든의 집으로 보내 그를 지키게 했고 그 가운데 한 병사는 하이든의 침실로 달려가 그가 작곡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 나오는 아리아를 불러 병상에 누운 노대가를 감동시켰습니다.

 


악보의 출판은 작곡가의 명성뿐만 아니라도 수입까지 늘려주었습니다. 하이든의 시대만 해도 음악가의 성공이라면 그저 돈 많은 귀족에게 고용되어 평생 그 집에서 살면서 생계 걱정을 않는 것이었지만 베토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연주회를 열고, 악보를 출판하여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누군가에게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악보의 출판이 마침내 음악가에게 자유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음악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C%A7%80%EC%B0%BD%EC%A1%B0

  1. 비밀댓글입니다
  2. 비밀댓글입니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와 음악[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와 음악

Posted at 2018.08.20 11:5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와 음악

 

2017년은 러시아 혁명 백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해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세비키 혁명으로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미국을 앞세운 서방의 자유 진영과 소련이 주도한 동쪽의 공산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는 동서 냉전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출처 : http://www.vsesovetnik.ru/archives/19425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국가들도 씨가 말라버린 지금 국제 사회에서 러시아의 위상과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언젠가는 다시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서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거나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오백년 전에도 러시아는 기독교가 지배한 유럽의 절반을 대표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때도 유럽은 동과 서로 나뉘어 있었고 냉전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는 동쪽의 중심이었습니다. 서쪽의 로마 카톨릭과 갈라선 비잔틴 교회, 즉 동방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그 중심을 두었으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무너지자 그 본거지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러시아의 군주를 그 수호자로 삼았고 그때부터 러시아의 왕은 황제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entoytwnika1.blogspot.com/2014/09/blog-post_16.html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군주들 가운데 황제의 칭호를 가졌던 나라는 딱 두 나라 뿐이었습니다. 서로마가 무너진 후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아 로마 카톨릭 교회를 수호한 공로로 로마의 대주교, 즉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봉해진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그 첫 번째이고, 모스크바로 근거를 옮긴 동방 정교회의 대주교로부터 로마 황제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러시아의 왕이 두 번째입니다. 동 프랑크는 독일의 전신입니다. 독일이 오랜 동안 여러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었을 때는 제후들의 선거로 황제를 선출하였습니다. 그러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세습하게 됩니다. 러시아의 황제는 로마노프 왕조가 대대로 세습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독일어로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와 러시아어의 "차르"라는 말이 모두 로마 제국의 황제를 일컫는 "카이사르"에서 비롯되었고 카이사르는 바로 로마제국의 초석을 다진 카이사르, 즉 시저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동프랑크 왕국 : 843년 – 918년)

출처 : https://bit.ly/2OOMGw6


초기 기독교가 온갖 박해와 시련을 지나 313년에 로마제국에서 공인을 받고 392년에 마침내 국교로 선포될 즈음에 제국 안에는 다섯 개의 교구, 5대 주교구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로마가 그들입니다. 그 가운데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주교구가 7세기 중엽 이후 이슬람의 정복으로 무너져버리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남아 교회의 두 중심축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동과 서로 갈라진 로마제국의 두 중심지였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공생과 경쟁의 묘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그 빈자리를 채울 만한 절대 강자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 로마교회는 정치권력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위상과 세력을 키워갈 수 있었기에 다른 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의 우위를 주장하며 로마 교구의 주교를 교황이라 부르게 됩니다. 이에 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는 교리상 모든 교구가 동등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제국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까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했습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입장과 교리의 차이는 두 교회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었고 여기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1054년 두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여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explorethemed.com/fallrome.asp?c=1


러시아 정교회는 일찍부터 비잔틴 정교회의 성가를 러시아어로 부르며 그들 나름의 음악을 더했으며, 특히 16세기 이후부터는 서로 다른 선율이 함께 어우러지는 다성음악을 성가에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과거 로마카톨릭교회가 모든 국가와 민족들에게 라틴어 성서와 전례를 강요했던 것과는 달리 동방정교회는 처음부터 모국어 성서와 전례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표트르 대제에 이르러 큰 변화와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1721, 표트르 대제는 총주교제를 폐지하고 종무청을 설립하여 교회에 대한 황제의 권한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호반시치나"는 표트르 대제의 대대적인 개혁 정책에 직면한 토착 귀족과 종교 지도자들의 저항과 몰락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4막에서 표트르의 군대에 쫓겨 막다른 길에 다다른 정교회의 성직자 도시페이와 추종자들은 곧 닥칠 최후를 예감하고 모두 함께 여기, 이 거룩한 장소에서라는 성가를 부릅니다.

 

M. Mussorgsky, Dawn on the Moskva River, Introduction to the Opera "Khovanshchina"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는 오페라에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 작곡가들의 여러 작품들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무소르그스키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국민악파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꼽히는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젊은 시절 황실 교회 성가대의 부감독으로 일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미사에서 강한 인상과 영감을 받아 "부활절 서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성가집에서 몇 개의 성가를 골라 그 선율을 바탕으로 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금관악기들이 러시아 성가의 장엄한 선율을 연주하는 마지막 부분은 그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를 사용한 곡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일 것입니다. 이 곡은 1882년에 있었던 모스크바 산업예술박람회의 개막 축하연에 연주하기 위해 위촉된 작품으로 나폴레옹 침략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친 보로디노 전투에서의 승리를 오케스트라의 음악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곡의 첫 부분은 비올라와 첼로가 연주하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 "주여, 당신의 백성을 구하소서"로 시작하는데 평화로운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에 감도는 전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를 묘사한 부분으로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러시아의 민요 선율이 뒤섞여 치열했던 격전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합니다.

