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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을 듣는다는 것-홍승찬 교수] 호흡을 이해하는 자만이 노래를 이해한다.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

by 블로그신 2014. 9. 29.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 음악사를 통틀어 그만큼 화려한 삶을 살다간 음악가는 없을 것 입니다. 홍승찬 교수의 저서 "그땐 미처 몰랐던 클래식의 즐거움"의 첫 장을 연 음악가는 엔리코 카루소 입니다.

 

 

화려한 삶을 살다간 음악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간판 스타였던 그는 뉴욕 시장이나 뉴욕 양키즈의 야구선수들보다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그가 움직일 때에는 반주자와 비서, 회계사, 운전사, 의상 담당자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수입도 어마어마해서 1918년 한 해 납부한 세금만 15만4천달러라고 합니다. 우리돈으로 1918년에 세금만 약 1억7천 이상 낸것이죠.

 

 

 

 

한번은 뮌헨 국립 가극장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공연하는데, 갑자기 무대장치가 무너지면서 카루소의 머리에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어서 공연이 계속되었는데, 극장장에게 문지기가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였답니다. "만약 카루소가 불구라도 되었다면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나았을 거에요. 그 막대한 보상금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성공을 거두기까지 카루소가 겪은 삶의 여정은 그야말로 혹독한 고난과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당대의 테너 베니아미노 질리는 "만약 내가 카루소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다. 나는 카루소처럼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가는 곳마다 따스함을 선사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Enrico Caruso Di quella pira High C countdown

 

1873년 2월 25일,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창고 노동자의 일곱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카루소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공장에 나가 푼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는 벌이마저 몽땅 술 마시는데 써버렸고, 학교조차 갈 수 없던 카루소는 어머니에게 겨우 읽고 쓰는 법을 익혔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재혼했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존재는 그에게 악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의 불운은 태어난 환경과 부모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라면서 인연을 맺은 스승들도 하나같이 견디기 힘든 고통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고된 밥벌이를 끝내고 저녁에 학교를 다닌 카루소는 브론제티 신부에게 노래를 배웠지만 브론제티는 부유층의 파티나 결혼식에 카루소를 내보내 노래를 부르게 한 뒤 그 수입을 가로챘습니다. 우연히 소개받은 유명한 성악 코치 베르지네도 어린 카루소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지만, 그 역시 가르치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를 이용해서 돈벌이할 생각뿐이었습니다. 그가 카루소에게 내민 계약서에는 4년을 가르친 이후 가수로 활동한 뒤 5년동안 얻은 모든 수입의 25%를 그가 갖는다는 조건이 적혀 있었습니다. 4년의 세월 중 3년은 군 복무를 해야 할 나이였으니 정작 가르친 기간은 겨우 1년뿐이었고, 활동하는 5년은 노래 부르는 시간만을 뜻한다고 주장했으니 평생을 그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셈이었습니다. 결국 이 어처구니없는 계약은 법정에 가서야 시시비비를 가렸고, 베르지네가 그동안 착복한 20만 리라를 내놓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카루소가 겪어야 했던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군에 입대한 카루소는 참호에서도 날마다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페라에 푹 빠져 있던 날리아티라는 장교가 그의 노래를 듣고 카루소의 동생으로 하여금 남은 복무 기간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의 불운도 끝나는가 싶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1894년, 그의 나이 21세 때 베르지네 선생은 하루빨리 카루소를 무대에 세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이자 메르카단테 극장의 매니저 다스푸로에게 부탁해 오페라 <미뇽>의 빌헬름 마이스터 역을 맡게 했습니다. 이전까지 제대로 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그는 대사를 잊고 시작도 놓치는가 하면 목소리마저 갈라지는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렸고, 결국 그의 출연은 취소되었습니다.

