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이건음악회 개최 안내 - 모스코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 공연 안내제28회 이건음악회 개최 안내 - 모스코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 공연 안내

Posted at 2017.07.12 13:47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음악회 톡톡

2017년도 이제 반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이제 점점 이건음악회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올 때 인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문의 주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에 이번 28회 이건음악회의 연주자와 일정 정보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28회 이건음악회 - 모스코바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 (Moscow Sretensky Monastery Chior)

  

이건음악회는 클래식 음악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상업적인 공연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여러 장르, 다양한 악기, 구성 등으로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올 해에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남성합창단인 모스코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을 초청하여 28회 이건음악회를 실시합니다.

러시아에는 많은 유명한 남성 합창단이 있습니다. 러시아 3대 남성 합창단이라는 볼쇼이 합창단, 돈코사크 합창단, 붉은 군대 합창단 등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볼쇼이 합창단은 꽤 자주 한국을 방문하는 합창단이기도 합니다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은 러시아 정교회 소속으로써 그 역사가 무려 620년이나 되는 전통있는 합창단입니다. 지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세계적인 소프라노인 안나 네트렙코와 함께 러시아 대표로 국가를 불렀을 정도로 러시아 내에서는 최고의 합창단입니다. 또한 국가적 주요 행사 등에서도 자주 초청되는 국보급 합창단입니다

다만 상업적인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을 모시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요 5년에 걸친 논의 과정에서 이건의 사회공헌활동과 나눔 컨셉의 음악회, 클래식 음악을 나누기 위한 노력 등을 어필하여 계약이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단체가 실력으로 최고다 하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각 합창단의 특유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이번 제28회 이건음악회를 통해서 모스코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의 매력에 푹~ 빠져보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앞으로도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에 대한 소개 자료를 꾸준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로 여러분들의 28회 이건음악회에 대한 기대를 표현해주세요 ^^ 좋은 소식으로 보답드리겠습니다.

 

 

 

[일정안내]

2017 10 26일 목요일 - 부산 문화회관 대공연장

2017 10 27일 금요일 -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

2017 10 28일 토요일 - 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017 10 29일 일요일 -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17 10 31일 화요일 - 광주 5.18기념문화센터

2017 11 01일 수요일 - 대구 수성아트피아

*공연 티켓 응모 이벤트 - 2017 9월 중 (이건음악회 블로그를 통해 공지 예정)

 

[공연 영상 보기 ]

 스마트폰 보기 : https://youtu.be/AiKqyg3AzOk

 

스마트폰 보기 : https://youtu.be/_xq8AOhCR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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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창선
    무지 기대 됩니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시 올해도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내용입니다. 아무쪼록 준비에 수고 많으셨고, 9월 응모 때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3. 양서빈
    올해는 광주에서도 공연을 해서 너무나 기대되네요. 꼭 참여하고 싶어요. 매년 멋진 공연 준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4. 김지연
    드디어 음악회 소식이 ~~^^올해도 너무나 설레입니다~~
  5. 김인철
    늘 기다려지는 공연소식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번에는 광주에서도 공연이 진행되기에 더욱 기대가 큽니다. 이건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6. 비밀댓글입니다
  7. 천병국
    지난 해 공연을 놓친 것이 너무도 아쉬웠는데, 이번에 미리 공연 소식을 접하게 되어 감사하네요. 늘 기대되는 이건음악회인만큼 이번 공연도 충분히 기다려지는건 저 뿐만 아닐 겁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8. 권희범
    시몬디너스틴 피아노 독주 공연 관람 후
    매번 기회를 놓쳤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네요!
    다시 행운을 기대하면서 이건기업의 문화창달에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9. 유구무언
    누군가는 돈을 위해 노래하지만 누군가는 노래할수 있음을 감사함으로 노래를 하지요.
    기대가 됩니다
  10. 함용성
    2017년의 이건음악회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모스코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 낯선 이름이지만 다른 러시아 합창단과 같이 깊은 울림의 성가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레고리안 찬트를 한 꼭지로 하면 더욱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려 줄 아리랑은 또 어떤 감동을 안겨줄지 상상해 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11. Sophia 💙
    이건의 메세나 덕분에 나의 감성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올 해도 감성 가득한 가을여행이 될 수 있는 행운이 오기를,,, 계속될 노블레스 오블리지로 메디치 가문 처럼 존경 받는 이건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
  12. 행복달
    안그래도 이때쯤이면 이건음악회 소식이 올라올텐데 하면서 들어와봤더니 역시나..
    이번에는 합창단 공연이군요. 조금 생소한 합창단이지만 이건의 선택이라면 올해도 기대해도 좋을것 같아요.
    해마다 너무나 멋진 공연, 감사합니다.
    올해도 대구에 오신다니 설레는 마음안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3. 페르소나
    올해도 너무 기대됩니다^^
  14. 김은경
    악기연주가아닌 합창단공연도 엄청 기대됩니다
  15. 우지수
    올해도 대구에서 공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척 기대됩니다~^^♡
  16. 신희숙
    이건음악회, 기다려온 공연 ~~~ 이번엔 전통있는 남성합창단 공연이라 더욱 가슴두근거립니다.
  17. 김태석
    올해도 기대되고 멋진 공연 볼수 있도록 준비해주시고 기획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8. 김화영
    올해 공연도 정말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19. 최선희
    이건 음악회 많이 기대됩니다. 이렇게 오랜기간 동안 좋은 음악을 소개하고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스코바 스레텐스키 수도원 합창단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앞으로도 무궁한 발전이 있길 바랍니다
  20. 단팥 앙
    음악회 정말 기대되요~
    벌써부터 정화되는 기분이에요 ㅎ
  21. 마포나루
    러시아 합창 정말 좋아하는데 이런 훌륭한 공연을 준비해 주시다니... 올해도 멋진 공연이 될거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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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나의 아버지, 테너 홍춘선[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나의 아버지, 테너 홍춘선

