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 - 베를린필하모닉 브라스 앙상블 가보 타르코비 Gábor Tarkövi KBS 교향악단 정기연주회 공연세계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 - 베를린필하모닉 브라스 앙상블 가보 타르코비 Gábor Tarkövi KBS 교향악단 정기연주회 공연

Posted at 2013.07.12 17:07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음악회 톡톡

 

지난 7월 4일과 6일에, 제23회 이건음악회 연주자인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라스 앙상블의 트럼펫 수석 가보 타르코비(Gábor Tarkövi 가보르 터르쾨비)씨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작년 이건음악회가 7월3일 인천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린지 딱 1년 정도되는 시점이고, 아름다운 연주를 꼭 다시 보고 싶었기에 공연에 찾아 가보았습니다.

 

KBS 교향악단 제 672회 정기연주회에 초대되어 한국에 다시 방문한 타르코비씨는 예술의 전당과 경기도 문화의전당에서 2회 협연을 하였습니다.

 

이번 연주회 포스터입니다.

 

 

 

 

타르코비씨의 사진.. -_-;;; 너무 젊게 나왔네요..  제가 저 사진 보고 러셀크로우 닮았다고 하니까.. 엄청 좋아했다는 사실!! ㅋㅋ 역시 잘생겼고 연예인 닮았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나 봅니다.  

 

 

 

 

연주 프로그램은 위의 사진을 클릭하시면 세부적으로 보실 수 있으십니다.

 

 

저는 예술의전당 리허설 때 방문을 했는데요. 환영 꽃다발을 들고 찾아뵈니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1년이 지났지만 ㅎㅎ 저를 기억해주셨어요. ㅠㅠ  보자 마자 영어로 "반갑다 No.1 오랜만이야!"라고 하시네요. 여기서 --;; 넘버원은.. 제가 작년에 연주자 의전을 담당하는데 의전용 휴대폰에 단축다이얼로 1번 표시를 했거든요. 1번 길게 누르면 나한테 연결된다고 ㅎㅎ 그랬더니 그 담부턴 절 넘버원으로 ㅋㅋ 부르더라구요 ㅎㅎ

 

 

예술의전당에서 리허설 할 때의 사진입니다.

 

 

고프로로 찍었는데 노출조절에 실패했네요 ㅠㅠ

 

아이폰5로 찍었습니다. ㅎㅎ

 

 

리허설 영상 간단히 보시겠습니다.

 

 

 

목요일 공연을 성공리에 끝내고, 다음 날인 금요일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세계적인 연주자와 함께 저녁을 먹다니!! 영광스러운 자리였지요. 헝가리인인 타르코비씨는 독일어는 잘하시는데 영어는 독일어 만큼은 아닌지라 ㅎㅎ 오히려 대화하기가 더 편했습니다. 제가 트럼펫을 다뤘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그래도 브라스 앙상블 다른 멤버들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요.

 

본인의 페이스북 계정 친구가 5,000명을 넘어서 페이지를 개설했다고 ㅎㅎ 친구 추가 못한 팬들이 많아 걱정이라고 자랑 반, 걱정 반 --;; 하시는 사려 깊은 아저씨! 팬 관리에 무척 신경쓰시는 모습이 다정다감하게 느껴졌습니다. ^^;;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 타르코비씨(서래마을) 

 

 

 

예술의 전당 리허설만 봤고 공연을 일때문에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토요일 공연에 초청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에도 공연을 보러 경기도 문화의전당으로 찾아뵈었습니다.

 

KBS 교향악단과 멋진 공연을 감상했구요. 공연 후에는 아래 사진 처럼 본인도 추척을 남기고, 페이스북용 ㅋ 사진도 찍으셨습니다.

 

 

본인의 사진 앞에서 즐거워 하는 모습

 

 

저와 함께 기념샷!!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음악회 팬들에게도 한 말씀 해주셨습니다. ^^ 저는 간단히 인터뷰만 요청했는데... ㅠㅠ 본인이 나서서 트럼펫 불면서 해야 멋지지 않겠냐고 ㅋㅋㅋ 하셔서 트럼펫을 불면서 간단한 인사 해주셨습니다.

 

 

 

 

 

 타르코비씨는 베를린필의 트럼펫 수석인 만큼 최고의 트럼펫 실력과 팬들에게 친절한 최고의 연주자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바로 다음 날 일본에서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라스 앙상블 공연이 있다고 했는데요.. 공연도 성공리에 잘 맞쳤다고 합니다. 페이스북에서 퍼온 사진 첨부합니다. ^^

 

 

 

아아아 !! 작년에 12일을 함께 전국을 돌며 콘서트 하던 기억이.. 매너 좋고 잘놀고 잘연주하는 베를린필 브라스 앙상블.. 멋집니다!!!

 

 

가보 타르코비씨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건승하기를 기원하며 오늘 포스팅은 마치겠습니다. 조만간 2012년 브라스앙상블 공연 실황을 업로드 하겠습니다. ^^ 많이 보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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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환
    작년에 이건음악회에서 연주듣고 빅팬이 됐는데
    아직도 그때 구입한 타르코비씨 씨디를 듣고 다닌답니다. ^^
    지방이라 이번 KBS연주회에 못 간것이 아쉽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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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의 거장. 마에스트로 카를로스 클라이버 (Carlos Kleiber | Karl Ludwig Kleiber) 그의 음악적 재능을 들여다 보다.지휘의 거장. 마에스트로 카를로스 클라이버 (Carlos Kleiber | Karl Ludwig Kleiber) 그의 음악적 재능을 들여다 보다.

Posted at 2012.12.17 09:49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40)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출처 : 구글 이미지

 

카를로스 클라이버(이하 카를로스)193073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베를린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 에리히 클라이버, 어머니는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루스 구드리치였다. 클라이버 본인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치 치하에서도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리히 클라이버가 알반 베르크[보체크]를 초연한 이후 베르크의 [루루]가 나치에게 퇴폐음악으로 분류돼 금지되자, 에리히 클라이버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음악감독직을 사임하며 저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나치와 에리히 클라이버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태어났을 때 이름은 카를 루드비히 클라이버였지만, 나치와 대립하고 있었던 에리히 클라이버가 1940년 아르헨티나에 망명했고, 스페인어권이었던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카를로스로 개명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피는 못 속인다 했던가. 카를로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적부터 뛰어났다. 9세 때 작곡을 하고 노래를 잘 했으며, 피아노와 팀파니를 연주했다. 아버지인 에리히는 카를로스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길을 걸으면 고생할까봐 아들이 음악인의 길을 걷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1950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결국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의 권유로 1952년부터 일단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대에 입학해서 화학을 전공했다. 1952년 라 플라타에서 지휘자로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53년에는 뮌헨 개르트너플라츠 극장에서 월급 없는 연습생 지휘자가 되어 지휘 경험을 쌓았다.

 

 

 

 

24세였던 1954년에는 포츠담에서 카를 밀뢰커의 오페레타 [가스파로네]를 지휘하면서 지휘자로서 데뷔했다. 이때 프로그램북에 실린 카를로스의 이름은 카를 켈러(Karl Keller)였다. 이날 무대에 서기까지는 아버지의 도움이 컸지만, 아버지의 후광을 얻어 지휘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에리히는 여기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카를로스에게 보낸 에리히의 전보에는 행운을 빈다. 늙은 켈러로부터라고 씌어 있었다. 에리히는 아들에게 충고를 해주는 한편, 오페라극장 관계자에게 소개를 했고, 공공연하게 아들의 음악활동을 따끔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젊은 카를로스 클라이버

 

 

젊은 카를로스는 지휘자로서의 커리어 초창기부터 연주회 무대에 서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연주회는 그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매번 자신의 지휘에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을 수 있는 절대적인 완벽의 사운드, 그에 걸맞은 해석을 이루지 못하면 지휘대 위에 서는 의미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카를로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를 아버지 에리히 탓으로 돌린다. 위대한 지휘자를 아버지로 둔 것은 카를로스에게 매우 큰 부담이 됐다. 성격이 무정했던 에리히는 그 표현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좀 더 따스한 부성애를 발휘했다면 카를로스의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지휘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임에도 아들의 지휘에 대해 아버지다운 뒷바라지가 부족했고, 카를로스의 불안정한 성격은 그에 말미암은 바가 적지 않다. 카를로스의 인생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복잡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Carlos Kleiber -Beethoven symphony No.7, Op.92 : mov.4

 

 

 

이후 뒤셀도르프, 취리히, 슈투트가르트 등 오페라를 지휘하던 카를로스는 1968년부터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를 자주 지휘하면서 명성을 확립했다. 1973년에는 빈 국립오페라에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데뷔했고, 19746월에는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7월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각각 데뷔했다. 1978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이 당시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실황은 비정규반이지만 골든 멜로드람 레이블에서 발매된 4장으로 구성된 세트(GM 4.0043)에 수록돼 있다. 슈베르트 [교향곡 3], 버터워스의 [영국 목가] 1], 그리고 뜨거운 연주인 베토벤 [교향곡 5]이 담겨 있다. 이후에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지휘대에 섰던 카를로스는 한 번도 음악감독직에 묶이지 않고 철저하게 프리랜서 지휘자를 고수했다.

