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2)
우리나라 음악계의 대표 리더쉽
음악계의 원로 낙촌 "이강숙" 선생님
오늘은 우리 모두의 본보기로 우러를 만한 음악계 원로 한 분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까 합니다. 이 땅에 음악학의 씨앗을 뿌렸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총장으로 재직하며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교육기관으로 자리잡게 만든 장본인이죠. 낙촌 이강숙 선생입니다. 낙촌은 음악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선생의 호를 딴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을 만들어 창단 후 지금까지 이강숙 선생이 단장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아마추어 음악활동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추어 음악활동가들이 모인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금년은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음악이론 전공을 처음 개설한 지가 30주년이고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문을 열고 2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 선생에겐 물론 우리 음악계와 예술계에 모두 뜻 깊은 해입니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여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올랐지만 과감히 그 자리를 버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음악학에 도전했죠.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교수로 있다가 1977년 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로 부임합니다. 그리고 4년 뒤 이론전공을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 전공과정을 열었죠. 수많은 저서와 논문, 평론으로 우리나라 음악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고 특히 첫 저서 “열린 음악의 세계”에서 제시한 열린 음악의 개념은 지금까지도 음악계는 물론 우리 사회 구석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KBS 교향악단
실천하는 학자이자 평론가로서 KBS 교향악단 초대 총감독을 맡기도 했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의 큰 업적은 한국예술종합학교입니다. 국립극장 옆에 방 한 칸을 얻어 간판을 걸었지만 그것 말고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었죠. 필요한 공간과 예산을 얻기 위해 정부 부처와 관계 기관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어야 했고 실체도 없는 학교에 오라며 최고의 교수와 예술가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뿐이었죠. 스스로도 그것을 “살인적인 인내”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기획예산처의 관계자들은 이강숙 총장이 나타나면 미리 자리를 피하기까지 했지만 아침 일찍 집 앞에서 기다리다 출근하는 담당자를 붙들고 사정하고 설득했는가 하면 “당신같은 사람이 이런 중요한 자리에 있어서 우리나라 문화예술계가 발전하지 못한다”며 소리치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죠. 그렇게 예산을 따고 공간을 얻고 직원을 늘렸고 해마다 하나씩 음악원,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까지 문을 열어 학교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소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서 나이 어린 직원에게도 반말로 대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명령이 아닌 설득으로 움직였습니다. 학습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연극원 교수들이 항의하며 대책을 요구하자 그들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눈을 감고 주기도문을 외었고 그 모습에서 진정성을 확인한 교수들은 학교의 입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도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하고 이해 당사자 모두를 대화로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는 총장을 두고 사람들은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 독재한다”며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죠. 리더로서 잠시라도 함께 일했던 교수와 직원들은 끝까지 대소사를 챙기며 신의를 다했습니다. 학교에 있다 문화부로 발령이 난 직원이 있으면 새로 소속된 부서의 장에게 전화를 걸고 따로 만나 식사를 하며 각별한 애정과 부탁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직원이 다른 부서로 옮겨 가면 다시 그 부서의 책임자에게 전과 마찬가지로 관심과 배려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총장을 부를 때 “외삼촌”이라 호칭하여 존경과 애정을 표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선 부하직원을 질책하지 않고 늘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잘못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싶을 땐 따로 불러 호되게 야단쳤죠. 학교를 만들며 사람들을 만나는 식사와 술자리가 많아지자 소주와 맥주를 섞는 폭탄주를 애용했는데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것이 널리 퍼지면서 심지어는 다른 대학 교수들까지 “예종주”라 부르며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강숙 선생님의 첫 저서 "열린 음악의 세계"
8년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면서 이강숙 선생은 또 한 번 새로운 삶에 도전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간직했던 소설가의 꿈을 이루었죠. 뒤늦게 문단에 등단하였고 지금까지도 일체의 다른 활동을 사양하며 줄곧 집필에만 정진하여 이미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머지않아 새로운 장편소설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공부 잘하는 수재가 어느 날 슈베르트의 가곡을 알게 되면서 음악의 마법에 걸려 집안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고난의 길에 기꺼이 몸과 마음을 던졌습니다. 누구보다 일찍 학교 연습실에 나와 다른 학생들에게 연습실을 내주지 않으려고 날마다 점심을 굶었고 그 때문에 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다녀오기도 했죠. 그리고 또 한 번 몸을 돌보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다 말기 위암에 이르렀지만 의지와 집념으로 기적같이 일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이강숙 선생을 음악의 길로 이끌어 오늘의 보람과 업적이 있게 한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 가운데 ‘보리수’를 들으며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