Posted at 2017.02.06 10:5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어려서 살던 집엔 대문 옆에 화장실이 따로 하나 더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홀로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 창문을 열고 담배 연기를 뿜으며 짜릿한 일탈을 만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 화장실 문을 연거푸 노크하더니 다급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엄마 깼다." 아버지였습니다. 벌써부터 알고 계셨지만 모르는 척 하셨던 겁니다. 그날 이후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입시를 앞둔 고 3 무렵도 마냥 느긋하기만 했습니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잠들어서는 해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잠결에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한참을 지켜보며 서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더니 아버지였습니다. 안방으로 건너오라 하시기에 정말이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휙 돌아서서 나가시면서 뜻밖에도 "명화극장 한다."는 말씀을 여운처럼 남기셨습니다. '명화극장'은 일요일 저녁마다 해외 명화를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혼자 살 때의 일입니다. 일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자는데 전화벨 소리에 단잠을 깼습니다. "점심 먹자." 아버지였습니다. 도착해서 전화할 테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대구에서 두시간 반만에 운전을 해서 도착하신 아버지는 골목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허름한 설렁탕집으로 들어가시더니 앉자마자 뜬금 없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니 사람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와 그리 좋아하는지 아나?"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었더니 "임마, 그건 세상에 없는 일이라서 그런기다." 라고 하셨습니다. 장남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마냥 기다릴 수가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소설과 영화에 푹 빠져 있었으니 혹시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느라 연애를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셨던 겁니다. 듣고 있는 아들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그렇다면 설마 결혼을 놓고 계산을 하느라 짝을 찾지 못하는가 싶어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니 요즘 젊은 놈들이 얼마나 한심한지 아나? 마누라가 아니라 원더우먼을 찾으니 그기 어디 있나? 날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가 좋거든 집구석에 들어가면 바깥 일은 입도 뻥긋하지 마라. 출세가 좋고 돈이 좋아서 그걸 거들어주길 바라면 마누라가 아를 안놓던지, 빨래를 안하던지, 밥을 안한다고 해도 암 말도 하믄 안된다. 간혹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여자가 있긴 있더라. 그런데 임마, 그기 니하고 무슨 상관이고?"

 

홍승찬 교수

 

70년대초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대구에서 서울을 이웃집 드나들 듯 다니셨습니다. 대구 효성여대(지금의 대구 카톨릭 대학교) 음대 학장이면서 국립 오페라단 주역이셨던 아버지는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 차를 운전해서 국립극장으로 가서 오페라 무대에 서셨고 밤늦게 다시 차를 운전해서 대구로 내려가는 강행군을 날마다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런 악조건에도 남들이 꺼리는 초연을 주로 도맡으셨고 그렇게 십년이 넘도록 우리나라 오페라 공연의 역사를 새로 쓰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몸담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행정 책임자로서 또한 믿을 수 없는 성과와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단과대학 음악학부에서 예술대학으로, 다시 음악대학으로 확대 개편하는 과정의 책임을 맡아 이끄셨는가 하면 학교 안에 여학생들만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직접 지휘자로 나서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를 오가며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u&no=22016

 

