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9)
위기에서 빛을 발한 하이든의 유머
2009년은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구촌 곳곳에서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연주회가 바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였습니다. 해마다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나 폴카를 중심으로 무대를 꾸몄지만 2009년은 아무래도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나봅니다.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봉을 잡은 이번 연주회에서 빈 필은 ‘고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4악장을 연주했는데, 이 곡의 배경을 모르고 연주실황을 보신 분이 있다면 아마도 어리둥절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빠른 악장이 느려지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악기를 들고 무대 뒤로 사라지더니 급기야 바이올린 연주자 두 사람만 남게 됩니다. 당황해서 지휘대를 내려와 단원들 사이를 드나들던 지휘자 바렌보임은 끝까지 남은 악장 곁에 나란히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까지 하며 비위를 맞추지만 그마저 끝내 자리를 뜨고 맙니다. 그렇게 어이없이 연주가 끝이 나지만 객석에 앉은 청중들은 시종 웃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지휘자와 단원들 사이에 충돌이나 불화가 있었나 싶지만 사실은 모두 사전에 연출된 해프닝입니다. 지휘자의 연기 말고는 원래부터 이렇게 연주해야 하는 곡입니다.
하이든 시대의 음악가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의 성이나 저택에 머물면서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작곡하거나 연주했습니다. 하이든을 고용했던 에스테르하치 후작은 여름이면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 기거하면서 더위를 피했는데 이 때는 하이든뿐만 아니라 하이든의 책임 하에 맡겨져 있었던 다른 악사들까지도 함께 가야 했습니다. 주인인 후작이야 당연히 가족들을 동반했겠지만 하이든과 다른 악사들은 그 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니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1772년 여름에는 무슨 일인지 예정되었던 두 달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도대체 돌아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악사들의 불만은 턱밑에까지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이든은 조심스럽게 후작에게 이런 사정을 전했지만 후작은 오히려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명을 내릴 뿐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하이든은 다른 방법으로 후작의 마음을 돌릴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주 만에 서둘러 완성한 곡이 바로 ‘고별 교향곡’이었습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악사들은 하나 둘씩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자리를 떠났고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이 사라지면서 음악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 때서야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차린 후작은 당장 떠날 차비를 지시하였고 마침내 그들 모두 기다리는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치 후작 가문과의 계약이 끝나 자유를 얻게 됩니다. 후작에게 봉사하던 30여년 세월 동안 하이든의 업적과 명성은 바다 건너 영국에까지 전해졌고 잘로몬이라는 흥행사의 주선으로 영국을 방문한 하이든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영국민들의 거국적인 환영에 놀라게 됩니다. 이를 계기고 말년의 교향곡들은 주로 영국에서의 연주회를 위해 작곡하였는데 그 가운데 ‘놀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교향곡 94번에 얽힌 일화에서도 하이든의 유머와 여유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귀족들과 부호들이 비록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십분 이해하고 경청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을 즐기기보다는 사교를 위해서, 혹은 남에게 과시하려는 생각에서 연주회장을 찾는 사람들은 그 때도 많았나봅니다. 게다가 푸짐한 만찬에다 디저트까지 먹었으니 음악을 들으면 졸음이 쏟아졌을 텐데 특히 화려한 의상과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귀부인들이 더했던 모양입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예술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모멸감을 이기지 못해 분통을 터뜨려야 마땅하겠지만 하이든은 이런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하게 됩니다.
하이든 놀람교향곡 2악장
느린 2악장을 아주 조용하게 시작하다가 갑자기 팀파니가 가세한 모든 악기들이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내게 만든 것입니다. 당연히 객석에서 졸고 있던 수많은 청중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겁을 했을 터이지만 결국은 청중들이나 작곡자, 심지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 가지게 된 스스로의 위상이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의식했더라면 연주회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도 있었고 점잖게 핀잔을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고 누구와도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음악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은근히 빗대어서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심각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부드럽고 유쾌하게 만들었고 다른 누구와도 얼굴 붉힐 필요 없이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면서 또한 존경할 만한 처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너무나도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열악한 환경이, 그리고 또 하이든을 평생 괴롭혔던 부인의 잔소리가 그를 이처럼 단련시켰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역경을 이겼고, 그 시대 다른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늘 성실과 겸손을 잊지 않았던 하이든은 예기치 않은 위기마다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하는 2009년, 우리 모두 하이든의 넉넉한 여유를 배워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유가 생겼으면 여유로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머를 찾아서 갈고 또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