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메디치 가문에서 시작된 오페라와 발레의 역사.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함께한 오페라.[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메디치 가문에서 시작된 오페라와 발레의 역사.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함께한 오페라.

Posted at 2016.11.10 11:54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클래식 톡톡



메디치 가문이라면 지금도 재력가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예술가들특히 보티첼리와 라파엘로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미술가들을 후원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지금도 메디치의 본산이었던 우피치 궁은 박물관으로 바뀌어 메디치 가문이 소장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미술품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소장품들을 다 돌아보려면 하루가 모자라고 이틀도 부족할 만큼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두가 메디치라는 한 가문이 의뢰하고 소장한 미술품이란 것입니다.



이처럼 메디치라면 주로 회화나 조각과 같은 미술이나 건축의 애호가이자 후원자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예술 장르나 학문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걸쳐 두루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오페라와 발레의 경우 그 탄생부터가 메디치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것이 모두 프랑스 왕실과의 혼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오페라가 피렌체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바르디 백작의 사랑방에 모였던 당대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문헌 속의 기록으로만 남은 그리스의 비극을 재현하고자 서로 협력하여 새롭게 만든 것이 오페라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가 메디치 가문의 후광을 업고 탄생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600 10프랑스 왕 앙리 4세는 메디치 가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를 신부로 맞아 결혼식을 올렸고 피렌체에서는 이를 축하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대규모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축제의 볼거리로 오페라를 만들기로 했고 여기에는 당시 피렌체를 대표할 만한 세 작곡가가 동원되었습니다. 결혼식이 거행된 다음날인 10 6일에는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가 작곡한 ‘쥬노네와 미네르바의 경쟁이 팔라치오 베키오에서 벌어진 향연 가운데 공연되었고 다음날에는 피티 궁전에서 야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0 9줄리오 카치니의 ‘체팔로의 납치가 우피치 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피렌체 시민 모두가 오페라라는 새로운 공연예술을 알게 되었고 그 소문이 이탈리아 전역을 넘어 프랑스와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발레의 종주국이라면 프랑스를 떠올리겠지만 그 원형을 수출한 나라는 이탈리아였습니다. 누구나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발레의 탄생이 오페라보다 앞섰고 이 또한 메디치 가문과 프랑스 왕실의 결혼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딸 카테리나가 프랑스의 왕실로 시집가면서 가져간 무수한 혼수품들 가운데 발레의 씨앗도 포함되었던 것입니다후에 카테리나의 남편은 앙리 2세가 되었고 아들인 앙리 3세의 치세에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발레를 만들도록 지시한 이가 바로 카테리나, 즉 카트린느였습니다.