날마다 오케스트라 연습이 밤늦게까지 이어지자 집에 가는 차편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학교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의 귀가를 돕겠다고 나섰고 학생들 하나하나 집앞까지 다 가서 내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명절에도 집에 없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늘 집에 있던 승합차에 고기와 떡, 막걸리를 싣고 학교로 가셨습니다. 남들 쉬는 날에도 학교에 나와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직원들을 다 불러서 가져간 음식과 술을 나누고 선물을 돌렸습니다. 학교에서 일하는 누구라도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지만 지금도 일 때문에 가끔 대구에 내려갑니다. 언젠가 동대구역에 내려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자꾸 백미러로 저를 쳐다보기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조심스럽게 "혹시 홍학장님 자제분 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개인택시 하기 전에 효성여대에서 운전기사로 일했었다며 큰 딸 대학 등록금이 없어 못보낼 형편이었는데 아버지 도움으로 졸업까지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사코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면서 이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이렇듯 열 사람이 해도 모자랄 일을 홀로 다 감당하셨기에 무쇠같은 체력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짐작할 따름이지만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쳐 더 힘드셨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 그 마음 같을 순 없었을 텐데 이미 모든 걸 꿰뚫어보시고도 안타까움과 미련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셨던 겁니다. 서른 다섯, 처음 교수가 되어서 아버지께 달려갔습니다. 소파에 앉아 저녁신문을 보고 계시기에 임명장을 내밀었더니 힐끗 보시고는 다시 신문을 펼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난 그 나이에 학장 했다."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대화는 병원 침대맡이었습니다. 마침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으셨구나 싶어 얼른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혹시 꼭 보고 싶은 분 한 분만 말씀하세요. 제가 경찰청이든 어디든 다 쑤시고 뒤져서 모셔 올게요!" 잠시 일그러진 얼굴이 펴지면서 벌어진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제서야 드디어 아버지가 마음 속에 간직한 누군가를 알게 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미소짓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바뀌더니 짧게 단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누우셨습니다. "없다."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돌아가신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출근하는 길, 꼬리를 물고 선 차 속에서 서리 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속에서 얼마나 추우실까 생각하니 어느덧 눈물이 흘러 시야를 가렸습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눈물을 닦으려는데 끝내 설움이 복받쳐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갈 땐 뭐라도 손에 들고 가게 됩니다. 끼니가 될 만한 것이 아니면 군것질 거리라도 꼭 챙깁니다. 밤에 살찌는데 왜 이런 걸 가져오느냐 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말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선술집에 안주로 나오는 갖가지 구이 종류를 따로 챙겨오셨습니다. 밤늦게 잠든 우리를 깨워서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잠이 덜 깨서 눈을 감은 채 입만 벌리고 받아먹었습니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에 고기가 불에 그을린 연기 냄새까지 뒤섞인 아버지의 체취가 코 끝을 찔렀습니다. 눈을 떠서 볼이라도 비비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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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경희
    이건음악회에서 홍교수님의 진솔하고 인간적인 멘트가 인상 깊었는데,
    그 뒤에 아주 훌륭한 아버지가 계셨군요 노래도 잘 들었습니다 ^^
  2. 고은희
    동화같은 따뜻한 이야기네요.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을 많이 공유하고 있는 선생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3. 윤현준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4. 효성여고
    1977년 효성여고 2학년때.
    홍춘선 교수님을뵈었습니다.
    학교 강당에서 전교생에게 음악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 주셨죠. 그때의 그노래 중에 '오 솔레미오' 마이크 없이도 큰 강당을 가득채우던
    아름다웠던 노래의 감동은 경이로움과 충격이었고, 효성여대 오케스트라를 데려오셔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을 설명까지 해주시며 들려주셨죠.
    그 시절로서는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에 눈을 뜨게 해 준 분이었습니다.
  5. 효성여대 피아노과 81학번학번
    뵙고싶은 교수님. 훌륭하신 선생님. 참 교육자이신 교수님 소식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네요~그 옛날교수님과 수업하던 생각이나 흐뭇함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수업하시랴 오케스트라에 합창지도에... 정말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실 만큼 많은 활동하시며 손수 전체 음대를 이끌어 가시며 활동하시든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많은 학생 이끌고 경주로 연주여행 간 생각이 나네요.연주 뒷풀이로 호텔나이트로 학생들 모두 데리고 가셔서 우린 생애 처음 스트립쇼를 보며 그 놀라움을... 지금도 그때를 잊을수가 없네요.지방 여대에서 피아노밖에 모르고 교복입고 다니던 학창시절... 그래도 누구하나 위험해 질까봐 학생들 뒤에서 챙겨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 중 제일은 교수님이 부르시던 오페라곡.독일가곡들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어요. 그 큰 몸집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테너의 목소리를 우린 가까이서 듣고 공부하였으니 참 행복하였네요.이렇게 소식 접할수 있어 감사합니다.홍춘선교수님 당신은 참 멋지고 아름다우신 분이싶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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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을 듣는다는 것-홍승찬 교수] 호흡을 이해하는 자만이 노래를 이해한다.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을 듣는다는 것-홍승찬 교수] 호흡을 이해하는 자만이 노래를 이해한다.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

