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6)
음악사의 돈키호테 무소르그스키
서양의 음악사를 통털어 무소르그스키만큼 독특한 인물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대로 작곡공부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누구보다 독창적인 작품들을 남겼고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 민중들을 생각하고 농노들을 걱정했습니다. 누구보다 러시아를 사랑한 민족주의자면서도 조국 러시아에 대항한 그루지아의 영웅 샤미르를 칭송하는 칸타타 “샤미르의 행진”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무소르그스키
이처럼 그의 삶은 모순으로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것이었습니다. 귀족가문의 지주와 농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출생부터가 그랬습니다. 그 비천한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음악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또, 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에 그의 친구인 화가 레핀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콧등과 뺨까지 온통 붉은 빛을 띠고 있지만 강렬한 눈빛만큼은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술독에 빠져 살았고 그 때문에 건강을 해쳐 죽음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늘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은 진정한 예술을 꿈꾸고 추구했던 예술가입니다. 그 열망이 얼마나 강했던지 타협을 거부하며 주변 사람들과도 수없이 부딪히며 상처를 주고 받았고 결국은 스스로의 정신마저 온전하게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칸타타(Cantata)란 성악곡의 하나로, 악기 반주가 동반되는 악곡의 형식이다.
무소르그스키라면 오늘날 발라키레프, 퀴, 림스키 코르사코프, 보로딘과 더불어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민족의 정신과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음악에 고스란히 담으려는 생각은 5인조 누구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지만 그 방법은 각자가 조금씩 달랐고 그 중에서도 무소르그스키의 생각이 유독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음악을 통해 구체적인 장면이나 사건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서술하려 했는데, 말하자면 사실주의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원래부터 구체적인 서술과 묘사의 대상이 있었던 문학과 미술은 낭만주의 이후 사실주의의 출현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음악은 사실주의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무소르그스키가 나타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19세기말 사실주의적인 경향, 즉 ‘베리즈모’ 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와 대본이 있는 오페라에서 가능한 일이었고 그나마도 잠시의 움직임이었을 따름이었습니다.
밀리 알렉세예비치 발라키레프 러시아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지휘자, 작곡가
아마도 무소르그스키가 이토록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는 했지만 전문가가 되기 위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은 아니었고, 더욱이 작곡공부라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 가운데는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 많고 오늘날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들 중에도 남의 손을 빌어 완성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남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신만의 특별한 무엇인가를 찾았겠지요.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어느 인터뷰에서 ‘남들 다 잘하는 음악으로는 자신이 없어 남들 안하는 것을 열심히 찾다 보니 비디오 아트에 승부를 걸게 되었다’는 고백을 해서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지만 모르긴 해도 무소르그스키의 심정이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소르그스키의 대표작이라면 단연 푸시킨의 원작을 오페라로 만든 “보리스 고두노프”와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생각과 말들을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은 그의 노래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유명한 “벼룩의 노래”와 “신학생”같은 가곡들로 부패한 러시아의 정치와 종교를 풍자하고 비판했으며 “트레파크”와 “농민의 자장가”와 같은 노래들을 통해서는 고단하고 찌든 삶을 살고 있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내 맘대로 살겠다는 사람이었으니 평생 배짱이라도 편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가졌으면서 억지를 부리고 강한 척하고 살았으니 그 마음고생이 오죽했으랴 싶기도 합니다. 그나마 술이라도 있었으니 커다란 위안이었을 것이고 음악 속에다 마음을 담을 수 있어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음악을 전혀 몰랐다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그보다는 무딜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군인으로 조국에 충성하며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그럭저럭 살았겠지요. 아니 오히려 음악가가 되겠다고 처음부터 나섰더라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음악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살았던 세상이 특별히 어지러웠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혹은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이라고 그 때와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덜 떨어진 바보들이나 억울한 남의 일을 제 일이나 되는 것처럼 아파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무소르그스키와 같은 돈키호테가 영 보이질 않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푸시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까요? 사실은 너무 슬프고 노여워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인데 설마 그걸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겠지요.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가운데 한 곡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무소르그스키 :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Tableaux d`une exposition, 라벨 편곡)'. 프리츠 라이너(지휘), 시카고 교향악단(RCA LSC2201, 1957년 12월 시카고 심포니홀에서 녹음)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1881)는 러시아 민족주의(국민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5인조’ 작곡가 중 한사람이다. 정규의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독학으로 연마한 자신만의 독특한 화성과 대위법을 사용하여 담대하고 솔직한 실험적인 음악을 작곡, 드비시, 라벨 등 인상주의 작곡가는 물론 야나체크, 글라주노프,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근, 현대의 슬라브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군인, 공무원 등 다양한 직업, 간질발작, 알코올 중독, 가난 등 질곡의 삶 가운데에서도 일생을 음악에 헌신하여 ‘민둥산의 하룻밤’(1867, 개작1872-74), 대작 오페라 ‘보리스 구도노프’(1868-69, 개작1871-72), ‘호반시나’(1873, 5막은 미완성), 피아노곡 ‘어린시절의 회상’(1865), 3개의 연가곡(1868-77), ‘벼룩의 노래’(1879) 등을 남겼다.
농노출신인 친할머니와 유모로부터 무소르그스키는 러시아 하층 사회의 생활을 이해하게 되며 이로부터 그는 하층민의 비애가 담겨있는 지극히 서민적이며 민속적인 주제를 독창적으로 음악에 담았다. ‘예술은 자기표현이라기 보다는 사람들과의 대화’라는 예술관과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그의 음악은 사실의 묘사나 인물의 성격,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전람회의 그림’도 사실적인 묘사와 독창적인 작곡기법(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즉흥적 착상과 드라마틱한 연출)을 통해 그의 예술관과 민족주의적 실천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표제가 붙은 이 작품은 원래 피아노 독주곡이다. 1922년 러시아 출신의 명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Serge Koussevitzky 1874-1951, 1924-49년까지 보스톤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지냄)의 의뢰로 라벨이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여 널리 알려지면서 고금의 관현악곡은 물론 무소르그스키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로 재탄생된 것이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르그스키의 절친한 친구이자 건축가-화가 빅토르 하르트만(1834-73)의 유작전에 전시된 10개의 스케치와 수채화를 직접 묘사한 모음곡(suite)이다. 1874년 작곡되었으나 그의 사후 5년 뒤인 1886년에 출판되었다. 곡의 배열도 대담하지만 작곡자 자신(관람자로서)을 곡중 하나의 관찰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간주곡 성격의 ‘프롬나드(promenade)’라는 독특한 연결 페시지(보행 주제)를 곡 중에 삽입한 것도 독창적이다. 1922년 라벨의 편곡이 가장 유명하며 스토코브스키, 아슈케나지, 헨리 우드, 호와스 등이 관현악 또는 관악으로 편곡했으나 이들은 라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라벨의 편곡을 회색톤의 원화에 컬러링하여 지나치게 프랑스적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평되기도 하지만 원곡이 주는 감동과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원곡을 훼손한 것은 아니다. 라벨의 편곡은 원곡의 특징에 충실하며 관현악의 천재답게 그 묘를 살린 색채는 눈부신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이건음악회 Talk Talk > 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포탄과 총알을 몸으로 막아낸 음악가들의 용기.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를 알고 계시나요? (0) | 2012.05.16 |
---|---|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오 솔레 미오’는 민요가 아니다. (2) | 2012.05.11 |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인생에도 리허설이 있다면... (0) | 2012.05.04 |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레퀴엠과 리타나이 - 모든 영혼이여, 평화 속에 잠들라 (0) | 2012.04.27 |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들어야 할 음악) (0) | 2012.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