 

Enrico Caruso - La Donna E Mobile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카세라타 성당에서 함께 일하던 연주자가 그를 친구인 모렐리에게 추천한 것입니다. 그는 1895년 5월 15일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모렐리의 <아미코 프란체스코>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투리두 역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 <마농 레스코> 등 오페라에 잇따라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는 가능성이 있지만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의 대기 상태였지요. 그런 카루소의 소리를 제대로 다듬어 절정에 올려놓은 사람이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입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베리스모' 즉 사실주의 오페라가 꽃피웠고, 롬바르디 역시 베리스모의 열렬한 지지자인 터라 여리고 고운 소리를 내는 당시의 여느 테너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 있고 극적인 소리를 내는 카루소의 호소력을 누구보다 반겼습니다. 그에게 본격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카루소의 소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할 무렵, 한번은 작곡가 푸치니가 카루소를 찾아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도대체 당신을 내게 보낸 이가 누구란 말인가? 신이란 말인가?"라고 말하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카루소는 데뷔한 지 5년 만에 드디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대뷔했고, 1903년 11월 23일 이제 막 새로운 오페라의 중심지로 떠오르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으로 등장한 이후 해마다 시즌 첫 공연의 주역을 거르지 않으며 그만의 왕국과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카루소가 이렇듯 큰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재능과 그것을 갈고 닦은 롬바르디의 안목이 있어 가능했겠지만, 더불어 그 시대의 베리스모 오페라가 극적이고 힘있는 목소리를 갈망한 것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유럽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간 것도 결정적 이유 중 하나겠지요. 메트로폴리탄이라는 무대를 만난 것도 행운이겠지만 미국에서 이제 막 발명해 세계 음악의 판도를 바꾼 음반 산업 덕분에 그의 목소리와 명성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전파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의 신화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음반은 그의 목소리뿐 아니라 그가 부른 오페라 아리아는 물론 그가 즐겨 부르던 고향 나폴리의 유행가까지 영원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음반 때문에 카루소의 목소리는 이후 모든 테너의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카루소>에서 저자 마이클 스콧은 '적어도 1902년까지는 성악에 여러 가지 스타일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후의 모든 테너는 카루소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서술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그렇게 지독한 불운을 꿋꿋이 딛고 일어선 카루소의 성공을 재능과 행운 덕이라고 돌릴 수 만은 없을 것 입니다.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열정적인 성격을 타고난 카루소는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지만 거듭되는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의지를 발휘했습니다. 그런 성격은 목소리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끌어들이는 마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코벤트 가든의 수석 지휘자 퍼시 피트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카루소는 어떤 자리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저녁 파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코벤트 가든을 떠나자 모임도 곧 시들해졌다. 카루소가 없는 파티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실력까지 갖춘 카루소는 그림을 그려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습니다. 공연을 하는 동안에도 무대 뒤에 앚아 자신과 다른 가수들의 모습을 그려 선물로 주곤 했지요.

 

그는 타고난 광대였습니다. 노래 때문에 울고 웃었으며, 노래처럼 사랑에 빠졌고, 노래 때문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점점 많은 것을 바라고 요구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흠을 잡아 유명해지려 했고, 심지어 갱들로부터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티켓 가격이 높아지는 만큼 공연 부담도 커졌습니다. 한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오스카 헤머스타인이 그에게 계약서를 내밀려 직접 출연료를 써 넣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유감스럽게도 귀하의 가치만큼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하시는 만큼은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카루소가 마지못해 숫자를 기입하자 헤머스타인이 당장 그것을 두 배로 고쳐 썼지만 카루소는 다시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노래 부를 때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질 겁니다." 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모든 것에 너무 지쳤소. 세상 밖 어딘가에서 사람들도 나를 잊고 나도 사람들을 잊은 채 살고 싶소.' 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결국 1920년 크리스마스이브 공연을 끝으로 그는 무대에서 은퇴했지만 때늦은 결심이었습니다. 이미 늑막염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었고, 이듬해 여름 그토록 그리워하던 나폴리로 돌아갔지만 8월 2일 마흔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영원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필의 검은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나폴리 시민의 애도를 받으며 고향 땅에 묻혔습니다.

 

 

그가 불러서 유명해진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를 들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분노와 슬픔에도 분장을 하고 무대에 나가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광대의 비참한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

 

Leoncavallo-Pagliacci 中 Vesti la giubba(의상을 입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