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기원전을 뜻하는 B.C.는 예수 탄생 이전, 즉 Before Christ를 줄여서 만든 말이지요. 여기에 빗대서 테너들에게 B.C.는 Before Caruso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프라노들에게 있어서 B.C.라면 당연히 Before Callas라고 해야겠지요. 그만큼 엔리코 카루소와 마리아 칼라스는 독보적인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역사에서의 B.C는 예수 탄생 이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음악의 다른 분야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를 찾는다면 어떤 분야의 누구를 언급할 수 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파블로 카잘스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첼로에서 B.C.는 Before Casals인 셈이지요. 첼로의 역사는 카잘스 이전과 카잘스 이후가 있다고 할 만큼 그의 존재와 업적은 두드러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연주가 그만큼 뛰어나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첼로 연주자들의 레퍼토리 가운데 다른 어떤 작품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 세상에 알렸고 또 평생을 바쳐 이 곡의 해석과 연주방법을 연구하여 후대에 남겼다는 것이 더욱 크게 평가받은 결과일 것입니다.
첼로에서의 B.C는 파블로 카잘스 탄생 이전을 의미합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뿐만 아니라 바흐가 남긴 작품과 그 영향은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절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피아니스트들의 구약성서라 일컬어지고 있지요. 그러나 피아노의 경우 베토벤의 소나타 32곡을 신약성서라며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나란히 언급하고 있지만 첼리스트들에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함께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작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위대한 걸작은 바흐가 죽고 백년이 훨씬 넘는 동안 그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유럽의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겨우 열세 살의 어린 소년 카잘스의 눈에 띄게 된 것이지요. 그것도 우연히 말입니다. 그 해가 바로 1899년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첼로의 원년은 1899년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첼로의 역사는 1899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셈이지요.
Bach : Das Wohltemperierte Clavier I - Prelude & Fuga No.1 In C Major BWV 846 (01-02)
Rostropovich -- BACH (DVD Completo)
카잘스는 연주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은 카잘스를 회상하며 “그의 단순함과 우아함, 고결함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파블로 카잘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엘 벤드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꽤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 지휘자였지만 살림은 늘 궁핍하였습니다. 그러나 11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음악교육에 소흘함이 없었고 그것이 훗날 카잘스에게 긍지이자 자랑으로 기억되어 늘 “나의 음악적 재능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노래와 건반악기를 배웠지만 바이올린과 첼로는 거의 스스로 터득하여 연주하였고 유랑악단과 어울려 엉터리 첼로를 곧잘 연주하는 아들에게 아버지 카를로스는 제대로 된 첼로를 사주었고 어머니는 그를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원에 입학시켜 정식으로 첼로를 배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지요.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날마다 카페 ‘토스트’에서 스스로 편곡한 곡들을 연주하였고 이를 지켜 본 작곡가 알베니스가 추천서를 써 주어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틈만 나면 들리곤 했던 헌책방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인쇄본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이후 연주자로서 그의 삶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왕실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카를로스 3세 훈장’을 받았고 유럽 각지는 물론 미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쳐 1904년 백악원 초청 연주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실내악에도 관심을 두어 1905년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1915년 드디어 첫 음반작업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1936년부터 3년여에 걸쳐 드디어 오랜 세월 연구와 연습을 거듭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첫 음반을 녹음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이어서 녹음한 베토벤 소나타 전곡과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그 해석에 있어 가장 권위있는 잣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음악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삶을 사는 가운데 1936년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과 1939년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은 너무나 큰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스페인 공화정을 지지했던 그는 1938년 10월 리체우 극장에서의 연주회를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스스로의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고향이 그리워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과 맞닿아 있는 프라드에서 살았고 1950년부터는 이곳에서 페스티발을 열어 세계적인 거장들과 명연주자들을 수없이 불러들였지만 프랑코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초청은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몬트세라트 수도원에 있는 카잘스의 동상
그 뿐만 아니라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에서도 연주회를 갖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코르토와도 절교를 했다가 1958년에야 다시 화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신념과 고집으로 말미암아 미국에서의 연주도 거부했지만 그가 호감을 가졌던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다시 한 번 백악관 연주회를 가졌고 당시의 실황을 담은 음반은 시대의 유물로 남았습니다. 특히 앙코르로 연주한 카탈루냐의 민요인 ‘새의 노래’는 동포와 인류의 자유를 염원한 카잘스의 상징으로 남아 지금도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많은 첼리스트들이 앞다투어 연주하고 있지요.
Folklore Catalan : Εl Cant dels Ocells - Pablo Casals
카잘스의 1950년 프라데 페스티벌 연주
카잘스는 죽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습했고 이것이 그에게는 날마다의 명상이자 기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처음에는 기술적으로 연주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도 하나 둘 극복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음악적인 해석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10월 22일 카잘스는 푸에르토 리코의 산 후안에서 수도자와도 같은 96년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토록 그가 기다렸던 프랑코 정권의 종말이 찾아왔고 1979년에는 비록 시신으로나마 그의 고향 카탈루냐의 엘 벤드렐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베를린 필 12 첼리스트들’은 연주여행을 다닐 때마다 틈을 내서 벼룩시장의 중고음반 가게를 들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은 오래된 무명 가수들의의 음반에서 좋은 곡을 찾으면 그것을 새롭게 편곡해서 연주회마다 들려준다고 하지요. 첼리스트들은 다 그런가봅니다. 첼리스트는 아니지만 저도 유럽의 대도시, 특히 파리를 방문할 때면 어김없이 벼룩시장을 찾습니다. 카잘스처럼 엄청난 보물을 찾는 요행을 바래서가 아니라 손 때 묻은 책 학 권, 빛 바랜 엽서 한 장을 버리지 않는 그들의 생각과 삶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딱히 벼룩시장을 찾지 않더라도 거리마다 사람마다 묵어서 은근한 멋을 풍기는 무엇인가를 걸치고 있어 흐뭇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2첼리스트(출처 : 다음 블로그)
좋은 것은 당장은 드러나지 않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지요. 클래식 음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그렇고 카잘스의 연주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걸까요? 카잘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