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1)
베를린 필이 세계 최고인 까닭은?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을 하나만 꼭 집어 말하라면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교향악단을 말하라면 아마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대답이 가장 많겠지요. 요즈음은 암스테르담 헤보우 오케스트라가 대세라고들 하지만 오래 전부터 베를린 필과 빈 필을 교향악단의 양대 산맥이라 일컬었고 언제부터인가 여기에 뉴묙 필을 더해 세계 3대 교향악단이란 말이 있지만 그건 그저 유명세를 따지는 호사가들의 입담일 뿐입니다. 그러나 실력으로 가리든 이름값을 놓고 따지든 오케스트라의 순위를 말할 때 베를린 필이 빠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고 아무래도 널리 알려진 인지도를 따진다면 베를린 필이 으뜸이 아닌가 싶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베를린 필의 명성과 위상을 가능하게 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베를린 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그 대답들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35년 동안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베를린 필의 신화를 만든 장본인이지요. 그로 말미암아 베를린 필이 오케스트라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그 또한 지휘자의 지존으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전에도 베를린 필을 거쳐 간 상임지휘자들은 하나 같이 그 시대 최고의 지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이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최고의 명성을 쌓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상임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는 음악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전업 지휘자였으니 두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그 후임자인 아르투르 니키쉬를 놓고 시비를 걸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베를린 필을 이끌었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그리고 카라얀의 전임자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베를린 필을 이끌었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역시 당대를 대표하는 지휘자임에 틀림이 없지요.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악장과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 관행을 처음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전까지 한 악장이 끝나면 스스럼없이 박수를 치던 청중들을 처음으로 제지하고 막아서 이후로 그가 지휘하는 연주회에서는 절대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점점 알려지고 전파되어 오늘날에는 마치 불문율처럼 지켜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카리스마라면 한스 폰 뷜로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했을 때 청중들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연주회장의 출입문을 닫게 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연주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물론 두 번째 연주가 끝났을 때에는 열화와 같은 환호와 갈채를 받았겠지요.
최초의 전업 지휘자로 실력과 명성이 자자했던 한스 폰 뷜로
베를린 필을 최고로 만든 두 번째 비결은 그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위기였습니다. 난관에 봉 착할 때마다 해결책을 찾으려 골몰했고 그렇게 헤쳐 나가면서 의지와 능력을 키워갔던 것이지요. 그들은 출발부터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19세기 베를린은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을 빼고는 음산하기까지 한 문화적 불모지였지요.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 80만명을 넘었고 이를 기회로 삼은 폴란드 출신의 궁정악사 벤야민 빌제가 자신의 악단을 만들어 1882년 시작한 빌제 콘서트가 베를린 필의 시작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어딘가 정착하여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없었던 악사들이 호구책으로 모여든 악단이었으니 야구로 치자면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던 셈입니다. 당시로는 전례가 없었던 연주회 전문 오케스트라였고 힘 있는 누군가 후원하거나 고용한 악단이 아니라 스스로 벌어서 꾸려나가야 하는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이었지요. 첫 연주회에 모인 청중들 가운데 남자들은 맥주잔을 들고 있었고 여자들은 커피잔을 앞에 놓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니 이것만으로도 그 어려운 상황을 여러모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연주일정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한 보수를 참아야 했던 단원들은 1882년 또 다른 연주를 위해 바르샤바로 향하는 열차 속에서 급기야 불만이 폭발하였고 그들 가운데 54명이 따로 악단을 조직해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열악한 재정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887년 명망 있는 공연기획자 헤르만 볼프가 악단의 운영을 맡아 재정을 책임지면서 드디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전업 지휘자로 실력과 명성이 자자했던 한스 폰 뷜로를 상임 지휘자로 초빙하였고 이전의 잡다한 연주회들을 대거 정리하면서 주로 고전적인 레퍼토리와 브람스의 작품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으며 공개 리허설을 도입하는 등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1892년 뷜로우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하자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을 객원으로 초빙했고 1895년 마침내 아르투르 니키쉬가 제 2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하게 됩니다. 1922년 니키쉬가 세상을 떠나자 헤르만 볼프에 이어 악단의 운영을 맡은 그의 딸 루이제 볼프는 30대의 신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세 번째 상임지휘자로 영입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결국 그 선택은 위기에 처한 악단을 다시 한 번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요.
운터 덴 린덴 Unter den Linden
브란덴부르그 문에서 마르크스-엥겔스 광장까지 이어지는 구 동 베를린 제일의 번화가. 주변엔 베를린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2차 대전 중 폭격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어 구동독 정권하에서 다시 재건되었다. 주변의 명소로는 주립 도서관, 훔볼트대학, 독일 역사박물관, 제국의회 의사당 등이 있다. 주립 도서관은 1933년 나치가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를 불태운 장소이며, 제국의회 의사당은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취임한 곳으로 유명하다.
