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의 거장. 마에스트로 카를로스 클라이버 (Carlos Kleiber | Karl Ludwig Kleiber) 그의 음악적 재능을 들여다 보다.지휘의 거장. 마에스트로 카를로스 클라이버 (Carlos Kleiber | Karl Ludwig Kleiber) 그의 음악적 재능을 들여다 보다.

Posted at 2012.12.17 09:49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40)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출처 : 구글 이미지

 

카를로스 클라이버(이하 카를로스)193073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베를린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 에리히 클라이버, 어머니는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루스 구드리치였다. 클라이버 본인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치 치하에서도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리히 클라이버가 알반 베르크[보체크]를 초연한 이후 베르크의 [루루]가 나치에게 퇴폐음악으로 분류돼 금지되자, 에리히 클라이버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음악감독직을 사임하며 저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나치와 에리히 클라이버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태어났을 때 이름은 카를 루드비히 클라이버였지만, 나치와 대립하고 있었던 에리히 클라이버가 1940년 아르헨티나에 망명했고, 스페인어권이었던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카를로스로 개명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피는 못 속인다 했던가. 카를로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적부터 뛰어났다. 9세 때 작곡을 하고 노래를 잘 했으며, 피아노와 팀파니를 연주했다. 아버지인 에리히는 카를로스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길을 걸으면 고생할까봐 아들이 음악인의 길을 걷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1950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결국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의 권유로 1952년부터 일단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대에 입학해서 화학을 전공했다. 1952년 라 플라타에서 지휘자로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53년에는 뮌헨 개르트너플라츠 극장에서 월급 없는 연습생 지휘자가 되어 지휘 경험을 쌓았다.

 

 

 

 

24세였던 1954년에는 포츠담에서 카를 밀뢰커의 오페레타 [가스파로네]를 지휘하면서 지휘자로서 데뷔했다. 이때 프로그램북에 실린 카를로스의 이름은 카를 켈러(Karl Keller)였다. 이날 무대에 서기까지는 아버지의 도움이 컸지만, 아버지의 후광을 얻어 지휘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에리히는 여기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카를로스에게 보낸 에리히의 전보에는 행운을 빈다. 늙은 켈러로부터라고 씌어 있었다. 에리히는 아들에게 충고를 해주는 한편, 오페라극장 관계자에게 소개를 했고, 공공연하게 아들의 음악활동을 따끔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젊은 카를로스 클라이버

 

 

젊은 카를로스는 지휘자로서의 커리어 초창기부터 연주회 무대에 서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연주회는 그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매번 자신의 지휘에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을 수 있는 절대적인 완벽의 사운드, 그에 걸맞은 해석을 이루지 못하면 지휘대 위에 서는 의미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카를로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를 아버지 에리히 탓으로 돌린다. 위대한 지휘자를 아버지로 둔 것은 카를로스에게 매우 큰 부담이 됐다. 성격이 무정했던 에리히는 그 표현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좀 더 따스한 부성애를 발휘했다면 카를로스의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지휘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임에도 아들의 지휘에 대해 아버지다운 뒷바라지가 부족했고, 카를로스의 불안정한 성격은 그에 말미암은 바가 적지 않다. 카를로스의 인생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복잡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Carlos Kleiber -Beethoven symphony No.7, Op.92 : mov.4

 

 

 

이후 뒤셀도르프, 취리히, 슈투트가르트 등 오페라를 지휘하던 카를로스는 1968년부터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를 자주 지휘하면서 명성을 확립했다. 1973년에는 빈 국립오페라에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데뷔했고, 19746월에는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7월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각각 데뷔했다. 1978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이 당시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실황은 비정규반이지만 골든 멜로드람 레이블에서 발매된 4장으로 구성된 세트(GM 4.0043)에 수록돼 있다. 슈베르트 [교향곡 3], 버터워스의 [영국 목가] 1], 그리고 뜨거운 연주인 베토벤 [교향곡 5]이 담겨 있다. 이후에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지휘대에 섰던 카를로스는 한 번도 음악감독직에 묶이지 않고 철저하게 프리랜서 지휘자를 고수했다.