Posted at 2014.09.29 13:0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 음악사를 통틀어 그만큼 화려한 삶을 살다간 음악가는 없을 것 입니다. 홍승찬 교수의 저서 "그땐 미처 몰랐던 클래식의 즐거움"의 첫 장을 연 음악가는 엔리코 카루소 입니다.

 

 

화려한 삶을 살다간 음악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간판 스타였던 그는 뉴욕 시장이나 뉴욕 양키즈의 야구선수들보다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그가 움직일 때에는 반주자와 비서, 회계사, 운전사, 의상 담당자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수입도 어마어마해서 1918년 한 해 납부한 세금만 15만4천달러라고 합니다. 우리돈으로 1918년에 세금만 약 1억7천 이상 낸것이죠.

 

 

 

 

한번은 뮌헨 국립 가극장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공연하는데, 갑자기 무대장치가 무너지면서 카루소의 머리에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어서 공연이 계속되었는데, 극장장에게 문지기가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였답니다. "만약 카루소가 불구라도 되었다면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나았을 거에요. 그 막대한 보상금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성공을 거두기까지 카루소가 겪은 삶의 여정은 그야말로 혹독한 고난과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당대의 테너 베니아미노 질리는 "만약 내가 카루소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다. 나는 카루소처럼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가는 곳마다 따스함을 선사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Enrico Caruso Di quella pira High C countdown

 

1873년 2월 25일,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창고 노동자의 일곱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카루소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공장에 나가 푼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는 벌이마저 몽땅 술 마시는데 써버렸고, 학교조차 갈 수 없던 카루소는 어머니에게 겨우 읽고 쓰는 법을 익혔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재혼했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존재는 그에게 악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의 불운은 태어난 환경과 부모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라면서 인연을 맺은 스승들도 하나같이 견디기 힘든 고통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고된 밥벌이를 끝내고 저녁에 학교를 다닌 카루소는 브론제티 신부에게 노래를 배웠지만 브론제티는 부유층의 파티나 결혼식에 카루소를 내보내 노래를 부르게 한 뒤 그 수입을 가로챘습니다. 우연히 소개받은 유명한 성악 코치 베르지네도 어린 카루소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지만, 그 역시 가르치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를 이용해서 돈벌이할 생각뿐이었습니다. 그가 카루소에게 내민 계약서에는 4년을 가르친 이후 가수로 활동한 뒤 5년동안 얻은 모든 수입의 25%를 그가 갖는다는 조건이 적혀 있었습니다. 4년의 세월 중 3년은 군 복무를 해야 할 나이였으니 정작 가르친 기간은 겨우 1년뿐이었고, 활동하는 5년은 노래 부르는 시간만을 뜻한다고 주장했으니 평생을 그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셈이었습니다. 결국 이 어처구니없는 계약은 법정에 가서야 시시비비를 가렸고, 베르지네가 그동안 착복한 20만 리라를 내놓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카루소가 겪어야 했던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군에 입대한 카루소는 참호에서도 날마다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페라에 푹 빠져 있던 날리아티라는 장교가 그의 노래를 듣고 카루소의 동생으로 하여금 남은 복무 기간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의 불운도 끝나는가 싶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1894년, 그의 나이 21세 때 베르지네 선생은 하루빨리 카루소를 무대에 세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이자 메르카단테 극장의 매니저 다스푸로에게 부탁해 오페라 <미뇽>의 빌헬름 마이스터 역을 맡게 했습니다. 이전까지 제대로 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그는 대사를 잊고 시작도 놓치는가 하면 목소리마저 갈라지는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렸고, 결국 그의 출연은 취소되었습니다.