 

 

 

 

 

1974년 베토벤 [교향곡 5] 녹음 이후 카를로스는 빈 필과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198212, 카를로스는 베토벤 [교향곡 4] 리허설 도중 견해 차이로 단원과 대립, 정기연주회를 취소해버리고 만다. 그 뒤 6년간 공백 후 19883, 카를로스와 빈 필은 화해하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모차르트 [교향곡 36린츠’]와 브람스 [교향곡 2] 등 당시 연주곡은 연습량이 많았음에도 실수가 눈에 띄었지만, 명연주에 넣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카를로스는 1989년과 1992년 신년음악회 때 빈 필과 만남을 가졌다

 

 

 

2011 Jecheon Intl Music & Film Festival : 마에스트로 - 카를로스 클라이버

 

 

 

카를로스는 단원들에게 음악 해석을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해 자세히 설명하곤 했다. 아버지인 에리히 클라이버와 비슷한 점이었다. 리허설 전에는 반드시 작곡가의 자필 확보를 확인하고 다른 연주자의 녹음을 구해 연주 해석을 확인하고, 아버지 에리히가 사용한 총보를 연구하는 등 그 준비과정이 세심하고 철저했다. 이렇게 치밀한 리허설에 비해 실제로 연주할 때는 발레를 연상시키는 독특하고 우아한 지휘모습으로 청중들, 오케스트라 단원, 협연자들을 매료시켰다. 그 지휘에서는 아찔한 속도감, 살아있는 리듬감, 색채의 강렬함, 서정적인 아름다움 등이 느껴졌다. 분명 천재 지휘자의 모습이었다.

 

 

 

 

 

그 질주하는 젊음으로 인해 카를로스는 항상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음악가로 인식됐다. 그러나 그는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좌우로 마주보게 배치하거나 악보에 수정을 하고 현악기의 보잉을 각 보면대마다 다르게 연주하는 등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방식을 응용했다. 이는 아버지 에리히의 강한 영향 아래 옛 지휘자들의 유파를 이어받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지휘자 파트보를 소유하고 그 내용을 적어 사용한 것도 브루노 발터 19세기 대지휘자들의 습성이었다.

 

 

 

 

클라이버는 단원들의 보잉을 모두 계산해서 적어 두었다. 다시 말해 청중들에게는 활을 올려 긋고 내리 긋는 것이 단원들의 자유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실은 클라이버가 각각의 스트링 파트 보면대마다 서로 다른 보잉을 명시해 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정되고 정확한 디테일을 끄집어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시카고 심포니에 객원지휘하던 시절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첼리스트 였던 프랭크 밀러는 이에 강력히 반발해서 악보 사서들은 첼로 파트 악보를 그로부터 지켜야 했다고 한다. 걸핏하면 클라이버의 보잉 지시를 삭제하고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을 적어놓곤 했기 때문이다. 클라이버는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시카고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모든 객원지휘자들 가운데 시카고 심포니의 악단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을 보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였다.

 

 

 

 

1970년 말부터 카를로스는 레퍼토리를 적게 유지하고 리허설 시간을 보통의 배 이상 잡아 연습했으며, 자신의 뜻에 거슬리면 연주를 취소하곤 했다. 이런 악취미가 오히려 카를로스의 희소성을 높이고 인기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카를로스의 공연은 늘 대체 지휘자를 마련해놓아야 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티켓은 항상 매진이었다. 몇 안 되는 녹음은 나오는 족족 명연으로 간주됐다. [장미의 기사]같은 곡은 음반 한 장만으로 만족 못해 해적반을 구하는 등 푸르트뱅글러와 비슷한 컬트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카라얀 사후 베를린 필 단원들 중 다수가 후임 음악감독으로 카를로스를 원했지만, 그는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일이라 거절했다. 인터뷰를 싫어했던 카를로스는 좀처럼 매체에 자신의 의향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친했던 번스타인에게는 나는 정원에 있는 야채와 같이 햇빛을 받고, 성장하고, 마시고, 자고 싶을 뿐이다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카를로스의 신경과민은 유명했다. 지나치게 예민했던 그는 협연자를 잘 주도하지 못했다. 나아가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을까 봐 늘 두려워했던 것 같다. 특히 무대에 오르기 바로 전 그의 긴장상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1970년대,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를 지휘해 [장미의 기사]를 연주할 때였다. 연주 직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음악 감독이었던 볼프강 자발리쉬가 카를로스의 대기실을 찾았다. 두 사람은 정중한 인사를 하고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자발리쉬는 카를로스를 무대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런데 막이 오를 즈음 카를로스는 거의 노이로제 상태가 됐다. 자발리쉬가 괜찮다고 격려하며 등을 떠밀어 억지로 무대 위로 내보냈다고 한다. 1970년대 말 클라이버는 어느 연주회에 앞서 구토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1980년대 후반부터 카를로스의 지휘는 뜸해졌다. 2~3년에 몇 번 정도의 페이스로 지속됐다.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 빈 필, 베를린 필 등 오케스트라도 한정됐다. 카를로스가 어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만으로도 큰 뉴스가 됐고, 연주회 티켓을 구한다 하더라도 그가 지휘대에 설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았지만 많은 팬들이 카를로스의 연주회를 기다렸다.

 

 

 

 

 

한 번은 베를린에서 한 번은 잉골슈타트(뮌헨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본사가 그곳에 있다, 이 때 클라이버는 개런티로 아우디 공장 견학과 승용차를 받았다 한다)에서, 한 번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고 빈에서 몇 번 지휘를 했다. 연주 횟수를 줄일수록 그가 벌어들이는 액수는 커져 갔다. 사람들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콘서트를 아주 희귀한 보석들과 동일시했다. 카를로스를 진정한 천재라고 평가한 카라얀은 이에 대해 냉장고가 빌 때에만 지휘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커리어 말기인 1998년과 1999년에 카를로스는 카나리아 제도와 사르데냐 섬에 나타났다. 둘 다 작렬하는 태양과 푸른 바다가 있는 전형적인 유럽 남쪽 지방의 섬이다. 1999년 초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사르데냐 섬의 주도 칼리아리에서의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클라이버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004713, 카를로스는 발레리나였던 부인 스탄카 브레조바르가의 고향인 슬로베니아에서 투병 끝에 간암으로 사망했다. 부인을 잃은 지 1년만이어서 카를로스의 자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매우 특별한 존재다. 강력하게 몰아붙이는 힘과 깊이있는 해석력, 오케스트라를 자기 몸처럼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에서 오는 유연하고 다이내믹한 지휘력 등등 그의 존재는 매력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 어떤 지휘자들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의 가장 큰 무기 중의 하나이다. 비인필하모닉을 지휘할 때에는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표현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화려한 경력에 비한다면 그가 지금까지 레코딩한 음반의 수는 정말로 너무 적다. 하지만 일단 그가 손을 댄 레파토리들은 대부분 명반의 대열에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만큼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지휘자 중의 한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가장 유명한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위시해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등은 이 분야 레코딩사에 길이 빛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슈트라우스의 박쥐’,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의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Angel), 슈베르트의 교향곡 3번과 8, 브람스의 교향곡 4(DG)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들이다.

