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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러시아 음악의 향수, 소콜로프의 추억(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

by 블로그신 2016. 9. 19.



지난 세기 러시아의 무대예술은 세 번씩이나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먼저 세기 초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간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과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와 라흐마니노프가 발레와 음악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나 처음으로 세상 밖에 그 모습을 드러낸 철의 장막 안의 예술가들의 기량은 아득하게 높은 수준에 있어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세기말이 다가올 무렵 결국 소비에트는 무너졌고 예술가들의 삶도 맥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살기 위해 그들은 다시 한 번 나라 밖으로 나서야 했지만 전과 달리 이번에는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술가의 긍지와 예술을 향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음악원이 문을 열면서부터 해외의 저명 음악인들을 교수로 초빙했고 그 가운데는 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도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소콜로프 내외를 맞이해서 교수 아파트로 이동하던 중 해가 저물었기에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노라며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테이크라고 대답했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내외가 함께 말 한 마디 없이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러시아의 경제 사정이 어떤지를 실감할 수 있었고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들의 처지가 딱하기만 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소콜로프는 뛰어난 러시아 음악가로 러시아에 명성을 안겨준 화려한 독주자중 한명이다. 소련 국립 교향악단에 견습생 시절 당대 명지휘자 니콜라이 아노소프에 의해 파격적으로 발탁되어 주목을 받기시작하였다. 1963년 소련 연방 콩쿨에서 우승한후 전-소련 방송 교향악단과 소련 국립교향악단의 독주자로 활동하며 소련의 대표 클라리네티스트로 자리하였다. 1984년 소련 공훈 예술가로 추대되었다. 


블라디미르 소콜로프(Vladimir Sokolov)


식당을 나서면서 그는 갑자기 가르치게 될 학생들을 내일이라도 당장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개학까지는 여러 날이 남았고 여독이 풀리고 시차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는 전혀 문제 없다며 오히려 학교가 문 여는 시간이 몇 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그렇게 일찍 출근한 적이 없어 모른다고 했더니 그는 가능한 한 이른 시간에 학생들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아홉시에 연구실로 모이도록 연락하고 8시 반까지 데리러 오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다음날 약속 시간에 집으로 가 벨을 눌렀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문이 열렸습니다. 현관에는 낡았지만 깔끔한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한 소콜로프가 한 손에는 악기 가방을, 다른 손에는 악보 가방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운전석 옆자리에 탄 그는 너덜해진 악보꾸러미를 가방에서 꺼내 다시 정리를 하면서 중간 중간 악보의 음표들을 소리 내어 읽었고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몸까지 흔들어대는 백발의 이국 신사를 지나가는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신기한 듯 쳐다보았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마침내 학생들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소콜로프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내게 다가와 낮고 작은 목소리로 어떻게 악기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악기를 두고 다닐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당황하여 아마도 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라 그럴거라고 궁색한 대답을 했더니 부드럽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얼마든지 기다릴테니 각자 돌아가서 악기와 지금 연습하는 곡의 악보까지 챙겨서 다시 오라고 말하고는 이번에는 학교가 문닫는 시간을 물었습니다. 사실은 열두시로 알고 있었지만 얼떨결에 열시라고 말했고 그는 그 시간에 데리러 와주면 고맙겠다는 정중한 부탁을 했습니다. 약속한 열시에 노크를 하고 연구실 문을 열었고 거기에는 아침에 만난 학생들이 모두 붉게 상기된 얼굴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소콜로프만 아침보다 더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이 세상에 없고 단지 함께 했던 짧은 시간만 추억으로 남아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가 보여준 참 예술가이자 스승으로서의 모습만은 오늘도 흐트러지려는 나를 문득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지 않아 우리 발레 스타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톡 공연을 갈 일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수리를 못해 잿빛으로 색이 바래고 무대 바닥이 삐걱거리는 목조 극장을 가득 메운 남루한 옷차림의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했고 그 추운 날씨에도 신문지에 싼 시든 꽃을 들고 밖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가 출연자들에게 하나씩 전하면서 어떤 장면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또 얼마나 좋았는지 들려주었고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진정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을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알았습니다. 이처럼 러시아 어디를 가든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술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 예술가들을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를 그토록 놀라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았던 위대한 러시아의 예술가들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득 지휘자 페도세예프가 페테르스부르크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 첫 내한 연주회를 가졌을 때의 감동이 떠오릅니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얼마지 않아서였습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지휘자보다 나이가 더 지긋해 보이는 악장이 지휘자의 악보를 따로 챙겨 들고 나와 지휘대 위에 펼쳐놓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은 페도세예프의 손 끝을 따라 줄타기를 하는 듯 팽팽했습니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았고 주저앉을 듯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온 몸으로 흐느꼈지만 결코 소리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격변과 혼란 속에서도 페도세예프와 오케스트라는 그들의 음악과 본분을 잃지 않았고 음악가가 지켜야 할 긍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단원들은 악장을 따랐고 악장은 지휘자를 깎듯이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한 마음으로 차이콥스키를 사랑했습니다. 음악에도 국경이 있다는 걸 그날 깨달았습니다. 차이콥스키는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우리가 반드시 지키고 간직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것이 사람마다의 본분이고 책임이며 지켜야 할 긍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고 살아가는 까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