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45)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사에 등장하는 가장 열렬한 사랑의 이야기라면 슈만과 클라라가 만나서 결혼에 이르게 된 사연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홀어머니의 간절한 기대를 뿌리치지 못하고 법대에 들어간 슈만은 끝내 음악을 버릴 수가 없어 당대의 피아노 교사인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법률가의 길을 포기하고 뒤늦게 음악가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조기교육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음악 분야에서 20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했으니 스스로를 혹사하는 훈련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손가락을 다쳐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도저히 헤어나기 힘든 절망 속에서도 그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여 날마다 갈고 닦는 한 편 음악잡지를 발간하며 평론가로서 자리를 잡아갔지만 이번에는 오직 그가 이 세상에 의지하고 있었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으며 무너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견디기 힘들었던 바로 그 무렵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왔으니 그가 바로 스승인 비크의 딸 클라라였습니다.
클라라 비크는 슈만보다 9살 연하였지만, 당시 이미 그 명성이 자자했던 피아노 연주자였습니다. 타고난 재능도 남달리 뛰어났지만 5살부터 아버지의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을 받은 결과 9살에 벌써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이후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았습니다. 게다가 젊고 아름답기까지 했지요. 그런 클라라에 비교한다면 슈만은 이제 겨우 활동을 시작하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 데다가 경제적인 기반조차 전혀 없는 노총각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니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가 결혼을 반대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지요. 더구나 아내도 없이 홀로 애지중지 키워 어느 모로 보나 누구보다 뛰어난 면모를 갖추게 된 딸을 그렇게 시집보내고 싶은 아버지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버지의 말이라면 너무나도 고분고분 잘 따르던 딸이 사랑에 눈이 멀어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나선 것이지요. 슈만과 클라라는 날마다 그를 조르고 애원했지만 비크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은 서로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도 서슴치 않게 되었습니다. 두 남녀는 너무나도 사랑하여 따로 떨어져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끝내 법에 호소하여 사랑을 쟁취하고자 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법원은 슈만과 클라라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미르테의 꽃 from Privat_e on Vimeo.
드디어 1840년 9월 12일 서른 살의 로베르트 슈만은 스물 한 살 생일을 불과 하루 앞둔 스무 살의 꽃다운 클라라 비크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물론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참석하지 않았고 두 사람을 아꼈던 몇몇 사람만이 자리를 지킨 조촐하고 소박한 식이었습니다. 그토록 갈망했던 결혼식 전날 슈만은 사랑하는 클라라에게 결혼 선물로 가곡집 《미르테의 꽃》을 헌정했습니다. 왕후장상이 바치는 그 어떤 금은보화인들 이 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을까요? 이 가곡집은 괴테 · 뤼케르트 · 바이런 · 번즈 · 하이네 · 모젠 · 무어 같은 위대한 시인들의 걸작 26개를 골라 곡을 붙인 것입니다. 미르테는 신부의 화관을 장식하는 향기가 짙은 꽃으로 천인화(天人花) 도금양(桃金孃) 등으로 번역되며 처녀의 순결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주옥같이 아름다운 노래들이지만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첫 번째 <헌정>과 모젠의 시에 곡을 붙인 세 번째 <호두나무>, 그리고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인 아홉 번째 <연꽃>이 특별히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열렬한 사랑을 담아 클라라에게 바친 노래라면 당연히 첫 번째 곡 <헌정>일 것입니다.
그대는 나의 영혼, 나의 심장이요
그대는 나의 기쁨, 나의 고통이며
그대는 내가 살아가는 나의 세계이자
그대는 내가 날아오르는 하늘.
그대는 나의 근심을 영원히 묻어버린 무덤,
그대는 나의 안식, 마음의 평화,
그대는 하늘이 내게 주신 사람
그대의 사랑이야말로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그대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맑고 밝아진다네
그대의 사랑이 나를 드높이니
그대는 나의 선한 영혼이요 나보다 더 나은 나 자신이여
지난 10월 26일 역대 최연소의 어린 나이로 세계 3대 피아노 콩쿠르라 일컬어지는 리즈 콩쿠르를 석권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젊은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쌀쌀한 야외에서 펼쳐진 이 날 결혼식에서 신랑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갑을 벗고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신부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먼저 사회자의 마이크를 빼앗아 뤼케르트의 시 <헌정>을 낭독하였고 이어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슈만의 가곡 <헌정>을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헌정>을 너무나도 열렬하고 절실하게 연주하여 하객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들 깨달았습니다. 음악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음악으로 바칠 수 있는 결혼 선물로 이 곡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지를 말입니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난 다음 제가 기획하고 해설하는 김선욱의 독주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앙코르곡으로 결혼식에서 듣고 너무나 감동을 받았던 <헌정>을 연주해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 곡만큼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만을 위해 연주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음악회가 끝나고 김선욱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너무나 애틋하게 서로를 보듬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슈만과 클라라도 이들처럼 사랑했으리라 짐작을 했습니다.
슈만의 헌정 -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는 노래.
길고 지루한 소송 끝에 사랑을 쟁취한 1840년 한 해 동안 슈만은 무려 138곡의 가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가곡들 대부분이 이 짧은 시기에 만들어진 셈이지요.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1840년을 ‘가곡의 해’라 불렀지만 사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은 바로 클라라를 향한 사랑이었으니 ‘가곡의 해’가 아니라 ‘사랑의 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14년을 한결같았습니다. 작곡가로서, 또 평론가로서 슈만의 업적과 명성도 나날이 드높아져 당대를 대표하기에 이르렀지만 슈만의 조울증도 그와 함께 깊어져 결국은 라인강에 몸을 던지기에 이르렀지요. 다행히 지나가는 어부에게 구조되어 목숨은 건졌지만 슈만의 정신병 증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슈만은 2년 후 극도로 증세가 악화되면서 폐렴까지 겹쳐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면회를 갔을 때 클라라는 음식을 삼키는 것도 어려운 슈만을 위해 와인을 손가락에 찍어 빨아 먹게 했습니다. 그런 클라라를 껴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도 알아(Ich weiß)”였다고 합니다. 정신을 놓고 아무 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도대체 무엇을 알았다는 것일까요? 아마도 사랑이었겠지요. 모든 것을 놓아버린 지경에서도 사랑만은 느낄 수 있었겠지요. 그런 지독하고 질긴 사랑이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적셔주고 있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