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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인생에도 리허설이 있다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5. 4.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5)
인생에도 리허설이 있다면

 

 


음악을 포함한 공연예술을 시간의 예술, 혹은 순간의 예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문학이나 미술, 영화와는 달리 정해진 시간 무대 위에서의 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대 위의 치열한 삶을 사는 예술가들은 공연에 모든 것을 쏟아버리고 나면 마치 한 번의 인생이 다 지나간 것처럼 허전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뒤풀이, 혹은 리셉션이 늘 있기 마련이지요. 무대에 섰던 사람, 객석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음식과 술을 함께 들면서 공연의 이런 저런 기억들을 되새기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한 번의 공연을 우리네 삶에 비유하자면 뒤풀이의 모습은 상가에 모인 조문객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연에는 인생에게 주어지지 않는 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리허설이 바로 그것이지요. 공연이 있기 바로 직전에 마치 진짜 공연인 것처럼 공연과 똑 같이 미리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아주 드물게 리허설과 공연이 거의 같은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관객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석대로라면 공연과 다름없이 처음부터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야겠지만 누군가 틀리면 멈추기도 하고 리허설 중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하고 점검하기도 합니다. 간혹은 다투는 경우도 없지 않지요. 늘 함께 하는 사이들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어느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자를 초빙한 경우나 협연자를 부른 경우, 이런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옳고 그르고의 여부 보다는 누가 더 힘을 가졌는지의 여부가 중요할 때가 많지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상임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로 유명합니다. 단원들의 자부심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지요. 언젠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와 함께 우리나라를 다녀간 적이 있는데 우연히 리허설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지시대로 연주를 하기 마련이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연주가 시작되고 어느 지점에 이르자 지휘자가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지휘자가 음악을 멈추고 다시 그 부분을 되풀이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은 지휘자가 악장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이후로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뜻대로 연주를 했습니다. 아마도 무대 뒤에서 악장을 설득한 결과이겠지요. 그런데 정작 공연이 시작되고 문제의 그 부분에 이르자 오케스트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원래 하던 대로 연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

 

리허설에서의 의견 차이가 이렇듯 늘 팽팽한 평행선을 긋는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후배를 감싸고 동료를 아끼는 마음에서, 혹은 같은 길을 먼저 걸어서 이미 경지에 이른 선배를 높이 받드는 마음으로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바스티유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 공연을 했던 정명훈과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의 리허설 모습이 바로 그 경우였습니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우러러 볼 만큼 신화적인 존재였던 리히테르였기에 정명훈 역시 최대한의 예우를 다했습니다. 아흔 살을 넘긴 노대가는 예정된 시각이 되자 어디선가 불현듯 나타나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리허설을 이끌어갔습니다.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

 

미리 악보에 표시한 부분만 오케스트라와 맞춰보면서 주로 일방적인 요구를 했고 지휘자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더러는 보는 입장에서도 아니다 싶은 해석이 있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불만이었지만 오히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설득하여 이끌어갔습니다. 그렇게 예정된 한 시간이 지나자 협연자는 또 다시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이날 지켜 본 정명훈의 모습은 지휘자가 아닌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존경해마지 않는 대선배를 향한 최고의 경의를 이렇게 표시함으로써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감동을 여운으로 남겼습니다.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다고 했지만 어찌 보면 리허설에서 만나는 연주자들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사는 참다운 삶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작 공연에서 만나는 음악가들의 모습은 허상인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늘 과정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연연하는 성취라는 것도 결국은 과정의 결과로서 얻는 부산물일 따름이지요. 그래서 늘 공연보다 리허설을 더 관심 있게 보게 됩니다. 공연에서는 좀체 찾을 수 없는 삶의 냄새가 코끝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리허설이 없는 공연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과정이 없는 성취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공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리허설의 묘미가 있는 것처럼 성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과정의 가치가 있습니다. 20세기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의 연주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쇼팽 연주에 뛰어난 기록을 남긴 리히터

쇼팽의 음악을 대체로 '낭만주의'라는 틀에서 설명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낭만주의는 한마디로 예술가가 마음껏 자신의 내면으로 망명해도 아무런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경향성을 말한다. 낭만주의에 와서야 처음으로 예술은 인간을 기록하고 그의 울부짖는 고백과 적나라한 상처를 기록하게 되었다. 계몽주의 예술 역시 시민을 주인공으로 추켜세웠지만 그것은 자기보다 높은 신분의 상류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논쟁적 언사였을 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섬세하고 집요한 기록은 낭만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이뤄졌다.

낭만주의의 어원이 되는 로맨틱(romantic)이라는 형용사는 원래 로망스(romance)에서 유래한 것. 중세 때까지만 해도 로망스는, 라틴어(roman)로 쓰여진 영웅적인 인물이나 사건이라는 뜻이었고 17세기 중엽에도 '낭만적'이라는 단어는 이 현실이 아닌 피안의 전설적이고 공상적인 세계를 노래하는 것, 혹은 불가사의하고 상징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성을 뜻했다.

그러던 것이 프랑스혁명 시대를 통과하면서 이 단어는 현존하는 세계의 질서를 거부하고 정서의 자유로운 이끌림에 따라 추상적인 관조와 불규칙한 심리를 표출하여 극단적인 어떤 동경의 세계로 향하는 예술적 경향을 뜻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