 

 

 

 

 

1974년 베토벤 [교향곡 5] 녹음 이후 카를로스는 빈 필과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198212, 카를로스는 베토벤 [교향곡 4] 리허설 도중 견해 차이로 단원과 대립, 정기연주회를 취소해버리고 만다. 그 뒤 6년간 공백 후 19883, 카를로스와 빈 필은 화해하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모차르트 [교향곡 36린츠’]와 브람스 [교향곡 2] 등 당시 연주곡은 연습량이 많았음에도 실수가 눈에 띄었지만, 명연주에 넣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카를로스는 1989년과 1992년 신년음악회 때 빈 필과 만남을 가졌다

 

 

 

2011 Jecheon Intl Music & Film Festival : 마에스트로 - 카를로스 클라이버

 

 

 

카를로스는 단원들에게 음악 해석을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해 자세히 설명하곤 했다. 아버지인 에리히 클라이버와 비슷한 점이었다. 리허설 전에는 반드시 작곡가의 자필 확보를 확인하고 다른 연주자의 녹음을 구해 연주 해석을 확인하고, 아버지 에리히가 사용한 총보를 연구하는 등 그 준비과정이 세심하고 철저했다. 이렇게 치밀한 리허설에 비해 실제로 연주할 때는 발레를 연상시키는 독특하고 우아한 지휘모습으로 청중들, 오케스트라 단원, 협연자들을 매료시켰다. 그 지휘에서는 아찔한 속도감, 살아있는 리듬감, 색채의 강렬함, 서정적인 아름다움 등이 느껴졌다. 분명 천재 지휘자의 모습이었다.

 

 

 

 

 

그 질주하는 젊음으로 인해 카를로스는 항상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음악가로 인식됐다. 그러나 그는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좌우로 마주보게 배치하거나 악보에 수정을 하고 현악기의 보잉을 각 보면대마다 다르게 연주하는 등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방식을 응용했다. 이는 아버지 에리히의 강한 영향 아래 옛 지휘자들의 유파를 이어받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지휘자 파트보를 소유하고 그 내용을 적어 사용한 것도 브루노 발터 19세기 대지휘자들의 습성이었다.

 

 

 

 

클라이버는 단원들의 보잉을 모두 계산해서 적어 두었다. 다시 말해 청중들에게는 활을 올려 긋고 내리 긋는 것이 단원들의 자유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실은 클라이버가 각각의 스트링 파트 보면대마다 서로 다른 보잉을 명시해 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정되고 정확한 디테일을 끄집어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시카고 심포니에 객원지휘하던 시절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첼리스트 였던 프랭크 밀러는 이에 강력히 반발해서 악보 사서들은 첼로 파트 악보를 그로부터 지켜야 했다고 한다. 걸핏하면 클라이버의 보잉 지시를 삭제하고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을 적어놓곤 했기 때문이다. 클라이버는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시카고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모든 객원지휘자들 가운데 시카고 심포니의 악단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을 보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였다.

 

 

 

 

