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8)
지휘자의 리더쉽
얼마 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은인이었다는 사실이 백건우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은 지휘콩쿠르로 바뀐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콩쿠르에 참가한 열다섯 살 소년 백건우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혼자 연습하는 모습을 발코니 석에서 지켜보던 번스타인이 주최 측에 그를 도우라고 말해 줄리어드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25년이나 지난 어느 날 백건우가 우연히 당시 콩쿠르의 조직위원장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번스타인은 20세기 후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베를린 필의 카라얀과 지휘계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매스컴을 적절히 활용하는 등 실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 스타일과 이미지는 상반된 것이 많았지요. 카라얀이 평생 사적으로 단원들과 식사자리 한번 가지지 않았던 독선적인 카리스마였다면 번스타인은 부드러운 이미지와 설득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요청이 있자 이를 거절하는 모험을 통해 종신 총감독의 지위를 얻어낸 승부사였다면 번스타인은 언제나 타협과 배려를 통해 모두의 만족을 이끌어내려 한 코디네이터였습니다.
베를린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카라얀
종신을 고집하다 단원들과의 불화로 끝내 사임에 이르렀던 카라얀과는 달리 번스타인은 적절한 시기에 주빈 메타에게 뉴욕 필을 물려주고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세계 유수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돌아다니며 지휘했는데 특별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요. 빈 필과의 한 연주회가 끝나고 열광적인 박수와 앙코르 요청이 있자 무대로 걸어 나온 그는 갑자기 악장을 일으켜 악단을 이끌게 하곤 자신은 무대 옆에 조용히 섰습니다. 시트라우스의 왈츠가 흘러나오자 조금 전까지 어리둥절했던 청중들은 그제서야 번스타인의 의도를 알고 전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로 대답했습니다. 왈츠는 빈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잘 연주하는 음악이니 빈 필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지요. 번스타인의 성격이 그렇기도 하지만 다분히 보여주기 위한 제스추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팔방미인 번스타인도 뉴욕 필의 단원들과는 별로였답니다. 말이 많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언어학을 전공하고 책까지 냈으니 짐작이 가는 일이지요. 연습시간이 끝나고도 잔소리가 이어지면 고참들은 악기를 챙겨 지위자 앞을 지나쳤다는군요. 이처럼 제 잘난 맛에 사는 예술가들을 어떻게든 이끌어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야 하는 지휘자야 말로 리더중의 리더가 아닌가 싶습니다.
카라얀이 사임한 이후 베를린 필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독일의 자랑인 만큼 다들 독일인 지휘자인 클라이버를 예상했지만 성격 좋고 배경 좋은 이탈리아의 아바도를 선택했습니다. 카라얀에게 물린 단원들이 클라이버의 고지식한 완벽주의를 감당하기 싫었겠지요. 가능한 한 적은 시간을 연습하고 많은 자유시간을 누리고 싶었을 겁니다. 완벽이 아니면 타협을 하지 않는 클라이버에게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을겁니다. 음악 명문가 출신의 아바도에게는 후원하는 세력도 많아서 교향악단 운영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아바도가 이탈리아 마피아의 지원을 받아 베를린 필에 입성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황제 카라얀의 후임.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떠난 이후 지휘계에도 신유목시대가 왔습니다. 상임지휘자로 한 오케스트라를 도맡에 오래가기 보다 여러 오케스트라를 떠도는 지휘자가 많아졌죠. 잘하는 몇 개의 레퍼토리만 있으면 한참을 견딜 수 있고 단원들도 간섭을 덜 받으며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어 서로들 좋아합니다. 문제는 오케스트라의 개성이 희미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과거 유진 오먼디가 오랫동안 아끌었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그들만의 소리가 있어 필라델피아 사운드, 혹은 유진 오먼디 사운드라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점점 이런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지요.
"오먼디 = 필라델피아 사운드" 라는 공식을 만든 헝가리 태생의 미국의 지휘자 유진 오먼디
신유목시대의 대표적인 지휘자 유형이라면 로린 마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가 지휘해야 할 오케스트라의 능력과 주어진 시간과 기타 여건들을 정확하게 판단하면 단원들에겐 그 안에서 가능한 만큼의 최선만을 요구합니다. 첫 만남과 연습, 마지막 리허설까지의 과정에서도 늘 유머와 칭찬을 잊지 않죠. 자신이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자신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따르는 부지휘자를 보내 연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당연히 단원들이 가장 좋아하고 신이 나서 하게 되니까 좋은 결과가 있고 또 그런 모습을 보는 청중들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현실적이면서 얄미울 정도로 영리한 리더쉽이죠.
즐거움을 추구했던 영리한 지휘자. 로린 마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휘자 두 분의 클래스를 비교하면 리더쉽의 상반된 두 가지 유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 분은 먼저 지휘봉을 고르고 손으로 쥐는 법부터 가르치고 다른 한 분은 전혀 설명이나 준비없이 대뜸 오케스트라를 앞에 놓고 악보대로 소리 나게 해보라고 시킵니다. 쉽게 생각하거나 혹은 너무 긴장해서 실패하는 게 당연하죠. 그렇게 기부터 죽여 긴장시키는 겁니다. 수업에서까지 발휘되는 지휘자의 리더쉽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리더쉽을 살펴보았지만 여러분에게도 생소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유형의 리더쉽을 발휘하고 계신지요? 그리고 그것이 과연 여러분의 조직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같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