앙리 3세의 모후였던 카트린느가 며느리인 왕후 루이즈의 여동생 마르게리트 드 로랭과 조아유 공작의 결혼식 피로연을 위해 만들었던 최초의 발레는 춤과 음악그리고 노래와 시낭송까지 결합한 형태였습니다. 그녀가 시집올 때 데려온 시종 중에 음악과 춤에 정통했던 발다사리오 다 벨지오조소 (프랑스 이름으로는 Bathasar de Beaujoyeulx)에게 공연을 맡겼습니다. 오늘날 라인의 코믹 발레(원제는 Ballet Comique de la Royne)로 불리고 있는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키르케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고 결국은 결국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키르케를 물리치고 여왕 루이즈에게 찬사를 바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연한 상상이겠지만 프랑스 궁중에서 싹튼 발레라는 새로운 예술은 당시 결혼식 피로연에서 공연되었던 오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장르 구분으로 보자면 문학과 연극음악과 무용이 한 데 어우러졌던 것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었고 그것을 새롭게 재현하겠다는 것이 오페라였다면 그 안에 당연히 무용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노래와 음악 중심으로 발전해갔다면 프랑스의 발레는 노래 대신 시와 춤을 택했고 결국에는 춤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화 “왕의 춤을 보면 루이 14세가 출연하는 발레 공연에서 라신이 자신의 시를 스스로 낭송하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왕은 온 몸에 황금 칠을 하고 태양의 신 아폴로를 춤추고 있고 라신은 그런 아폴로즉 프랑스의 국왕 을 찬양하는 시를 읊조리고 있어 태양 왕이라는 루이 14세의 별칭이 어떤 연유로 비롯되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루이 14세는 열세 살부터 몸이 불어 춤을 출 수 없을 때까지 수많은 발레에 직접 출연했습니다. 더불어 직업 무용수를 양성하기 위해 1661년 왕립 무용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전통이 오늘날 파리 오페라극장의 발레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곡가 륄리를 교장에 임명했고 보샹으로 하여금 무용수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도록 했습니다. 보샹은 오늘날까지 발레의 기본동작으로 강조되고 있는 ‘다섯 가지 다리의 포지시옹을 창안하였고 륄리는 처음으로 여성을 발레 무대에 출연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임이 고안되어 시의 낭송 없이 발레의 동작만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있게 되면서 독립적인 무대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어느 국가나 민족이 크게 부흥하여 그 주위를 평정하고 위세를 떨쳤을 때안으로는 학문이나 예술을 크게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개인들이 앞장서서 학문과 예술의 융성을 도모코자 가진 능력과 재력을 희사했던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르네상스 시대를 주도했던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과 바르디 백작 등이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는 데 앞장섰는가 하면 이를 본받고자 했던 프랑스 왕실, 특히 부르봉 왕가의 전성기를 열었던 루이 14세 또한 주변에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거느리면서 그들의 창작활동을 크게 장려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에 못지 않게 자랑할 만한 위인들이 많았지만 우리 스스로 기억하여 본받으려 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조선시대만 해도 박연을 총애하여 아악을 집대성케 했던 세종대왕이 있었고 판소리에 관한 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그 기틀을 만들고 다졌던 신재효의 역할과 기여 또한 바르디와 메디치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궁중예식과 그에 필요한 춤의 양식인 정재를 창제하고 정리하여 후대에 남긴 소명세자의 공헌이야말로 발레를 체계화한 루이 14세에 견줄만한 치적임에 틀림없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르네상스를 이끌어가고 뒷받침할 우리의 메디치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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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유럽여행_피렌체 어디까지 가봤니?^^[유럽여행]유럽여행_피렌체 어디까지 가봤니?^^

Posted at 2012.04.05 13:18 | Posted in 직장인 톡톡/심심타파!

영어로는 플로렌스, 로마에서 약 230KM떨어진 지역.

BC2세기부터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후 로마와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있었으나,
12세기 전반에 코무네로 독립하고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전하면서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고 
번영하기 시작했습니다. 13세기 교황당과 황제당의 싸움에서 인근도시를 지배하며 공화국으로 성장,
10만 인구에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여,
권력을 잡은 메디치가의 적극적인 문예지원으로
황금기를 맞이하는 지역이입니다.

 
<t산타크로체 성당_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마키아벨리등의 무덤이 있어요, 단테의 기념비와 함께>

<다비드상_도나텔로>

우피치 미술관
원래는 토스카나 대공 코지모 1세가 자신의 집무실로 쓰기 위해 건축하여
전 3층에 미술품 전시를 위한 공간 계획,
가스토네를 끝으로 메디치 가문이 단절되고 1737년 오스트리아의 군대는
피렌체를 점령, 메디치의 마지막 손녀인 안나 마리아 데디치는 죽을때까지
피티궁에 거처, 마지막 유언으로 모든 메디치가의 재산을 기부하면서
피렌체 밖으로의 반출금지를 요청하여 현재전시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이 있다.

 


메디치가
평범한 중산 가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부를 측적,
1400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된 조반니 디 비치는 당시 일어났던 방직 노동자 길드 반란에서 
대중의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정계를 진출, 피렌체 공화국 수반인 곤팔로니에레에 임명,
아들 코지모 데미치는 피렌체 인근 메디치 별장에
고전주의자 피지노를 학장으로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를 창설하여 문예에 힘썻다. 
메디치가는 로렌초 데 메디치까지 르네상스 전성기를 주도하였습니다.
1537년 메디치 가문을 이어간 사람은 정통 장자 후손이 끊어지면서
먼 친척인 조반니의 후손인 코시모 1세로 그는
교황으로부터 대공을 인정받음으로써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교황 레오10세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했던 3대 교황중 한명으로 
그 씀씀이가 엄청났던 교황이기도 하죠^^ 

메디치가는 미켈로초,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피렌체를 최고의 르네상스 중심지로 만들었죠.
메디치 가문은 산로레초 교회, 산 마르코 수도원 등
피렌체 및 다른도시 성당건축과 장식사업을 후원하였습니다. 