 

Tchaikovsky - 1812 Overture (Full with Cannons)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끝까지 버티던 프랑스군이 대포 소리와 함께 서서히 퇴각하면서 첫 부분에 등장했던 성가의 선율이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금관으로 다시 한 번 힘차게 연주됩니다. 종소리가 멈추면 러시아군의 개선 행진이 있고, 축포를 터뜨리며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제정 시대 러시아의 국가인 신이시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를 연주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출처 : http://cossacksmusic.ru/bozhe-czarya-xrani.html


지금은 제정 시대도 아니고 불과 삼십년도 지나지 않은 냉전 시대도 이미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러시아의 역사 속에서 러시아 사람들의 고난과 영광을 늘 함께 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정신과 음악은 그들의 위대한 유산이자 자랑이며 긍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비단 종교가 아니고 정치적인 이념은 더더욱 아니더라도 위기의 순간, 한 나라와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치와 신념이 진정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요즈음입니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기업과 예술, 기업과 음악의 아름다운 만남(기업/회사 이름의 유래)[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기업과 예술, 기업과 음악의 아름다운 만남(기업/회사 이름의 유래)

Posted at 2018.07.23 08:5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오늘날 샤토 무통 로쉴드라면 와인 애호가 누구나 최고의 와이너리로 잘 알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1855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보르도 와인의 등급을 매기기 시작했을 때 무통 로쉴드는 1등급이 아닌 2등급을 받았고 백년이 넘도록 그 등급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1등급을 받기 위한 로쉴드 가문의 노력은 끊임 없이 이어졌습니다. 와인을 만들어 통에 담아 보관하던 이전의 방법을 벗어나 양조한 다음 바로 병에 넣어 판매하는 체계를 처음으로 도입했고, 와인 병에 생산 년도와 지역, 생산자 이름 등을 기입한 레이블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해마다 한 사람의 화가를 선정해서 레이블에 들어갈 그림을 부탁했고 피카소의 그림이 레이블을 장식한 1973, 드디어 샤토 무통 로쉴드는 2등급을 벗어나 1등급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출처 : https://www.thefrenchcellar.sg/chateau-mouton-rothschild/


세계 최대의 의류업체 "자라(Zara)"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라는 브랜드가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자라의 창업자 아만시오 오르테가는 1936년 스페인의 레온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철도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3살이 되던 1949갈라라는 양품점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의류업에 첫발을 들여놓았고 3년 만에 16살의 나이로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1963년에 의류 제조업체 고아 콘벡시오네스로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1975, 라코루냐 지역에 처음으로 문을 연 의류 소매점이 자라의 시작입니다. 그 무렵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오르테가는 가게 이름을 "조르바(ZORBA)"로 결정하고 간판까지 만들었지만 매장에서 겨우 두 블록 떨어진 술집에서 먼저 이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간판에서 알파벳 ‘O’‘B’를 빼고 ‘A’를 더해 "자라(Zara)"로 바꾸었습니다.

 

출처 : https://303magazine.com/2018/03/zara-denver/


우리에게는 "별다방"이란 애칭으로 더욱 친근한 "스타벅스"는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Moby Dick)"에 등장하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Starbuck)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스타벅스는 1971년 미국의 시애틀에서 커피 원두를 판매하는 가게로 문을 열었습니다. 영어교사 제리 볼드윈(Jerry Baldwin)과 역사교사 고든 보커(Gordon Bowker), 그리고 작가 지브 시글(Zev Siegel)이 동업하여 문을 열었고 1987년에 하워드 슐츠가 인수하면서 커피 전문점으로 탈바꿈하여 오늘날 세계 최대의 다국적 커피 전문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스타벅스의 창업자 세 사람 가운데 제리 볼드윈은 소설 "백경"의 애독자였고 가게 이름을 고민하는 동업자 고든과 지브에게 처음에는 소설에 나오는 포경선의 이름 "피커드(Pequod)"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든이 반대하면서 스타벅을 대안으로 내놓았고 볼드윈이 이를 받아들여 결국 스타벅스로 결정되었습니다.

