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바흐의 마지막 작품. 아르슈타트과 뮐하우젠 시대,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만년의 걸작들을 만들었던 라이프치히 시대까지..[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바흐의 마지막 작품. 아르슈타트과 뮐하우젠 시대,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만년의 걸작들을 만들었던 라이프치히 시대까지..

Posted at 2015.10.28 08:57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바흐의 마지막 작품. 아르슈타트과 뮐하우젠 시대,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만년의 걸작들을 만들었던 라이프치히 시대까지...

 

바흐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작품은 “푸가의 기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곡의 푸가와 4곡의 캐논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오늘날 대위의 모든 기법을 총망라한 전대미문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기법으로 대위와 화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대위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선율을 함께 만들어 가면서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는 것이고 화성은 하나의 선율을 먼저 생각한 다음 그것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다른 음들을 찾아서 채워나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은 서로 별개가 아니고 음악을 만들 때 함께 고려해야 할 변수입니다.

 

 

푸가의 기법(독일어: Die Kunst der Fuge, BWV 108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14곡의 푸가와 4곡의 카논으로 된 곡집이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15번째 푸가를 다 마치지 못하고 239마디에서 중단됩니다. 게다가 이 곡을 어떤 악기로 연주하라는 지시는 악보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바흐가 죽고 한참이나 지난 1927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연주되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여러 악기들의 다양한 조합으로 연주되고 있습니다. 바흐가 이 곡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안과 수술의 후유증으로 실명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흐 - 푸가의 기법 / 모로니

 

 

악기를 지시하지 못한 것을 두고는 특정 악기만을 반드시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설명도 있고 통상적으로 이럴 경우 건반악기를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갑자기 작곡을 중단하였기에 미처 악기를 지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엄격히 말해서 이 곡이 바흐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 바흐는 제자이자 사위였던 요한 크리스토프 알트니콜을 침대로 불러 그의 지시대로 악보에 적도록 시켰고 그렇게 완성한 곡이 “저 이제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라는 제목의 코랄 프렐류드였으니 이 곡이야말로 진정 바흐의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연 때문에 오늘날 이 곡을 “임종의 코랄”이라 부르고 있고 “푸가의 기법”을 연주한 다음 이어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이렇듯 누군가에게 받아 적게 하여 곡을 쓸 수 있는데 왜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푸가의 기법”을 같은 방법으로 완성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요? 그 해답은 그의 독실한 신앙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 작곡을 한다는 것은 하늘이 주신 소명이었고 그 자신은 단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도록 명을 받든 한낱 피조물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도,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작곡을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된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이니 그저 따를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임종의 순간에 완성한 마지막 곡은 그에게 주어진 소명 가운데 하나로서가 아니라 소임을 다하여 부르심을 받은 임무자가 올리는 보고였던 셈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눈이 멀어 병상에 누웠을 때 “푸가의 기법”을 완성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하기 보다 비로소 십자가를 내려놓게 되었음에 안도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이제나흐 광장 서 있는 게오르크 교회는 아이제나흐 시 교회. 1182-1188년에 지어진 교회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의 문서에 따르면 바흐는 1685년 3월 23일에 세례를 받았고 이를 근거로 그는 이틀 전인 3월 21일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곱 살에 성 게오르크 교회 부속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 때부터 벌써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교회 성가대에 들어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를 잃은 바흐는 오르가니스트인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를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주합니다. 이 시절의 바흐는 당대 대가들의 작품 사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형의 악보를 몰래 빼내 밤새 필사하면서 음악 공부를 하였습니다. 오르도르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을 배웠고 형의 가족이 늘어나자 바흐는 1700년 봄에 북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자립합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는 북독일 학파의 다채로운 음악을 접했고, 교회 오르간 연주의 대가 게오르크 뵘을 만났고 함부르크에서 북독일 오르간악파의 노대가 라인켄의 음악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웃 고장인 쩰레의 궁정악단 연주를 듣고 프랑스악파의 양식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바흐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가로서 취직을 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엔 궁정악사로서 일하다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합니다. 이 직책은 오르간 연주뿐 아니라, 성가대를 훈련시켜야 했는데, 18세인 바흐는 젊은 대원들과 길거리에서 주먹으로 치고 받기도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늘 겸손하고 성실했던 바흐에게도 혈기 넘치던 젊은 시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바흐의 음악인생은 그가 살았던 장소에 따라 대별됩니다. 즉 아르슈타트과 뮐하우젠 시대,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만년의 걸작들을 만들었던 라이프치히 시대입니다.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던 바흐는 늘 부양해야 할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낳은 생활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직장을 옮겼고 마지막으로 라이프치히를 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장성한 자녀들의 대학교육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던 그의 삶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들 또한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하여 아버지의 업적과 명성을 이을 수 있었고 오늘날 기적이라 일컬을 만큼 놀라운 업적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삶과 음악의 바탕에는 누구보다 깊고 든든한 신앙심이 받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작곡을 시작할 때 악보에 예수여 도와주소서(Jesu Juva)를 줄인 J.J.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In Nomine Jesu)를 줄인 I.N.J.를 썼고 마지막엔 항상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대 Gloria)를 줄인 S.D.G.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늘 성경을 가까이 두고 읽었고 좋아하는 성경 구절에 “하나님께 드리는 음악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항상 은혜로운 임재로 가까이 와 계신다”라고 주석을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반드시 기독교가 아니고 특정한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섭리하는 무엇인가가 있어 그것을 거슬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정말이지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스스로 교만하거나 나태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흐는 그 음악 이전에 그의 삶이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과 교훈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만의 버켓리스트에는 바흐순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태어난 아이제나흐에서 시작하여 그가 성장한 오르도르프와 뤼네부르크를 지나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 바이마르와 괴텐을 거쳐 라이프치히에서 마치게 될 이 여정을 통해 그의 삶의 자취와 향기를 좀 더 가까이 느껴볼 생각입니다. 혹시 이 순례에 동참하시겠다면 기꺼이 동행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바흐순례에 초대합니다.

