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레퀴엠과 리타나이 - 모든 영혼이여, 평화 속에 잠들라[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레퀴엠과 리타나이 - 모든 영혼이여, 평화 속에 잠들라

Posted at 2012. 4. 27. 21:14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4)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레퀴엠과 리타나이

 

 



레퀴엠은 안식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카톨릭 교회의 예배의식인 미사의 첫 순서를 인트로이트, 즉 입당송이라 하는데, 장례미사나 위령미사의 경우 입당송의 첫 구절이 레퀴엠 에테르남 도나 에이스 도미네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 첫 단어를 따서 레퀴엠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입당송의 첫 구절을 우리말로 옮기면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카톨릭 교회로부터 서양음악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수많은 작곡가들이 미사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고 당연히 그 중에는 레퀴엠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걸작들 가운데 모차르트와 베르디, 포레의 레퀴엠을 으뜸으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각의 개성과 사연이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7917, 회색 옷을 입은 낯선 이가 불쑥 모차르트를 찾아와 작곡을 의뢰하는 편지를 전했는데, 거기에는 발신인도 없었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모차르트는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던 데다가 다른 작품에 매달려야 하는 형편이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제시한 거금을 뿌리치지 못하고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마감을 재촉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지만 그는 레퀴엠에 점점 빠져들었고 아내 콘스탄체에게 이것이 마치 스스로를 위한 곡인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심신을 혹사한 그는 결국 끝을 보지 못한 채 그해 1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머지는 제자인 쥐스마이어가 완성을 했고 2년 뒤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다음 마침내 레퀴엠을 위촉한 장본인이 발체크 백작으로 밝혀졌고 아내의 기일에 그 곡이 마치 자신의 작품인 양 발표할 심산이었다는 것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화속 모차르트의 죽음과 장례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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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레퀴엠은 이탈리아의 문호 만초니를 기리기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1873년 오페라 아이다의 공연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중에 그가 존경해마지 않았던 만초니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 즉시 만초니의 일주기를 위한 레퀴엠을 작곡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5년 전 롯시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레퀴엠을 바칠 생각으로 다른 작곡가들과의 공동작업을 제안했었지만 그 때는 연주자들의 사정으로 초연이 무산되었고 악보만이라도 완성하여 영전에 헌정하려 했으나 이 또한 이루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혼자 그 일을 감당하기로 했고 마침내 일주기를 맞는 18745, 밀라노의 산 마르코 성당에서 그 자신이 직접 지휘대에 올라 110명의 오케스트라와 120명의 합창단을 이끌고 역사적인 초연을 성사시켰습니다.

 

 

종교적인 엄숙함보다 극적이고 역동적인 오페라에 가깝다는 베르디의 레퀴엠에 비해 포레의 레퀴엠은 정적이고 사색적이며 담담하기까지 합니다. 4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레퀴엠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나 곧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 곡은 결국 부모를 위한 레퀴엠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자신의 레퀴엠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알고 있었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레퀴엠은 죽음의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들어왔다. 아니 오히려 죽음의 자장가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내가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은 서글픈 스러짐이 아니라 행복한 구원이며, 영원한 행복으로의 도달인 것이다.”

 

 

 

아마도 얼마지 않아 천안함과 함께 조국의 바다 속으로 스러진 해군용사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분명 음악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혹시 모차르트나 베르디, 혹은 포레의 레퀴엠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도 분명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을 터이지만 이만큼 마음속에 깊이 와 닿는 것이 딱히 짚이지가 않는 까닭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작정을 하고 만든다면 일주기를 맞는 내년에는 우리가 만든 우리의 레퀴엠으로 마음을 모아 숭고한 영혼들을 받들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고 형제이면서 아들이기도 한 그들이 잠든 바다를 찾아 꽃 한 송이 던지며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캄캄한 바닷속이 외롭지 않도록 말입니다. 슈베르트의 리타나이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지금처럼 봄을 맞아 우리네 진달래꽃 같은 히스 꽃이 만발하면 마을 처녀들이 그 꽃을 꺽어 처녀로 죽은 이의 무덤에 뿌리며 노래와 춤으로 그 영혼을 달랬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리타나이라고 합니다. “모든 영혼이여, 평화 속에 잠들라고 시작하는 그 말 뜻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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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들어야 할 음악)[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들어야 할 음악)

