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공연장의 CEO는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 벤슨 푸아

by 블로그신 2015. 11. 17.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싱가포르에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과 같은 복합문화공간인 에스플러러네이드(Esplanade)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서 봐야지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함께 경험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방학을 이용하는 계절학기 과목으로 “세계 문화현장 탐방”을 열고 에스플로네이드의 CEO 벤슨 푸아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메일을 보내는 사람은 누구며, 몸담고 있는 학교는 어떻고, 이러저러한 이유와 의도로 학생들을 인솔해서 그쪽을 방문하고 싶은데 제공할 수 있는 정보나 편의가 없는지, 혹시 학생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 등등을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메일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연구실로 돌아왔더니 벌써 답장이 와 있었습니다. 알게 되어 반갑고 참 좋은 취지의 계획이라 그 자신도 기꺼이 돕겠다며 그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세부사항의 제안과 결정은 비서를 통해 진행할 테니 조교나 학생 대표가 서로 연락을 주고받도록 하자는 제안을 덧붙였습니다.

일단은 서로 모르는 사이의 외국인에게 메일을 보내서 이렇게 빠른 회신을 받은 일이 없어 놀랐고 그쪽 입장에서는 성가시고 귀찮은 일일 뿐 그다지 이익이나 덕을 볼 일이 아님에도 성의 있고 뜻밖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출처 : 서울시청

 

 

그런데 그것은 겨우 시작이었을 뿐 이후의 감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서로 메일을 주고받은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로부터 다시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아마도 이런 저런 사정을 핑계로 협조가 불가하다는 내용이겠거니’ 생각하며 메일을 열었더니 그게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학생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나이 많은 비서보다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신입사원이 더 적격이라는 생각에 그런 직원 한 사람을 지정해 이후 연락과 진행을 그 담당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세안 문화예술포럼에서 싱가포르의의 벤슨 푸아(Benson Puah)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대표의 연설

(출처 : 해외문화 홍보원)

 

 

일면식도 없는 외국 사람이 뻔뻔하게 메일로 부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인데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서 배려하는 마음씀씀이를 대하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고 불과 몇 분 전의 삐딱했던 짐작이 너무나도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정했고 마침내 우리 일행은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일찍 서두른 탓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흩어져 사방을 둘러보다 약속시간이 가까울 무렵 로비에서 모이라는 지시를 하고 혼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일행 중 한 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로비에서 우연히 벤슨 푸아와 마주쳤는데 일찍 도착했다는 말을 듣더니 일정을 앞당기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학생들을 불러 모아 예정된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직원들이 배석한 가운데 벤슨 푸아와 그를 보좌하는 간부들이 직접 진행하는 PPT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걸 보는 순간 또 한 번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정된 서로의 상견례와 공연장 소개라는 것이 이런 것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놀랄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에스플로네이드 곳곳을 둘러보는 투어까지 벤슨 푸아가 직접 나섰는가 하면 예정에 없던 저녁 초대와 공연관람까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깔끔한 음식이 준비된 저녁식사 시간 동안 벤슨 푸아는 학생들이 앉아 있는 모든 식탁을 빠짐없이 돌며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업무가 바빠서 PPT를 발표하는 자리에 배석하지 못했던 직원들은 퇴근하면서 그 자리에 잠시 들러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건넸습니다. 정말이지 그 대표에 그 직원들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고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놀랍고 감동적인 경험이 더하게 되자 이날의 마지막 순서인 공연관람은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스스로 클래식 음악, 특히 오페라를 좋아한다고 했고 투어를 하면서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중이라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아마도 그 공연에 초대하려니 예상했는데 정작 벤슨 푸아가 초대한 공연은 야외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는 민속음악 공연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누구나가 구경할 수 있는 무료공연이었기에 실망이 더 컸는데 야외공연에 초대한 까닭을 듣고 나니 또 한 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싱가포르 국민들 대부분은 아직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에 큰 관심이 없기에 당장은 그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연을 부담 없이 쉽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것이 바로 에스플로네이드의 현재이고 당면 과제이기에 그 현장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꾸 이 공간을 찾다 보면 언젠가는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른 종류의 공연들에도 점차 호기심을 두게 될 것이고 그때는 또 그것을 관심과 호감으로 바꾸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안동 탈춤 페스티벌

 

 

이 말을 듣고 보니 이곳의 이름을 에스플로네이드라고 지은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산책‘이라는 말 뜻을 우리식으로 푼다면 ’마실‘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저녁 먹고 하릴없이 거닐다가 문득 찾아가는 이웃집처럼 늘 궁금하고 정겨운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 당시 ’싱가포르 아트센터‘였다가 개관 무렵 널리 공모하여 채택된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싱가포르에 복합 문화센터가 생긴 것은 일본보다 늦고 그에 앞선 우리보다는 한참이나 늦었지만 정작 그 고민과 모색을 시작한 것은 아시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먼저였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술의 전당처럼 있으면 남들 보기에도 그럴듯할 테니 일단 만들어 놓고 보자는 것이 아니라 요모조모 따지고 심사숙고한 끝에 만들기로 했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준비하고 마련했던 것입니다.

 

 

 

두리안을 형상화했다는 에스플러네이드, 싱가포르의 핫 스팟! 

 

 

전에 없던 것이 처음 생겼으니 그 책임자를 물색하는 일도 쉽지 않았겠지요. 경험이 있는 경력자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남다른 생각과 선택을 했습니다. 상식과 원칙을 앞세운 것이지요. 공연장과 전시장은 물론이고 여기에 식음료장까지 더한 복합문화센터라는 것이 결국은 이용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니 이와 유사한 서비업에 오래 종사하여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전문가들 가운데 문화 예술 전반에 관한 관심과 소양, 애정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적임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바로 벤슨 푸아였고 이전에 그는 싱가포르 최고의 호텔 경영자였습니다. 다양한 예술 장르와 문화 전반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PPT로 준비한 발표를 듣는 동안 어쩐지,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그랬구나 했는데 질문응답시간에 한 학생이 민망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호텔 경영자였던 당시와 지금의 연봉을 비교해달라는 것이었고 전에 비하면 지금의 연봉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다시 질문하기를 그런데 왜 지금의 자리를 선택했느냐고 물었고 그의 대답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그는 호텔 경영자로 있으면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긍지와 자부심이 컸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서비스를 늘 특정의 소수에게만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불특정 다수, 즉 원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그들 모두에게 서비스의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에스플로네이드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 서곡

 

 

지금도 누군가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주저 없이 벤슨 푸아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공연장이나 전시장, 혹은 복합문화센터의 경영자로 어떤 사람이 적합한지 의견을 물어올 때면 호텔과 같은 서비업에 오래 종사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고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전문가들 가운데 문화 예술 전반에 관한 관심과 소양, 애정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적임자라고 말해줍니다. 에스플로네이드를 방문했던 날 공연중이었지만 결국은 보지 못했던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가운데 피가로가 부르는 아리아 ‘이제는 못날으리’ 들으며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