1970년 말부터 카를로스는 레퍼토리를 적게 유지하고 리허설 시간을 보통의 배 이상 잡아 연습했으며, 자신의 뜻에 거슬리면 연주를 취소하곤 했다. 이런 악취미가 오히려 카를로스의 희소성을 높이고 인기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카를로스의 공연은 늘 대체 지휘자를 마련해놓아야 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티켓은 항상 매진이었다. 몇 안 되는 녹음은 나오는 족족 명연으로 간주됐다. [장미의 기사]같은 곡은 음반 한 장만으로 만족 못해 해적반을 구하는 등 푸르트뱅글러와 비슷한 컬트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카라얀 사후 베를린 필 단원들 중 다수가 후임 음악감독으로 카를로스를 원했지만, 그는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일이라 거절했다. 인터뷰를 싫어했던 카를로스는 좀처럼 매체에 자신의 의향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친했던 번스타인에게는 나는 정원에 있는 야채와 같이 햇빛을 받고, 성장하고, 마시고, 자고 싶을 뿐이다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카를로스의 신경과민은 유명했다. 지나치게 예민했던 그는 협연자를 잘 주도하지 못했다. 나아가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을까 봐 늘 두려워했던 것 같다. 특히 무대에 오르기 바로 전 그의 긴장상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1970년대,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를 지휘해 [장미의 기사]를 연주할 때였다. 연주 직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음악 감독이었던 볼프강 자발리쉬가 카를로스의 대기실을 찾았다. 두 사람은 정중한 인사를 하고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자발리쉬는 카를로스를 무대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런데 막이 오를 즈음 카를로스는 거의 노이로제 상태가 됐다. 자발리쉬가 괜찮다고 격려하며 등을 떠밀어 억지로 무대 위로 내보냈다고 한다. 1970년대 말 클라이버는 어느 연주회에 앞서 구토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1980년대 후반부터 카를로스의 지휘는 뜸해졌다. 2~3년에 몇 번 정도의 페이스로 지속됐다.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 빈 필, 베를린 필 등 오케스트라도 한정됐다. 카를로스가 어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만으로도 큰 뉴스가 됐고, 연주회 티켓을 구한다 하더라도 그가 지휘대에 설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았지만 많은 팬들이 카를로스의 연주회를 기다렸다.

 

 

 

 

 

한 번은 베를린에서 한 번은 잉골슈타트(뮌헨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본사가 그곳에 있다, 이 때 클라이버는 개런티로 아우디 공장 견학과 승용차를 받았다 한다)에서, 한 번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고 빈에서 몇 번 지휘를 했다. 연주 횟수를 줄일수록 그가 벌어들이는 액수는 커져 갔다. 사람들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콘서트를 아주 희귀한 보석들과 동일시했다. 카를로스를 진정한 천재라고 평가한 카라얀은 이에 대해 냉장고가 빌 때에만 지휘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커리어 말기인 1998년과 1999년에 카를로스는 카나리아 제도와 사르데냐 섬에 나타났다. 둘 다 작렬하는 태양과 푸른 바다가 있는 전형적인 유럽 남쪽 지방의 섬이다. 1999년 초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사르데냐 섬의 주도 칼리아리에서의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클라이버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004713, 카를로스는 발레리나였던 부인 스탄카 브레조바르가의 고향인 슬로베니아에서 투병 끝에 간암으로 사망했다. 부인을 잃은 지 1년만이어서 카를로스의 자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매우 특별한 존재다. 강력하게 몰아붙이는 힘과 깊이있는 해석력, 오케스트라를 자기 몸처럼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에서 오는 유연하고 다이내믹한 지휘력 등등 그의 존재는 매력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 어떤 지휘자들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의 가장 큰 무기 중의 하나이다. 비인필하모닉을 지휘할 때에는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표현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화려한 경력에 비한다면 그가 지금까지 레코딩한 음반의 수는 정말로 너무 적다. 하지만 일단 그가 손을 댄 레파토리들은 대부분 명반의 대열에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만큼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지휘자 중의 한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가장 유명한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위시해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등은 이 분야 레코딩사에 길이 빛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슈트라우스의 박쥐’,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의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Angel), 슈베르트의 교향곡 3번과 8, 브람스의 교향곡 4(DG)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들이다.

 

 

 

 

 

 

 

 

 

노다메 칸타빌레 주제곡 - 베토벤 교향곡 7번 -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Beethoven Symphony no.7 Carlos Kleiber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1.avi

 

 

Beethoven Symphony no.7 Carlos Kleiber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2.avi

 

 

Beethoven Symphony no.7 Carlos Kleiber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3.avi

 

 

Beethoven Symphony no.7 Carlos Kleiber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4.avi

 

 

 

대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이기도 한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에리히 클라이버는 워낙 대지휘자였던 관계로 1935년 푸르트벵글러의 힌데미트 사건당시 그가 푸르트벵글러를 지원하고 나서는 바람에 나치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 아들인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야만 했다. 워낙 힘든 역정을 살아왔던 만큼 아버지는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자가 되는 것에 탐탁해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아들이 음악공부를 하는 것조차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휘법을 꾸준히 공부하고 많은 음악을 접해 결국 1952년 라프라타에서 음악인으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동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으로 갔다. 끝까지 음악을 하는 것에 반대하던 아버지 때문에 결국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스위스 연방공업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은 계속 남아 결국 1953년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인 겔트너 프라츠 극장의 무급 견습 지휘자로 지휘 인생을 시작했다.