Posted at 2012. 4. 20.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3)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들어야 할 음악)

 

 

 



해마다 연말이면 송년 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많은 공연들이 무대에 올려집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큰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등장하여 베토벤의 교향곡 9, ‘합창을 연주하는 경우가 흔한데요, 일본에서 건너온 풍습인 듯합니다. 왜냐면 서양음악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오히려 합창 교향곡을 신년에 연주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자유와 평등, 형제애가 실현될 미래를 염원하는 4악장의 가사를 따진다면 한 해를 정리하는 기분보다 새해를 열어가는 다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1231일 자정을 넘겨 끝나는 제야음악회도 있고 신년 벽두에 열리는 신년 음악회까지 있어 한 해의 끝과 시작이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훌쩍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라 즐겁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 해의 마무리와 시작을 혼자서, 아니면 정말 가까운 누군가와 나란히, 혹은 오붓이 둘러 앉아 조용하게 보내고 싶을 때 꼭 들을 만한 음악 한 곡을 소개드리려고 하는데요, 리하르트 시트라우스의 가곡 ‘Morgen, 내일입니다. 이 곡은 독일어로 된 시에 음악을 붙인 독일의 예술가곡, 'Lied 리트'입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 말로 된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이 있겠지만 특별히 독일 가곡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가사의 뜻과 음운, 심지어는 뉘앙스까지를 노래의 선율과 피아노 반주로 잘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슈베르트는 이전의 어느 작곡가보다 많은 가곡을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높은 차원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어 진정한 독일가곡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후 슈만이 그 뒤를 이었고 브람스와 볼프를 거쳐 리하르트 시트라우스에 이르러 독일가곡의 역사는 정점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오늘 들으실 모르겐은 바로 그 리하르트 시트라우스의 작품입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Und morgen wird die Sonne wieder scheinen

und auf dem Wege, den ich gehen werde

wird uns, die Glucklichen, sie wieder einen

inmitten dieser sonnenatmenden Erde...

 

Und zu dem Strand, dem weiten wogenblauen,

werden wir still und langsam niedersteigen.

stumm werden wir uns in die Augen schauen,

und auf uns sinkt des Gluckes Schweigen.

 

그리고 내일은 태양이 다시 빛나겠고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길 위에서

우리, 행복한 우리를 내일은 다시 하나 되게 하리라.

태양을 호흡하는 이 땅 위에서...

 

그리고 푸른 파도가 치는 넓은 바닷가로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내려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하여, 조용한 행복의 침묵이 우리 위에 임하리라.

 

 

담담하게 펼쳐지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시는 우리말로 그리고라는 뜻의 'und' 로 시작하고 있지만 노래에서는 그 앞에 짧지 않은 피아노 전주가 펼쳐집니다. 말하자면 'und' 속에 담긴 뜻을 피아노 소리로 풀어내는 것이고 이 부분이 이 가곡에서 가장 매력적인 점이기도 합니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시의 내용은 모두 앞으로 벌어졌으면 하는 희망과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und'라는 한 마디에 다 담고 있는 것이고 시에서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수많은 사연들을 피아노 전주가 들려주고 있는 셈입니다. 첫 부분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wieder'라는 말은 우리말로 다시라는 뜻입니다. 노래 가운데서도 길고 높은 음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듯합니다. 이 단어로 충분히 짐작했겠지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탄했다가 어느 순간 어려움이 닥쳐 서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그러다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강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천천히라는 뜻을 가진 ‘langsam'에서는 음악이 느려지는가 하면 내려간다는 뜻의 'niedersteigen'에서는 음높이도 점점 내려갑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면 처음에 나왔던 피아노 전주가 다시 나타나는데요,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조금씩 뜸을 들이면서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가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어느 바닷가로 나가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찬 겨울 바람에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을 함께 걸으면서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그러다 갑자기 넓게 펼쳐진 바닷가에 이르면 귓가를 때리는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십시오. 그 순간 시선을 돌려 서로의 눈을 마주본다면 그 눈 속에서, 서로의 미소 속에서 다가오는 새 해가 밝아올 것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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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우리나라 음악계의 대표 리더쉽 -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소통이다![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우리나라 음악계의 대표 리더쉽 -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소통이다!