 

 

 

 

 

 

 

 

 

노다메 칸타빌레 주제곡 - 베토벤 교향곡 7번 -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Beethoven Symphony no.7 Carlos Kleiber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1.avi

 

 

Beethoven Symphony no.7 Carlos Kleiber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2.avi

 

 

Beethoven Symphony no.7 Carlos Kleiber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3.avi

 

 

Beethoven Symphony no.7 Carlos Kleiber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4.avi

 

 

 

대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이기도 한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에리히 클라이버는 워낙 대지휘자였던 관계로 1935년 푸르트벵글러의 힌데미트 사건당시 그가 푸르트벵글러를 지원하고 나서는 바람에 나치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 아들인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야만 했다. 워낙 힘든 역정을 살아왔던 만큼 아버지는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자가 되는 것에 탐탁해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아들이 음악공부를 하는 것조차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휘법을 꾸준히 공부하고 많은 음악을 접해 결국 1952년 라프라타에서 음악인으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동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으로 갔다. 끝까지 음악을 하는 것에 반대하던 아버지 때문에 결국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스위스 연방공업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은 계속 남아 결국 1953년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인 겔트너 프라츠 극장의 무급 견습 지휘자로 지휘 인생을 시작했다.

카를로스의 잠재력을 알아본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오페레타 극장에선 1954년에 그를 지휘자로 영입하고, 이로 인해 그는 프로 지휘자로서 드디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1956년부터 1964년까지 뒤셀도르프와 뒤스부르크를 중심으로 라인 도이치 오페라의 지휘자로 오페라를 주로 연주하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후부터 그는 여러 오케스트라를 거치며 명성을 다져나가기에 이른다. 1964년의 취리히 오페라 극장을 필두로 1966년의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 등에 이르기까지 주로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의 진가를 과시했다. 이미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오페라 전문 지휘자로서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다질 수 있었다. 현대음악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를 비롯하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그너, 베르디, 비제, 베버 등 여러 작품들을 연주해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보체크의 경우 아버지인 에리히 클라이버가 세계 초연한 작품이라 부자가 나란히 이 작품을 멋지게 지휘해 이 분야의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높은 평가와 인기 등으로 그는 1968년부터 저 유명한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무대에 설 수 있는 영광까지 누리기에 이른다.

 

이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생애 명연 중의 하나로 평가받게 되는 위대한 작업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베버의 마탄의 사수이다.

 

1973년 드레스덴에서 녹음한 이 앨범은 현재까지도 이 작품 사상 최고의 명연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을 필두로 그의 파워풀하고 장악력있는 지휘봉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1973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과 197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 데뷔를 장식-, 비제의 카르멘’, 베르크의 보체크등 여러 명작들을 날카롭게 해석해 연이어 주목을 받았다.

 

그 후에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76년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텔로로 오프닝을 장식해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78년 스칼라 오페라 극장 개설 200주년 기념 공연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해 감각적으로 깊이있는 연출을 하는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오프닝 연주를 한 비제의 카르멘’, 시카고 교향악단과의 베토벤의 교향곡 제5’-이 작품은 그의 미국 데뷔작이기도 하다-, 뮌헨과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와 푸치니의 라 보엠등을 무리없이 지휘해 완벽한 지휘자로서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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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시시작
    베토벤 7번의 4악장은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죠..특히나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은 명불허전입니다.
    좋은 블로그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
    제 블로그도 꼭 한 번 들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http://gospel79.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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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2012.12.03 10:4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9)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192413,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조지 거슈윈과 버디 드 실바가 당구를 치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조지 거슈윈의 형인 아이라 거슈윈14일자 <뉴욕 트리뷴>지를 읽고 있다가 어느 대목에 시선이 머물렀다. ‘미국음악이란 무엇인가?(What Is American Music?)’라는 제목으로 펼쳐진 화이트먼의 콘서트 리뷰 기사였다. 마지막 단락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조지 거슈윈은 재즈 협주곡을 작곡 중이고, 어빙 벌린은 싱커페이션(당김음)을 쓴 교향시를, 빅터 허버트[미국 모음곡]을 작곡하고 있다.”이봐, 조지, 이것 좀 보라구. 지금 재즈 협주곡 작곡하고 있는 것 맞아?”

 

 

 

 

다음날 화이트먼과 통화하면서 거슈윈은 화이트먼의 라이벌인 빈센트 로페스가 재즈와 클래식을 융합하는 자신의 실험을 표절해서 선수를 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거슈윈은 마침내 작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남은 시간은 단 5. 거슈윈은 서둘러 작품을 썼다.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랩소디 인 블루]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1931년 거슈윈은 그의 첫 전기 작가인 아이작 골드버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기차 안이었다네. 열차 바퀴가 선로 이음새와 마찰하는 덜컹거리는 소리는 종종 작곡가들에겐 좋은 자극이 되지. 종종 큰 소음이 나는 가운데서 음악을 듣곤 하네. 거기서 갑자기 [랩소디 인 블루]의 구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번쩍 하고 떠올랐지. 마치 악보에 적혀있는 것 같았다네. 다른 주제는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 주제 선율은 이미 마음에 있었고 전체로서의 작품을 파악하려고 했다네. 그건 마치 미국을 묘사하는 음악적 만화경이나 다름없었지.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미국적인 기운이랄까. 블루스라든지 도시의 광기 같은 것 말일세. 보스턴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겐 어떻게 써야할 지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서 있었던 거야.”

 

 

 

 

미국을 묘사하는 거대한 음악적 만화경, 미국적인 기운

 

17일 거슈윈은 작곡을 시작했다. 원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던 이 작품에 붙였던 제목은 아메리칸 랩소디였다. ‘랩소디 인 블루라는 명칭은 형 아이라 거슈윈이 조지에게 제안한 것으로, 아이라 거슈윈은 미국의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전시회에서 [검은색과 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화가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작품) 등을 관람하고 명칭이 떠올랐다고 한다. 몇 주 뒤 거슈윈은 작곡을 마치고 화이트먼의 편곡자 퍼디 그로페(Ferde Grofé)에게 넘겼다. 훗날 [그랜드 캐년 모음곡]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는 그로페는 초연을 불과 여드레 앞둔 24일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을 마쳤다. [랩소디 인 블루]1924212, 폴 화이트먼과 그의 오케스트라(Palais Royal Orchestra)현대음악의 실험(An Experiment in Modern Music)’이란 제목으로 에올리언 홀에서 개최한 오후 콘서트에서 초연됐다. 초연은 화이트먼 밴드에 객원 현악 주자들을 보강한 가운데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연주로 진행됐다. 초연 악보에서 거슈윈은 화이트먼과 합의하여 1페이지 가량을 비운 채 진행했다. 그로페가 쓴 총보에도 ‘(피아니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연주를 계속한다는 부분만 적어 놓았다. 이 공백 부분을 거슈윈은 즉흥으로 연주했는데,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피아노 즉흥 연주 부분을 따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초연 당시 [랩소디 인 블루]가 어떻게 연주됐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공연차 미국에 왔을 때 거슈윈은 자신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라벨에게 요청했다. 라벨은 당신은 저절로 샘처럼 솟아나는 듯한 멜로디를 가진 사람이다. 일류의 거슈윈이 되는 편이 이류 라벨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고 거절한 일화도 유명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김연아 선수의 신들린 듯 눈부신 연기는 우리 모두의 넋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그 순간을 위해서 김연아 선수가 선택한 음악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끓었고 오래도록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바로 거쉬인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였지요. 오늘은 그 곡을 작곡한 조지 거쉬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이 막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던 시절,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인물이지요. 뮤지컬의 전성기를 살면서 주로 뮤지컬 작곡가로 뛰어난 업적과 걸작을 남겼지만 오히려 클래식 음악 쪽에서 더 크게 기억되고 있는가 하면 그가 만든 아름다운 히트곡들은 재즈의 스탠다드 넘버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거쉬인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와 함께하는 김연아]

 

 

 

조지 거쉬인은 1898,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거쇼비츠는 유태계 러시아인으로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와 열심히 살았지만 늘 어려운 살림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정은 화목했고 자식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거쉬인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사서 집안에 들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이들이 길에서 로울러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집으로 들어섰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려 이상하다 했더니 둘째 아들 조지가 혼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아들을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는 궁색한 살림에도 그린이라는 피아노 선생을 찾아 아들을 맡겼습니다.

