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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영화 패왕별희를 아시나요? 영화같이 경극을 일으킨 건륭제, 경극에 빠진 서태후

by 블로그신 2015. 10. 7.

 

우리에게 경극은 영화 "패왕별희"로 다가온다. "패왕별희"라 함은 ‘초패왕 항우가 애첩 우희를 이별하다’는 뜻으로 한고조 유방과 천하를 다투었던 항우의 애틋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경극은 중국의 역사나 고전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극의 형식을 빌어 꾸민 것으로 무예에 가까운 몸동작에 가성을 써서 고음을 내는 대사와 노래, 그리고 화려한 의상과 형형색색의 화장이 어우러진 무대예술이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페이징 오페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본의 가부키와 더불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극예술 형식으로 꼽히고 있다.

 

 

패왕별희 / 출처 : 구글이미지


 

경극(京劇)의 기원을 따지자면 원나라의 잡극(雜劇)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잡극이 발전하여 명나라에서는 곤곡(昆曲)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여기에 호북성의 한극(漢劇)이 영향을 미쳐 창(唱)을 더하게 되면서 휘극(徽劇)이 되었다. 안휘성 사람들이 즐기던 휘극은 주로 역사를 소재로 삼았는데 이것이 북경에 알려지면서 경극으로 발전하였다. 1790년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안휘성에서 북경으로 보낸 공연단이 처음으로 휘극을 청나라 황실에 알렸고 그것이 경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후 황실의 문인들이 그 문장과 틀을 다듬고 분장이나 의상이 점차 화려해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경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륭제 / 출처 : 차이나 투데이

 


경극의 탄생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던 건륭제는 강희제, 옹정제와 더불어 청나라를 대표하는 성군으로 칭송받고 있다. 특히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고 장려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교하기도 한다. 루이 14세가 발레의 기틀을 다졌던 것처럼 건륭제는 경극의 씨앗을 심고 또 가꾸었다. 건륭제 이후 수도 북경에 뿌리를 내린 경극은 빈부와 계층, 세대와 남녀를 초월하여 널리 사랑받는 무대예술로 자리잡았다. 북경 사람 누구나가 다 경극을 사랑했지만 특별히 많은 혜택과 여유를 누렸던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경극을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극공연 / 출처 : 국립부산국악원

 


이처럼 경극을 끔찍하게 아꼈던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 하나만을 들라면 서태후가 아닌가 싶다. 더러는 청왕조 몰락의 주범으로 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중국 역사상 둘도 없는 여걸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치적이나 정치적인 과오보다는 다소 과장되어 전해지고 있는 기행이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타고난 미모와 지략, 거기에 색기까지 겸비하여 함풍제의 총애를 얻었고 그것을 발판으로 최고의 권력까지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황제의 총애보다는 가까스로 쟁취한 한번의 잠자리에서 황실의 단 하나뿐인 황자를 생산한 것이 권력의 열쇠였다는 것이다.

서태후는 만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전란 속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7살에 궁녀로 뽑혀 황궁에 들어갔고 궁에 들어간 여인이라면 누구나가 그랬던 것처럼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리고 1년이 흘러 결국은 내관들을 매수한 서태후는 황제를 자신의 침소 가까운 곳으로 이끌게 했고, 바로 그 때 노래를 불러 황제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천하 절색들만 모여 있는 황궁에서 서태후는 그 미모보다는 노래가 단연 발군이었다. 이처럼 기예에 밝았던 그였기에 경극을 사랑하여 보는 것만 즐겼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무대에 참여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서태후 / 출처 : 구글 이미지

 


1860년 영국이 중국을 침략하자 열하로 피해간 함풍제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6살 난 황자가 그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동치제였다. 즉위한 황제가 나이가 어려 모후의 섭정이 불가한 상황이었으나 생모인 서태후가 황제의 정비가 아닌지라 선황의 정비인 동태후와 서태후가 함께 섭정에 임하였다. 이 두 태후를 두고 동태후와 서태후라 했던 것은 그들의 거처가 각각 황궁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서태후와는 달리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했던 동태후는 조정 대신들은 물론이고 황제와도 가까웠다. 심지어 황제는 황비를 간택함에 있어서도 동태후의 의중을 따랐는데, 이럴수록 서태후는 동태후를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은 동태후를 독살하고 홀로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그 때 이미 황제는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모후인 서태후의 간섭과 핍박을 견디지 못해 향락만을 일삼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에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치제의 황후에게 남편을 핍박했다는 누명을 씌어 살해하고 이제 겨우 3살인 광서제를 제위에 올려놓고 섭정을 하게 된다. 광서제는 함풍제의 동생과 서태후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으니 광서제에게 있어 서태후는 백모이면서 동시에 이모였던 것이다. 

19살이 되면서 광서제는 개혁파와 손을 잡고 서태후에 맞섰지만 103일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광서제는 죽는 날까지 연금 생활을 해야 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여름이면 이화원에서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에서 갇혀 지냈던 광서제는 1908년 서태후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하루 전에 서태후의 명으로 살해되고 만다. 이로써 28살에 동치제의 섭정으로 시작된 서태후의 통치는 48년만에 막을 내렸지만 이와 더불어 청왕조의 운명도 마지막을 치닫게 된다.

 

 

북경 이화원 / 출처 : 구글 이미지

 


서태후는 황궁인 자금성보다는 황실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을 좋아했고 나중에는 주로 이화원에 머물면서 인수전에서 정무를 돌보았다. 금나라 때인 1153년에 건조를 시작해서 명대를 거치면서 그 틀을 잡은 이화원은 건륭제가 곤명호를 파서 만수산을 쌓으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860년 제 2차 아편전쟁으로 그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1988년 서태후가 해군의 군비를 유용하여 다시 지었다. 정문인 동궁문을 지나면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인수전이 있고 그 북쪽에는 덕화원이 있는데, 이 3층짜리 건물이 바로 서태후가 경극을 관람하던 곳으로 서태후의 환갑을 맞아 은자 70만냥을 들여 지었다. 서태후가 이곳에서 경극을 관람한 날짜는 모두 262일이었고 어떤 해에는 365일 가운데 무려 40일을 경극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북경 덕화원 / 출처 : http://kohhanshin.tistory.com/


 

서태후는 경극 외에도 보석과 음식이며 의복에 이르기까지 살아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다. 보석 가운데는 비취를 특별히 좋아해서 몸에 걸치는 각종 장신구는 물론이고 식기에다 악기까지도 비취로 만들게 했다. 비취에 대한 안목과 식견도 뛰어나 보지 않고 만지기만 해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식사와 의복에서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한 끼 식사를 위해 만 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비용을 지출했고 의복을 보관하는 상자가 3000여 개에 이르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렸던 서태후도 단 한가지만은 어쩔 수 없었다. 자금성을 들어가는 정문인 오문의 한 가운데 문을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문은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었고 황후는 평생에 단 한번, 황제와의 결혼식에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다. 무려 48년 동안이나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서태후였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자금성을 피해 이화원에 공을 들였을 것이다. 지아비인 함풍제가 살았을 때, 어쩌면 한번도 애틋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경극 “패왕별희”를 보고 또 보면서 항우의 애첩 우희를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영화'패왕별희'(장국영)_Bygone love(옛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