Posted at 2012. 4. 17.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2)
우리나라 음악계의 대표 리더쉽

 

 

 

음악계의 원로 낙촌 "이강숙" 선생님

오늘은 우리 모두의 본보기로 우러를 만한 음악계 원로 한 분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까 합니다. 이 땅에 음악학의 씨앗을 뿌렸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총장으로 재직하며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교육기관으로 자리잡게 만든 장본인이죠. 낙촌 이강숙 선생입니다. 낙촌은 음악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선생의 호를 딴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을 만들어 창단 후 지금까지 이강숙 선생이 단장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아마추어 음악활동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추어 음악활동가들이 모인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금년은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음악이론 전공을 처음 개설한 지가 30주년이고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문을 열고 2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 선생에겐 물론 우리 음악계와 예술계에 모두 뜻 깊은 해입니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여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올랐지만 과감히 그 자리를 버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음악학에 도전했죠.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교수로 있다가 1977년 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로 부임합니다. 그리고 4년 뒤 이론전공을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학 전공과정을 열었죠. 수많은 저서와 논문, 평론으로 우리나라 음악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고 특히 첫 저서 열린 음악의 세계에서 제시한 열린 음악의 개념은 지금까지도 음악계는 물론 우리 사회 구석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KBS 교향악단

 

실천하는 학자이자 평론가로서 KBS 교향악단 초대 총감독을 맡기도 했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의 큰 업적은 한국예술종합학교입니다. 국립극장 옆에 방 한 칸을 얻어 간판을 걸었지만 그것 말고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었죠. 필요한 공간과 예산을 얻기 위해 정부 부처와 관계 기관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어야 했고 실체도 없는 학교에 오라며 최고의 교수와 예술가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뿐이었죠. 스스로도 그것을 살인적인 인내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기획예산처의 관계자들은 이강숙 총장이 나타나면 미리 자리를 피하기까지 했지만 아침 일찍 집 앞에서 기다리다 출근하는 담당자를 붙들고 사정하고 설득했는가 하면 당신같은 사람이 이런 중요한 자리에 있어서 우리나라 문화예술계가 발전하지 못한다며 소리치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죠. 그렇게 예산을 따고 공간을 얻고 직원을 늘렸고 해마다 하나씩 음악원,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까지 문을 열어 학교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소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서 나이 어린 직원에게도 반말로 대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명령이 아닌 설득으로 움직였습니다. 학습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연극원 교수들이 항의하며 대책을 요구하자 그들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눈을 감고 주기도문을 외었고 그 모습에서 진정성을 확인한 교수들은 학교의 입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도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하고 이해 당사자 모두를 대화로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는 총장을 두고 사람들은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 독재한다며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죠. 리더로서 잠시라도 함께 일했던 교수와 직원들은 끝까지 대소사를 챙기며 신의를 다했습니다. 학교에 있다 문화부로 발령이 난 직원이 있으면 새로 소속된 부서의 장에게 전화를 걸고 따로 만나 식사를 하며 각별한 애정과 부탁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직원이 다른 부서로 옮겨 가면 다시 그 부서의 책임자에게 전과 마찬가지로 관심과 배려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총장을 부를 때 외삼촌이라 호칭하여 존경과 애정을 표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선 부하직원을 질책하지 않고 늘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잘못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싶을 땐 따로 불러 호되게 야단쳤죠. 학교를 만들며 사람들을 만나는 식사와 술자리가 많아지자 소주와 맥주를 섞는 폭탄주를 애용했는데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것이 널리 퍼지면서 심지어는 다른 대학 교수들까지 예종주라 부르며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강숙 선생님의 첫 저서 "열린 음악의 세계"

