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몸담고 있는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경상남도 한 농촌의 마을회관으로 내려가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예술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술 하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 공연을 보여주고 들려주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학생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 예술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하려는 뜻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허설을 마치고 공연을 막 시작하려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중이라고는 일곱 명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코흘리개 다섯에 할머니 두 분이었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농번기라 휴일도 없이 모두 일하러 나갔고 일손을 거들지 못해 어린 손주라도 돌보겠다며 집에 남은 할머니 두 분이 마실을 나선 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쪽 형편을 헤아려 찾아간다는 것이 전혀 사정도 모르고 헛발질을 한 셈이었으니 처음부터 잘못 계획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서른 명이 넘는 출연진에 일곱 명의 청중이라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맥이 빠져 공연을 못하겠다는 학생들에게 공연의 성패는 청중의 수가 아니라 감동의 크기라고 말하며 여기 있는 한 사람마다 잊다 못할 추억을 남기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대 옆에 따로 의자를 놓고는 공연이 진행되는 순서마다 어린이 한 명씩을 차례로 불러 그 의자에 앉히고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크게 부르며 이제 연주할 곡을 잘 듣고 기억하라며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너만을 위한 곡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일곱 명의 청중은 머리를 무엇에 맞은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이었고 공연이 끝나고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그들을 두고 떠나는 학생들이 더 뭉클하고 뿌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관객들이 이것 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오래 전 그 누군가는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앞에 놓고서도 연주를 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였습니다. 그날 연주회는 전장의 군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이었습니다. 그것도 비가 쏟아져 진창이 되어버린 야외에서의 연주였습니다. 이런 날씨에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하지 말자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을 만큼 아프지 않은 이상 연주를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관객이라고는 객석 저 멀리 우산을 쓴 병사 한 사람이 전부였지만 그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최선을 다한 연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껏 했던 연주들 가운데 최고였다."고 말했습니다.
19세기가 파가니니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누가 뭐래도 하이페츠의 시대였습니다. 하이페츠에 한발 앞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크라이슬러조차도 어린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제 바이올린을 연주할 필요가 없어졌다." 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그를 가르쳤던 거장 레오폴트 아우어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하이페츠의 이름을 뺀 까닭을 묻자 "하이페츠는 신의 제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습니다.1901년, 러시아의 빌니우스에서 태어나 세 살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하이페츠는 일리아 말킨을 거쳐 러시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가 되었지만 여덟 살에 벌써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했고 열 살에는 이미 유럽을 누비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2년 어깨를 다쳐 어쩔 수 없이 악기를 놓을 때까지 평생을 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어디서든 최고의 찬사를 누렸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어느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어떤 연주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차갑다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사실 그의 가슴은 누구보다 뜨거웠고 그래서 어려운 형편의 제자들을 아무도 모르게 도왔는가 하면 자선 공연이나 위문 공연이라면 언제든 주저하지 않고 나섰습니다. 1923년 일본 공연을 불과 몇 주 앞두고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폐허가 된 일본을 방문하여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서 예정에 없던 자선 연주회를 열었는가 하면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선의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에 앞장섰고 연주회 도중 폭격을 받아 대피하는 위험을 겪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는 늘 무표정한 모습이었지만 위문공연 당시 병사들과 어울려 함께 찍은 사진에서만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Jascha Heifetz plays Tchaikovsky Violin Concerto: 1st mov.
제가 좋아하는 김사인 시인의 시 “조용한 일”입니다. 이제 곧 가을입니다. 여러분도 늘 음악이 이처럼 철 이른 낙엽이었으면 합니다. 슬며시 곁에 내려서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그냥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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