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0)
70 억 원짜리 스트라디바리를 연주한 거리의 악사
지난 2007년 워싱턴 포스트 선데이 매가진의 4월 8일자 커버 스토리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죠슈아 벨이 1월 12일 워싱턴의 랑팡 플라자 지하철역에서 거리의 악사로 변장해서 출근길 시민들 앞에서 연주를 했다는 것이지요. 메이저 리그 워싱턴 내셔널 팀의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죠슈아 벨은 악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낸 다음 대신 그 자리에 종자돈으로 1달러짜리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를 던져 놓고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오전 7시 51분부터 출근길 시민들 앞에서 바흐의 ‘샤콘느’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마누엘 폰체의 ‘에스트렐리타’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 그리고 바흐의 ‘가보트’까지 여섯곡을 되풀이해서 연주했고 그렇게 45분 동안 쉬지 않고 연주를 해서 행인들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은 모두 32달러였다고 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바이올린 리스트 조슈야 벨
1분에 천달러 이상을 버는 연주자가 350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45분간 연주해서 벌어들인 돈이 고작 32달러라는 사실이 한 동안 호사가들의 입방에 오르내렸습니다. 이 깜짝 이벤트를 계획한 워싱턴 포스트 선데이 매가진 측이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의 음악감독인 레너드 슬래트킨에게 미리 예상 수입을 물어봤을 때 그의 대답은 150달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인들 천명 가운데 최소한 백여명은 걸음을 멈추고 음악을 들을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정작 그 시간 동안 그 앞을 지나갔던 1097명의 행인들 가운데 멈춰 서서 음악을 들은 사람은 7명뿐이었고 동전 한 닢이라도 던져 넣은 사람은 겨우 27명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연주자를 알아보고 20 달러짜리 지폐를 놓고 간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26명의 대부분은 50센트짜리 동전을 던진 것이지요.
이 일이 있고 얼마지 않아 중앙일보의 음악전문기자였던 이장직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서울에서 이와 비슷한 이벤트를 벌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물론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찬성을 했지요. 그리고 서로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로 했고 그 역시 흔쾌히 동참을 약속했습니다. 마침 한국의 어느 악기사에 고가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어 어렵사리 협찬을 얻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의 리더가 썼던 악기라고 해서 ‘엑스 알반 베르크’라는 이름이 붙은 이 악기의 가격은 무려 70억 원이었으니 죠슈아 벨이 연주했던 악기보다 거의 두 배나 비싼 악기였지요.
마드리드 왕궁에 보관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먼저 서울 매트로와 서울 지하철 공사에 연락을 해서 출근 시간대에 가장 붐비는 곳이 강남역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 가운데 가장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6번 출구 입구를 결행 장소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07년 5월 2일 오전 8시 45분, 청바지와 셔츠 차림에 덥수록한 수염을 기르고 낚시 모자까지 눌러 쓴 한 남자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고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앞에 놓인 악기 케이스에는 종잣돈으로 미리 오천원권 지폐 한 장과 천원권 두 장, 오백원짜리 동전 두 개를 넣어 두었지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소나타 12번을 시작으로 엘가의 ‘사랑의 인사’, 사라사테의 ‘로만사 안달루사’, ‘지고이네르바이젠’,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1번까지 여섯 곡을 쉬지 않고 되풀이해서 연주했고 그렇게 45분 동안 벌어들인 수입은 모두 1만 6천 9백원이었습니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5&total_id=2718486
[피호영 교수의 70억원짜리 길거리 연주 관련 기사
이 시간 동안 연주자 앞을 지나친 행인들의 수는 9500여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악기 케이스에 돈을 놓고 간 21명 가운데 14명이 천 원 짜리 지폐를 꺼냈고 네 명은 오백원 짜리 동전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이 놓고 간 돈이 각각 300원씩 900원이었지요. 행인들 가운데 2분 이상 바쁜 발걸음을 멈추고 음악을 들었던 사람은 단지 다섯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서서 음악을 들었던 사람은 가수 비의 호주 공연을 성사시켰던 공연기획자 김선영씨였습니다. 출근길에 급하게 6번 출구 계단을 올라가다 다시 내려와서 5분 동안 음악을 들었고 범상치 않은 연주에 호주 무대에 소개할 생각으로 천원짜리 지폐와 함께 명함까지 건넸다고 합니다.
Susie J. Tanenbaum이 쓴 ‘Underground Harmonics: Music and Politics in the Subways of New York' 이라는 책에 따르면 뉴욕의 지하철에서 연주하는 악사들이 한 시간에 벌어들일 수 있는 최대 수입이 20달러라고 하지요. 우연이겠지만 피호영씨가 그날 벌어들인 수입도 이 정도였고 죠슈아 벨의 경우도 그를 알아보고 20달러짜리 지폐를 놓고 간 한 사람이 없었다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무렵 런던의 워털루 역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타스민 리틀도 비슷한 실험을 했고 1000여명의 행인들 가운데 8명이 발길을 멈추고 음악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벌어들인 수입은 모두 14파운드 10실링, 우리 돈으로 약 25000원 정도였으니 좀 나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다른 결과를 얻지는 못한 셈입니다.
처음에는 지하철 강남역에서의 해프닝이 끝나면 의기투합했던 세 사람이 근처 제과점에서 만나 요기도 하고 잡담도 나눌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서로 얼굴을 대하고 앉고 보니 그저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을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연주자를 지켜보면서 궁금했던 일부터 물어보았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미리 정한 여섯 곡을 차례대로 되풀이 연주하기로 했는데 유독 파가니니의 소나타를 더 많이 연주한 까닭이 궁금했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고 힘들었는데, 점차 익숙해지면서 어떤 곡에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관심과 반응을 주는지에 신경을 쓰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모래시계의 주제음악으로 삽입되었던 파가니니 소나타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을 느끼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그 곡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열심히 연주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이날 수입으로 빵 값을 치를 생각이었지만 결국은 이 돈을 봉투에 넣어 따로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써버리기에는 너무나 의미가 큰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장소와 시간을 바꾸고 방법도 달리 해서 또 다른 시도를 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저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음악을, 예술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었던 뭉클한 경험이었습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들은 늘 이렇듯 소박한 일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죠슈아 벨의 해프닝을 소개한 워싱턴 포스트 선데이 매가진의 기사는 데이비스가 쓴 ‘여가’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온통 걱정 근심 때문에 서서 구경할 시간조차 없다면 도대체 이걸 산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말이지요. 문득 티 에스 엘리엇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Where is my life? I have lost it in the living."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앞만 보며 너무 열심히 사느라 정작 진정한 삶의 보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소나타 6번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Niccolo Paganini - Violin Sonata No 6 ( HQ video with photos / pictures )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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