 

Enrico Caruso - La Donna E Mobile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카세라타 성당에서 함께 일하던 연주자가 그를 친구인 모렐리에게 추천한 것입니다. 그는 1895년 5월 15일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모렐리의 <아미코 프란체스코>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투리두 역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 <마농 레스코> 등 오페라에 잇따라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는 가능성이 있지만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의 대기 상태였지요. 그런 카루소의 소리를 제대로 다듬어 절정에 올려놓은 사람이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입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베리스모' 즉 사실주의 오페라가 꽃피웠고, 롬바르디 역시 베리스모의 열렬한 지지자인 터라 여리고 고운 소리를 내는 당시의 여느 테너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 있고 극적인 소리를 내는 카루소의 호소력을 누구보다 반겼습니다. 그에게 본격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카루소의 소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할 무렵, 한번은 작곡가 푸치니가 카루소를 찾아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도대체 당신을 내게 보낸 이가 누구란 말인가? 신이란 말인가?"라고 말하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카루소는 데뷔한 지 5년 만에 드디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대뷔했고, 1903년 11월 23일 이제 막 새로운 오페라의 중심지로 떠오르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으로 등장한 이후 해마다 시즌 첫 공연의 주역을 거르지 않으며 그만의 왕국과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카루소가 이렇듯 큰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재능과 그것을 갈고 닦은 롬바르디의 안목이 있어 가능했겠지만, 더불어 그 시대의 베리스모 오페라가 극적이고 힘있는 목소리를 갈망한 것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유럽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간 것도 결정적 이유 중 하나겠지요. 메트로폴리탄이라는 무대를 만난 것도 행운이겠지만 미국에서 이제 막 발명해 세계 음악의 판도를 바꾼 음반 산업 덕분에 그의 목소리와 명성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전파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의 신화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음반은 그의 목소리뿐 아니라 그가 부른 오페라 아리아는 물론 그가 즐겨 부르던 고향 나폴리의 유행가까지 영원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음반 때문에 카루소의 목소리는 이후 모든 테너의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카루소>에서 저자 마이클 스콧은 '적어도 1902년까지는 성악에 여러 가지 스타일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후의 모든 테너는 카루소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서술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그렇게 지독한 불운을 꿋꿋이 딛고 일어선 카루소의 성공을 재능과 행운 덕이라고 돌릴 수 만은 없을 것 입니다.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열정적인 성격을 타고난 카루소는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지만 거듭되는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의지를 발휘했습니다. 그런 성격은 목소리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끌어들이는 마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코벤트 가든의 수석 지휘자 퍼시 피트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카루소는 어떤 자리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저녁 파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코벤트 가든을 떠나자 모임도 곧 시들해졌다. 카루소가 없는 파티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실력까지 갖춘 카루소는 그림을 그려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습니다. 공연을 하는 동안에도 무대 뒤에 앚아 자신과 다른 가수들의 모습을 그려 선물로 주곤 했지요.

 

그는 타고난 광대였습니다. 노래 때문에 울고 웃었으며, 노래처럼 사랑에 빠졌고, 노래 때문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점점 많은 것을 바라고 요구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흠을 잡아 유명해지려 했고, 심지어 갱들로부터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티켓 가격이 높아지는 만큼 공연 부담도 커졌습니다. 한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오스카 헤머스타인이 그에게 계약서를 내밀려 직접 출연료를 써 넣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유감스럽게도 귀하의 가치만큼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하시는 만큼은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카루소가 마지못해 숫자를 기입하자 헤머스타인이 당장 그것을 두 배로 고쳐 썼지만 카루소는 다시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노래 부를 때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질 겁니다." 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모든 것에 너무 지쳤소. 세상 밖 어딘가에서 사람들도 나를 잊고 나도 사람들을 잊은 채 살고 싶소.' 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결국 1920년 크리스마스이브 공연을 끝으로 그는 무대에서 은퇴했지만 때늦은 결심이었습니다. 이미 늑막염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었고, 이듬해 여름 그토록 그리워하던 나폴리로 돌아갔지만 8월 2일 마흔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영원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필의 검은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나폴리 시민의 애도를 받으며 고향 땅에 묻혔습니다.

 

 

그가 불러서 유명해진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를 들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분노와 슬픔에도 분장을 하고 무대에 나가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광대의 비참한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

 

Leoncavallo-Pagliacci 中 Vesti la giubba(의상을 입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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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얻고자 노래를 불렀고 사랑을 얻고자 노래를 버린 마리아 칼라스]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 불멸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사랑을 얻고자 노래를 불렀고 사랑을 얻고자 노래를 버린 마리아 칼라스]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 불멸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

Posted at 2012.10.01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5)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사랑을 얻고자 노래를 불렀고 사랑을 얻고자 노래를 버린 마리아 칼라스

 

 

 

불멸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

 

 

 

 

 

