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위기에서 빛을 발한 하이든의 유머 / 위기에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 찾는 법[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위기에서 빛을 발한 하이든의 유머 / 위기에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 찾는 법

Posted at 2012.04.06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9)
위기에서 빛을 발한 하이든의 유머

 

 


 

2009년은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구촌 곳곳에서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연주회가 바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였습니다. 해마다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나 폴카를 중심으로 무대를 꾸몄지만 2009년은 아무래도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나봅니다.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봉을 잡은 이번 연주회에서 빈 필은 고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든의 교향곡 454악장을 연주했는데, 이 곡의 배경을 모르고 연주실황을 보신 분이 있다면 아마도 어리둥절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빠른 악장이 느려지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악기를 들고 무대 뒤로 사라지더니 급기야 바이올린 연주자 두 사람만 남게 됩니다. 당황해서 지휘대를 내려와 단원들 사이를 드나들던 지휘자 바렌보임은 끝까지 남은 악장 곁에 나란히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까지 하며 비위를 맞추지만 그마저 끝내 자리를 뜨고 맙니다. 그렇게 어이없이 연주가 끝이 나지만 객석에 앉은 청중들은 시종 웃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지휘자와 단원들 사이에 충돌이나 불화가 있었나 싶지만 사실은 모두 사전에 연출된 해프닝입니다. 지휘자의 연기 말고는 원래부터 이렇게 연주해야 하는 곡입니다.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고별.

 

하이든 시대의 음악가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의 성이나 저택에 머물면서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작곡하거나 연주했습니다. 하이든을 고용했던 에스테르하치 후작은 여름이면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 기거하면서 더위를 피했는데 이 때는 하이든뿐만 아니라 하이든의 책임 하에 맡겨져 있었던 다른 악사들까지도 함께 가야 했습니다. 주인인 후작이야 당연히 가족들을 동반했겠지만 하이든과 다른 악사들은 그 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니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1772년 여름에는 무슨 일인지 예정되었던 두 달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도대체 돌아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악사들의 불만은 턱밑에까지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이든은 조심스럽게 후작에게 이런 사정을 전했지만 후작은 오히려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명을 내릴 뿐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하이든은 다른 방법으로 후작의 마음을 돌릴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주 만에 서둘러 완성한 곡이 바로 고별 교향곡이었습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악사들은 하나 둘씩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자리를 떠났고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이 사라지면서 음악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 때서야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차린 후작은 당장 떠날 차비를 지시하였고 마침내 그들 모두 기다리는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치 후작 가문과의 계약이 끝나 자유를 얻게 됩니다. 후작에게 봉사하던 30여년 세월 동안 하이든의 업적과 명성은 바다 건너 영국에까지 전해졌고 잘로몬이라는 흥행사의 주선으로 영국을 방문한 하이든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영국민들의 거국적인 환영에 놀라게 됩니다. 이를 계기고 말년의 교향곡들은 주로 영국에서의 연주회를 위해 작곡하였는데 그 가운데 놀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교향곡 94번에 얽힌 일화에서도 하이든의 유머와 여유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귀족들과 부호들이 비록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십분 이해하고 경청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을 즐기기보다는 사교를 위해서, 혹은 남에게 과시하려는 생각에서 연주회장을 찾는 사람들은 그 때도 많았나봅니다. 게다가 푸짐한 만찬에다 디저트까지 먹었으니 음악을 들으면 졸음이 쏟아졌을 텐데 특히 화려한 의상과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귀부인들이 더했던 모양입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예술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모멸감을 이기지 못해 분통을 터뜨려야 마땅하겠지만 하이든은 이런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하게 됩니다.

 

하이든 놀람교향곡 2악장

 

느린 2악장을 아주 조용하게 시작하다가 갑자기 팀파니가 가세한 모든 악기들이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내게 만든 것입니다. 당연히 객석에서 졸고 있던 수많은 청중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겁을 했을 터이지만 결국은 청중들이나 작곡자, 심지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 가지게 된 스스로의 위상이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의식했더라면 연주회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도 있었고 점잖게 핀잔을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고 누구와도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음악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은근히 빗대어서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심각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부드럽고 유쾌하게 만들었고 다른 누구와도 얼굴 붉힐 필요 없이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면서 또한 존경할 만한 처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너무나도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열악한 환경이, 그리고 또 하이든을 평생 괴롭혔던 부인의 잔소리가 그를 이처럼 단련시켰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역경을 이겼고, 그 시대 다른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늘 성실과 겸손을 잊지 않았던 하이든은 예기치 않은 위기마다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하는 2009, 우리 모두 하이든의 넉넉한 여유를 배워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유가 생겼으면 여유로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머를 찾아서 갈고 또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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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사의 불가사의한 아홉수 - 교향곡 9번의 저주! ㅇㅇㅇ의 마지막 교향곡에 붙은 번호 ‘9’는 아무도 넘을 수 없는 마법의 숫자였다.[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사의 불가사의한 아홉수 - 교향곡 9번의 저주! ㅇㅇㅇ의 마지막 교향곡에 붙은 번호 ‘9’는 아무도 넘을 수 없는 마법의 숫자였다.