 

 

Bach: Easter Oratorio (Sir John Eliot Gardiner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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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작곡가 멘델스존.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세상에 태어난 멘델스존을 아시나요?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작곡가 멘델스존.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세상에 태어난 멘델스존을 아시나요?

Posted at 2012.06.21 11:3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7)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작곡가 멘델스존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1809,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던 바로 그 해에 멘델스존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태어난다는 것부터가 서로 상반된 운명이지만 그것 말고도 두 사람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아마도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이가 하이든이었다면 멘델스존은 아마도 가장 부유하고 유복한 환경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누렸던 경우였을 것입니다. 그의 집안이 당시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였으니 오늘날로 치자면 재벌집의 귀한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미소녀... 아니 미소년은???

젊은날의 멘델스존의 초상화[멘델스존 13세]

 

부유한 은행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력과 교양을 두루 갖춘 부모덕에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그 많은 것들 가운데 음악을 택한 것은 부모의 뜻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다른 길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멘델스존은 스스로가 타고난 재능에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 완벽한 환경까지를 갖춘 행운아였습니다. 거기에 넉넉한 인품과 온화한 성격까지 지니고 있어 당대의 음악가들은 물론이고 각계각층의 여러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무엇 하나 남부러울 것 없었던 멘델스존도 건강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지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삶을 마쳐야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 역시 일흔을 넘어 살았던 하이든과는 상반된 운명이었던 것이지요. 두 사람의 삶의 여정은 그토록 달랐지만 온화하고 넉넉한 인품과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 세계는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주어진 환경이 사람의 성격과 삶을 결정짓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세월에는 장사 없구나... 중년의 멘델스존

 

