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2일, 우리나라 오페라 애호가들 그토록 기다렸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내한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 이후 안나 네트렙코만큼 주목받았던 소프라노가 있었나 싶습니다. 노래와 연기, 외모까지 모두 다 가졌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고 타고난 끼와 재능에다 재치와 순발력까지 갖추고도 그 의욕과 열정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미모라면 일찍이 그 이름이 같은 안나 모포가 있었지만 노래와 연기, 무엇보다 성량이 전혀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노래는 물론 연기만으로도 감동을 준 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는 평생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출산을 하고 다시 나타난 지금은 불어난 몸매가 아쉽기도 하고 소리의 탄력도 예전만은 못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안나 네트렙코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디바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안나 네트렙코의 존재가 지금처럼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알려진 것은 2000년대 초반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초청되어 도밍고가 발굴한 테너 롤란드 비야존과 몇차례 호흡을 맞추면서부터입니다.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청순하지만 적극적인 성격의 시골처녀 아디나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베르디의 "트라비아타"에서는 무채색의 무대를 배경으로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나와관능적이면서 가련하기까지 한 화류계 여인 비올레타의 강렬한 이미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서구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팔방미인 소프라노의 출현을 반기면서 호들갑을 떨었고 "마린스키 극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한 소녀가 우연히 마에스트로 게르기에프의 눈에 띄어 일약 스타가 되었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사실이고 게르기에프에게 발탁되어 오페라 무대에 선 것도 사실이지만 청소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자주, 또 가까이서 오페라를 만드는 현장을 보고싶은 열망에서 택한 일이었고 게르기에프와 처음 호흡을 맞춘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역은 1993년 글린카 콩쿠르에서 우승한 다음 해의 일이었습니다.
네트렙코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크게 성공한 예술가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그 역시 어린 나이에 가수가 되려는 꿈을 품었고 피나는 노력으로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어 마침내 성공에 이르렀을 것이라 짐작하겠지만 정작 그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1971년 9월 18일 흑해 연안의 러시아 도시 크라스노다르에서 지질학자인 아버지와 통신기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발레와 체조, 농구를 배워 수준급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고 연극 "오셀로"를 본 이후로는 한 동안 연극 무대를 동경한 연기자 지망생이었습니다. 당연히 연극 학교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학이 어려울 거라는 주변의 만류로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 전문대로 방향을 틀었고 일년 만에 그 보다 더 높은 수준의 림스키코르사코프 콘서바토리에 편입했습니다. 연기자의 꿈을 접고 택한 성악가의 길에서 재능을 발견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지만 정작 그 자신은 가수가 되지 못했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집안에 집시의 피가 흘러 언제나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꾸며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네트렙코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줄곧 새로운 영역과 역할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산으로 잠시 공백기가 있었지만 이후 다시 나타나서는 전보다 한층 더 진지하고 성숙한 역할에 몰입하여 묵직하고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에서 네트렙코는 헨리 8세에게 버림받는 비운의 여인 앤 볼린의 참담한 심정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서 최고의 열연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네트렙코에 열광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빼어난 외모와 도발적인 무대 매너에 현혹되어 정작 부족한 기본기를 간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대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같이 콜로라투라의 기교가 필요한 역할에서 칼라스와 그루베로바를 비교한다면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의 영역에서라면 누군가 한 사람이 모든 작품의 모든 역할을 다른 누구보다 잘한다는 건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러는 그가 명품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고 동거와 결별, 결혼과 이혼에 이은 재혼까지 문제삼는 시각도 없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소위 말하는 유명 연예인들의 그렇고 그런 행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오페라 가수, 예술가의 품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사람들 중에는 그가 비인에서 살면서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한 사실에 분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이 인류의 미래를 열어가는 시대입니다. 연예인과 예술가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고 결혼이든 국적이든 개인의 선택을 두고 다른 누군가가 이렇고 저렇고 따지던 시대는 이미 아주 먼 옛날입니다. 네트렙코의 말대로 그 자신 변신을 거듭하다 무엇을 선택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언니처럼 모델로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고 연기자로 나서거나 그림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틀림 없는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네트렙코는 자신이 원하는 하루 하루의 삶을 마치 그날이 주어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스스로를 던져 만들어갈 것이며 언제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리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가지를 사방으로 멀리 뻗을수록 줄기는 더욱 단단해져 그를 있게 한 러시아의 흙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사회주의 소비에트 시절을 살면서 엘리트 교육의 혜택을 누렸으니 그 때를 결코 잊지는 못할 것입니다. 21세기의 카라얀을 꿈꾸는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황제) 게르기에프의 간택을 받았으니 그 또한 숙명입니다.
라틴 혈통의 다정다감한 바리톤 가수 두 남자와 살다가 헤어져서 지금의 남편인 테너 유시프 에이바조프와 결혼한 것도 어쩌면 러시아어가 아니면 서로 통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간절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생각보다 너무 먼 바다로 나왔으니 어느덧 지난 날이 그립고 살던 곳이 그립겠지만 누구든 한 번 시작한 시간의 항해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며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이미 시작된 변화를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운명입니다. 네트렙코가 오페라 무대에 등장한 이후 벌써 제 2, 제 3의 네트렙코가 그 뒤를 이으며 네트렙코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 또한 그 누구도 멈추거나 돌이킬 수 없는 오페라의 흐름이고 네트렙코의 운명입니다.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고, 그는 소비에트가 길러 러시아가 자랑하는 21세기 오페라의 새로운 아이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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