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피아노의 전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 세계에 그의 존재를 알리면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그만의 신화를 만들었던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피아노의 전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 세계에 그의 존재를 알리면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그만의 신화를 만들었던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Posted at 2012.11.05 22:42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7)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피아노의 전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

 

 

지금까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연주회를 보고 또 들었지만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의 독주회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연주회는 달리 없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1994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 때의 느낌과 기억은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고 또렷합니다. 여든을 코 앞에 둔 나이의 이 거장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를 찾았고 바로 다음해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97년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유별난 요구를 받아들여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객석과 무대의 모든 조명을 끄고 단 한 줄기의 빛만이 피아노 건반과 보면대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한 공연장에서 모든 시선과 감각은 피아노에 집중되었고 마치 코 앞에서 연주를 듣는 듯한 착각 속에서 모든 청중들은 홀린 듯이 리히테르의 연주에 빨려들었습니다. 어느 일간지에 비평을 쓰기로 하고 찾아간 자리였지만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그 날의 연주는 강렬했습니다. 잠시 최면에 걸렸다가 다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리고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감히 뭐라 할 말이 없으니 차라리 지면을 비워서 경의를 표하자고 말했습니다.

 

 

 

 

 

 

그의 연주는 잘하고 못하고를 따질 경지가 아니었습니다. 전기 작가인 브뤼노 몽생종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나는 청중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그저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연장에서 홀로 담담하게 피아노를 쳤을 뿐이었지만 그 소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습니다. 20세기의 수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거장으로 칭송되었지만 리히테르는 그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누구와 비교해서 더 돋보이고 잘난 것이 아니라 그 누구와도 전혀 다른 그 만의 철학과 고집이 아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마치 올림푸스산 꼭대기에 제우스가 사는 것처럼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철의 장막이 걷히면서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던 소비에트의 연주자들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발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로 군림하게 되는데 바이올린의 오이스트라흐와 첼로의 로스트로포비치가 그랬고 피아노에서는 에밀 길렐스가 먼저 지존으로 등극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열광하는 미국 청중들에게 길렐스는 리히테르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을 했고 드디어 1960년에 미국에 나타난 리히테르는 그 이전의 어떤 연주자들도 얻지 못했던 열광적인 반응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곧 전 세계에 그의 존재를 알리면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그만의 신화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입신의 경지를 이룬 최고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는 출발부터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조기교육이 절대적인 음악 분야에서 그는 20대가 다 되도록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으니 후일 그가 거둔 성공은 기적과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이었던 아버지는 빈 음악원을 다녔고 그리그와도 친분이 있었을 만큼 촉망받는 음악가였지만 법이 금지하는 결투를 벌인 탓에 우크라이나로 도망을 가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러다가 그에게서 배우던 제자와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바로 리히테르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잠시 피아노를 배웠으나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그 후로는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와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혁명 이후 오데사로 이주한 리히테르는 음악보다 문학과 미술, 영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듯했지만 열네 살에 그곳의 한 해군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열다섯 살에는 이미 엄청난 양의 오페라 악보를 통달하여 관현악 총보를 피아노로 칠 수 있었고 열여섯 살에 리스트의 난곡들을 정복했습니다. 열여덟 살 무렵에는 오페라 하우스에 취직하여 발레와 오페라의 연습 반주자로 일했고 이듬해인 1934년에는 오데사의 기술자 클럽에서 쇼팽의 곡으로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전에 한 번도 피아노의 기본 레퍼토리를 배우지 못했던 그로서는 실로 대담한 시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렵 오데사에서 불거졌던 반독일정서로 말미암아 리히테르의 가족들은 모스크바로 떠났고, 거기서 그는 에밀 길렐스에서부터 라두 루푸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대표하는 거장들을 길러낸 20세기 최고의 피아노 교수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리히테르는 벌써부터 오데사에서 네이가우스의 연주를 듣고 감동한 바 있었지만 1937년에야 처음으로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은 네이가우스 역시 리히테르의 재능에 감탄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리히테르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출신이면서 독일인 아버지를 두었던 네이가우스는 이후 리히테르의 삶과 음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프로코피에프에게 그를 소개하여 194011월에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소나타 제6을 초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모스크바에서의 데뷔 연주회였습니다. 