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9)
조수미의 추억
30년 전 쯤의 어느 나른한 오후, 4동 대형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음대, 미대 학생들이 함께 ‘국민윤리’를 듣는 시간이었지요. 뻔한 내용이라 듣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강의하는 젊은 시간강사 선생님도 따분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는 학생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자 강단에 섰던 그 강사 선생님이 갑자기 책을 덮고 강의를 중단하더니 학생들을 향해 뜬금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어차피 강의를 계속해도 들을 사람도 없을 것 같으니 누군가 나와서 나머지 수업시간을 때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원자가 없다면 별 수 없이 강의로 남은 시간을 채울 수밖에 없다는 말을 덧붙였지요. 그 안에 있던 누구나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지만 누구도 자신이 없어 선뜻 나서질 못하고 있는데, 강의실 뒤에서 강단 앞으로 성큼 성큼 다가가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잠시도 주저함이 없이 피아노 앞에 앉더니 당시 우리 세대가 즐겨들었던 팝송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수많은 노래들을 자신의 피아노 반주로 물 흐르는 듯 계속 이어서 불렀습니다. 남은 수업 시간이 꽤 길었을 텐데 순식간에 다 지나간 것처럼 느꼈던 것은 모두들 그의 노래에 넋이 나가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겠지요. 그 용감하고 당당했던 여학생의 이름은 조수경이었고, 지금은 세계 어디서나 그를 조수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같은 음악대학이었지만 전공이 달라 서로 길게 말을 섞어 본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여러 강의들을 들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스로 관심이나 흥미가 있는 과목을 들을 때의 태도와 그렇지 않은 수업에 임하는 자세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싫고 좋고가 너무나 분명하고 스스로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혀 감추거나 숨기려 들지 않았던 것이지요. 조수미에 대한 학창시절의 기억은 그 정도가 전부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후의 기억은 무대에서의 모습뿐이니 각별히 그를 아끼는 수많은 애호가들에 비하면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다만 유학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가졌던 내한 연주회의 인상적인 레퍼토리와 그것을 통해 보여주었던 엄청난 자신감과 여유만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고대했던 고국에서의 무대였을 텐데 어쩌면 그렇게 느긋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당장에 듣기 좋은 베르디부터 부르고 금방 가슴에 와 닿는 푸치니도 연기하고 싶었을 텐데 롯시니와 도니제티, 벨리니를 가지고 무대에 나선 그의 용기와 배짱이 너무나 감탄스러웠습니다. 오페라 무대에 서려는 성악도라면 반드시 다져야 할 기초이면서 누구나 다 그냥 넘어가고 싶고 사실 대부분 하는 척만 하다가 슬쩍 지나쳐 버리고 마는 그 어렵고 힘든 과정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섭렵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큰 그림을 그려놓고 하나씩 차근차근 이루어가겠다는 여유와 자신감이었을 것입니다. 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고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 난곡들을 너무나 정확하고 완벽하면서 느긋하게까지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점쳤는지 모릅니다.
소프라노 조수미는 지금도 충분히 세계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가진 것이 많습니다. 전 세계를 통 털어 ‘밤의 여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프라노라는 것도 무척이나 자랑스럽지만 그것도 한 때로 족할 따름이지요. 단지 키가 작아서, 아니면 도저히 서양인으로 보일 수가 없는 외모 때문에 하고 싶은 배역을 잡을 수가 없다면 그에게 맞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페라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조수미가 잘 부를 수 있는 우리나라 노래를 잘 골라서 세계무대에 내놓고 함께 자랑하는 것도 좋겠지요. 이 참에 조수미를 염두에 두고 새로 노래를 만드는 건 어떨까요. 잘만 만든다면 작곡가까지 더불어 유명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조수미
조수미를 발탁했던 대지휘자 카라얀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이제는 우리 손으로 잘 다듬고 가꾸어서 다시 세계에 자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조수미만이 유독 더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이 가진 가능성을 충분히 살려서 우리 모두가 함께 보람과 긍지로 삼자는 것입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프리마돈나 존 서덜랜드를 책임자로 불러들여 서로의 가능성과 기회를 최대한 살리는 방법을 택했고 이탈리아가 배출한 불세출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로마 월드컵을 계기로 ‘쓰리 테너’ 공연을 성사시킴으로써 20세기 최고의 문화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런 사례가 없습니다. 그러자고 뜻을 모았던 ‘윤이상 음악제’가 슬그머니 통영 국제 음악제로 바뀌었고 그나마 음악제의 한 부분으로 시작한 국제 콩쿠르는 엉뚱하게 경남 국제 음악 콩쿠르가 되어버렸습니다.
조수미도 지금쯤은 많이 지쳐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연습해서 노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전에도 짐작했겠지만 이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더 외롭겠지요. 그러니 어쩌면 이쯤에서 멈추고 편하게 누리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좋아라고 난리들이겠지만 무대와 객석에 불이 꺼지고 나면 조수미는 또 다시 홀로 남게 됩니다. 28년 전, 강단 앞으로 성큼 나섰던 그 용기와 배짱으로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할 무엇인가를 해내기를 기다려봅니다. 첫 번째 내한연주에서 보여주었던 그 자신감으로 말입니다. 기다리지만 말고 응원을 해야겠지요. 응원보다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조수미 - 나 가거든 [Jo Sumi - If I leave] MV 'The Lost Empire' 明成皇后 [HD]
조수미 - 나 가거든 [Jo Sumi - If I leave]
MV 'The Lost Empire' 明成皇后 [HD]
최소한 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깨어나야한다...
을미사변의 진실은 과연 무었인가?
아니 그 이전에 우리의 역사관과 교육은 어떠한가?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이건음악회 Talk Talk > 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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