 

출처 : http://fortune.com/2018/04/14/starbucks-black-men-arrested-philadelphia/


그림과 영화, 그리고 문학이 기업에 영향을 미친 사연을 먼저 살펴보았지만 음악과 기업이 만나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경우도 하나 둘이 아닙니다. 아우디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이 그렇고 스와로브스와 메트로폴리탄의 인연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산토리 위스키는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을 지어 그들의 자부심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whisky.suntory.com/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음악축제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잘츠부르크 패스티발이 아닌가 싶습니다. 7월 말부터 약 40일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이 축제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25만여명에 이르는 음악애호가들이 모여듭니다. 독일의 자동차 회사 아우디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을 후원하면서 축제에 필요한 의전용 승용차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이라면 아우디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덕분에 아우디의 브랜드 가치가 한층 더 높아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MHeqVc9xfXw


크리스탈로 유명한 스와로브스키의 오페라 사랑은 각별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사용한 장신구 대부분을 스와로브스키가 만들었고 1956년 전설로 남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공연에서 칼라스가 착용했던 왕관과 목걸이, 귀걸이까지도 모두 스와로브스키 제품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오페라와의 인연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로 이어지면서 절정을 맞게 됩니다. 1966916일 메트로폴리탄이 맨해튼 39번가의 옛 건물에서 지금의 링컨센터로 옮겨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스와로브스키가 기증하여 객석과 로비에 20여개나 설치된 크리스탈 샹들리에였습니다. 성게처럼 생긴 모양부터가 독특하지만 공연이 시작할 즈음이면 불빛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천장 위로 점점 올라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장관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출처 : https://bit.ly/2JLJa2Z

 

2008년에 세상의 관심이 다시 메트로폴리탄의 샹들리에로 모아졌습니다. 42년 전 설치된 이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와 교체 작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샹들리에를 바닥에 내려서 5만여개나 되는 크리스탈 부품을 다 해체한 다음 항공편으로 오스트리아의 비인으로 보냈고, 스와로브스키가 이를 세 달에 걸쳐 완벽하게 수선하여 다시 뉴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9월에 시작하는 새로운 시즌의 첫 공연에서 새롭게 단장한 샹들리에가 공개되면서 그 존재감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샹들리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계에 자랑할 만한 콘서트홀을 지어 보란듯이 운영하고 있는 기업도 있습니다. 일본의 산토리 음료가 1986년 위스키 출시 60주년을 맞아 만든 산토리홀이 바로 그 경우입니다. 세계에서 위스키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다섯 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와 이웃나라 아일랜드가 있고 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새로 세운 나라 미국과 캐나다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산토리가 아시아 국가 중에는 처음으로 위스키를 만들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 앞선 네 나라와 견주어 전혀 품질에 있어 뒤지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그들을 능가한다는 평가까지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출처 : https://www.suntory.com/culture-sports/suntoryhall/


산토리홀은 세계 최고의 위스키를 만드는 그들의 자부심과 열정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자랑입니다. 세기의 지휘자 카라얀의 자문을 받아 건립한 2006석 규모의 이 콘서트홀은 그곳을 다녀간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입을 모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할 정도로 최상의 음향과 시설, 최고의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난 201125주년을 맞이한 산토리홀은 다시 한 번 세계의 음악애호가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2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연주회에 그들이 개관 이후 그때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작곡가들에게 위촉하여 초연했던 세계 초연곡들만 모아 무대에 올리는 전대미문의 일을 벌인 것입니다. 세계 최초가 곧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일깨우는 것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말을 두고두고 되새기며 자꾸만 그 뜻을 헤아려 봅니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결혼식 음악[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결혼식 음악

Posted at 2018.07.11 12:2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지난 해 딸 아이 결혼식을 치르면서 결혼식 음악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에 정착된 서양식 결혼식에서는 축가, 혹은 축하연주와 더불어 신부가 입장할 때와 신랑이 입장할 때, 신랑 신부가 함께 퇴장할 때 음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부가 입장할 때의 음악과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의 음악은 어느 결혼식에서 같은 곡을 연주하는 것이 마치 약속인 듯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음악이 정확하게 무슨 음악인지, 무슨 까닭으로 누가 언제부터 어떻게 결혼식에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아무도 묻거나 따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출처 : Pixabay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 연주하는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에서 성배를 지키는 기사 로엔그린과 엘자의 결혼식을 축복하며 부르는 축혼 합창곡입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 연주하는 곡은 멘델스존이 세익스피어의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해 작곡한 부수음악 가운데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 연주하는 결혼 행진곡입니다. 이 두 곡이 결혼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58, 125,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있었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빅토리아 공주와 프로이센 왕국의 왕자 프리드리히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신부가 입장할 때 로엔그린축혼 합창곡을 연주한 것은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던 빅토리아 공주가 그 곡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퇴장 때의 음악으로 선택한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은 프로이센 왕실을 배려한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이자 프리드리히 왕자의 큰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연극 한 여름 밤의 꿈의 공연을 위해 멘델스존에게 음악을 부탁했고 그 결과 1843, 포츠담의 궁전에서 연극과 함께 멘델스존의 부수음악 한 여름 밤의 꿈이 초연되었기에 프로이센 왕실 사람 누구나 이 음악을 알고 있었고 또 좋아했던 것입니다.

 

출처 : Pixabay


지금도 그렇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세를 만방에 떨쳤던 그 당시 영국 왕실의 결혼식은 만인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된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걸 모방하려는 사람들의 열망 또한 클 수밖에 없었기에 한 동안 그 음악까지 너나없이 따라 하면서 그 유행이 유럽은 물론 전 세계로 널리 퍼진 것입니다. 추측컨대 그 유행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전해졌고 1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그 영문도 모르는 채 무작정 따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결혼식의 모양새부터가 그런 것처럼 그 음악까지도 지금껏 그래왔으니 그냥 그러자는 식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 여기저기에 저 나름 다 달라야 할 것들이, 그래서 뜻 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들이 그저 그렇게 밋밋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따라 하더라도 우리가 분명히 알고 또 기억해야 할 것은 160년 전에 있었던 결혼식의 그 음악들은 전부터 다른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연주했던 곡이 아니라 바로 그 결혼식의 당사자들이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어 선택한 음악이라는 사실입니다.