 

 

 

늦은 나이에 음악에 빠져든 거쉬인은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 일대를 일컫는 틴 팬 앨리가 미국 대중음악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 일대에는 노래 악보 출판사들이 밀집해 있었고, 작곡가와 작사가도 자연스럽게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 조지 거슈윈이 직업 음악가로 발걸음을 딛기 시작한 곳도 바로 틴 팬 앨리였다. 오늘날로 치면 음대 작곡 전공생이 아니라 가요 기획사의 소속 작곡가로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불과 열다섯 살 때인 1913년 여름, 뉴욕 북쪽 캣스킬의 호텔 리조트에서 임시 피아니스트로 주급 5달러를 받은 것이 그의 첫 음악 활동이었다. 이듬해에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틴 팬 앨리로 직행해서 유명 악보 출판사 레믹에 취업했다. 열일곱 살 때인 1915년 첫 자작곡인 당신을 잃은 뒤를 발표했고, 연말마다 울려 퍼지는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작곡가로 유명한 어빙 벌린을 만나서 조수 역할을 제안받기도 했다.

거슈윈에게 음악은 이론적 바탕이나 학습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장에서 체험을 통해 습득하는 본능적인 것이었다. 악보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 출발해서 뮤지컬 극장에서 오케스트라의 휴식시간에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와 가벼운 오페레타의 반주자까지 다양한 경력을 쌓던 거슈윈은 스물한 살 때인 1919스와니(Swanee)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첫해 팔려나간 악보만 100만 권에 이르렀고 거슈윈이 그해 벌어들인 돈은 1만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 곡으로 가난과 작별하고, 곧바로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진출했다.

1922년 거슈윈은 당시 재즈의 왕으로 불리던 폴 화이트먼과 만났다. 해군 군악대를 지휘하다가 제대 후에 자신의 재즈 밴드를 이끌고 있던 화이트먼은 1924년 거슈윈에게 새로운 작품을 의뢰했다. 훗날 대표작이 된 랩소디 인 블루였다.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랩소디 인 블루가 등장한다]

 

 

 

바쁠 때는 불과 닷새 만에 새로운 뮤지컬을 써내야 했고, 제작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피아노 스케치를 쓰고 나면 전문 편곡자가 오케스트라 편곡을 대신 맡아주는 시스템에 익숙해 있던 거슈윈에게 본격적인 관현악곡은 부담이었음이 분명했다. 작곡가는 화이트먼의 제안을 가볍게 여기고 잊고 있었지만, 화이트먼은 거슈윈이 재즈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다고 발 빠르게 언론에 흘렸다. 자신의 관현악곡 작곡이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거슈윈은 단 5주 만에 작품을 써내려갔다.

 

 

 

19241월 뉴욕 에올리언 홀의 초연 당일, 지휘를 맡은 화이트먼은 초조한 나머지 공연 취소를 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날의 초연은 스트라빈스키의봄의 제전보다 위대하다” “재즈를 집안 부엌에서 꺼냈다는 호평을 받으며 20세기 미국 음악사의 중요한 하루로 기록됐다. 뉴욕의 히트곡 제조기가 드디어 콘서트홀에 상륙한 것이었다. 거슈윈은 소설가 피츠제럴드가 재즈의 시대라고 불렀던 192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1925년에는 미국 출신 작곡가 가운데 처음으로 타임의 표지에 등장했다. 작곡가 스스로도 재즈가 3분짜리 댄스용 음악만이 아니라 더욱 큰 주제와 의도를 지니고 있는 음악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랩소디 인 블루이후, 거슈윈의 영역은 급속하게 콘서트홀로 확장됐다. 더불어 그는 체계적인 음악이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고, 1928년 프랑스 파리를 찾았다. 작곡가 라벨의 쉰세 살 생일파티에서 사사를 청했지만, 라벨은 오히려 왜 일류 거슈윈이 될 수 있는데 굳이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하느냐면서 말렸다. 작곡가 에런 코플런드의 스승이었던 나디아 불랑제 역시 비슷한 이유로 거절했다. 거슈윈이 이번엔 스트라빈스키에게 배움을 청하자, 스트라빈스키는 그에게 작곡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거슈윈이 “1년에 10만 달러쯤 된다고 하자 스트라빈스키는 그렇다면 나야말로 당신 제자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당대의 어떤 미국 작곡가도 거슈윈과 같은 국제적 명성을 얻은 적이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1928년 거슈윈은 음렬주의 계열에 있던 알반 베르크와 빈에서 만나 교유했다. 베르크가 현악 4중주를 위해 편곡한 서정적 모음곡을 감상한 뒤, 이번엔 거슈윈의 작품을 청하자 그는 수줍게 사양했다. 유럽에 대한 미국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대중음악의 겸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베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거슈윈 씨, 음악은 음악일 뿐입니다.”

 

 

 

거슈윈은 결국 1932년 당시 러시아의 음악이론가로 이름 높던 요세프 쉴링거를 만나서 뒤늦게 체계적인 공부에 들어갔다. 역시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블라디미르 드로즈도프는 거슈윈은 20대부터 이미 유명 인사였지만, 언제나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알았고 공부하려는 의지와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라고 평했다.

 

1926년 뒤보즈 헤이워드의 베스트셀러 소설인 포기(Porgy)를 접한 거슈윈은 당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이사회 의장이었던 오토 칸에게 대형 재즈 오페라를 써달라는 위촉을 받자 이 작품을 오페라로 쓰기로 결심했다. 소수의 교양인보다는 다수에게 호소하겠다고 마음먹은 작곡가는 단짝 작사자인 형 아이라 거슈윈, 원작자인 헤이워드와 함께 작업한 끝에포기와 베스를 내놓았다. 서머타임」「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It Ain't Necessarily So)같은 명곡들이 이 오페라를 통해 탄생했다

 

작품이 단지 멜로디 좋은 곡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거슈윈은 이렇게 답했다. 그 노래들이 좋은 곡인 한, 나는 그 곡들을 쓴 것이 부끄럽지 않다. 베르디 오페라의 대부분은 히트송을 담고 있으며, 카르멘역시 히트곡의 다발이다.” 엉클 톰의 오두막집과 마찬가지로 이 오페라 역시 백인들이 바라보는 착한 흑인 상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전설적 소프라노 레온틴 프라이스를 비롯해 많은 흑인 가수들이 이 작품을 통해 당당히 오페라극장에 설 수 있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었다.

 

 

 

 

 

거슈윈의 관현악은 때때로 구성적인 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는다. 이를테면 작곡가이자 비평가 버질 톰슨은 포기와 베스를 본 뒤에 거슈윈은 오페라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하지만 굳이 단점을 꼬집기보다는 매력에 주목하는 것도 방법이다. 작곡가가 어린 시절 흠모했던 벌린의 말처럼 거슈윈은 내가 아는 유행가 작곡가 가운데 클래식 음악 작곡가가 된 유일한 경우였던 것이다.

 

크로스오버라는 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그는 클래식과 대중음악, 오페라와 뮤지컬 등 장르 사이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영역 파괴에 대한 문제의식을 촉발시켰다. 작곡가는 과거 다른 나라의 위대한 음악은 언제나 민속음악에 기반해왔다. 재즈, 래그타임, 흑인 영가와 블루스, 남부 산악 지역의 노래들과 카우보이의 노래 역시 미국 예술 음악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거슈윈은 나는 100년 동안이나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선율들을 갖고 있다고 자신했을 만큼 타고난 멜로디 메이커였지만, 서른아홉 살의 이른 나이에 뇌종양으로 타계했다.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거슈윈은 20여 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4편의 영화음악, 오페라 포기와 베스, 랩소디 인 블루를 비롯한 20여 편의 관현악곡, 387곡의 대중적인 히트곡을 남겼다. 거슈윈과 쇤베르크는 어쩌면 가장 거리가 먼 작곡가인 듯 보인다. 하지만 미국 망명 이후 거슈윈의 절친한 테니스 친구가 되었던 쇤베르크는 작곡가가 타계한 뒤 이런 추도사를 남겼다.

