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바흐의 마지막 작품. 아르슈타트과 뮐하우젠 시대,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만년의 걸작들을 만들었던 라이프치히 시대까지...
바흐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작품은 “푸가의 기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곡의 푸가와 4곡의 캐논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오늘날 대위의 모든 기법을 총망라한 전대미문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기법으로 대위와 화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대위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선율을 함께 만들어 가면서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는 것이고 화성은 하나의 선율을 먼저 생각한 다음 그것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다른 음들을 찾아서 채워나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은 서로 별개가 아니고 음악을 만들 때 함께 고려해야 할 변수입니다.
푸가의 기법(독일어: Die Kunst der Fuge, BWV 108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14곡의 푸가와 4곡의 카논으로 된 곡집이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15번째 푸가를 다 마치지 못하고 239마디에서 중단됩니다. 게다가 이 곡을 어떤 악기로 연주하라는 지시는 악보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바흐가 죽고 한참이나 지난 1927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연주되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여러 악기들의 다양한 조합으로 연주되고 있습니다. 바흐가 이 곡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안과 수술의 후유증으로 실명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흐 - 푸가의 기법 / 모로니
악기를 지시하지 못한 것을 두고는 특정 악기만을 반드시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설명도 있고 통상적으로 이럴 경우 건반악기를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갑자기 작곡을 중단하였기에 미처 악기를 지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엄격히 말해서 이 곡이 바흐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 바흐는 제자이자 사위였던 요한 크리스토프 알트니콜을 침대로 불러 그의 지시대로 악보에 적도록 시켰고 그렇게 완성한 곡이 “저 이제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라는 제목의 코랄 프렐류드였으니 이 곡이야말로 진정 바흐의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연 때문에 오늘날 이 곡을 “임종의 코랄”이라 부르고 있고 “푸가의 기법”을 연주한 다음 이어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이렇듯 누군가에게 받아 적게 하여 곡을 쓸 수 있는데 왜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푸가의 기법”을 같은 방법으로 완성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요? 그 해답은 그의 독실한 신앙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 작곡을 한다는 것은 하늘이 주신 소명이었고 그 자신은 단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도록 명을 받든 한낱 피조물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도,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작곡을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된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이니 그저 따를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임종의 순간에 완성한 마지막 곡은 그에게 주어진 소명 가운데 하나로서가 아니라 소임을 다하여 부르심을 받은 임무자가 올리는 보고였던 셈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눈이 멀어 병상에 누웠을 때 “푸가의 기법”을 완성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하기 보다 비로소 십자가를 내려놓게 되었음에 안도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이제나흐 광장 서 있는 게오르크 교회는 아이제나흐 시 교회. 1182-1188년에 지어진 교회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의 문서에 따르면 바흐는 1685년 3월 23일에 세례를 받았고 이를 근거로 그는 이틀 전인 3월 21일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곱 살에 성 게오르크 교회 부속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 때부터 벌써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교회 성가대에 들어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를 잃은 바흐는 오르가니스트인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를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주합니다. 이 시절의 바흐는 당대 대가들의 작품 사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형의 악보를 몰래 빼내 밤새 필사하면서 음악 공부를 하였습니다. 오르도르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을 배웠고 형의 가족이 늘어나자 바흐는 1700년 봄에 북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자립합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는 북독일 학파의 다채로운 음악을 접했고, 교회 오르간 연주의 대가 게오르크 뵘을 만났고 함부르크에서 북독일 오르간악파의 노대가 라인켄의 음악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웃 고장인 쩰레의 궁정악단 연주를 듣고 프랑스악파의 양식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바흐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가로서 취직을 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엔 궁정악사로서 일하다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합니다. 이 직책은 오르간 연주뿐 아니라, 성가대를 훈련시켜야 했는데, 18세인 바흐는 젊은 대원들과 길거리에서 주먹으로 치고 받기도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늘 겸손하고 성실했던 바흐에게도 혈기 넘치던 젊은 시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바흐의 음악인생은 그가 살았던 장소에 따라 대별됩니다. 즉 아르슈타트과 뮐하우젠 시대,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만년의 걸작들을 만들었던 라이프치히 시대입니다.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던 바흐는 늘 부양해야 할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낳은 생활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직장을 옮겼고 마지막으로 라이프치히를 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장성한 자녀들의 대학교육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던 그의 삶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들 또한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하여 아버지의 업적과 명성을 이을 수 있었고 오늘날 기적이라 일컬을 만큼 놀라운 업적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삶과 음악의 바탕에는 누구보다 깊고 든든한 신앙심이 받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작곡을 시작할 때 악보에 예수여 도와주소서(Jesu Juva)를 줄인 J.J.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In Nomine Jesu)를 줄인 I.N.J.를 썼고 마지막엔 항상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대 Gloria)를 줄인 S.D.G.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늘 성경을 가까이 두고 읽었고 좋아하는 성경 구절에 “하나님께 드리는 음악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항상 은혜로운 임재로 가까이 와 계신다”라고 주석을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반드시 기독교가 아니고 특정한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섭리하는 무엇인가가 있어 그것을 거슬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정말이지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스스로 교만하거나 나태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흐는 그 음악 이전에 그의 삶이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과 교훈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만의 버켓리스트에는 바흐순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태어난 아이제나흐에서 시작하여 그가 성장한 오르도르프와 뤼네부르크를 지나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 바이마르와 괴텐을 거쳐 라이프치히에서 마치게 될 이 여정을 통해 그의 삶의 자취와 향기를 좀 더 가까이 느껴볼 생각입니다. 혹시 이 순례에 동참하시겠다면 기꺼이 동행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바흐순례에 초대합니다.
Bach: Easter Oratorio (Sir John Eliot Gardiner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