 

출처 : https://twitter.com/umma1996 


딸 아이 결혼식에 들어갈 음악만큼은 예식의 주인공들에게 먼저 물어 보고 그들에게 보다 의미 있는 곡들을 골라서 잘 알고 지내는 연주자들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을 즈음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의 지휘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초대 총장 이강숙 선생의 한자 호 낙촌을 우리말로 풀어 쓴 이름을 붙인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은 이강숙 선생과 작곡가 이건용 선생, 지휘자 홍준철이 앞장서고 거기에 저의 작은 힘을 보태서 창단한 아마추어 합창단입니다. 사람 사는 마을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함께 모여 노래 부르는 세상을 꿈꾸며 만든 이 합창단은 지난 20여 년 동안 그 꿈을 쫓아 하루도 빠짐없이 있는 힘을 다해왔습니다.

 

통화의 내용은 축하 인사와 함께 단원들의 뜻이라며 결혼식의 모든 음악 순서를 합창단에 맡겨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서 결혼식에 이 보다 더 뜻 깊은 선물이 없을 것이라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지휘자가 생각하는 대략의 곡목을 전달 받아 예식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와 의논을 했고 그 결과, 전에 없던 새롭고 뜻 깊은 결혼식 음악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식이 있던 날 합창단이 모차르트의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를 부르기 시작하자 바로 얼마 전까지 어수선했던 식장의 분위기는 한 순간에 마치 다른 곳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차분하고 엄숙해졌습니다. 이어서 원래의 곡 그대로 합창으로 부르는 바그너의 축혼 행진곡에 맞춰 딸 아이 손을 잡고 식장 안으로 들어섰고 축가와 퇴장까지 모두 합창단의 노래로 예식을 진행하였습니다. 축가 여기 사람들 있네와 퇴장 음악 문을 열어라는 모두 합창단의 음악 감독인 이건용 선생의 곡으로 딸아이는 물론 하객들 모두에게 특별하고 색다른 감동의 시간을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식의 축가라면 언제나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신부에게 바치는 축가를 직접 연주했습니다. 슈만의 가곡 헌정을 리스트가 피아노 연주용으로 개작한 곡이었습니다. 피아노에 앉기 전에 하객들을 향해 신부에게 꼭 노래로 이 곡을 불러주고 싶었지만 노래를 잘 못해 피아노로 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전에 보고 들었던 김선욱의 그 어떤 연주보다 몸과 마음을 다한 연주였기에 오히려 가사가 없어 호소하는 듯 더 간절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결혼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하는 연주회가 있어 김선욱에게 결혼식 축가로 연주했던 헌정을 앙코르로 연주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습니다. ‘그 곡은 오직 한 사람 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쳤기에 앞으로 아내 말고 그 누구 앞에서도 결코 연주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누구나 함께 모여 노래 부르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래서 말인데 결혼식 하객들과 함께 부르며 신랑 신부를 축복하는 축가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살면서 거치기 마련인 중요한 순간마다 특별하고 뜻 깊은 음악이 늘 함께 하여 세월이 지나도 그 때를 언제나 벅차고 뿌듯했던 시간으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Pixabay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페라로 보는 러시아의 역사(2018 러시아 월드컵 16강 화이팅!)[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페라로 보는 러시아의 역사(2018 러시아 월드컵 16강 화이팅!)

Posted at 2018.06.26 17:05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안녕하세요.

러시아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이제 16강의 주인공도 모두 정해졌는데요...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만큼 대한민국과 독일전에서 한국을 열심히 응원해보려 합니다.

러시아 월드컵이 한창인 만큼 러시아와 오페라에 대해 한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오페라의 대본은 늘 이미 세상에 있는 어떤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신화나 전설, 혹은 역사적인 사건을 가져다가 직접 대본으로 꾸미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쓴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문학작품을 각색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세익스피어와 괴테, 쉴러와 위고와 같은 대문호들의 작품을 오페라로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페라 역사를 통털어 가장 많은 작품이 대본으로 선택된 문학가는 누구일까요? 뜻밖에도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이 그 주인공입니다. 무려 16 작품이나 오페라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우리가 알만한 러시아 오페라들 가운데 절반을 훨씬 넘는 숫자이니 푸시킨을 빼고 러시아 오페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를 좋아한다는 분들까지도 그 사실을 잘 모르는 것은 러시아 밖에서 러시아 오페라가 공연되는 일이 많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그 만큼 우리가 러시아의 문화, 러시아의 역사에 관심이 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출처 : https://bit.ly/1QwcwSf