1941년에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리히테르의 아버지는 독일계라는 이유로 비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마저 독일로 떠나버리자 네이가우스는 리히테르에게 있어 아버지와도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942년부터 그는 전시하의 모스크바에서 연속적으로 리사이틀을 열었고 1945년에는 전() 소비에트 연방 음악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습니다. 1947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금메달을 받았고 1950년에는 스탈린상을 수상하면서 동유럽권으로 연주 여행을 시작하여 1954프라하의 봄음악제에서 '현대의 리스트'라는 격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남보다 한참이나 늦게 시작하여 하나 둘씩 끝없이 쌓고 또 늘려 간 그의 음악세계는 그 누구보다 넓고 또 깊습니다. 하나도 중복되지 않는 연주곡목을 가지고 지금 당장이라도 80개의 서로 다른 독주회를 만들 수 있다는 그의 방대한 레퍼토리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경지입니다. 프로코피에프와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 리스트와 쇼팽,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베토벤과 같은 정통 레퍼토리에다가 독일과 프랑스의 바로크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 인상주의 음악과 현대음악까지를 모두 아우를 만큼 엄청난 규모입니다. 게다가 실내악 활동도 왕성하게 펼쳐 소비에트 시절을 함께 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므스티슬브 로스트로포비치와의 트리오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최고의 앙상블로 꼽히고 있고 더 나아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페터 슈라이어와 호흡을 맞춘 독일가곡의 반주 역시 역사적인 명연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젊은 음악가들과도 자주 어울려 피아니스트 졸탄 코치슈,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 등과 듀오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올레그 카간, 첼리스트 나탈리 구트만,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와 앙상블을 이루어 자주 연주를 했고 보로딘 사중주단과도 많은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말년에 이르러 독주회마다 항상 연주회장 안의 모든 불을 끄고 보면대와 건반을 비추는 한 줄기 조명만을 고집하여 기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남다른 그의 기행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해외 연주를 갈 때면 늘 호텔방 침대 바로 옆에 피아노가 있어야 했고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를 꺼리면서 자동차 운전을 즐겼습니다. 그러니 모스크바를 떠나 해외로 나갈 때면 늘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여러 날을 달려야 했고 도중에 머물게 되는 도시나 마을마다 예정에도 없던 무료 독주회를 열어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흔 한살이 되던 1986년에는 자동차 한 대로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외딴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레닌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이어진 긴 여정 동안 무려 91회의 연주회를 여는 강행군을 펼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교회나 강당이든 어떤 곳도 마다하지 않았고 낡은 피아노는 물론 심지어 조율이 되지 않은 피아노도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은 시베리아의 어떤 마을에서 한 소년이 리히테르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음악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오늘날 세계 최고의 바리톤 가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드미트리 흐브로스토프스키라고 합니다. 1995년 캐나다 뤼벡에서의 연주를 끝으로 은퇴를 한 리히테르는 2년 뒤인 199781일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살아서 늘 함께 음악과 우정을 나누었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에밀 길렐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의 거장들이 묻힌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동료들이 하나 둘 자유와 부를 쫓아 서방 세계로 망명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조국 러시아를 지켰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조국에게 받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는 대답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돌려주기 위해 끝없이 조국 산천을 떠돌며 수없이 많은 동포들을 찾아서 음악으로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독일의 이성과 러시아의 감성을 모두 지녔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극과 극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기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내친 조국마저 가슴으로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구에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뜨거운 가슴을 감추고 한음 한음에 혼신을 힘을 다하며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리히테르는 다른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혼자만의 고집과 뚝심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불멸의 크리에이터였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1. 농부
    감동적인 이야기 잘 봤어요!^^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인생에도 리허설이 있다면...[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인생에도 리허설이 있다면...

Posted at 2012.05.04 12:3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5)
인생에도 리허설이 있다면

 

 