카를로스의 잠재력을 알아본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오페레타 극장에선 1954년에 그를 지휘자로 영입하고, 이로 인해 그는 프로 지휘자로서 드디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1956년부터 1964년까지 뒤셀도르프와 뒤스부르크를 중심으로 라인 도이치 오페라의 지휘자로 오페라를 주로 연주하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후부터 그는 여러 오케스트라를 거치며 명성을 다져나가기에 이른다. 1964년의 취리히 오페라 극장을 필두로 1966년의 슈투트가르트 뷔르템베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 등에 이르기까지 주로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의 진가를 과시했다. 이미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오페라 전문 지휘자로서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다질 수 있었다. 현대음악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를 비롯하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그너, 베르디, 비제, 베버 등 여러 작품들을 연주해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보체크의 경우 아버지인 에리히 클라이버가 세계 초연한 작품이라 부자가 나란히 이 작품을 멋지게 지휘해 이 분야의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높은 평가와 인기 등으로 그는 1968년부터 저 유명한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무대에 설 수 있는 영광까지 누리기에 이른다.

 

이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생애 명연 중의 하나로 평가받게 되는 위대한 작업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베버의 마탄의 사수이다.

 

1973년 드레스덴에서 녹음한 이 앨범은 현재까지도 이 작품 사상 최고의 명연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을 필두로 그의 파워풀하고 장악력있는 지휘봉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1973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과 197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 데뷔를 장식-, 비제의 카르멘’, 베르크의 보체크등 여러 명작들을 날카롭게 해석해 연이어 주목을 받았다.

 

그 후에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76년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텔로로 오프닝을 장식해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78년 스칼라 오페라 극장 개설 200주년 기념 공연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해 감각적으로 깊이있는 연출을 하는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오프닝 연주를 한 비제의 카르멘’, 시카고 교향악단과의 베토벤의 교향곡 제5’-이 작품은 그의 미국 데뷔작이기도 하다-, 뮌헨과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와 푸치니의 라 보엠등을 무리없이 지휘해 완벽한 지휘자로서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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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시시작
    베토벤 7번의 4악장은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죠..특히나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은 명불허전입니다.
    좋은 블로그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
    제 블로그도 꼭 한 번 들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http://gospel79.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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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의 패션감각]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보여야 하는 연주자들에게 연주복은 어떻게 발전되어 왔을까요?[연주자의 패션감각]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보여야 하는 연주자들에게 연주복은 어떻게 발전되어 왔을까요?

Posted at 2012.08.09 10:56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1)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연주자의 패션감각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님의 연미복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요즘처럼 외형을 중시하는 풍조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늘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보여야 하는 연주자들에게 연주복은 정말이지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남성 연주자는 무조건 연미복이나 턱시도를 입어야 했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주로 여성 연주자들의 고민이었지만 세상이 달라지면서 남성 연주자들의 연주복도 엄격한 틀을 벗어나 각자의 취향과 개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기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20세기의 거장 카라얀은 음반 산업의 중요성을 남보다 앞서 깨달았던 지휘자였습니다. 그리고 들려주는 음악 뿐 아니라 보여주는 모습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음반뿐 아니라 영상물 제작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그 덕에 지금도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물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녹화된 화면 속에서 검은 색 바지 위에 목까지 오는 검은 색 스웨터를 입고 눈을 감은 채 지휘하는 카라얀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요, 상체에 비해 짧고 왜소한 하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런 복장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가급적 전신이나 하반신을 드러내는 각도에서의 촬영은 피했다고 하지요.