흔히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작품들이 그의 평탄했던 삶과 무난했던 성격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절실하거나 치열한 그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고들 합니다. 멘델스존의 음악에서 그다지 새롭고 도전적인 시도가 보이지 않고 대체로 밝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그가 살았던 삶과 그의 성격을 결부시켜 설명하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를 놓고는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을 것이라며 온갖 추측을 다하면서 멘델스존에게는 또 다른 음악세계의 가능성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만약 멘델스존이 베토벤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더라면 불굴의 의지를 불태웠을까요? 물론 아니라는 대답이 옳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환경이 바뀐 만큼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의 음악도 달라졌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고난과 역경이 베토벤 음악의 밑거름이 된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을 극복할 의지가 없고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남다른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시련은 견디기 힘든 고통과 회복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길 뿐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갖춘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에게 맞게 십분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스스로를 나태하게 만드는 독약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지만 좋은 환경이 약속하는 나태한 삶의 유혹을 뿌리치고 스스로를 단련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사람도 드물게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마치 넉넉한 환경이 남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여유와 아량을 만든다는 말이나 힘겹게 살아본 사람이라야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는 말이 모두 다 틀린 말이 아닌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멘델스존의 와이프입니다. 멘델스존이 19세기 꽃미남 이라고 하던데...

예쁜 얼굴에, 완전 부잣집 아들에, 게다가 천재성까지~ 19세기의 엄친아가 아닐까요?

 

어찌되었든 멘델스존은 자칫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아도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환경의 유혹을 극복했고 스스로가 겪어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사정과 형편까지도 헤아리고 보살필 줄 아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늘 작품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만들 때도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의 조언에 귀 기울였습니다. 작곡도 중요했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 너무나도 많았고 그것들을 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능력과 열의도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자신이 맡은 악단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고 교육자로서 음악학교를 세워 후학들을 길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흐와 같은 선배 작곡가를 찾아내서 세상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서로 교류했던 많은 동료 음악가들이 뜻을 펼 수 있도록 힘쓰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잊혀졌던 바흐의 음악을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린 장본인이 바로 멘델스존이었고 또 바흐의 고장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그곳에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한 것도 멘델스존이었던 것입니다.

 

 

사진 출처 : 론리플렛 매거진 코리아.

 

남에게 관대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기 마련입니다. 멘델스존이 바로 그랬고 그래서 제대로 건강을 돌보지 못하고 그렇게 일찍 세상을 등져야 했습니다. 남의 작은 허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큰 허물도 어물쩍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좋은 점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렇지 못한 스스로가 너무나도 초라해지기 때문입니다. 멘델스존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로 독창성을 운운하면서 크게 새로운 것이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라 애써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멘델스존의 생각으로는 차라리 옛 것을 찾아 미래의 초석을 삼으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새 것에만 신경 쓰고 있을 때 바흐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흙속에 뭍인 보석을 발견해서 온 세상에 그 빛을 발하도록 하는 것이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까. 자신만이 홀로 남다른 생각을 키워가기 보다는 능력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그런 기회를 주려고 백방으로 힘쓴 것이 어떻게 스스로를 갈고 닦은 것보다 못하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학교를 세워 미래의 초석을 닦은 것이 작품을 만들어 후대에 남기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왜 작곡가 멘델스존을 벗어나 음악학자이며 지휘자인 멘델스존을 이야기하고 음악교육자 멘델스존을 이야기하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교를 강요합니다. 그것도 누군가의 모든 것을 두루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둘도 아닌 하나만을 앞세워서 비교하려고 듭니다. 비교를 통해 서로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면서 사고의 폭을 넓히고 삶의 여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열을 가리고 선택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무엇인가를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를 비난합니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일류병도 따지고 보면 성급하고 잘못된 비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외를 시키고 넓은 공부방을 준다고 해서 모두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몰아 부치고 다그친다고 의욕이 생기고 투지가 불타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를 못하면 그것 말고 달리 잘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가장 값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진 것을 얼마나 키워서 어떻게 나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멘델스존이야말로 낭만주의 시대를 통틀어 가장 값진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었습니다.