누군가 저에게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 한 사람을 말하라면 선뜻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피아니시스트가 누구인지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해도 역시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거장들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골라 최고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마리아 칼라스를 꼽을 것입니다. 칼라스는 이전의 어떤 소프라노 가수와도 다르고 이후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오페라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인 프랑코 제피렐리는 마리아 칼라스를 추억하며 음악에서 BBefore Christ가 아니라 Before Callas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같은 소프라노라고 해도 소리가 무겁고 어둡거나, 아니면 가볍고 밝은지에 따라 맡을 수 있는 오페라의 배역이 달랐지만 칼라스는 그 어느 것도 가리지 않고 다 소화할 수 있었고 심지어 메조 소프라노가 부르는 영역까지도 섭렵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칼라스가 보여준 가장 큰 차이는 연기력이었고 노래와 연기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놀라운 힘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칼라스 이전의 오페라 가수들은 단지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면 칼라스에 이르러 드디어 노래를 연기하는 소프라노의 탄생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칼라스만 들어서는 그 진정한 매력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먼저 듣고 칼라스가 부르는 같은 노래를 들어야 그 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하지요. 그 만큼 그는 다른 누구와도 전혀 달랐고 그로 말미암아 어떤 소프라노도 가지 못했던 길을 홀로 걸어갔습니다.

 

 


 

그녀는 1938년 15살 때 아테네 가극장에서 데뷔하면서부터 스타가 되었다. 1952년 영국의 코벤트가든 왕립가극장에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주역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어 그녀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공연 장면은 1959년 파리에서 가진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의 4악장 가운데 한 장면이다.





 

 

 

그러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이 불세출의 소프라노의 어린 시절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1923122일 미국 뉴욕에서 그리스 이주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잃고 그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또 다시 아들을 원했던 부모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렸기에 그 실망은 고스란히 죄 없이 태어난 새 생명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또래보다 유난히 덩치가 크고 뚱뚱한데다가 지독한 근시로 두꺼운 안경까지 끼고 있었던 마리아는 늘 천덕꾸러기에다 외톨이었고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예쁘고 날씬한 언니의 차지였습니다. 덩치에 어울리게 목소리도 컸던 마리아가 오직 하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노래였습니다. 그걸 알게 되면서 칼라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자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무대에서의 삶을 꿈꾸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던 어머니는 뒤늦게 어린 딸의 재능을 발견하고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딸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딸의 성공을 통한 대리만족이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 1923. 12. 2 ~ 1977. 9. 16.)

 

아버지의 약국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이혼한 어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돌아갔고 마리아는 아테네 국립 음악원에 입학하여 성악을 공부하게 됩니다. 거기서 스페인의 성악가 엘비라 데 이달고를 만나 성악의 기초를 닦고 실력을 쌓아가지만 그리스의 정국이 혼란으로 치닫게 되자 1945년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해 겨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오디션에 응모했지만 탈락하는 아픔을 겪게 되고 겨우 힘들게 맺은 출연계약마저 기획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같은 기획사 소속의 베이스 가수 레메니의 소개로 1947년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지오콘다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유럽으로 돌아왔고 그것이 마리아 칼라스의 공식적인 데뷔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이탈리아의 부유한 사업가 지오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칼라스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칼라스를 사랑했던 그는 스스로 매니저를 자처하면서 그의 모든 것을 칼라스에게 바쳤습니다. 두 사람은 동거를 거쳐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고 메네기니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칼라스는 노래에만 전념하게 되어 역사상 최고의 소프라노로 등극하게 됩니다.

 

 

영원한 불멸의 디바 - 2007년, 스크린에 부활하다!


역사상 최고의 디바로 꼽히는 마리아 칼라스(화니 아르당 분)가 그녀의 공연 기획자 친구인 래리(제레미 아이언스 분)의 설득으로 은둔 생활을 접고 오페라 '카르멘'을 영화로 만들게 된다는 흥미로운 가상 이야기를 다루는 음악드라마.

 

 

 

라트라비아타, 슬픈 비극의 마지막 장면을 노래하는 마리아(1953년)

 

 

 

지난 날이여 안녕!을 노래하는 마리아(1953년 라 스칼라)

 

1956년 라 스칼라 - 라 트라비아타의 명연주(실황녹음)

 

 

 

Ah, perfido! - 1976년 3월 파리 엘리제 궁 극장에서 마지막 연주(실황)

 

 

 

영원히 살아 있는 마리아의 노래와 말을 들어보자!

