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이라면 지금도 재력가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예술가들, 특히 보티첼리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미술가들을 후원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도 메디치의 본산이었던 우피치 궁은 박물관으로 바뀌어 메디치 가문이 소장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미술품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소장품들을 다 돌아보려면 하루가 모자라고 이틀도 부족할 만큼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두가 메디치라는 한 가문이 의뢰하고 소장한 미술품이란 것입니다.
이처럼 메디치라면 주로 회화나 조각과 같은 미술이나 건축의 애호가이자 후원자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예술 장르나 학문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걸쳐 두루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오페라와 발레의 경우 그 탄생부터가 메디치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것이 모두 프랑스 왕실과의 혼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오페라가 피렌체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바르디 백작의 사랑방에 모였던 당대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문헌 속의 기록으로만 남은 그리스의 비극을 재현하고자 서로 협력하여 새롭게 만든 것이 오페라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가 메디치 가문의 후광을 업고 탄생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600년 10월,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메디치 가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를 신부로 맞아 결혼식을 올렸고 피렌체에서는 이를 축하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대규모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축제의 볼거리로 오페라를 만들기로 했고 여기에는 당시 피렌체를 대표할 만한 세 작곡가가 동원되었습니다. 결혼식이 거행된 다음날인 10월 6일에는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가 작곡한 ‘쥬노네와 미네르바의 경쟁’이 팔라치오 베키오에서 벌어진 향연 가운데 공연되었고 다음날에는 피티 궁전에서 야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0월 9일, 줄리오 카치니의 ‘체팔로의 납치’가 우피치 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피렌체 시민 모두가 오페라라는 새로운 공연예술을 알게 되었고 그 소문이 이탈리아 전역을 넘어 프랑스와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발레의 종주국이라면 프랑스를 떠올리겠지만 그 원형을 수출한 나라는 이탈리아였습니다. 누구나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발레의 탄생이 오페라보다 앞섰고 이 또한 메디치 가문과 프랑스 왕실의 결혼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딸 카테리나가 프랑스의 왕실로 시집가면서 가져간 무수한 혼수품들 가운데 발레의 씨앗도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후에 카테리나의 남편은 앙리 2세가 되었고 아들인 앙리 3세의 치세에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발레를 만들도록 지시한 이가 바로 카테리나, 즉 카트린느였습니다.
앙리 3세의 모후였던 카트린느가 며느리인 왕후 루이즈의 여동생 마르게리트 드 로랭과 조아유 공작의 결혼식 피로연을 위해 만들었던 최초의 발레는 춤과 음악, 그리고 노래와 시낭송까지 결합한 형태였습니다. 그녀가 시집올 때 데려온 시종 중에 음악과 춤에 정통했던 발다사리오 다 벨지오조소 (프랑스 이름으로는 Bathasar de Beaujoyeulx)에게 공연을 맡겼습니다. 오늘날 라인의 코믹 발레(원제는 Ballet Comique de la Royne)로 불리고 있는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키르케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고 결국은 결국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키르케를 물리치고 여왕 루이즈에게 찬사를 바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연한 상상이겠지만 프랑스 궁중에서 싹튼 발레라는 새로운 예술은 당시 결혼식 피로연에서 공연되었던 오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장르 구분으로 보자면 문학과 연극, 음악과 무용이 한 데 어우러졌던 것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었고 그것을 새롭게 재현하겠다는 것이 오페라였다면 그 안에 당연히 무용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노래와 음악 중심으로 발전해갔다면 프랑스의 발레는 노래 대신 시와 춤을 택했고 결국에는 춤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화 “왕의 춤”을 보면 루이 14세가 출연하는 발레 공연에서 라신이 자신의 시를 스스로 낭송하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왕은 온 몸에 황금 칠을 하고 태양의 신 아폴로를 춤추고 있고 라신은 그런 아폴로, 즉 프랑스의 국왕 을 찬양하는 시를 읊조리고 있어 태양 왕이라는 루이 14세의 별칭이 어떤 연유로 비롯되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루이 14세는 열세 살부터 몸이 불어 춤을 출 수 없을 때까지 수많은 발레에 직접 출연했습니다. 더불어 직업 무용수를 양성하기 위해 1661년 왕립 무용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전통이 오늘날 파리 오페라극장의 발레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곡가 륄리를 교장에 임명했고 보샹으로 하여금 무용수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도록 했습니다. 보샹은 오늘날까지 발레의 기본동작으로 강조되고 있는 ‘다섯 가지 다리의 포지시옹’을 창안하였고 륄리는 처음으로 여성을 발레 무대에 출연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임이 고안되어 시의 낭송 없이 발레의 동작만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있게 되면서 독립적인 무대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어느 국가나 민족이 크게 부흥하여 그 주위를 평정하고 위세를 떨쳤을 때, 안으로는 학문이나 예술을 크게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개인들이 앞장서서 학문과 예술의 융성을 도모코자 가진 능력과 재력을 희사했던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주도했던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과 바르디 백작 등이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는 데 앞장섰는가 하면 이를 본받고자 했던 프랑스 왕실, 특히 부르봉 왕가의 전성기를 열었던 루이 14세 또한 주변에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거느리면서 그들의 창작활동을 크게 장려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에 못지 않게 자랑할 만한 위인들이 많았지만 우리 스스로 기억하여 본받으려 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조선시대만 해도 박연을 총애하여 아악을 집대성케 했던 세종대왕이 있었고 판소리에 관한 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그 기틀을 만들고 다졌던 신재효의 역할과 기여 또한 바르디와 메디치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궁중예식과 그에 필요한 춤의 양식인 정재를 창제하고 정리하여 후대에 남긴 소명세자의 공헌이야말로 발레를 체계화한 루이 14세에 견줄만한 치적임에 틀림없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르네상스를 이끌어가고 뒷받침할 우리의 메디치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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