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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우리들의 영원한 겨울 나그네 피셔-디스카우] 독일 가곡의 전설이라 일컬어졌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1. 19.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8)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우리들의 영원한 겨울 나그네 피셔-디스카우

 

지난 518일 독일 가곡의 전설이라 일컬어졌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86세를 일기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1951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말러의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불러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그가 눈을 감은 날은 공교롭게도 말러가 세상을 떠난 날과 같아 혹자들은 말러의 영혼이 그를 불렀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말러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독일 가곡에 관한 한 그보다 더 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한 성악가는 없었고 그보다 더 깊은 경지를 보여주었던 성악가도 없었습니다.

 

 

 

 

특히 슈베르트의 해석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어 그 이전에는 물론 이후에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업적을 쌓았습니다. 1964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그가 부른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듣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성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고 하니 그의 노래가 가진 호소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소프라노로서 독일 가곡의 최고로 평가받고 있는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조차도 디스카우를 두고는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신과 같았다.“고 감탄하였습니다. 평생을 자중하며 절제했던 그 스스로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했을 정도이니 전설로 불리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출처 : 구글 이미지

 

 

그러나 그가 이렇듯 까마득한 업적을 이룬 것은 천부적인 재능보다 초인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가 훨씬 더 큽니다. 1925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디스카우는 열여섯살부터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고전문학자인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성악가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1943년 참전하게 된 그는 1945년 이탈리아에서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날마다 연습에 매달려 수용소 안에서 연주회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47년 베를린 음대에 들어가더니 얼마지 않아 다시 독일가곡으로 독창회를 가졌고 1948년 베를린 시립 오페라에 들어가 베르디의 돈 카를로의 로드리고 역을 맡아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그의 믿을 수 없는 활약이 종횡무진 펼쳐집니다. 바이에른과 빈을 넘어 네델란드와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런던의 코벤트 가든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까지 무대를 넓혀 기존의 대표적인 오페라들은 물론 동시대 작곡가들의 신작 오페라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섭렵하였습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보통 성악가들은 오페라와 가곡, 혹은 종교음악 가운데 어느 하나에 주력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뜸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디스카우는 독일 가곡은 물론이고 오페라와 종교음악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업적과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이렇듯 오페라 무대를 쉴 새 없이 누비는 동안에도 역사상 최초로 슈베르트 가곡 전곡을 녹음하였고 브람스와 독일레퀴엠과 바흐의 마태수난곡 등 대표적인 종교음악까지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1962년에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공습으로 파괴된 영국 런던의 코벤트리 성당 복원을 기념하여 초연된 벤저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에 독일을 대표하여 초청되는 뜻 깊은 일이 있었고 훗날 그는 "내 삶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신작과 초연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남달랐던 그는 1978년 오페라 무대를 떠나는 은퇴공연까지도 라이만의 신작 리어왕을 선택했습니다.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디스카우

출처 : 구글 이미지

 

 

음악과 예술에 대한 디스카우의 끝없는 열정은 노래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지휘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그토록 바쁜 일정 중에도 지휘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1973년 마침내 오토 클렘페러를 대신하여 지휘봉을 잡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성악가로서 은퇴를 선언한 1993년 이후 지휘자로서 무대에 서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틈틈이 그린 그림들은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어섰고 저술에도 관심을 두어 19세기 독일 가곡에 대한 저서들을 출판하였습니다. 피아노 반주에도 일가견이 있어 반주자로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부인인 소프라노 율리아 바라디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노래하는 동안 돋보기를 쓰고 피아노를 치는 말년의 모습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이렇듯 너무나도 많은 분야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일들을 이루어냈으니 그의 삶에서 허투루 보낸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연주회가 끝나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가진 기억조차 없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자화상 옆에 선 피셔 디스카우

출처 : 구글 이미지

 

 

독일가곡에 관한 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던 그였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다른 성악가들이 부른 음반들을 전부 찾아서 듣고 또 들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지요. 악보를 보기 전에 가사부터 한 음절씩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으며 그 뜻과 소리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악보 또한 음표 하나 기호 하나 놓치지 않고 새기고 또 새겼습니다. 그렇게 정확하고 빈틈이 없으니 지휘자들마다 앞 다투어 그를 불렀고 작곡가들 또한 누구나 그에게 작품을 맡겨 무대에 올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했던 반주자 제랄드 무어는 물론 외르크 데무스와 다니엘 바렌보임, 알프레드 브렌델과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까지 당대의 최고 피아니스트들이 기꺼이 그의 반주자로 무대에 섰던 것이지요. 리히테르는 "가사에 대한 그의 태도가 까다로워서 결코 연습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고, 바렌보임은 "그와 작업하면서 언어와 음악을 결합시키는 방법과 단어의 의미와 발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배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가사의 해석과 전달에 대한 남다른 노력과 업적으로 말미암아 그는 독일어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으며 20세기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가사의 전달과 표현에 있어 그를 최고라고 일컫기도 했습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은퇴를 앞두고 무대에 올랐던 피셔-디스카우의 노년의 모습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칼은 어느덧 서리가 내려 백발이 되었지만 눈빛만큼은 전과 다름없이 맑고 깊었습니다. 30년도 넘었을 것 같이 낡고 빛바랜 연주복이 하나도 초라해 보이지 않을 만큼 절도 있고 기품 있는 인격은 움직임 하나 눈빛 하나로도 속속들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시를 넘어 영혼의 맑고 깊은 울림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날마다 허덕이는 우리와는 달리 스스로의 존재를 일깨우려 평생을 바친 수도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가 수십 번도 더 불렀을 겨울 나그네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