일단 푸시킨의 작품으로 만든 오페라의 제목을 연대순으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먼저 글린카가 작곡한 루슬란과 루드밀라(1842)”가 있고 다르고미쥐스키의 루살카(1848)”와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1869)”가 그 다음입니다. 다르고미쥐스키가 다시 석상 방문객(1869)”을 시작했으나 끝내지 못했고 카프카즈의 포로(1874)”를 작곡한 퀴가 그 나머지를 완성합니다. 퀴는 이후 흑사병 시대의 축제(1901)”대위의 딸(1911)”을 작곡하였고 차이코프스키는 예브게니 오네긴(1878)”마제파(1883)”, “스페이드의 여왕(1890)”을 오페라로 만들었으며 나프라브니크는 두브로브스키(1894)”를 작곡했습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1897)”술탄 황제의 이야기(1900)”에 이어 황금닭(1908)”을 내놓는 사이에 라흐마니노프가 인색한 기사(1904)‘를 작곡했고 마지막으로 스트라빈스키가 푸시킨의 콜롬나의 작은 집을 각색한 마브라(1922)“를 작곡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보리스 고두노프마제파는 역사적 인물을 다룬 작품입니다. 러시아 오페라가 다른 나라 오페라와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다룬 오페라가 많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작품이라면 보로딘의 이고리 공과 글린카의 이반 수사닌”,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호반시치나”,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마제파를 들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cbscc.co.kr/


오페라 이고리 공은 이고리 공()의 유목민 정벌과 활약상을 소재로 한 러시아의 중세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으로서 대본은 보로딘이 직접 썼습니다. 보로딘은 1869년 여름에 작곡을 시작했으나 1875년에야 겨우 발레음악 폴로베츠 사람들의 춤 PolovtsianDances’을 완성하였습니다. 보로딘은 이 작품을 끝맺지 못했고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가 나머지를 완성하였습니다. 프롤로그와 4막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18901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20세기 초 파리에서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이 폴로베츠 사람들의 춤을 따로 발레 작품으로 만들어 공연하면서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1552년 뱌젬 지역의 지주 표도르 이바노비치 고두노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총명했던 보리스는 이반 4세의 총애를 받으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1598년 매제인 표도르 1세가 죽자 황제가 되어 1605년까지 러시아를 다스렸습니다. 당시를 기록한 러시아의 사학자 카람신의 연구서를 읽은 푸시킨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을 참고하여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금지령으로 이 작품은 푸시킨이 세상을 떠나고 3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무대에 오를 수 있었고 1869, 무소르그스키의 손을 거쳐 오페라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원작에 충실하여 무미건조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작품을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페라 극장이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드미트리와 마리나의 연애 이야기가 3막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오페라에서는 주인공 보리스 고두노프가 최후를 예감하며 홀로 고뇌를 되뇌이는 독백 장면이 압권입니다.

 

출처 : http://m.blog.daum.net/johnkchung/6826804


글린카가 1836년에 작곡한 이반 수사닌은 러시아어 대본으로 만든 최초의 오페라입니다. 실존 인물인 이반 수사닌은 1613년 미하일 1세가 황제로 즉위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열 수 있게 만든 영웅입니다. 그는 폴란드가 침공해왔을 때, 폴란드 군대를 숲 속으로 유인해 불을 질러 참패시켰지만 그 자신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그의 기념상이 있는 코스트로마는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명소입니다. “이반 수사닌의 발췌곡은 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고 그 가운데 폴란드군 사령관이 주최하는 무도회에서 나오는 폴로네이즈와 왈츠, 마주르카가 유명합니다.

 

출처 : https://bit.ly/2K8TS8y


호반시치나는 표트르 대제의 통치시대를 배경으로 호반스키의 반란과 진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젊은 차르 알렉세예비치 표도르(Alekseevich Fyodor)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이반(Ivan)과 이복동생 페테르(Peter)가 함께 권좌를 나누지만 섭정으로 나선 표도르 대제의 누이 소피아(Sophia)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벼량 끝에 내몰린 페테르는 절치부심 끝에 소피아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단독으로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룩한 표트르 대제입니다. 그러나 소피아 공주를 비롯한 적대 세력들은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반전의 기회를 노립니다. 마침내 호반스키(Khovansky) 공을 따르는 모스크바 수비대 스트렐치(Streltsi)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격에 나선 표트르의 군대에 진압되고 표토르의 교회개혁에 맞섰던 구교회의 지도자와 추종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교를 선택합니다.

 

마제파역시 표트르 대제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코사크 족이었던 마제파는 일찍이 폴란드와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고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견문과 식견을 넓혔으며 우크라이나의 지도자가 된 다음에는 곳곳에 교회와 학교를 짓고 학문과 예술, 출판을 장려하였습니다. 폴란드와 스웨덴의 연합군이 우크라이나로 쳐들어오자 마제파는 러시아가 나서서 도와주리라 믿었지만 표트르의 군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654, 페레야슬라브 조약을 맺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서로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러시아가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다. 중과부적의 처지라 그는 어쩔 수 없이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뒤늦게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보복으로 코사크족들을 무차별 처형하였고 십자가에 묶은 시체를 드네프르 강에 흘려보냅니다. 쫓기던 마제파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출처  : http://www.hottracks.co.kr/ht/record/detail/0809478009894

 