음악을 포함한 공연예술을 시간의 예술, 혹은 순간의 예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문학이나 미술, 영화와는 달리 정해진 시간 무대 위에서의 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대 위의 치열한 삶을 사는 예술가들은 공연에 모든 것을 쏟아버리고 나면 마치 한 번의 인생이 다 지나간 것처럼 허전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뒤풀이, 혹은 리셉션이 늘 있기 마련이지요. 무대에 섰던 사람, 객석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음식과 술을 함께 들면서 공연의 이런 저런 기억들을 되새기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한 번의 공연을 우리네 삶에 비유하자면 뒤풀이의 모습은 상가에 모인 조문객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연에는 인생에게 주어지지 않는 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리허설이 바로 그것이지요. 공연이 있기 바로 직전에 마치 진짜 공연인 것처럼 공연과 똑 같이 미리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아주 드물게 리허설과 공연이 거의 같은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관객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석대로라면 공연과 다름없이 처음부터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야겠지만 누군가 틀리면 멈추기도 하고 리허설 중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하고 점검하기도 합니다. 간혹은 다투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늘 함께 하는 사이들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어느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자를 초빙한 경우나 협연자를 부른 경우, 이런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옳고 그르고의 여부 보다는 누가 더 힘을 가졌는지의 여부가 중요할 때가 많지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상임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로 유명합니다. 단원들의 자부심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지요. 언젠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와 함께 우리나라를 다녀간 적이 있는데 우연히 리허설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지시대로 연주를 하기 마련이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연주가 시작되고 어느 지점에 이르자 지휘자가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지휘자가 음악을 멈추고 다시 그 부분을 되풀이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은 지휘자가 악장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이후로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뜻대로 연주를 했습니다. 아마도 무대 뒤에서 악장을 설득한 결과이겠지요. 그런데 정작 공연이 시작되고 문제의 그 부분에 이르자 오케스트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원래 하던 대로 연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

 

리허설에서의 의견 차이가 이렇듯 늘 팽팽한 평행선을 긋는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후배를 감싸고 동료를 아끼는 마음에서, 혹은 같은 길을 먼저 걸어서 이미 경지에 이른 선배를 높이 받드는 마음으로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바스티유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 공연을 했던 정명훈과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의 리허설 모습이 바로 그 경우였습니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우러러 볼 만큼 신화적인 존재였던 리히테르였기에 정명훈 역시 최대한의 예우를 다했습니다. 아흔 살을 넘긴 노대가는 예정된 시각이 되자 어디선가 불현듯 나타나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리허설을 이끌어갔습니다.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

 

미리 악보에 표시한 부분만 오케스트라와 맞춰보면서 주로 일방적인 요구를 했고 지휘자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더러는 보는 입장에서도 아니다 싶은 해석이 있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불만이었지만 오히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설득하여 이끌어갔습니다. 그렇게 예정된 한 시간이 지나자 협연자는 또 다시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이날 지켜 본 정명훈의 모습은 지휘자가 아닌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존경해마지 않는 대선배를 향한 최고의 경의를 이렇게 표시함으로써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감동을 여운으로 남겼습니다.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다고 했지만 어찌 보면 리허설에서 만나는 연주자들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사는 참다운 삶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작 공연에서 만나는 음악가들의 모습은 허상인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늘 과정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연연하는 성취라는 것도 결국은 과정의 결과로서 얻는 부산물일 따름이지요. 그래서 늘 공연보다 리허설을 더 관심 있게 보게 됩니다. 공연에서는 좀체 찾을 수 없는 삶의 냄새가 코끝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리허설이 없는 공연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과정이 없는 성취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공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리허설의 묘미가 있는 것처럼 성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과정의 가치가 있습니다. 20세기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의 연주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쇼팽 연주에 뛰어난 기록을 남긴 리히터

쇼팽의 음악을 대체로 '낭만주의'라는 틀에서 설명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낭만주의는 한마디로 예술가가 마음껏 자신의 내면으로 망명해도 아무런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경향성을 말한다. 낭만주의에 와서야 처음으로 예술은 인간을 기록하고 그의 울부짖는 고백과 적나라한 상처를 기록하게 되었다. 계몽주의 예술 역시 시민을 주인공으로 추켜세웠지만 그것은 자기보다 높은 신분의 상류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논쟁적 언사였을 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섬세하고 집요한 기록은 낭만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이뤄졌다.

낭만주의의 어원이 되는 로맨틱(romantic)이라는 형용사는 원래 로망스(romance)에서 유래한 것. 중세 때까지만 해도 로망스는, 라틴어(roman)로 쓰여진 영웅적인 인물이나 사건이라는 뜻이었고 17세기 중엽에도 '낭만적'이라는 단어는 이 현실이 아닌 피안의 전설적이고 공상적인 세계를 노래하는 것, 혹은 불가사의하고 상징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성을 뜻했다.

그러던 것이 프랑스혁명 시대를 통과하면서 이 단어는 현존하는 세계의 질서를 거부하고 정서의 자유로운 이끌림에 따라 추상적인 관조와 불규칙한 심리를 표출하여 극단적인 어떤 동경의 세계로 향하는 예술적 경향을 뜻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