 

 

세계 3대 첼리스트로 꼽히는 첼로의 거장, 미샤 마이스키

 

연주자들 가운데 파격적인 의상으로 주목을 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을 찾으라면 아무래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실력과 더불어 그리스의 조각같이 수려한 용모로 여성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그는 몸에 붙는 검은 색 바지 위에 소매와 품이 넉넉하고 잔주름이 잡힌 셔츠를 입고 무대에 등장하면 마치 신화 속의 인물이 나타난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공연의 후반부에는 다른 색상의 셔츠를 갈아입곤 하는데 그 의상이 모두 일본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자케의 작품이라고 해서 더욱 음악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연주회마다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연주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전부터 유명 연주가들의 연주회마다 모습을 보이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 앙드레 김은 좋아하는 연주자들의 연주복을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에게 선물한 특이한 연주복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생 텍쥐 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의 삽화에서 본 듯한 복장으로 무대에 등장한 김선욱의 표정과 몸짓은 잠시 겸연쩍고 쑥스러운 듯 어색해보였지만 곧 음악에 몰입하여 성숙하고 열정적인 연주를 펼쳐보였습니다.

 

 

자신만의 시각적 이미지가 확고한 지휘자 금난새

 

우리나라 연주자들 가운데 패션 감각에서 으뜸을 꼽으라면 지휘자 금난새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검정색이나 짙은 회색 계열의 색상에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적인 수트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부적인 디자인에서 단추와 재봉선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다르면서 꼼꼼하게 마무리 한 특별한 의상입니다. 그리고 늘 초록색 계통의 타이에다 같은 색 계통의 소품으로 포인트를 줌으로써 자신만의 시각적 이미지를 확실하고 각인시키고 있는 점이야말로 실로 감탄스러울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무대에서 만난 연주자들 가운데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가장 뚜렷하고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심어준 음악가라면 단연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를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LG 아트 홀에서 들었던 그의 연주와 그 때 보았던 그의 모습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고 파격적이었습니다. 눈부시게 밝은 금발과 하얀 피부에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난 용모부터가 여성 팬들을 매료시켰고 초인적인 기교에다 폭발적인 힘이 없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리스트의 난곡들을 어루만지듯이, 혹은 노래하듯이 너무나도 부드럽고 편안하게 풀어헤치는 연주는 청중들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습니다. 그의 모습과 음악은 무척이나 섬세하여 부서지기 쉽지만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리스트가 작곡한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주제에 의한 패러프레이즈에서 그는 어느 성악가가 부르는 노래보다 더 노래답고 더 아름다운 선율을 가슴이 멍들도록 흐느끼며 노래했습니다. 그의 타고난 감각과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몸매를 자연스럽게 감싸면서 어깨로부터 떨어지는 선이 부드러운 듯 빈틈이 없었던 검은 색 연미복은 눈부신 그의 외모를 더욱 더 돋보이게 했고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드레스 셔츠에 빨간 색 나비 넥타이와 역시 빨간 바탕에 금박 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조끼는 너무나 파격적이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을 때 살짝 올라간 바지 끝단 아래로 살짝 드러난 빨간 양말은 청중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복장이나 외모가 들리는 음악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 때문에 들리는 것이 달라질 수야 없겠지요. 그러나 들리는 것만큼 보이는 것도 좋다면, 그래서 보기에도, 듣기에도 다 좋은 연주회라면 듣기에만 좋은 연주회보다야 당연히 더 낫겠지요. 옷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기 전에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서 그런 마음을 보이고 싶다면 옷차림부터 신경을 쓰고 가다듬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일상에서의 만남부터가 이렇다면 무대에 나서서 청중들을 대하는 예술가의 입장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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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베를린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카라얀의 교훈[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베를린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카라얀의 교훈

Posted at 2012.06.01 11:47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2)
지휘자 카라얀의 교훈

 

 