호반시치나마제파는 모두 러시아 역사에 있어 가장 역동적이며 찬란했다고 하는 표트르 대제의 통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작품은 모두 그 시대의 밝은 부분이 아니라 어두운 면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승자의 역사가 아니라 패자의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이 밝을수록 그늘은 더욱 캄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눈부신 성취와 업적 뒤에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좋은 일일수록 대가가 크고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그 대가와 희생이 부당하고 가혹할 수도 있고 그래서 더욱 불편한 진실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그 불편한 진실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은 그의 시에서 운명은 피할 수 없음이 아니라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나의 운명을 마주합니다. 감추어진 우리의 아픈 역사를 돌아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 모두 다 함께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봅니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모차르트의 음악[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모차르트의 음악

Posted at 2018.06.20 08:3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모차르트의 음악은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아무리 짧아도 글은 앞뒤를 재고 따져서 쓰기 마련이지만 말은 조심하느라 뜸들이다 보면 때를 놓쳐 흥이 죽고 김이 빠집니다. 생각을 고르고 다듬어 가지런히 펼쳐 놓는 것이 글이라면 말은 미처 생각이 자리 잡을 틈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이렇게도 건드려 보고 저렇게도 찔러보는 겁니다. 글은 그 뜻을 새기느라 생각을 하며 읽게 되지만 말은 그 흐름을 쫓아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먼저 글을 써 놓고 뒤에 말로 읽으면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어색하지만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을 글로 바로 옮기면 살아서 숨쉬는 듯 자연스럽게 꿈틀거립니다.

 

출처 : https://www.classictic.com/en/mozart_piano_sonatas/10048/412238/


모차르트의 음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떠오르는 대로 생각을 악보에 옮기면 음표 하나하나가 모두 소리가 되고 한숨이 되고 표정이 되어, 입으로 눈으로 또 몸짓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누구나 이와 같이 말하는 것처럼 글을 쓰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그렇게 빨리 찾아서 가리지 못할 뿐더러 그걸 또 그렇게 능청스럽고 유연하게 풀어 나가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에게 있어 음악은 말보다 쉽고 말은 또한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습니다


Mozart - Piano Sonata No. 8 in A minor, K. 310 [complete]


숨 쉬듯이 말을 하고 말을 하는 것처럼 음악이 저절로 흘러나오니 그걸 생각 속에 가둘 틈도 없고 미처 잠글 겨를도 없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하다 보면 멈칫 하고 더듬거나 했던 말을 또 하기 마련이지만 모차르트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어떤 어려운 자리에서도 전혀 떨거나 주눅 들지 않고 미리 작곡한 악보를 보는 듯이 티끌만한 흠도 없는 즉흥연주를 펼쳤으니 그에게 작곡은 당장의 연주와 다름이 없고 글은 또한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출처 : https://bit.ly/2JQTT0V


모차르트의 음악은 글이기에 앞서 말이지만 그 말과 글이 하나 되는 기적입니다. 모차르트 음악은 섹시합니다 짜릿하고 아찔하여 소름이 돋고 쭈뼛합니다 살갗에 닿기도 전에 이렇듯 곤두서니 생각이 미칠 겨를조차 없습니다 닿을 듯 말 듯 밀고 당기며 들었다 놓았다를 거듭하니 치마폭에 감겨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본능입니다


The Best of Mozart


오스트리아 지역의 음악가로 바흐베토벤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전세계의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어도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이름은 알고 있으며, 설령 이름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의 음악은 들어봤을 것이다. 특히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주목할 만한 음악을 남겼기 때문에 음악 역사상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불세출의 천재로 인정받고 있다. 35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 수만 무려 626곡에 이르는 곡을 남긴 굇수[1]이며 단순히 곡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수의 작품들이 음악성 측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다. 또한 대부분의 작품이 음악역사에 중요기점이 되고있다. 특히 오페라 분야에서 그가 이룩한 성취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의 음악은 모든 사람들이 곡명은 몰라도 한번 이상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곡들이 많이 있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했으며 1791년 12월 5일 에서 죽었다. 
잘츠부르크는 현재 오스트리아령이지만 모차르트가 태어난 당시에는 엄밀히 말하면 오스트리아 소속이 아니었고 잘츠부르크의 가톨릭 대주교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가끔 음악 관련 서적에선 '모르트'라고 적혀있기도 했으며, 1980년대만 해도 이 명칭이 더 흔하게 쓰였다. 그러나 독일어 외래어 표기법 상 z를 ㅊ로 전사(轉寫)하도록 되어 있고, 더욱이 된소리를 쓰지 않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맞는 표현이다. 

출처 : 나무위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연극, 발레, 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연극, 발레, 춤

Posted at 2018.05.16 14:29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좋은 소설을 읽거나 잘 만든 연극을 보고나면 줄거리나 장면보다 등장인물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성격과 처지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그렇게 이야기와 삶이 펼쳐집니다.

"온 세상이 한갓 무대일 지니, 모든 남녀는 한낱 배우일 따름이다.(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34110866077239435/?lp=true


베토벤은 죽음이 눈앞에 이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극(Comedia)이 끝났으니 친구들이여 박수를 쳐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운명에 맞서 자유와 불멸을 얻고자 그토록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조차도 말입니다.

 

출처 : https://bit.ly/2KuZ0iT


연극(play)은 놀이(play)입니다. 한바탕 질펀하게 노는 겁니다. 연극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한 세월 잘 놀다 가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겁니다. 인생은 연극입니다.