 

 


 

Sarah Chang: Mendelssohn Violin Concerto Mvt.1 Part1

멘델스존의 작곡 중 유명하다는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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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콘서트홀이 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콘서트홀이 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Posted at 2012.03.22 14:4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5)
콘서트홀이 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 오케스트라! 그 이름의 유래는 어디서 시작될까?

우리가 이름을 들어 알만한 오케스트라들은 그 오케스트라가 터를 잡고 있는 지명 다음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아니면 심포닉 오케스트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보스톤 심포닉 오케스트라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오페라 극장에 전속된 오케스트라와 방송국 소속의 오케스트라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주 드물게 전혀 색다른 이름을 가진 오케스트라들도 없지 않습니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예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아닌가 싶은데요, 게반트하우스라는 공연장에 터를 잡고 있어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오케스트라 같지 않은 오케스트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역사


그런데 게반트하우스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면 공연장이나 오케스트라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됩니다. 그 말의 뜻을 풀어서 옮기자면 직물업자들의 회관이니 오늘날로 치자면 섬유회관, 직물센타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은 건물인 셈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공연장의 이름을 그렇게 붙였고, 거기에 상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이름까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의문을 풀기 우해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슈만 - 교향곡 4번 1악장(Part 1) - 리카르도 샤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743, 라이프치히에서 직물을 거래하던 상인 12명이 12명의 음악가를 초청해서 달마다 각각의 집을 차례로 돌면서 음악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악회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음악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음악회 장소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카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점점 많아지게 되자 카페보다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고 궁리 끝에 라이프치히 직물업자들의 회관, 즉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점점 넓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더 많은 연주자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더 많은 재정적 부담을 나누기 위해 더 많은 상인들, 혹은 회원들의 참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연주를 하고 좀 더 편한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게반트하우스 내부도 고쳐야 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1784년 콘서트홀을 지어서 보금자리를 옮겼지만 한 때 머물렀던 게반트하우스가 지금까지도 오케스트라의 이름 속에 자랑으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3. 왜 썰렁한 회관에서 공연을 할까?

아마도 이런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라이프치히라면 독일에서 꽤나 큰 도시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쓸만한 공연장이나 콘서트홀이 있을 터인데, 하필 어수선한 카페를 생각하고 썰렁한 회관을 찾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답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물론 전문 연주회장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는 라이프치히 뿐만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도시에 연주회장, 혹은 콘서트홀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연주회를 해서 재정을 꾸려가는 오케스트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표를 사서 음악회를 간다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살면서 익숙한 많은 일들이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있어왔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법이지요.



당시는 오케스트라에 지휘자가 따로 없고 악장이 악단을 이끄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상황도 달라졌고 1835, 드디어 최초의 상임지휘자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부임한 상임지휘자는 너무나도 유명한 작곡가 멘델스존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를 악장으로 영입하고 그때가지 잊혀졌던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초연하는 등, 오케스트라의 발전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밖에도 작곡가 슈만이 발견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과 멘델스존 자신의 교향곡 3스코틀랜드도 이 교향악단을 통해 세상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멘델스존이 부임하기 전 이미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을 초연한 바 있었던 이 교향악단은 멘델스존 이후에도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등을 초연하여 그 명성을 드높이게 됩니다.




베토벤 - 로망스 1번 G장조 - 르노 카퓌송, 쿠르트 마주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2명의 상인이 뜻을 모아 12명의 음악가로 시작된 이 소박한 음악회가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 속에 콘서트홀을 만들고 오케스트라로 커지면서 음악의 역사 속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연이야말로 라이프치히의 자랑이자 긍지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 도시의 문화적 역량을 가늠하려면 그 도시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보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겠지요.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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