출처 : http://berlinwoorizip-walkingtour.com/xe/TouristResort
그러나 1차대전 패전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불황은 악단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어쩔 수 없이 베를린 시와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일정 횟수 이상의 연주회를 의무적으로 열어야 하는 타협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히틀러의 집권은 엎친 데 겹친 격이었지요. 나치 정권 치하에서 베를린 필은 사실상 국립 교향악단이나 다름이 없었고, 나치스가 개최하는 각종 행사와 위문 공연에도 동원되었습니다. 악단과 그 자신의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며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푸르트벵글러는 1934년 힌데미트에 대한 나치스의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고 상임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질적인 상임 지휘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악단을 지켰지만 유태계 단원들까지 끝까지 다 지켜주지는 못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2차대전 중에는 총력전 소집에서 제외되는 특권을 부여받으면서 악단의 연주활동도 이어졌으나, 전세가 악화되면서 폭격으로 공연장들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자 점차 연주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푸르트벵글러도 스위스로 피신했고, 단원들은 베를린 공방전에 투입될 국민군 중대로 편성되어 전장에 나갈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 계획을 무산시켜 단원 대부분은 극적으로 베를린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태생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단원들은 레오 보르하르트의 지휘로 영화관이었던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공연을 가지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도 잠시 지휘자 보르하르트가 영국군 병사의 총기 오발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이 닥쳤습니다. 보르하르트의 뒤를 이어 임시로 상임 지휘자를 맡은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나치스 시절 연주가 금지되었던 유태인 작곡가들의 작품이나 적성국이었던 미국과 러시아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면서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고 1947년 5월 25일에 베를린 필로 돌아온 푸르트벵글러는 1952년에 다시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지요. 1954년에 푸르트벵글러마저 세상을 떠나자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젊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대타로 내세우는 모험을 또 다시 감행하여 전후 최초의 미국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이듬해에는 결국 종신 상임 지휘자겸 예술 감독으로 영입하는 무모한 도박을 벌여 결국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궁극에 자리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2002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첫 영국 출신 지휘자로 베를린 필의 수장을 맡은 사이먼 래틀 경(53). 은빛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의 그는 입에 마이크를 낀 채 능숙한 독일어로 해설을 곁들이며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사진출처 : http://blog.donga.com/raphy/archives/23
언제나 그 시대 최고의 지휘자를 영입하였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선택과 도전의 역사가 베를린 필의 성공신화를 만들었다면 그렇게 이루어낸 결실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개척정신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베를린 필의 위대한 자산일 것입니다. 한스 폰 뷜로우의 뒤를 이었던 아르투르 니키쉬는 뷜로우가 외면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과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동유럽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레퍼토리에 포함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창단 이후 최초의 해외 연주를 시도하여 프랑스와 러시아를 방문하였습니다. 니키쉬가 죽고 상임 지휘자에 발탁된 푸르트벵글러는 한 발 더 나아가 스트라빈스키와 라벨은 물론 쇤베르크와 바르토크, 힌데미트 등 동시대 작곡가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작곡가들의 작품들까지 적극적으로 소개하려는 의지를 밀어붙여 음악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요.
”카라얀 서커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니아 홀.
사진출처 : http://blog.donga.com/raphy/archives/23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봉을 이어받은 카라얀은 오페라를 처음으로 시도하는 등 레퍼토리를 확장하는 일은 물론 악단의 활동영역을 크게 넓히는 일에도 정진하여 마침내 베를린 필과 더불어 세계의 음악계를 평정하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다른 지휘자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녹음에도 주력하여 도이치 그라모폰과 더불어 지금도 클래식 음악 역사상 최고의 판매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음반들을 출시하였고 연주 무대를 유럽과 미국은 물론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전역으로 넓혔으며 미디어까지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말년에 여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의 입단을 놓고 단원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금녀의 전통과 배타적인 악단문화가 구설수에 올랐으나 그건 단지 표면상의 이유일 따름이지요. 현재는 여성 단원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출신의 단원들이 함께 호흡하고 있고 한 때 일본 출신의 야스나가 도루가 악장을 맡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푸르트벵글러 재임 시절 바이올리니스트 게르하르트 타슈너가 불과 열아홉의 나이에 악장으로 임명되었고 2003년에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출신 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가 겨우 열여덟 살에 정단원으로 입단하기도 했지요. 카라얀 사후 누구나 독일 출신의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상임지휘자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취임한 것이나 아바도 이후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을 받아들인 것도 늘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베를린 필의 개척정신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아바도는 지휘자에게 집중되었던 악단운영의 권한을 줄여 민주화를 실현하였고 래틀은 악단과 정부로 이원화되었던 악단의 운영 주체를 새로 발족한 재단법인으로 일원하시키면서 새롭게 교육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등 악단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베토벤 - 교향곡 7번 1악장 Part. 1
베토벤 - 교향곡 7번 1악장 [2/2] (카라얀)
베토벤 - 교향곡 7번 1악장 Part. 2
연주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 : Herbert Von Karajan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금까지 너무나도 먼 나라 독일의 이야기였고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아마도 성공한 기업이나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나라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면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최근 유튜브에서 가장 조회수가 많은 클래식 음악 영상이라지요. 이바도와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베토벤의 교향곡 7번 1악장 들으시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베토벤 - 교향곡 3번 '에로이카' 1악장 Part1 - 아바도, 베를린필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