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8)
포탄과 총알을 몸으로 막아낸 음악가들의 용기
캐나다의 작가 스티븐 갤러웨이의 소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작가는 이 글을 통해 20세기의 끝 무렵을 피와 멍으로 물들이며 우리 모두를 부끄럽고 아프게 했던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기록과 흔적을 조사한 자료와 더불어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씌어진 이 소설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점령했던 세르비아계 무장 세력들이 자행한 만행을 고발하고 그 때문에 상처받고 희생당한 사라예보 시민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소설의 제목은 당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이 쏟아지는 거리 한 복판에서 연주를 했던 한 첼리스트 사연에서 비롯되었지만 사실 소설의 내용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1992년 5월 27일,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라예보 시민들을 향해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쏜 포탄이 떨어졌고 이 포격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무고한 시민 2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사가 있던 다음날 오후 4시에 한 남자가 큰 가방을 들고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저격병들의 수많은 총구가 일제히 그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에서 천천히 첼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했습니다. 요란하던 총성은 점점 잦아들었고 총알을 피해 건물 안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걱정과 설마 하는 기대를 안고 창가로 다가섰습니다. 놀랍게도 총성은 멎었고 이후 22일 동안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인 주인공은 사라예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였습니다.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22명의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22일 동안 매일 같은 시간 사건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연주를 했던 것입니다. 그의 이런 용기 있는 행동과 연주는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희망과 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시민들의 사기가 오를까 두려웠던 세르비아 점령군은 스마일로비치를 쓰러뜨리기 위해 저격병을 보내기로 했고 이에 맞선 시민 저항군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의 여성 저격수에게 그를 보호하도록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세르비아 저격병의 총구는 불을 뿜지 않았고 스마일로비치는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22번의 연주를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상대편 저격수의 응사가 두려워 저격을 꺼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연주자의 용기와 음악의 감동이 세르비아 저격병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해 중동에서는 걸프전이 벌어졌고 역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날마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라크의 공격으로 두려움과 절망을 나날을 보내는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용기 희망을 주고자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주빈 메타가 목숨을 건 연주회를 감행했습니다. 이라크의 미사일 공격은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 시간을 피해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공연을 알리면서 방독면을 지참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언제 공습경보가 울려 방공호로 대피해야 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연장 안에는 방공호에 수용할 수 있는 숫자의 청중들만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3천여석의 객석 가운데 겨우 수백 석만 채워졌지만 포화 속에서 연일 이어지는 연주회는 점점 세계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교향악단과 지휘자의 숭고한 용기와 헌신에 감동한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 중인 이스라엘로 날아와서 연주회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스턴, 예핌 브론프만, 다니엘 바렌보임, 이차크 펄만 등 내로라는 유태계 음악가들이 이 무대에 섰습니다. 공연 도중 울리는 공습경보 때문에 청중들이 방독면을 쓰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고 음악가들도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는 악조건이었지만 음악회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뜨거웠습니다.
위의 사례와는 달리 전쟁 중인 적군이 상대국의 음악가를 음악으로 감동시키고 위로했던 뜻밖의 경우도 있습니다. 올해로 서거 200주년을 맞이한 작곡가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1809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받았고 하이든이 몸져누웠던 수도 비인도 프랑스 군대의 포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이든의 집 근처에도 포탄이 떨어졌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대로 하여금 하이든의 집 둘레를 경비하도록 했습니다. 임무를 받은 경비병 가운데 한 프랑스 군인이 하이든의 집을 방문하여 그와 그의 음악에 대해 경의를 표했고 죽음을 앞둔 하이든에게는 나폴레옹의 배려와 그 병사의 방문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장병은 하이든이 말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천지창조〉에 나오는 아리아 한 곡을 불렀고, 노래를 들은 하이든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불러 병상에 누운 위대한 음악가를 감동시켰던 이 프랑스인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했고, 하이든도 그가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이든의 서거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군대는 시신을 실은 영구차 뒤를 열을 지어 따랐습니다. 전쟁 중이었지만 오스트리아인과 프랑스인은 모두 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위대한 음악가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처럼 음악은 인류가 만든 가장 큰 재앙이라는 전쟁마저도 극복할 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나봅니다. 아마도 그 힘은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배려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쟁도 이길 정도라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이나 갈등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데 음악만큼 확실한 처방이 달리 또 있을까요? 미움과 상처가 없고 갈등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들려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를 빕니다.
전자바이올린 연주가 박은주 ** 알비노니아다지오
Albinoni - Adagio in G-Minor, Vesselin Demirev, violin - dedicated to Ogi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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