이 정도의 피렌체의 지식이면 피렌체를 방문하여
여행하는 것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 도시의 역사를 알고 그 곳을 둘러봄은
많은 것을 다르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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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의 역사/유래-[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의 역사/유래-

Posted at 2011.11.17 12:5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라고 하면 무반주 합창이나 중창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계실 겁니다.

관심이 있어 이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원래는 아 카펠라 a capella', 교회에 맞게’, 혹은 교회 풍으로라는 뜻인데 지금은 반주가 없이 부르는 중창이나 합창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처음에는 교회에 맞게라는 뜻이었다가 무반주 합창이나 중창으로 바뀐 까닭이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먼 옛날에는 교회에서 노래를 불러 신을 찬양하려면 반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또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음악이 아니더라도 무반주로 부르는 합창이나 중창을 아카펠라로 부르게 되었고 오히려 교회에서는 반주를 사용하는 음악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카펠라 이렇게 만들어졌다!

왜? 초기 유럽의 크리스트교 교회에서는 왜 악기로 반주하는 것을 금지했을까요?

한 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을 무렵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할 때 원형경기장에 맹수들을 풀어놓고 온갖 악기 소리로 흥을 돋우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그 후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포교하는 과정에서 이교도들의 종교의식과 기독교의 예배의식을 엄격하게 구분 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중세의 신학자들이 기록으로 남겨 전하고 있는 교리상의 명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등급의 음악이 있는데,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은 무지카 문두스 musica mundus', 즉 천상의 음악으로 신의 섭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지카 휴마나 musica humana’, 즉 인간의 음악으로 신의 섭리가 인간 세상에 구현된 것이고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 musica instrumentalis’, 즉 도구의 음악은 인간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물리적 현상의 소리로 가장 낮은 등급의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고귀하고 오묘한 신의 섭리와 그것이 구현된 자연의 조화는 미천한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사람이 보고 듣고 느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교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교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일진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악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가치 있고 진실 된 본질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도 나타낼 수도 없다는 것이고,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일장춘몽 헛것에 불과하니 지상에 살면서도 천국과 하느님만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손바닥의 상처를 보고서야 믿었던 제자 토마스를 나무라셨듯이 보지 않고 듣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교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교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이었겠지요. 하물며 인간의 손으로 만든 악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음악 해석의 변천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다 변하기 마련이고 종교의 교리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음악에 대한 해석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천상의 음악은 신의 섭리와 그것이 구현된 자연의 조화까지를 다 아우르는 개념이 되고 인간의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의 섭리요 자연의 조화를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구의 음악은 인간이 만든 도구, 즉 악기로 내는 소리인 만큼 여전히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변화를 거쳐 사람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에는 당위성이 부여되었지만 그 후로도 한참동안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은 교회에 수용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악기로 반주하는 성가나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지만 특정 교파 경우는 아직까지도 교회 안에서 노래로 찬양을 하거나 찬송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아카펠라의 황금기!

반주 없이 노래하는 합창이나 중창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노래 부르기를 즐겼는데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마드리갈이라는 양식이 가장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 무렵부터 악보 출판이 시작되어 그것이 또한 이런 음악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에 출판된 음악들의 상당수가 기록으로 남게 되어 지금도 합창단의 레퍼토리만큼은 바로크 시대를 앞질러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무반주 합창곡이 교회 밖에서 성행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놀라운 업적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을 꼽으라면 팔레스트리나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듯이 가톨릭교회가 안팎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홀로 소신을 꺾지 않고 위대한 걸작으로 교회음악의 권위를 지켰던 거장이었습니다. 요즈음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 사회에도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팔레스트리나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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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은 삼백년마다 새로 태어난다?[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은 삼백년마다 새로 태어난다?