 

 

많은 음악가들이 거슈윈을 진지한 작곡가로 여기지 않는다. 역사가 그를 요한 슈트라우스와 오펜바흐, 레하르 같은 가벼운 작곡가로 볼지, 드뷔시와 브람스, 푸치니 같은 진지한 음악가로 판단할지 나 역시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예술가이며 작곡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표현했으며 그 아이디어는 항상 새로웠다.

 

 

 

 

 

 

본명은 Jacob Gershvin. 1898. 9. 26 미국 뉴욕 브루클린~ 1937. 7. 11 할리우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중적인 작곡가.

 

 

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음악을 썼지만, 예술음악의 기교와 형식을 대중음악·재즈의 기법과 다양하게 섞어놓은 그의 다른 작품들도 뮤지컬 음악 못지 않게 중요하다.

거슈윈은 러시아계 유대 이민 거쇼비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6세 무렵 연주현장에서 처음으로 재즈를 들었다. 어려서부터 연주회에 자주 갈 수 있었으며 12세 때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작곡가로 성공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작곡기법을 계속 넓혀 나갔으며, 한때 개성이 뚜렷하고 진보적인 미국 작곡가 헨리 코웰과 윌링퍼드 리거에게 배웠다. 그후에는 수학에 바탕을 둔 작곡으로 유명한 작곡가이자 이론가 조지프 실링거에게 배웠다.

1914년 제롬레믹음반회사에서 광고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전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년 뒤 최초로 음반녹음된When You Want'Em You Can't Get'Em을 출반했다. 그 노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몇몇 저명한 브로드웨이 작곡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오페레타 작곡가인 지크문트 롬베르크는 The Passing Show of 1916에 거슈윈의 노래를 1곡 포함시켰다. 그동안 계속 피아노·화성·관현악법을 공부했으며, 연습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1918~19년 거슈윈의 노래 중 여러 곡이 브로드웨이 공연에 포함되었고 신바드 Sinbad에서는 가수 엘 졸슨이 부른스와니 Swanee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맨 처음 쓴 뮤지컬은 , 라 루실 La, La Lucille(1919)이었다. 1920~241년에 1편씩 공연된 조지 화이트의 스캔들 George White's Scandals에 수십편의 노래를 제공했는데 이 곡들은 모두 1920년에 작곡한 것이었다. 1922년 공연된 조지 화이트의 스캔들을 위해 단막 오페라 우울한 월요일 Blue Monday을 작곡했다. 나중에 135번가 135th Street로 이름이 바뀐 이 곡은 스캔들의 지휘자이자 악단장인 폴 화이트먼의 주의를 끌었으며, 그는 거슈윈에게 재즈 양식으로 된 교향곡 1편을 의뢰, 그 유명한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1924)를 탄생시켰다. 이 곡은 원래 재즈 밴드와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으나 화이트먼의 편곡자인 작곡가 페르드 그로페가 여러 차례 관현악곡으로 재편곡했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1924년 뮤지컬 코미디 숙녀여, 선량하라 Lady, Be Good로 브로드웨이에서는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작품에는환상적 리듬 Fascinating Rhythm·, 숙녀여, 선량하라 Oh, Lady, Be Good(이 작품을 위해 작곡했으나 포함되지는 않음내가 사랑하는 남자 The Man I Love등의 노래가 있다. 이 뮤지컬은 또한 거슈윈과 친형제인 서정시인 아이라 거슈윈이 처음부터 쭉 함께 작업해서 눈길을 끌었다. 거슈윈 형제는 그후 10여 년 동안 브로드웨이 극장가에서 일급 노래 작곡팀이라는 명성을 쌓았다. 그들은 발끝 Tip-Toes(1925)·오 케이 Oh, Kay(1926)·밴드를 시작하라 Strike Up the Band(1927, 개작 1930)·우스운 얼굴 Funny Face(1927)·들뜬 여자 Girl Crazy(1930) 등 뮤지컬을 함께 제작했으며 그중 그대를 위해 노래부르리 Of Thee I Sing(1931)는 미국 정치체제를 대담하게 풍자한 것으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다. 거슈윈의 노래는 그의 삶을 다룬 랩소디 인 블루(1945)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영화에도 쓰였다. 듀보즈 헤이워드의 소설 포기 Porgy에 기초한 최고 야심작인 오페라 포기와 베스 Porgy and Bess(1935)는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오페라 대본작업은 아이라 거슈윈과 같이 함). 그는 이 작품을 쓰기 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연안의 한 섬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그 지역 흑인들의 음악과 관습을 익혔다. 그러나 이 작품은 행상들이 떠드는 소리를 빼고는 민속적 선율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민속 오페라'라기보다는 본격 오페라에 가깝다. 그는 이 오페라에서 원하는 극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대중가요 양식, 재즈 리듬, 오페라 아리아, 특유의 관현악법을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사용했다.

그의 고전 작품들로는 피아노 협주곡 F장조 Piano Concerto in F Major(1925),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Preludes(1926), 교향시풍의 파리의 아메리카인 An American in Paris(1928),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위한 두번째 랩소디 Second Rhapsody(1931)가 있다.

 

 

 

 

그는 머리카락이 유난히 많이 빠져 고민했습니다. 머리카락을 나게 한다는 냉장고만한 기계를 사서 하루 30분씩 치료를 받았지만,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면 벌써 우리나라 곳곳에도 머리카락방이 있었겠죠?

 

 

그는 고무 타는 냄새를 느끼면서 정신 줄을 놓는일을 되풀이해서 병원에 실려 가곤 했습니다만, 그때마다 의사는 스트레스 탓이라며 돌려보냈습니다. 거슈인은 계속 쓰러지다가 마침내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39세의 한창 나이였습니다.

 

 

거슈인은 늘 내 머릿속에는 100년 동안 악보에 옮겨 적어도 될 만한 곡들로 꽉 차 있다고 자랑했지만, 더 이상 그 곡들을 악보로 적을 수 없게 됐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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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정보네요...
    잘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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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 타이타닉의 마지막을 지킨 여덟명의 음악가를 아시나요?[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 타이타닉의 마지막을 지킨 여덟명의 음악가를 아시나요?

Posted at 2012.06.19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6)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

 

 


여러분은 혹시 바이올리니스트 월레스 하틀리(Wallace Henry Hartley)를 아십니까? 아마 클래식 음악에 꽤 관심이 있거나 조예가 깊다는 분들도 그 이름을 듣거나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영화 타이타닉을 보셨는지요? 그렇다면 배가 기울어져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때까지 갑판에 서서 끝까지 음악을 연주했던 악사들의 모습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여덟 명의 악사들을 최후의 순간까지 이끌었던 바이올린 연주자가 바로 월레스 하틀리입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과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하며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선장의 결연한 의지도 감동적이었고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연약한 여성들을 위해 기꺼이 구명선의 자리를 양보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일등실 영국신사들의 신사도 또한 너무나도 숭고했지만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가슴 뭉클했던 장면이라면 죽음의 순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음악을 연주한 악사들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RMS 타이타닉호의 악단 단장이였던 월레스 하틀리(Wallace Henry Hartley)

 