 

도리스 데이의 노래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의 후렴을 되뇌입니다.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그렇습니다. 누구라서 미래를 알겠습니까. 때가 되면 어차피 알게 될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당장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기다릴 뿐입니다. 그게 바로 너나없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출처 : http://sanctionofstyle.com/que-sera-sera/


발레는 몸에 너무 잘 맞아서 아픈 옷이라고 말합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수석무용수 강효정의 말입니다. 처음엔 몸에 꼭 달라붙고 끼어서 아프지만 나중엔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아픔마저 잊는 것이고 발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발레는 투자 대비 확률이 가장 떨어지는 무모한 도전입니다. 성공에 절대 필요한 조건이 너무나 많고 다 갖추고도 피나는 훈련을 이겨내야 합니다. 자라면서 체형이 달라지거나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혹시 성공한다 해도 무대에서 빛나는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출처 : https://bit.ly/2Gl02Mf


발레의 묘미는 발끝에서 손가락 끝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에 있습니다. 하나 된 몸과 마음이 시선에 담기고 발끝의 움직임으로부터 손가락 끝으로 모아질 때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그 순간 생각이 멈추고 느낌도 무뎌져 딴 세상에 있는 기분이 듭니다.

 

감출 데가 없고 숨길 수도 없는 것이 춤입니다. 옷으로 온통 가려도 맨 몸뚱아리가 다 보이고 온갖 걸로 몽땅 둘러싸도 뿜어나오는 몸짓을 가둘 수가 없습니다. 말이 없이도 말을 걸어야 하니 꾸미지 말아야 합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어야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s://bit.ly/2rIF9Fa


춤은 몸입니다. 그리고 몸의 움직입니다. 그걸로 다른 무엇을 보여주고 말고는 그 다음 생각할 일입니다. 몸짓 말고는 달리 길이 없고 그게 가장 낫다고 믿는다면 춤으로 해야 합니다.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몸으로 하겠다면 그만한 까닭이 있어야 합니다. 춤은 몸짓입니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예술가란? 예술계의 3대 왕자병은 누구인가?[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예술가란? 예술계의 3대 왕자병은 누구인가?

Posted at 2018.04.25 16:2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예술계의 3대 왕자병이 있다고 합니다. 마에스트로와 발레리노, 그리고 테노르입니다. 지휘자는 늘 오케스트라가 따라오지 못해서 문제지 스스로는 누구보다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수 많은 발레리나들에 둘러싸여 그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발레리노는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테너는 세상 모든 여인들이 자신의 노래에 넋을 잃을거라 착각하며 우쭐댑니다.

 

출처 : 베토벤 바이러스


세상에는 잘난 예술가와 잘난 척하는 예술가가 있지만 못난 예술가는 없습니다. 못나 보이는 예술가가 있을 뿐입니다. 잘난 척해서 못나 보이기도 하고 못난 짓을 해서 못나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자랑스러워야 하고 누구에게도 아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예술가는 모두가 다 잘났습니다.

정말 처세에 능한 예술가는 예술 말고 다른 건 전혀 모르는 척 합니다. 예술이 가장 큰 무기란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모자라니 다른 방법을 찾는겁니다. 처세의 기본은 언제 어디서나 "기브 앤 테이크"입니다. 더러는 불쌍한 척 도와달라는 처세도 있습니다. 최악의 처세는 잘난 척입니다.

아티스트들 가운데 누군가를 두고 그 사람이 어떠냐고 물으면 "참 좋은 사람이지"라는 대답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력이 별로란 얘기입니다. 성격 착하면서 예술가로 뛰어나긴 힘든 것 같습니다. 우선은 예민해서 그렇고 모진 데가 없으면 날마다 반복되는 길고 지루한 연습을 견딜 수가 없을 겁니다.

 

출처 : PIXABAY


남달리 뛰어난 예술가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집중력입니다. 때문에 같은 시간을 들여도 성취가 큽니다. 뭐든 빠지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도박이나 사랑에 빠져 목숨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딘가 빠져서 보는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를 겁니다. 제 정신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래서 더 잘 보고 느끼는 겁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마지막 작품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 마치 있어서는 안되는 일인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누구도 주어진 삶의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뭔가를 잔뜩 벌여놓고는 마무리를 짓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출처 : PIXABAY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말하라고 하면 늘 '이러저러해서 성공했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업적을 남겼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이룩한 놀라운 성취가 후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정작 알고자 하는 삶의 굴곡은 온 데 간 데 없고 예술만 덩그러니 남아 삶을 대신하는 셈이고 예술이 온통 삶의 이유며 목적이었기에 위대한 삶이었노라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로 그랬을까요? 그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주길 바랬을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슬픔과 참을 수 없는 아픔을 겪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이겨내기 마련이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야 하니 그렇다는 말이고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저 그런 척하려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면서 속으로만 힘겨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후벼 판 가슴에 쌓여서 짓눌린 쓴 맛, 신 맛, 떫은 맛 나는 삶의 찌꺼기가 썩고 삭고 문드러져 곰삭은 맛이 제대로 들어야 참 예술로 거듭나는 겁니다.