흔히들 19세를 피아니스트의 시대라고 하고 20세기를 지휘자의 시대라고 합니다. 슈만과 브람스, 쇼팽과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들어 기억할 만한 19세기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은 대부분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고 그 시대 청중들의 관심과 애정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점점 커지면서 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사람들의 관심도 지휘자에게로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20세기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지휘자 한 사람을 말하라면 쉽지 않겠지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지휘자라면 단연 카라얀을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입니다. 카라얀은 늘 새로운 관심과 변신으로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판도를 바꾸어놓았고 그 때문에 숱한 찬사와 더불어 그에 못지 않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베를린 필과 빈 필, 오페라 극장의 쌍벽이라 할 수 있는 스칼라 극장과 빈 국립 가극장을 혼자 움켜쥐었고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세계 최고의 음악 축제인 잘츠부르크 음악제까지 지배했던 그는 오케스트라의 제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면서 지휘자가 군림하던 시대도 막을 내렸고 지금은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독재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휘봉 하나로 세계 음악계를 지배했던 황제 카라얀

 

카라얀의 신화가 가능했던 가장 큰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 그의 음악적인 능력에서 찾아야겠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고 어떤 면에서는 사업가적인 감각과 경영자적인 리더쉽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보다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에 대응하여 변신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카라얀은 중요한 시기마다 승부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결단과 모험을 감행했고 그때마다 그 자신은 물론 클래식 음악의 흐름까지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푸르트뱅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단원들의 투표 결과, 그토록 원하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제안 받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종신 지휘자를 요구하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결국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카라얀은 이후 30년이 넘는 긴 세월 베를린 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음악계를 지배하는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카라얀에게도 컴플렉스가 있었으니... 바로 짧은 키!

 

요트와 승마는 물론 스포츠카 운전과 비행기 조종까지 즐겼을 만큼 속도와 경쟁을 좋아했던 그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오히려 일생일대의 호기로 반전시킬 만큼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났는가 하면 순간을 포착하는 순발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한 때 연주활동이 금지되는 시련에 부딪혔지만 이 때 찾아온 음반사 EMI의 프로듀서 월터 래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적극적으로 음반작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그 시대 대다수의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음반작업에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이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그의 선택이 얼마나 모험적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래그가 음반 녹음을 위해 만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음반을 내놓기 시작했고 활동에 대한 제재가 풀린 다음에도 음반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더욱 키워나갔습니다. 나중에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작업이 많아지면서 EMI와의 사이에서 묘한 입장에 놓이기도 했지만 끝내 어느 한 쪽과의 독점 계약을 피함으로써 항상 더 좋은 조건을 선택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특별 주문 제작한 911 터보 RS.

911 turbo 중에 RS형은 카라얀만을 위해 단 한대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구글

 

중요한 시기마다 그의 선택이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변명하지 않는 자신감 또한 그의 남다른 장점이기도 합니다. 한 때 나치당에 입당한 전력이 평생 그를 괴롭혔지만 그 스스로는 아헨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다시 당시로 돌아가서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했을 것이라는 말까지도 했을 정도입니다. 1980년 소니의 회장 아키오 모리타를 만나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가능성을 감지한 카라얀은 오페라 마술피리를 최초로 디지털로 녹음했고 이듬해 415일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에서 카라얀은 모리타, 그리고 필립스의 간부들과 함께 새로 출시하게 되는 CD의 규격을 발표하게 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시디를 개발한 필립스와 소니는 카라얀에게 한 장에 담게 되는 녹음의 분량이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9합창을 두 장의 엘피에 나누어 담아야 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던 그는 합창교향곡을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정도를 제안해서 결국 74분으로 정해졌다고 하지요. 카라얀은 이엠아이와 그라모폰을 오가며 수많은 음반을 냈습니다. 에스피와 레이저디스크까지 포함하면 그의 생전에 판매한 그의 음반만도 11500만장이 넘습니다.

 

 

 

음악을 CD로...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가능성을 이끈 카라얀

 

1989년 여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의 입단 문제로 불거진 단원들과의 불화로 끝내 베를린 필을 사임하게 된 카라얀은 그해 잘츠부르크 인근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단원들과 사적으로 만나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던 카라얀은 어쩌면 그런 지나친 자기 관리로 말미암아 화를 키웠을지도 모릅니다. 작은 키와 짧은 하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연주를 녹화한 영상물에서 허리 아래를 찍지 못하도록 할 만큼 스스로의 이미지 관리에도 철저했던 그였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었나 봅니다.