Posted at 2012.03.09 15:0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4)
음악사의 불가사의한 아홉수

 1. 저주일까? 교향곡 9번이라는 9수...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은 백곡이 넘는 교향곡을 썼습니다. 삼십대에 요절한 모차르트도 41곡이나 되는 교향곡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를 이었던 베토벤이 작곡한 교향곡은 고작 아홉 곡에 불과합니다. 모차르트보다 훨씬 오래 살았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베토벤이 죽고 한참 동안 아홉 곡이 넘는 교향곡을 남긴 작곡가는 서양음악사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소위 낭만주의 시대라고 하는 19세기 내내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에 붙은 번호 ‘9’는 아무도 넘을 수 없는 마법의 숫자였습니다. 슈베르트는 불멸의 대작이라고 하는 8번 미완성 교향곡과 스케치만 남긴 7번까지를 포함해서 모두 아홉 곡을 작곡했고 슈만과 브람스가 각각 네 곡을, 멘델스존은 다섯 곡을 남겼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中 환희의 송가

베토벤을 너무나도 존경했던 브람스는 베토벤이 교향곡을 통해 이룩했던 눈부신 업적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워 마흔이 넘을 때까지 교향곡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용기를 내서 오래 전부터 구상했던 최초의 교향곡을 처음 세상에 내놓았을 때, 이 곡을 지휘했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는 베토벤의 교향곡 10과도 같다는 말로 격찬을 했고 브람스는 이 말을 듣고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합니다. 누구와도 다른 독창성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가를 두고 다른 예술가의 창작세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말을 칭찬으로 한 것도 그렇지만 이 말을 듣고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는 것을 보면 베토벤이 교향곡에서 쌓은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향곡으로 유명한 또 다른 작곡가 브루크너는 마치 9번을 넘지 못하는 숙명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교향곡 번호를 0번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영향이 너무나도 강하게 느껴지는 이 곡을 두고 작곡가 자신은 교향곡 0, 전혀 통용될 수 없는 것이며 단순한 시작이라는 말로 애써 그 의미를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 역시 9번의 벽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아홉 번째인 8번을 무사히 넘기고 열 번째인 9번에 도전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2. 저주를 극복한 작곡가들의 방법... 그 해결책은?




후기 낭만주의 시대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로 꼽히는 말러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병약하게 태어나서 어려서는 형제들의 죽음을 겪었고 결혼해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어야 했던 그는 평생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것이 그의 작품세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마침내 아홉 번째 교향곡에 이르자 그는 9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결국은 교향곡이라는 이름 대신 대지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하였습니다. 이후 교향곡 9번을 작곡하였고 베토벤 이후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두 자리 숫자가 붙은 교향곡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러나 9번에 걸린 주문은 말러도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브루크너가 열 번째인 9번에서 주저앉았던 것처럼 말러도 10번을 완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베토벤의 위대한 유산은 그가 손댄 모든 장르에 골고루 뻗쳐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피아니스트의 구약성서라고 하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신약성서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 다섯 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 장르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고 실내악, 특히 현악사중주에서 그가 남긴 결실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향곡에서의 업적이야말로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인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교향곡 9합창은 여러 가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브람스는 물론 브루크너의 교향곡도 베토벤 9번에서 출발하고 있고, 기악곡인 교향곡에 성악, 즉 가사가 있는 노래를 넣겠다는 발상은 말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처럼 음악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이 곡의 의미는 마지막 악장에서 노래로 들려주는 쉴러의 시에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Freude, 즉 환희의 송가로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Freiheit, 즉 자유의 송가입니다. 자유라는 말이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기에 검열을 피해 가사를 바꾼 것입니다. 베토벤은 진정으로 믿었습니다. 결코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들 인간 모두가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평등한 가운데 서로 의지하며 살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되기를 누구보다 갈망했습니다. 그 염원이 너무나도 컸기에 교향곡에 합창을, 노래를, 가사를 넣어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악성, 즉 음악의 성인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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