 

출처 : PIXABAY


젊어서 귀가 먹어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만 천여 장이 넘는 필담을 메모로 남겼고 오늘날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그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히 짐작컨대 그렇듯 세상과의 단절이 있었기에 철저한 고독 속에서 온전한 자유를 얻었을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소리가 아닌 내면의 소리에 귀 울일 수 있었을 겁니다.

결핍이 곧 충만이요 충족이 곧 결여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탓하기에 앞서 그 때문에 얻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잠시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그 소리에 마음을 열고 몸을 일으켜 손을 뻗고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내가 사는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1. 정성진
    내게 없는 것을 탓하기에 앞서 그 때문에 얻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에 콕 박히는 말씀입니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휴양도시에서 펼쳐진 브레겐츠 오페라 축제[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휴양도시에서 펼쳐진 브레겐츠 오페라 축제

Posted at 2018.04.24 13:3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브레겐츠는 해마다 열리는 오페라 축제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물론 스위스까지 펼쳐진 드넓은 ‘보덴 제’(See는 독일어로 호수를 뜻한다)를 끼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휴양도시이지만 비슷한 조건의 마을이나 도시들은 너무나 많아 브레겐츠를 특별히 기억할 이유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만의 특별한 무엇인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런 고민 끝에 세상에서 하나 뿐인 오페라 축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출처 : https://www.atlasofwonders.com/2013/04/floating-stage-bregenz-festival.html


1946년에 시작된 브레겐츠 페스티발은 호숫가에서 펼쳐지는 최초의 오페라 축제이다. 이후 비슷한 시도들이 뒤를 이었지만 브레겐츠가 가장 먼저였고 그 후로도 꾸준히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여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규모와 명성을 자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호수에 큰 배를 띄워 갑판 위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축제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이 보덴 제를 찾는 관광객과 휴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자 1948년부터는 호수 위에 고정적인 무대를 세웠다. 그리고 1979년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첨단의 시설을 완성하였고 1980년에는 호숫가에 페스티벌 하우스를 따로 만들어서 해마다 7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오페라 페스티발을 열고 있다.

 

 

출처 : https://www.atlasofwonders.com/2013/04/floating-stage-bregenz-festival.html


 

호사가들은 브레겐츠 페스티발을 두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과 함께 세계 3대 음악축제라고 말하곤 하지만 솔직히 유서 깊은 유럽의 다른 축제들에 비해 브레겐츠 페스티발에 대한 이미지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기발한 아이디어로 휴양도시 브레겐츠에 관광객들을 끌어들이자는 의도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오락영화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007 시리즈’에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고 콘텐츠보다 마케팅이 앞서는 현대 쇼 비즈니스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여름 처음으로 브레겐츠를 방문하여 남들보다 일찍 페스티발이 열리는 호숫가 무대를 찾았을 때도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크게 눈길을 끄는 곳이 없었고 호텔에서 소개한 어느 레스토랑에 들러 이른 저녁 식사를 마쳤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을 만한 맛은 아니었다. 그래서 얼른 다시 호텔로 돌아와 정장으로 갈아입고는 일찌감치 페스티발이 열리는 공연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출처 : https://www.atlasofwonders.com/2013/04/floating-stage-bregenz-festival.html

 

그런데 별 다른 할 일이 없어 일찍 찾은 호반의 공연장에서 기대치 않은 경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탁 트인 무대를 바라보는 넓은 객석에 홀로 앉아 커다란 무대와 어우러진 호수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아무 것도 가릴 것이 없어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무대는 이미 공연 전의 기대와 호기심을 자아내는 대상은 아니었지만 마치 오래 전부터 그것에 있었던 기념비적인 조형물인 것처럼 호수 위에 떠서 유유히 하늘을 이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저물면서 관객들도 하나 둘씩 객석을 채우기 시작했고 호수 저편 린다우에서 다가온 배가 기슭에 닿아 한 무리의 사람들을 내려놓자 조금 전까지의 호젓하고 적막한 공기가 흩어지듯 사방으로 날리는 것 같았다. 저무는 해가 하늘과 호수를 점점 더 붉게 물들일 즈음 새하얀 조명이 들어오는 순간은 마치 위대했던 한 시대가 가고 다른 시대가 오는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환상적이었다. 이윽고 펼쳐진 오페라는 이미 수 없이 보았던 푸치니의 ‘토스카’가 아니었다. 익숙한 스토리와 귀에 익은 음악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저 인간을 둘러싼 대자연에 바치는 외침이고 몸짓일 뿐이었다.

 

 

출처 : https://www.atlasofwonders.com/2013/04/floating-stage-bregenz-festival.html

 


베로나 야외극장에서 베르디의 ‘아이다’를 볼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있었다. 그 때는 소리가 너무나 맑고 또렷해서 멀리서도 마치 바로 앞에서 보는 듯한 착각에 흠칫 놀랐었다. 베로나에서는 고대 로마의 위대한 역사와 그것이 이룩한 문명에 감탄했다면 베르겐츠에서는 인간이 도저히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자연의 섭리와 그것에 맞서도 끝내 어우러지고 마는 인간의 운명에 저절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하나 뿐인 소리를 들려주었던 베로나와는 달리 베르겐츠는 세상에 하나 뿐인 장관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처음에 의도했던 그대로 세상에 하나 뿐인 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