Posted at 2011.11.03 18:1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 음악이 300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 인간의 역사가 늘 되풀이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문명도 그러려니와 나라도 그렇고, 한 인간의 삶도 부침을 거듭하기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드물지만 그 가운데 어떤 일들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거듭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대표적으로 서양 음악의 역사가 그렇다고들 합니다. 음악의 기원을 따지자면 까마득한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기록으로 남은 음악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보편적인 역사라는 것이 문자 기록이 있고난 다음부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역사를 제대로 언급하자면 음악의 기록, 즉 악보가 남아서 그것을 지금에 와서 고스란히 되살릴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서양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레고리오 성가를 먼저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악보로 남아서 오늘날에도 재현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그의 재위 14, 즉 서기 590년부터 604년 사이 동안 유럽 각지의 성가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작업의 방대함을 생각한다면 교황이 시작했지만 그의 사후에 한참이나 지나서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라고 하는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름을 따서 붙인 성가 형태이다. 물론 교황께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모두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고, 그분께서 당시의 성가들을 정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그것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을 백년쯤 뒤로 생각한다면 700년경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약 삼백년쯤이 지나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에다 다른 선율을 붙여서 동시에 부르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또 삼백년쯤이 지난 천 삼백년 경부터는 교회 밖에서 부르던 노래나 악기로 연주하던 춤곡들까지도 기록으로 남겼는가 하면 리듬이라는 것이 음악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게 삼백년이 지난 1600년경 우리가 흔히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지금의 우리가 들어도 생소하기까지 한 현대음악이 탄생한 것이지요.
라틴어로 기록된 오래된 문헌을 보면 1300년경에 시작된 획기적인 새로운 음악을 아르스 노바신 예술이라 일컬었고 이전 300년 동안의 음악을 이와 구분하여 아르스 안티쿠아’, 구 예술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바로크라 부르게 된 1600년경의 음악도 라틴어로 누오베 무지케’, 신 음악이라 했고 20세기의 현대음악은 영어로 뉴 뮤직이라 부르고 있으니 결국은 1300년경부터 300년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음악들의 이름이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아르스 노바는 新 예술이었으며, 바로크는 新 음악이고, 현대음악은 New Music 이다.


| 묘한 것은 1300년대 이후 백오십년마다 또 다른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인데, 1450년경에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고 1600년과 1900년 사이의 1750년경에는 고전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시기가 바로 1750년대 이후의 백오십년입니다. 그 백오십년 사이에 고전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지금 우리가 즐겨 듣는 클래식 음악의 명곡들 대부분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클래식의 어원은 고대 로마시대의 계급을 가르키는 라틴어로 잘 정돈된, 품위있는, 영구적이며 모범적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후 예술사에서 고전주의 시대를 일컫는 말로 클래식이 사용되다가 지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클래식 음악이라 하는 영역까지 아우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이라면 당장 그 말이 가지는 의미에서부터 찾을 수 있겠지만 고전주의 시대 이후의 음악이 클래식 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까지 나라마다, 혹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던 서양의 음악이 고전주의 시대 이후 점점 하나의 질서로 통일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통합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질서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이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입니다. 그래서 그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1750
년은 다름 아닌 바흐가 세상을 떠난 해입니다. 한 시대의 종말과 한 시대의 시작을 한 작곡가가 생애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의 역사는 늘 위대한 작곡가의 전기로 채워져 있는 모양입니다. 어찌 보면 바흐는 바로크 시대에도 속하지 않고 고전주의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작곡가입니다. 속한다기 보다는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토벤의 위대한 업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바흐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고전주의 시대를 완성하여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대게는 그를 고전주의 시대의 작곡가라 하지만 좀 안다는 사람들은 낭만주의 시대의 선구자로 그를 자리매김합니다. 그러나 그도 바흐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시대가 아니라 두 시대를 다 포용했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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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수님 어제 계명아트센터에서 함께 있었던 최인규입니다.

    명쾌하고 즐거운 설명 갑사합니다.

    내년에 북구에서 뵙기를 희망하고 이건콘서트에서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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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유부남 혼자 떠나는 일본여행② – 키타큐슈(北九州), 시모노세키(下関)[여행]유부남 혼자 떠나는 일본여행② – 키타큐슈(北九州), 시모노세키(下関)

Posted at 2011.10.21 00:12 | Posted in 직장인 톡톡/심심타파!

지난 후쿠오카, 야나가와 여행기에 이어 두 번째 날 키타큐슈, 시모노세키 여행기로
'유부남 혼자 떠나는 일본여행' 포스팅을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자유의 시간 둘째 날, 이동시간이 아까워 택한 여행지는
바로 하카타에서 북동쪽으로 멀지 않은 키타큐슈(北九州)..
마지막까지 나가사키(長崎)와 저울질 했지만, 가까운 곳이 여유있겠다 싶어 결정했습니다.

모지코(門司港)에서 자전거를 빌리면 전용도로를 따라 칸몬해협을 건너갈 수 있고,
시모노세키 쪽에 유명한 카라토 어시장(唐戶市場)도 있다고 하여 기대를 가득 안고 출발~!