누구라도 갑작스런 천재지변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면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주저치 않을 것입니다. 지상낙원이라던 아이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 군상들의 처절한 몸부림과 이로 말미암아 나날이 더해가고 있는 끔찍한 참상을 보고 있노라면 생존 앞에 헌신짝처럼 버려진 인간의 존엄성이 서글프기만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오래 전에 본 영화 타이타닉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이겠지요. 누구도 이기기 힘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음의 순간까지 음악을 연주했던 타이타닉의 여덟 명 악사들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여덟 명 모두의 신원이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모범을 보여 다른 악사들이 따르도록 했던 밴드 마스터 월레스 하틀리의 존재만큼은 확실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1878년 영국의 콜른에서 태어난 하틀리는 보험판매원을 아버지로 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줄곧 여객선의 악사로 일했습니다. 죽기 전까지 무려 70여 차례의 항해를 마쳤고 타이타닉에 오르기 직전에 마리아 로빈슨(Maria Robinson)이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처음에는 승선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최고 여객선의 처녀항해에 참여하고픈 의욕이 앞서 계획을 바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항해가 그의 마지막이 되었고 그의 사랑 또한 그렇게 끝나 그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하틀리의 장례식에는 무려 4만 여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숭고한 죽음을 추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고향 콜른에는 3미터 높이의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호주의 내륙도시 브로컨 힐(Broken Hill)에는 하틀리를 포함한 여덟 명 악사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기념탑이 서 있습니다. 얼핏 영국도 미국도 아닌 호주에 있다는 것이 엉뚱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된 사연에는 잔잔하지만 또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20세기 초 은과 아연 등을 채굴하는 광산으로 경기가 좋았던 이 도시는 스포츠 말고 별 다른 오락거리가 없었지만 네 개나 되는 밴드가 있어 나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어느 날 멀리서 전해온 타이타닉호 악사들의 미담에 감동한 이곳 밴드의 악사들이 기념탑 건립기금을 위한 모금운동에 앞장서게 되었고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131221일에 마침내 추모탑 제막식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제막식에서 네 개의 밴드가 참여한 연합악대는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악사들이 연주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찬송가 “Nearer, My God, to Thee"(내 주를 가까이)를 연주했고 기념비에는 그 찬송가의 가사와 함께 오선지에 그려진 네 소절의 악보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 타이타닉호의 악사들이 실제로 이 곡을 연주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일등실 승객이었던 캐나다인 베라 딕(Vera Dick) 여사와 알버트 부인 등 몇몇 승객들이 그렇게 증언했고 하틀리 또한 평소 측근들에게 자신이 만약에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바로 그 찬송가를 연주하겠노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지만 타이타닉호 사건을 다룬 책 “The Story of THE TITANIC""A Night To Remember”에는 다른 증언과 정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통신실에서 일했던 이등 통신사 해롤드 브라이드에 따르면 당시 악사들이 연주했던 곡은 가을”(Autumn)이었다고 하고 당시 구명정 하강을 직접 지휘했던 항해사 라이드는 곡명은 알 수 없지만 찬송가가 아니라 경음악이었다는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베라 딕 여사의 경우 배가 침몰하기 1시간 20분 전에 구명정을 탔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이미 악사들의 연주를 들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는 것이고 진술자들 가운데 브라이드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구나 살려고 발버둥치는 긴박한 상황에서 음악가로서의 본분과 사명을 잊지 않고 음악을 통해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동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음악가라면,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 이들 말고 누가 또 이렇게 했는지 누구라서 이렇게 할 수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통해 다른 이들이 위로를 얻고 평정을 찾았겠지만 그들 스스로가 또한 그 음악에서 힘을 얻어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는 최후의 순간에도 동요치 않고 평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Nearer, My God, to Thee /L.Mason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to thee

E'en though it be a cross
That raiseth me

Still all my song shall b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to thee

Though like the way wanderer
The sun gone down

Darkness be over me
My rest a stone

Yet in my dreams I'd b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to thee

There let the way appear
Steps unto heaven

All that thou sendest me
In mercy given

Angels to beckon m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to the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to thee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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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콰당탕헉
    그 악단도 실존했던 거군요. ㅠ. 흐미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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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감상에 관한 제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오해와 편견 / 음반 평론 / 음악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 연주의 선택 / 악기 배우기음악 감상에 관한 제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오해와 편견 / 음반 평론 / 음악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 연주의 선택 / 악기 배우기

Posted at 2012.01.15 14:16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클래식 음악 감상에 관심을 갖고 첫 걸음을 내딛는 분들에게 비록 저의 사사로운 경험과 생각에 의한 것이지만 클래식 음악의 한없이 드넓은 세계에 들어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드리는 글입니다. 이 아름답고 기쁜 여행에 부족하나마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다른 애호가분들도 좋은 의견 나눠주시면 유익한 조언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1. 클래식 음악에 대한 오해와 편견

클래식 음악은 기득권층을 위한 문화라든가 잘난 척하려는 사람이나 듣는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거나 그 진심을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클래식으로 불리는 음악이 창작 당시에는 일반 민중을 위한 것이기도 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아름다운 가치가 퇴색되지 않고 탁월한 예술성을 인정받았기에 클래식으로 명명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런 오해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테면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것은 원더 걸스의 텔 미를 좋아한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진짜가 어디 있고 가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편, 클래식 음악이 대중 문화 전체에 비하면 그 규모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을 즐기는 데에도 팝보다는 좀 더 많은 시간과 공부 같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간혹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도 없지 않습니다. 또 저마다 문화적 취향이 상이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울려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자 할 적에는 상대적으로 보다 진지하고 무게가 느껴지는 클래식보다는 누구나 쉽고 가벼운 기분으로 즐길 수 있는 대중 가요가 상황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즉 우리가 어떤 음악을 좋아한다고, 즐긴다고 할 적에 그것이 공통의 관심사에 속하는가, 해당 상황이나 분위기에 적절하게 어울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둘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2. 감상 레퍼토리의 선정과 작품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

무엇을 들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본적인 레퍼토리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섭렵하는 것도 좋고, 가령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여러 곡들을 부담없이 두루 듣는 과정에서, 또는 광고나 드라마, 영화를 보다가 정말 우연하게 특별히 자기 마음에 와닿는 음악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걸 찾아서 듣는 것도 음악 감상에 자발적인 동기와 흥미를 부여하므로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다만, 만약 관련 자료를 찾아 공부하면서 노력해도 잘 이해되지 않고 마음에 와닿지도 않는다면 유명한 곡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들으려고 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을 이해하는 데는 다소의 공부가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음악 감상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즐기기 위한 것이므로 마치 고생하며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이 된다면 본래의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다만 무슨 일이든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므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듣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다시 들으면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관 없을 것입니다.

음악 감상에서 우선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이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입니다. 동일한 작품에 대해 워낙 많은 연주가 있다보니 요즘은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는 듯한 인상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참고 서적을 통해 작곡가와 작품에 대한 해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작곡 배경이나 관련된 일화, 당시 작곡가의 심경이나 처지, 동시대 및 오늘날 유명 인사의 평가, 악보를 토대로 한 작품 분석 등은 곡을 깊이 있게 감상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다만, 일종의 설에 불과하거나 심지어는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경우도 종종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밖에 오페라나 가곡, 종교 음악 같은 성악곡은 가사와 대본의 숙지가 필수적이며 표제 음악이나 음악극에 등장하는 이데 픽스라든가 라이트모티브처럼 등장 인물이나 정황을 상징하는 주제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배가시켜 줍니다. 그밖에도 소나타나 푸가 형식에서의 주제의 제시와 발전, 재현과 같은 곡의 구조적 이해, 가곡이나 종교 성악곡에 있어서 가사와 음악의 밀접한 연관성의 문제, 고전 시대 모음곡과 교향곡을 구성하는 춤곡의 유래와 형태, 기능 등 약간의 공부만 뒷받침된다면 음악 감상의 재미와 깊이를 더할 수 있게 하는 소재들이 참 많습니다.



