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살던 집엔 대문 옆에 화장실이 따로 하나 더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홀로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 창문을 열고 담배 연기를 뿜으며 짜릿한 일탈을 만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 화장실 문을 연거푸 노크하더니 다급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엄마 깼다." 아버지였습니다. 벌써부터 알고 계셨지만 모르는 척 하셨던 겁니다. 그날 이후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입시를 앞둔 고 3 무렵도 마냥 느긋하기만 했습니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잠들어서는 해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잠결에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한참을 지켜보며 서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더니 아버지였습니다. 안방으로 건너오라 하시기에 정말이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휙 돌아서서 나가시면서 뜻밖에도 "명화극장 한다."는 말씀을 여운처럼 남기셨습니다. '명화극장'은 일요일 저녁마다 해외 명화를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혼자 살 때의 일입니다. 일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자는데 전화벨 소리에 단잠을 깼습니다. "점심 먹자." 아버지였습니다. 도착해서 전화할 테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대구에서 두시간 반만에 운전을 해서 도착하신 아버지는 골목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허름한 설렁탕집으로 들어가시더니 앉자마자 뜬금 없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니 사람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와 그리 좋아하는지 아나?"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었더니 "임마, 그건 세상에 없는 일이라서 그런기다." 라고 하셨습니다. 장남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마냥 기다릴 수가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소설과 영화에 푹 빠져 있었으니 혹시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느라 연애를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셨던 겁니다. 듣고 있는 아들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그렇다면 설마 결혼을 놓고 계산을 하느라 짝을 찾지 못하는가 싶어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니 요즘 젊은 놈들이 얼마나 한심한지 아나? 마누라가 아니라 원더우먼을 찾으니 그기 어디 있나? 날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가 좋거든 집구석에 들어가면 바깥 일은 입도 뻥긋하지 마라. 출세가 좋고 돈이 좋아서 그걸 거들어주길 바라면 마누라가 아를 안놓던지, 빨래를 안하던지, 밥을 안한다고 해도 암 말도 하믄 안된다. 간혹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여자가 있긴 있더라. 그런데 임마, 그기 니하고 무슨 상관이고?"
홍승찬 교수
70년대초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대구에서 서울을 이웃집 드나들 듯 다니셨습니다. 대구 효성여대(지금의 대구 카톨릭 대학교) 음대 학장이면서 국립 오페라단 주역이셨던 아버지는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 차를 운전해서 국립극장으로 가서 오페라 무대에 서셨고 밤늦게 다시 차를 운전해서 대구로 내려가는 강행군을 날마다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런 악조건에도 남들이 꺼리는 초연을 주로 도맡으셨고 그렇게 십년이 넘도록 우리나라 오페라 공연의 역사를 새로 쓰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몸담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행정 책임자로서 또한 믿을 수 없는 성과와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단과대학 음악학부에서 예술대학으로, 다시 음악대학으로 확대 개편하는 과정의 책임을 맡아 이끄셨는가 하면 학교 안에 여학생들만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직접 지휘자로 나서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를 오가며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u&no=22016
날마다 오케스트라 연습이 밤늦게까지 이어지자 집에 가는 차편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학교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의 귀가를 돕겠다고 나섰고 학생들 하나하나 집앞까지 다 가서 내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명절에도 집에 없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늘 집에 있던 승합차에 고기와 떡, 막걸리를 싣고 학교로 가셨습니다. 남들 쉬는 날에도 학교에 나와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직원들을 다 불러서 가져간 음식과 술을 나누고 선물을 돌렸습니다. 학교에서 일하는 누구라도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지만 지금도 일 때문에 가끔 대구에 내려갑니다. 언젠가 동대구역에 내려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자꾸 백미러로 저를 쳐다보기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조심스럽게 "혹시 홍학장님 자제분 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개인택시 하기 전에 효성여대에서 운전기사로 일했었다며 큰 딸 대학 등록금이 없어 못보낼 형편이었는데 아버지 도움으로 졸업까지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사코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면서 이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이렇듯 열 사람이 해도 모자랄 일을 홀로 다 감당하셨기에 무쇠같은 체력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짐작할 따름이지만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쳐 더 힘드셨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 그 마음 같을 순 없었을 텐데 이미 모든 걸 꿰뚫어보시고도 안타까움과 미련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셨던 겁니다. 서른 다섯, 처음 교수가 되어서 아버지께 달려갔습니다. 소파에 앉아 저녁신문을 보고 계시기에 임명장을 내밀었더니 힐끗 보시고는 다시 신문을 펼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난 그 나이에 학장 했다."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대화는 병원 침대맡이었습니다. 마침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으셨구나 싶어 얼른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혹시 꼭 보고 싶은 분 한 분만 말씀하세요. 제가 경찰청이든 어디든 다 쑤시고 뒤져서 모셔 올게요!" 잠시 일그러진 얼굴이 펴지면서 벌어진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제서야 드디어 아버지가 마음 속에 간직한 누군가를 알게 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미소짓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바뀌더니 짧게 단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누우셨습니다. "없다."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돌아가신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출근하는 길, 꼬리를 물고 선 차 속에서 서리 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속에서 얼마나 추우실까 생각하니 어느덧 눈물이 흘러 시야를 가렸습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눈물을 닦으려는데 끝내 설움이 복받쳐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갈 땐 뭐라도 손에 들고 가게 됩니다. 끼니가 될 만한 것이 아니면 군것질 거리라도 꼭 챙깁니다. 밤에 살찌는데 왜 이런 걸 가져오느냐 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말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선술집에 안주로 나오는 갖가지 구이 종류를 따로 챙겨오셨습니다. 밤늦게 잠든 우리를 깨워서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잠이 덜 깨서 눈을 감은 채 입만 벌리고 받아먹었습니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에 고기가 불에 그을린 연기 냄새까지 뒤섞인 아버지의 체취가 코 끝을 찔렀습니다. 눈을 떠서 볼이라도 비비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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