1) Norma (studio, 1949)

2) Il Trovatore (Mexico City, 1950)
3) Puritani (Mexico City, 1951)
4) Macbeth (Milan, 1952)
5) La Traviata (studio, 1953)
6) Lucia di Lammermoor (Milan, 1954)
7) Andrea Chénier (Milan, 1955)
8) La Vestale (Milan, 1956)
9) Anna Bolena (Milan, 1957)
10) Medea (Dallas, 1958)
11) Il Pirata (New York, 1959)
12) Poliuto (Milan, 1960)
13) Samson et Dalila (studio, 1961)
14) Tosca (studio, 1965)

 

 

 

베로나에서 데뷔한 이후 대역으로 나선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에서 엘비라를 열연하여 오페라의 여신이란 극찬을 받았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이라는 라 스칼라에서 베르디의 아이다를 불러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칼라스는 당대의 프리마 돈나 레나타 테발디를 대신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이후 스칼라 극장과 멀어지게 된 테발디와는 늘 라이벌 관계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테발디를 넘어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연 칼라스는 코벤트 가든과 메트로폴리탄을 비롯한 세계 정상의 오페라 극장을 하나씩 정복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90킬로그램이 넘었던 체중을 28킬로그램이나 줄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지나친 감량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힘을 잃지 않아 또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렇듯 남달리 강한 의지를 가졌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칼라스는 사소한 문제로 사람들과 부딪혀 쓸 데 없는 불화와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돌연 출연을 취소하여 비난과 빈축을 사기고 했지만 그 때마다 메네기니가 나서 사태를 수습하고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메네기니의 이러한 헌신적인 사랑도 칼라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바꿔놓지 못했습니다. 역사상 그 누구도 누리지 못했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가 칼라스에게 접근했고 사랑에 눈이 먼 칼라스는 메네기니는 물론 오페라와 노래까지도 던져 버렸죠. 메네기니가 칼라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칼라스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오나시스에게 걸었지만 희대의 카사노바였던 오나시스의 관심은 이미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인 재클린에게 가 있었고 케네디가 비명에 세상을 떠나자 끈질기고 노골적인 구애 끝에 마침내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재클린과 신혼여행을 가서도 칼라스에게 전화를 걸 만큼 비열했던 오나시스를 포기하지 못했던 칼라스는 자기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가졌으나 오나시스의 변심으로 유산을 하였고 그 충격으로 자살까지 시도하였습니다.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려 영화 메데아에 출연하였고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이미 허물어져버린 심신은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겠다는 당대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나선 세계 순회공연은 칼라스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 만큼 초라하였습니다. 결국 이 무대를 끝으로 더 이상의 기력을 잃은 칼라스는 파리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끝에 1977916일 약물과용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에게 기자들이 칼라스와 테발디를 비교해 달라고 하자 그는 칼라스는 여자이지만 테발디는 아니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던 테발디는 딸을 업고 하루도 빠짐없이 먼 길을 치료받으러 다녔던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미운 오리새끼였던 칼라스는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 노래로 그 사랑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테발디의 노래와 연기는 너무나 절제되어 있어 고상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랑에 굶주렸던 칼라스의 노래는 구구절절 사랑으로 넘쳐납니다. 이미 가진 사람은 절실하지가 않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궁핍이 예술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가지지 못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애닲은 노래를 낳았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칼라스만이 부를 수 있다는 벨리니의 노르마는 배신당한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고 역시 누구도 따를 수 없다는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절망으로 미쳐버린 여인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군요.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가운데 토스카가 부르는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들으며 노래와 사랑이 삶의 전부였기에 사랑으로 노래를 부르고 노래로 사랑을 얻으려고 했던 한 여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 칼라스의 아베마리아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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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신의 목소리를 가진 테너 파바로티를 기리며...[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신의 목소리를 가진 테너 파바로티를 기리며...

Posted at 2012.06.15 11:59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5)
파바로티를 기리며

 

 


이탈리아 사람들은 하느님이 남자를 만든 다음 여자를 만들었고, 그리고 테너를 만들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테너는 특별해서 어딘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아닌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들마다 수준급의 테너를 구하지 못해 난리들입니다. 그래서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높은 음역만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테너라면 아무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말까지도 합니다. 이렇듯 공급이 수요를 전혀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니 테너들이 저마다 목에 힘주고 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습니다. 마치 발레에 있어 발레리노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이겠지요.