3. 연주의 선택 - 음반 평론

대중 가요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 노래의 주인인 가수만 부르게 되어 있지만 클래식 음악은 다릅니다. 같은 곡을 두고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무수히 많은 음악가들이 연주해왔고 시중에 나와 있는 음반도 무척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 어떤 작품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CD를 사야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음반을 선택하는 데에는 저명한 음악 평론지나 평론가의 추천만큼 신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높은 평가를 받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음반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절대로 괜히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것은 해당 평론을 통해서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의 그라모폰이나 펭귄 가이드의 음반 평론가들은 음악학교 교수나 직업 연주자 출신으로서 그들의 평론은 학문적인 연구에 입각한 해박한 지식과 실제 연주 경험이 토대가 된 현실적인 판단력을 바탕으로 누구보다도 타당성을 갖춘 평가를 이끌어냅니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르기도 하고 간혹 같은 사람이 종전의 평가를 번복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가이드 북도 매년 업데이트 되면서 같은 음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연주를 찾겠다고 시중에 나와 있는 음반 전부를 들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군다나 지금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감안한다면 권위 있는 평론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물론 언제나 이에 의존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연주 자체 - 누가 지휘했는지, 누가 연주했는지 - 에 크게 연연하지는 말라는 것을 일단 전제로 두고 싶습니다. 누가 연주하든 결국 바하는 바하이고 베토벤은 베토벤일 뿐입니다. 가디너가 연주했다고 베토벤의 음악이 헨델의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니며 클렘페러가 연주했다고 바하의 음악이 브람스의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작품을 다른 음악가의 연주로 들을 때 그 작품에 대한 인상을 상당히 달리 받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아무리 명성이 높은 연주라도 연주자의 개성이 지나치게 두드러지거나 작위적으로 해석한 연주는 뒤로 미루는 선에서 음반 선별은 그치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오페라 DVD를 보고자 할 때에도 처음에는 현대적인 재해석에 의한 것보다 가급적 작곡가의 의도에 부합하는 연출로 공연된 것을 선택하는 게 작품 이해에 알맞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일에 음반 평론을 참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곡 자체를 들어보기도 전에 무슨 음반을 사야할 지 고민부터 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작품보다 연주에 더 큰 중요성을 둠으로써 작품과 연주 사이에 편향된 자세를 갖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4. 음악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작곡과 연주 활동은 음악가로서 타고난 재능과 오랜 시간을 통한 공부와 훈련으로 습득한 기능을 요하는 일입니다. 설령 아무리 음악이 마음에 안들어도 음악가의 능력에 대한 기본적인 인정조차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음반 매체와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레코드 100년 역사에 걸쳐 만들어진 수많은 연주 녹음들을 너무나 편하게 구해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다보니 한편으로는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의 연주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카라얀은 지휘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원하는 게 있는 것과 그것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피아노 건반 하나 눌러본 적 없는 사람도 음악을 좋아하고 많이 들어왔다면 직업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음악이 어떤 식으로 들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직업 음악가가 애호가와 다른 점은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음악을 만들 줄 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음악가들이 평생 동안 배우고 훈련해 얻은 지적, 심미적, 신체적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칼 리히터는 음악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프레이징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프레이징 하나만 언급했을 뿐이지만 사실은 바로 이 프레이징이라고 하는 것에 음악 연주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갑니다. 멜로디의 흐름, 개별 음의 길이와 연결, 악센트 등 아티큘레이션, 셈여림과 그 변화, 음색 등, 악보상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과 그것만으로는 실제 연주에 불충분한 그 모든 것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끄는 건 음악을 이해하는 타고난 재능과 공부로써 가능해집니다. 비음악가가 음악을 듣고 즐기는 것과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연주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있다고 그렇게 들리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결국 음악 애호가의 입장에서 어떤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언정 음악가의 능력마저 부인하는 건 결코 온당한 처사가 아닙니다.

어떤 것을 비판하려면 철저하고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한 정확하고 완전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부정적인 시각만을 가지고 트집잡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 주장은 명확한 근거나 합리적인 설명이 제시되지 않으니 타당성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전혀 말이 안되는 억지일 뿐이지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통해 무분별하게 게시되고 읽히면서 잘못된 선입견을 조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5. 적정 음반 수 - 경제성의 문제

음악을 많이 좋아하게 되면 다른 작품이나 연주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히 많은 음반들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다양한 음반들을 갖고 듣는 것은 자신의 음악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많은 수의 음반을 갖는 것은 그리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좋아하는 것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힘들어도 직장에 나가 일도 해야하고 학생은 공부도 해야합니다. 또 여가 시간을 음악 듣는 데만 쓰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나면 음악 감상뿐 아니라 책도 읽고, 운동도 하고, 여행도 가고, 아는 사람 만나 얘기도 하고 어디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습니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음악 듣는 데만 투자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만약 음악 듣는 데만 몰두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면 균형잡힌 삶이라는 관점에서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지나치게 많은 양의 음반은 경제성의 기준에서 봤을 때 별로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또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 갖고 있는 음반 수가 늘어가면 그 하나하나에 손이 가는 빈도는 낮아지게 마련입니다. 경제학을 빌어 말하자면, 음반 수가 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새로운 음반 하나를 추가해서 얻는 즐거움(효용)보다 그것을 잘 간수하는 데 드는 노력과 공간(비용)이 더 커지는 임계점을 지나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음반을 갖고 있다는 게 더 이상 즐거움이나 자랑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짐이 되고 맙니다. '이사하다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내가 없을 때 누가 잘못 만져서 망가지면 어떻게 하지', '밤중에 천장에 비가 새서 음반이 물에 젖기라도 하는 날이면...' 온갖 근심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작품으로 너무 많은 음반을 구입하는 것도 되도록이면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특정 작곡가, 특정 작품에 빠져서 같은 곡으로 여러 음반을 사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르고나면 결국에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보다는 작품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게다가 언제까지나 지금 내가 좋아하는 곡만 들을 것도 아니고 다른 작곡가, 다른 작품에 관심이 가게 되면 호기심에 구입한 그 많은 음반들은 자리만 차지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아하는 작품이라도 한 곡당 음반 수가 다섯 종을 넘지 않게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세 종을 넘지 않게끔 하려고 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다른 수많은 다양한 작품들 음반 한둘씩 갖추는 데에 적지 않은 비용이 계속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음악 감상에도 경제성이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음반 전부 다 갖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누구든 음악 듣는 데 쓸 수 있는 시간과 돈, 음반을 보관하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렇게 제한된 한도 안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보다 고르고 다양하게 음악을 듣는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5-1. 음반을 삽시다.

앞에서 경제적인 음반 구입을 제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터넷을 통한 불법 음원의 유포와 그로 인한 음반 시장의 불황 및 음반사와 음악인들의 경제적인 손해가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시장 경제의 핵심적인 원리 중 하나가 자원의 합리적인 분배입니다. 음반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악인들이 공부와 노력으로 습득한 실력으로 연주한 것을 음반사가 자본을 들여 녹음하고 제작한 것이며 음반 시장을 통해 유통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상적인 경로를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복제된 음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음악인과 음반사가 투자한 것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연은 연주회장에 직접 가서 관람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시간적으로든 금전적으로든) 항상 용이한 일은 아니기에 그 대안으로 삼도록 만들어진 것이 바로 CD와 DVD-Video입니다. 더 나아가 차세대 영상 매체로 최근 결정된 Blu-ray Disc로 새로운 타이틀들이 속속 출시되기 시작하면서 전세계 무대에서 열리는 공연들을 획기적으로 향상된 화질과 음질로 집에서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가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저변이 튼튼하지 않은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음반들이 수입되고 판매되고 있다는 건 애호가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입니다.

요즘에는 뭐가 필요하면 돈 안 들이고 왠만하면 인터넷에서 구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니 음반의 경우에도 정품을 구입하기보다는 인터넷에서 파일(아마도 대개는 불법)을 구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클래식 음반은 비록 가격이 좀 비싼 편이기는해도 충분히 돈들여 장만할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비록 기록 매체에 불과하지만 음반도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순화하는 역할을 하는데 돈 좀 쓰기에 아깝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다른 일에는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데요. 현실적으로 사치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정신적인 존재이고 누구나 각자의 여건 하에서 절약해 모은 돈으로 산 음반이 얼마나 소중한 추억과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갖게 된 좋아하는 음반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마음이 갈 때마다 꺼내어 감상하고 다시 잘 꽂아두면서 벗처럼 늘 가까이 두는 뿌듯한 마음이 있습니다. 반면에 컴퓨터 파일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애틋한 정이 들지 않지요. 게다가 파일은 잘못해서 지워지거나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오랫 동안 간직하면서 두고두고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 소장용으로는 안전하지 못합니다. 공디스크에 구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폼은 안 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작사에 따라 다르지만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북클릿은 인터넷은 물론 심지어 왠만한 클래식 서적 이상의 심도 있는 해설을 담고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익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저는 고클 다운로드보다 음반을 직접 구입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고클이 여러 음원들을 가지고 상업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정통적인 권한을 저작권자로부터 부여받은 것도 아닙니다. 저작권(또는 저작인접권)이 만료된 음원을 복제하는 것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회원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에서 조직적인 형태로 행해지다면 분명 음반 시장에서의 수요를 일부 잠식하는 효과를 발생시킬 것인데도 이윤 중 일부가 음반 시장이나 해당 음반사, 연주자들에게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작권법을 위반하는 사례를 피하고 있을 뿐이지요.

