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1)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이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는 까닭은?
누구나에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만남이 있고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평생의 등불이 되기도 하고 그로부터 삶의 가치와 목표를 얻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초등학교 시절 경험했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의 독주회가 그렇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단아하고 담백한 소리에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마구 쏟아내는 감정이 아니라 안으로 깊이 들이마셨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흐느끼듯 뿜어져 나오는 꽉 찬 소리였습니다. 마치 찰지고 숙성된 반죽이 국수틀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였고 탱탱한 누에고치에서 윤기 흐르는 명주실이 뽑아져 나오는 듯한 소리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지금까지 단 한 번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사인을 받았습니다. 늘 건강하시라는 말을 건냈고 피곤하지만 밝은 표정으로 고맙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감동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일 년도 못되어 그만두었습니다. 연습을 게을리 한 탓이 크겠지만 단 한 번도 딱 맞는 음높이의 소리를 켜보지 못했고 그것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그렇게 섬세하고 어려운 악기라는 것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주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듣는 음악이 그들이 감내한 인고의 세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 어렴풋이나마 음악가들을 곁에서 돕는 일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로 김영욱에 관한 글과 음반을 찾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김승현 박사의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음악을 사랑했던 어머니 이현경 여사의 영향으로 집안에 늘 당대의 음악가들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위로 두 누님은 피아노를 쳤고 김영욱도 처음에는 피아노를 치다가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피아노가 치기 싫었고 크기가 작은 바이올린이 만만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때부터 놀라운 재능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 내한했던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당시 커티스 음대 학장이었던 그의 초청으로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바이올린 지도자였던 갈라미언에게는 핑커스 주커만과 이차크 펄만,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경화와 같은 쟁쟁한 제자들이 있었지만 누구보다 김영욱을 아꼈습니다.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전제하에 제자들 중 김영욱을 가장 주목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의 기대대로 김영욱은 곧 세계무대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함께 협연했던 뉴욕 필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나는 왠만해선 천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영욱이야말로 진짜 천재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Conductor, Leonard Bernstein, 1918 – 1990>
그렇게 많은 연주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녹음한 음반은 많지 않습니다.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김영욱의 성격 때문입니다. 거듭 연주해서 짜깁기 하는 것도 그렇고 기계로 잘못된 부분을 조작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답니다. 독주보다는 실내악을 좋아해서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엑스, 첼리스트 요요마와 더불어 엑스 김 마 트리오를 결성했는가 하면 보자르 트리오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녹음은 독주 음반보다 실내악 음반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일체의 연주활동을 중지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어 더 이상 그의 음악을 무대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때 김영욱이 독일의 테트몰트 음대에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우연히 제 여동생이 그곳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동생을 보러 가는 길에 그를 찾아가 만나볼까 망설였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고 서울대 음대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차일피일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임을 알았기에 조금이라도 그를 어색하고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 함께 음악예술감독으로 취임하신 분이 그토록 오랜 세월 만나 뵙고 싶었던 김영욱 선생이었습니다. 제 방 바로 옆방에 김영욱 선생의 방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제 방보다 그 곳을 먼저 찾아가 보았습니다. 책상과 책장만 놓여있는 텅 빈 방이었지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결혼식을 기다리는 새신부의 심정으로 첫 만남을 기다렸습니다. 조촐한 취임식이 있던 날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초등학교 시절 추억을 말씀드렸고 김영욱 선생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손사래를 치며 웃었습니다. 이후로 직책상 함께 하는 자리가 거듭되었고 예술의 전당을 떠나고도 여태껏 가끔씩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러면서 음악을 듣고 느꼈던 그대로가 그의 모습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이 또한 큰 기쁨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꾸밈없는 음악만큼이나 소탈하고 욕심없는 성품이었고 맛깔스런 소리마냥 고상하고 섬세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튀지 않고 은은한 색상이지만 흔하지 않은 질감을 가진 양복과 셔츠, 타이를 매지 않고 포켓에 꽂은 수건과 커프스 버튼과 같은 소품으로 포인트를 주는 감각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입니다. 스스로 음식 만들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그 나름 즐기는 여유와 식사 자리에서는 가급적 일과 관련된 대화를 피하는 것까지 모두가 그의 음악만큼이나 특별하면서 친근합니다. 차가운 듯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 까칠한 점이 한없이 그를 높이 바라보게 만듭니다.
마음 같아선 늘 가까이서 자주 보고 싶지만 그의 일상을 조금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바이올린을 그 무엇보다 좋아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은 그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이기에 그가 바라는 그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