 

드보르자크 5번 3악장베를릴 필 카라얀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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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라얀 광팬
    이건 아닌듯 해요 카라얀키가 177인데 작다는건 아니지않나요? 카라얀이 원래 지휘동작이 클뿐 이거를 키가 작다고 하는건 아니지 않나요? 지휘자키가 180안팎인데 키가 작다면 165 정도는 되야 작다고 하는게 옳지않을까요?
  2. 카라얀광팬
    카라얀의 키가 작아보인다는건 아마도 1980년대의 카라얀이남긴 영상물이 많아서 이면서 동시에 연미복대신 입은 공연복?이 키가 작아보이는 착시현상을 가져온것이기 때문이거나 1976년 척추수술로 인한게 아닐까요? 제가 카라얀 광팬으로서 이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정 못밑으시면 카라얀의 1971년에찍은 베토벤교향곡 3번의 3악장을 보시면 될꺼에요
    • 2013.11.13 13:43 신고 [Edit/Del]
      카라얀 광팬님 안녕하세요.

      카라얀의 키라고 하면...
      최근 한 여권이 발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카라얀의 키가 173cm 라고 적힌 여권입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나 책들로 보았을 때에는 160cm초/중반으로 카라얀의 키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차후 정확한 자료가 있으면 함께 링크하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3. 카라얀 광팬
    블로그신님 안녕하세요.
    저도 그여권에 대하여 압니다. 저희나라에 1984년 카라얀이 내한공연을 왔을때라고 아는데 이미
    그의 나이는 76세 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나이가 들면 키가 줄어드는게 정상적이죠. 177이라는것에 매우 신빙성이 갑니다. 그가 50대 60대의 젊을때 키가 177이라는것이고 늙어서 173이라면 줄어든것이니 맞는것 같군요.
    173이라는 여권의 키는 신체검사를 통해 잰것일 것이니 확실 한것입니다. 제가 언급하것은 카라얀의 80년대
    옷때문입니다. 연미복과 달리 키가 작아보이는 착시현상이므로 우리나라에서 들리는 이야기가 착시현상에 의한 추측의 의견이고 저희나라의 책으로는 신빙성이 매우 떨어 집니다. 그건 카라얀의 비서라든지 일가친척과 가족만이 알겟지만 아마 그책들도 카라얀의 모습이나 사진들로만 입각한 추측일것입니다. 저의 전체적인 의견과 더불어 님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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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지휘자의 리더쉽 /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리더십을 보면서...[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지휘자의 리더쉽 /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리더십을 보면서...

Posted at 2012.04.03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8)
지휘자의 리더쉽

 

 

 


얼마 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은인이었다는 사실이 백건우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은 지휘콩쿠르로 바뀐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콩쿠르에 참가한 열다섯 살 소년 백건우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혼자 연습하는 모습을 발코니 석에서 지켜보던 번스타인이 주최 측에 그를 도우라고 말해 줄리어드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25년이나 지난 어느 날 백건우가 우연히 당시 콩쿠르의 조직위원장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번스타인은 20세기 후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베를린 필의 카라얀과 지휘계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매스컴을 적절히 활용하는 등 실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 스타일과 이미지는 상반된 것이 많았지요. 카라얀이 평생 사적으로 단원들과 식사자리 한번 가지지 않았던 독선적인 카리스마였다면 번스타인은 부드러운 이미지와 설득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요청이 있자 이를 거절하는 모험을 통해 종신 총감독의 지위를 얻어낸 승부사였다면 번스타인은 언제나 타협과 배려를 통해 모두의 만족을 이끌어내려 한 코디네이터였습니다.