큐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역이며,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되었다는

모지코역(門司港駅)에 내리니 작열하는 태양이 정말~ 후끈! @,.@;;

이 날씨에 자전거를 탔다간 화상을 입을 것 같아, 차선책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지코와 시모노세키를 이어주는 이 자그마한 연락선.
한 시간에도 2~3번은 배편이 있어 대기시간도 짧고, 가격도 착했습니다. 강추!



배를 타기 전 주변을 둘러보다 만난 할아버지와 두 아이..
가족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소리가 꼭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습니다.



차선책으로 택한 연락선이 결과적으로 자전거보다 더 좋은 추억거리가 됐는데요.
시원한 바람, 물보라와 함께 해협을 건너는 기분이 정말 시원 통쾌 합니다.



그렇게 해협을 건너 오늘의 중요 목적지인 카라토시장(唐戶市場)을 갔는데...
이럴수가~!!

벌써 상점들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Orz..
역시 어시장은 부지런한 사람만 구경할 수 있나봅니다..


이미 늦어버린 거~

점심을 먹기 전 카라토시장(唐戶市場) 윗층으로 올라가 해협을 느긋하게 감상했습니다.
놀러 온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도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어시장 관광을 놓쳤으니 신선한 해산물이라도 먹겠다고 음식점을 기웃거리길 몇 바퀴~
해협이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복어와 고래 사시미 세트를 시켜봤습니다.


시모노세키(下関)는 원래 복어로 유명한 곳이라 어느 정도 기대치가 있었는데,
~! 고래고기는 정말 기대를 뛰어넘는 황홀한 맛이네요.

또 시원한 맥주를 꿀떡꿀떡~!! 'ㅠ'



느긋하게 앉아 맥주를 즐기며 해협을 감상하길 두 시간.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근처 고쿠라(小倉)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캐널시티 하카타(キャナルシティ博多)
와 같은 사람이 설계했다는
복합쇼핑몰 리버워크 키타큐슈(リバーウォーク北九州)
고쿠라성
야사카신사(八坂神社) 바로 인접해있습니다.



정원도, 신사도, 해자도 모두 오밀조밀 아담한 사이즈의 고쿠라성(小倉城)
무더운 날씨에 지치기도 하고 입장료가 비싸 들어가보진 않았습니다.



이제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 할 시간..
나카스(中洲) 이자카야에서 술 한잔 마시고 강가로 나오니,
강물에 비친 네온사인이 눈부십니다.


한 쪽에서는 나카스 밤거리 특유의 호객행위로 시끌벅적 하지만
혼자서 신낼 일도 없는지라 조용히 강가를 따라 산책을 해봤습니다.



인적이 드물어질 만큼 내려와서 자리를 깔고 앉으니
나카스 밤거리가 또 다르게 보입니다.


어디 분위기 좋은 바에 앉아 말없는 친구와 술 한잔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새 사람이 그리워졌는지 좀처럼 떠나기 힘들었던 밤거리였습니다.





다음날 부산항에 도착 후 얼큰한 맛이 그리워 찾은 돼지국밥.
좋은데이 한 병 시켜서 반주하니 역시 한국의 맛이 좋긴 좋습니다.

소주 맛이 궁금한 듯 기웃거리는 옆 테이블 외국인에게 술도 한잔 따라주고~ ^^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시간은 새벽1
기분 좋은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며...
가족과 함께 할 내일을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

오랜만에 에너지로 충만한 느낌이랄까,
모두에게 잘 해주고 싶고, 나눠주고 싶은 그런 풍요로운 마음입니다.

언젠가 또 빈 껍데기만 남았다 싶을 땐 다시 훌쩍 떠나야겠죠.
여러가지 역할 속에 매몰된 여러분께도 '혼자 떠나는 여행'
강력 추천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마지막은 고쿠라성 야사카신사(八坂神社)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길묘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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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만간 저도 시모노세키 여행을 계획중이라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4번정도 여행했는데 항상 도쿄에만 있어서 사진을 보니 더 기대가 되네요- 그런데 혹시 다음에 또 일본을 찾으셔도 고래고기는 드시지 마세요.
    그거 돌고래 고기랍니다.ㅠ 일본인들이 그것을 고래고기로 속이고, 또 돌고래를 어떻게 죽이는지 보시면 드실 수 없을 거예요. 그로인해 바다생태계도 파괴된다고 하네요. 참견하고 가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고래고기는 정말 아니되어요.ㅠㅠ '더 코브' 이 다큐멘터리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2. 허거걱.. 그렇군요! 돌고래 고기라니...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못 먹겠군요.. ㅠㅠ
    암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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