 

'천상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 세계적인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7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늘 뭇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고 보니 유명한 테너가수치고 스캔들이 없었던 경우도 참 드문 것 같습니다. 한 때 황금의 목소리를 가진 테너로 각광받았던 델 모나코라는 테너도 늘 염문이 끊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신문기사에 실려 곤혹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말하기를 당신들이 테너에 대해서 무얼 아느냐, 당사자인 내가 가만있는데 왜들 난리들이냐며 제발 남편을 그냥 두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힘과 긴장감으로 꽉 찬 목소리를 보여 주던 마리오 델 모나코.

 

테너들에게 있어 고음에 대한 부담은 한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이자 악몽입니다. 더러는 잘 나가는 테너가 어느 날 갑자기 고음이 나지 않아 무대를 떠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무대 위에서 이런 비극을 맞아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도 없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화려하고 열광적인 무대 뒤의 이런 암울한 상황이야말로 테너를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제 3의 인간으로 만드는 원인이겠지요. 테너들뿐만 아니라 성악가들의 목소리는 신체의 일부인 만큼 늘 몸과 마음의 변화에 민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릴 때는 주요 배역들의 대역을 미리 뽑아서 대기시키는 경우가 많고 유명한 가수들 중에는 대역으로 있으면서 기회를 얻어 성공한 경우가 많습니다. 파바로티가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 데뷔한 것도 스테파노의 대역으로 발탁된 덕분이었습니다.

 

 

 

테너가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역의 소리를 흔히 하이 C'라고 합니다. 피아노 건반에서 가운데 옥타브보다 하나 더 올라간 옥타브의 끝에 있는 도를 치면 나는 소리가 바로 그 음높이입니다. 그 음을 너무 쉽게 잘 낸다고 해서 '하이 C'의 제왕으로 불렸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20세기 오페라 무대를 카루소가 열었다면 그 마지막을 장식한 테너는 당연히 파바로티가 아닌가 싶습니다. 스포츠카의 대명사 페라리의 산지로 유명한 모데나에서 태어나 한 때 축구선수를 꿈꾸었던 파바로티는 뒤늦게 성악가의 꿈을 키워 오페라계의 판도를 바꾸고 결국 역사 속의 큰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계 3대 테너로 함께 군림했던 도밍고는 늘 파바로티에게 최고의 대우를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신이 내려주신 그의 목소리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도밍고의 목소리가 더 극적일지는 몰라도 그와 비슷한 목소리는 더러 다른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고 그 점에서는 카레라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파바로티의 목소리와 착각할 만큼 비슷한 목소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파바로티의 장점으로 고음을 쉽게 낸다는 것을 가장 먼저 내세우지만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그의 무기라면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의 음색일 것입니다.

 

 

 

 

파바로티는 그 유명세만큼 거기에 걸맞는 일화도 많습니다. 1988년 독일의 오페라 극장에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 출연했을 때는 1시간 7분 동안 무려 165번의 커튼콜을 받아 이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고 1990년 로마올림픽의 전야제에서 처음 시작한 쓰리 테너공연은 그 후 음반으로 발매되어 수백만 장이 팔렸고 당연히 클래식 분야의 최고 음반판매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쓰리 테너이후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라는 공연과 음반이 또 한 차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오페라를 떠나 지나치게 상업성과 대중성을 추구한다는 비난도 뒤따랐습니다.

 

 

 

 

그가 출연한 오페라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대표작이라면 첫 출세작인 라보엠의 로돌포역, 그리고 기네스북에까지 오르면서 파바로티를 일약 세계 최고로 만든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역을 아마도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같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이 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 도니제티의 연대의 딸도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하이 C"를 피해 고친 악보 대신 원래의 악보대로 불러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작품이지요. 로돌포의 상대역 미미로 출연했던 명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는 한살 차이의 동향 친구로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로 서로 호흡을 맞추었던 존 서덜랜드도 파바로티의 성공에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도쿄 공연에서 한 음대생이 무대에 뛰어올라 파바로티를 포옹하는 사건을 만들었던 리골레토의 만토바 역도 그의 장기임에 틀림이 없지만 오늘은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베르디의 레퀴엠가운데 한 곡을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레퀴엠은 죽은 자를 추모하는 미사인 만큼 더욱 의미가 있을 듯싶습니다. 산자의 기쁨과 죽은 이의 절망 대신 산자의 고통과 죽은 이의 평화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베르디 - 레퀴엠 中 <진노의 날> - 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르디: 레퀴엠(진혼곡)
VERDI: Messa da Requiem


2. 진노의 날
2. Dies Irae


Angela Gheorghiu
Daniela Barcellona
Roberto Alagna
Julian Konstantinov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 (conducto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Berliner Philharmoniker

Swedish Radio Chorus
Eric Ericson Chamber Choir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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