아시다시피 최근 영화 불법 파일이 큰 문제가 되었는데 시장 규모는 상대가 안 되겠지만 클래식 CD/DVD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EMI 음반 뒤에 보면 음반 불법 복제 같은 행위가 음반업계 종사자들의 생계를 위협하므로 삼가달라는 문구가 있더군요. 물론 자기가 모르는 남까지 신경쓸 생각은 없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공허한 부르짖음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아무렇지도 않게 해도 되는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다 인터넷으로 불법 복제 파일을 찾고 다운로드로 음악을 듣는다면 음반사 입장에서는 녹음/음반을 제작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적절히 보상받지 못할 것이고 그런 상황이 심각해진다면 어떤 사람이 돈들여 공연을 녹음하고 음반을 제작하려고 할까요. 지금의 소비 행태로 인한 결과가 결국엔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 작품의 본질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유명한 곡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음반이 수십 종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 많은 연주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해당 곡에 내재한 다양한 차원의 세계를 드러내고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애호가의 입장에서 이것은 아주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흥미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 연주들을 두고 너무 비교하는 데 골몰하는 것은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작품도 그것에 꼭 부합하는 단일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작품 자체에 대한 초점을 잃게 하거나 특정 연주들 사이의 우열을 결정짓는 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연주든 대부분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음반화된 것이라면 어느 정도는 검증된 수준의 연주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또 어떤 연주가 음악적으로 훌륭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는 꼭 다른 연주와 비교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 연주만 놓고서도 그 자체로서 타당한 가치 판단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작품 연구와 음악을 연주하는 일에 대한 지적인 이해로써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분별심이 무명(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지식은 인간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의 참된 지성의 기능을 가리기도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이 뭔가를 안다고 할 적에 그는 다른 대상을 자기가 알고 있는 인식의 틀을 통해 봅니다. 그럴 때 그 대상을 100%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에게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휘로 된 차이코프스키 연주에서 실망감을 느꼈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으로 본인을 위해 바람직한 일인가, 그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음악을 들은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드보르작은, 한 일화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베토벤의 5번 교향곡에 대해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꼭 토스카니니나 푸르트뱅글러나 클라이버같은 연주를 들어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중소도시의 이름 모를 악단이 연주한 것이라도 베토벤 음악의 위대함을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저것 서로 비교하고 따지면서 '이 부분은 누구보다 좋고 저 부분은 누구보다 나쁘다'는 식의 판단이 그 연주를 평가하는 타당한 방식일지 의문입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부분만 서로 떼어내 붙인다면 따로 봤을 때에는 좋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상실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여러 미녀들에게서 가장 예쁜 부분만 떼어내 합친다는 게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새로 합쳐진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연주에 대한 평가는 부분적인 것에 대한 고려를 포함하더라도 결국은 통일성과 일관성이 유지되는 전체 맥락에 의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균형잡힌 시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러 연주를 듣는 것은 분명 작품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고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유익한 경험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소중한 것을 망각하면서까지 그것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건 중심을 벗어난 일일지도 모릅니다.




7. 작품과 연주에 대한 평가

음악을 좋아하고 많이 들을수록 저마다 음악에 대한 나름의 생각과 가치관을 갖게 마련이고 이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를 형성합니다. 이것은 또한 각자의 개성과도 상통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품과 연주에 대하여 내가 지금 판단하고 있는 게 반드시 가장 옳고 고정불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음악을 듣는 경험이 쌓일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과 연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이해가 깊어지면서 기존의 생각이 수정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음악과 연주에 포함되는 여러 다양한 가치들에 대해서 능히 고려할 수 있는 변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는 것도 전에는 몰랐던 것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깨닫도록 합니다.

간혹 어떤 작품이나 연주에 대해 다소 부당하게 낮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나 어떤 평가든 자유롭게 내릴 수 있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며 반대 의견을 원천봉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다수의 경우 오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예술은 마음은 연 이에게 죽을 때까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영감을 자극합니다. 마음을 닫아버린 이에게 그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예술이 아니라 겉만 그럴 듯한 박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당장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내가 모르는 것이 아직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기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러 연주들을 놓고 서로 비교하면서 줄세우기를 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경향의 정반대편에 바로 이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있습니다. 내가 좋으면 그만, 내가 싫으면 그만, 네 생각은 그저 네 생각일 뿐이라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내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고견을 듣지 않겠다는 고집일지도 모릅니다. 예술은 분명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속성의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타당하게 인정되어야만 하는 공통된 가치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고전이라고 불리는 그 모든 것들이 창작 이래 수십 년, 수 백년 동안 사상과 이념과 문화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든 우리는 균형잡힌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필요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음악 예술의 보편성과 상대성은 그 영역의 상호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8. 악기 배우기

어떤 악기든 하나 다룰 줄 아는 게 있으면 음악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꼭 비싼 악기가 아니라 문구점에서 파는 값싼 리코더라도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는 데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지 테크닉 같은 신체적인 활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어떤 것인가, 음악적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수반합니다. 이것은 단지 많은 작품과 연주를 들어왔다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며 몸소 악기를 익히면서 연주해보는 경험을 통해 조금씩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 앞에서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꼭 뛰어난 테크닉을 마스터하지 않았더라도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그 안에서 나름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9. 클래식 밖의 클래식

클래식 음악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처럼 단지 유럽의 것만 지칭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전이라는 말 그대로 어느 문화의 소산이든 시대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인정받는 보편성을 지닌 예술이라면 우리나라의 훌륭한 전통 음악을 비롯하여 중국이나 인도, 아라비아, 미주 등 다른 문화권의 훌륭한 음악 등도 또 다른 클래식으로서 많은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범위를 이보다 더 확대한다면 장르의 선을 넘어 대중 음악도 지금은 인기가 많아 팝인 것이 앞으로 시대의 냉정한 평가를 거쳐 다음 세대에까지 전해지게 된다면 이 역시 클래식으로서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 글을 마치며

예술은 인간 정신의 가장 솔직하고 숭고하고 위대한 표현 형태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가가 혼신을 다해 자기 영혼의 정수를 세련된 양식으로 조직화한 예술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욕구와 필요로 가득 찬 일상 생활에서 어지럽게 흐트러진 정신을 맑게 하고 지치고 슬픈 마음을 달래며 아마도 천상에서나 누릴 수 있을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되는 감격스러운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가치 있는 문화 유산을 즐기는 데는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올바른 자세로 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다보니 불필요하게 너무 길어진 감이 있는데 저 스스로도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늘 곁에 두어왔으면서도 예전에 참 잘못된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됩니다. 음반 시장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과거에 비해 클래식 음악의 문화 자본은 매우 풍부해졌고 애호가들의 감상 양상도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작품과 음반에 묻혀서 한편으로는 음악 감상의 순수성과 진실함을 잃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는 곡은 많고 들은 연주는 많지만 음악을 처음 듣기 시작하던 시절에 설레는 마음으로 음악을 듣고 진정으로 감동했던 경험은 왠지 점점 줄어드는 듯한 기분입니다. 풍요로운 음악 속에서 역설적으로 마음의 진정한 기쁨은 빈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사사로운 의견에 불과하고 내용도 부족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를 찾는 많은 분들이 음악을 통해, 예술을 통해 순수한 아름다움과 진실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고 클래식(krichter님)

클래식의 문화 하나하나를 다가가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역사를 알아야되고...
그 역사에 따른 시대 상황을 알아야 하며...
그 시대 상황에 따른 작곡가 및 그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까지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작곡가의 음악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즐기면서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가볍게 시작한다면

좋은 결과
좋은 음악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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