 

베를린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카라얀

 

종신을 고집하다 단원들과의 불화로 끝내 사임에 이르렀던 카라얀과는 달리 번스타인은 적절한 시기에 주빈 메타에게 뉴욕 필을 물려주고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세계 유수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돌아다니며 지휘했는데 특별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요. 빈 필과의 한 연주회가 끝나고 열광적인 박수와 앙코르 요청이 있자 무대로 걸어 나온 그는 갑자기 악장을 일으켜 악단을 이끌게 하곤 자신은 무대 옆에 조용히 섰습니다. 시트라우스의 왈츠가 흘러나오자 조금 전까지 어리둥절했던 청중들은 그제서야 번스타인의 의도를 알고 전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로 대답했습니다. 왈츠는 빈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잘 연주하는 음악이니 빈 필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지요. 번스타인의 성격이 그렇기도 하지만 다분히 보여주기 위한 제스추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팔방미인 번스타인도 뉴욕 필의 단원들과는 별로였답니다. 말이 많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언어학을 전공하고 책까지 냈으니 짐작이 가는 일이지요. 연습시간이 끝나고도 잔소리가 이어지면 고참들은 악기를 챙겨 지위자 앞을 지나쳤다는군요. 이처럼 제 잘난 맛에 사는 예술가들을 어떻게든 이끌어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야 하는 지휘자야 말로 리더중의 리더가 아닌가 싶습니다.

 

카라얀이 사임한 이후 베를린 필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독일의 자랑인 만큼 다들 독일인 지휘자인 클라이버를 예상했지만 성격 좋고 배경 좋은 이탈리아의 아바도를 선택했습니다. 카라얀에게 물린 단원들이 클라이버의 고지식한 완벽주의를 감당하기 싫었겠지요. 가능한 한 적은 시간을 연습하고 많은 자유시간을 누리고 싶었을 겁니다. 완벽이 아니면 타협을 하지 않는 클라이버에게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을겁니다. 음악 명문가 출신의 아바도에게는 후원하는 세력도 많아서 교향악단 운영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아바도가 이탈리아 마피아의 지원을 받아 베를린 필에 입성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황제 카라얀의 후임.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떠난 이후 지휘계에도 신유목시대가 왔습니다. 상임지휘자로 한 오케스트라를 도맡에 오래가기 보다 여러 오케스트라를 떠도는 지휘자가 많아졌죠. 잘하는 몇 개의 레퍼토리만 있으면 한참을 견딜 수 있고 단원들도 간섭을 덜 받으며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어 서로들 좋아합니다. 문제는 오케스트라의 개성이 희미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과거 유진 오먼디가 오랫동안 아끌었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그들만의 소리가 있어 필라델피아 사운드, 혹은 유진 오먼디 사운드라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점점 이런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지요.

 

 

 "오먼디 = 필라델피아 사운드" 라는 공식을 만든 헝가리 태생의 미국의 지휘자 유진 오먼디

 

신유목시대의 대표적인 지휘자 유형이라면 로린 마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가 지휘해야 할 오케스트라의 능력과 주어진 시간과 기타 여건들을 정확하게 판단하면 단원들에겐 그 안에서 가능한 만큼의 최선만을 요구합니다. 첫 만남과 연습, 마지막 리허설까지의 과정에서도 늘 유머와 칭찬을 잊지 않죠. 자신이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자신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따르는 부지휘자를 보내 연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당연히 단원들이 가장 좋아하고 신이 나서 하게 되니까 좋은 결과가 있고 또 그런 모습을 보는 청중들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현실적이면서 얄미울 정도로 영리한 리더쉽이죠.

 

 

즐거움을 추구했던 영리한 지휘자. 로린 마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휘자 두 분의 클래스를 비교하면 리더쉽의 상반된 두 가지 유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 분은 먼저 지휘봉을 고르고 손으로 쥐는 법부터 가르치고 다른 한 분은 전혀 설명이나 준비없이 대뜸 오케스트라를 앞에 놓고 악보대로 소리 나게 해보라고 시킵니다. 쉽게 생각하거나 혹은 너무 긴장해서 실패하는 게 당연하죠. 그렇게 기부터 죽여 긴장시키는 겁니다. 수업에서까지 발휘되는 지휘자의 리더쉽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리더쉽을 살펴보았지만 여러분에게도 생소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유형의 리더쉽을 발휘하고 계신지요? 그리고 그것이 과연 여러분의 조직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같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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