 

8년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면서 이강숙 선생은 또 한 번 새로운 삶에 도전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간직했던 소설가의 꿈을 이루었죠. 뒤늦게 문단에 등단하였고 지금까지도 일체의 다른 활동을 사양하며 줄곧 집필에만 정진하여 이미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머지않아 새로운 장편소설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공부 잘하는 수재가 어느 날 슈베르트의 가곡을 알게 되면서 음악의 마법에 걸려 집안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고난의 길에 기꺼이 몸과 마음을 던졌습니다. 누구보다 일찍 학교 연습실에 나와 다른 학생들에게 연습실을 내주지 않으려고 날마다 점심을 굶었고 그 때문에 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다녀오기도 했죠. 그리고 또 한 번 몸을 돌보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다 말기 위암에 이르렀지만 의지와 집념으로 기적같이 일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이강숙 선생을 음악의 길로 이끌어 오늘의 보람과 업적이 있게 한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가운데 보리수를 들으며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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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이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는 까닭은? 자유로운 영혼을 논하기 전에 자유로움을 논해보자.[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이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는 까닭은? 자유로운 영혼을 논하기 전에 자유로움을 논해보자.

Posted at 2012. 4. 16. 11:2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1)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이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는 까닭은?

 

 



누구나에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만남이 있고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평생의 등불이 되기도 하고 그로부터 삶의 가치와 목표를 얻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초등학교 시절 경험했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의 독주회가 그렇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단아하고 담백한 소리에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마구 쏟아내는 감정이 아니라 안으로 깊이 들이마셨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흐느끼듯 뿜어져 나오는 꽉 찬 소리였습니다. 마치 찰지고 숙성된 반죽이 국수틀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였고 탱탱한 누에고치에서 윤기 흐르는 명주실이 뽑아져 나오는 듯한 소리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지금까지 단 한 번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사인을 받았습니다. 늘 건강하시라는 말을 건냈고 피곤하지만 밝은 표정으로 고맙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감동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일 년도 못되어 그만두었습니다. 연습을 게을리 한 탓이 크겠지만 단 한 번도 딱 맞는 음높이의 소리를 켜보지 못했고 그것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그렇게 섬세하고 어려운 악기라는 것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주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듣는 음악이 그들이 감내한 인고의 세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 어렴풋이나마 음악가들을 곁에서 돕는 일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로 김영욱에 관한 글과 음반을 찾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김승현 박사의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음악을 사랑했던 어머니 이현경 여사의 영향으로 집안에 늘 당대의 음악가들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위로 두 누님은 피아노를 쳤고 김영욱도 처음에는 피아노를 치다가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피아노가 치기 싫었고 크기가 작은 바이올린이 만만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때부터 놀라운 재능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육학년 때 내한했던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당시 커티스 음대 학장이었던 그의 초청으로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바이올린 지도자였던 갈라미언에게는 핑커스 주커만과 이차크 펄만,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경화와 같은 쟁쟁한 제자들이 있었지만 누구보다 김영욱을 아꼈습니다.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전제하에 제자들 중 김영욱을 가장 주목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의 기대대로 김영욱은 곧 세계무대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함께 협연했던 뉴욕 필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나는 왠만해선 천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영욱이야말로 진짜 천재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Conductor, Leonard Bernstein, 1918 – 1990>

 

 

그렇게 많은 연주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녹음한 음반은 많지 않습니다.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김영욱의 성격 때문입니다. 거듭 연주해서 짜깁기 하는 것도 그렇고 기계로 잘못된 부분을 조작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답니다. 독주보다는 실내악을 좋아해서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엑스, 첼리스트 요요마와 더불어 엑스 김 마 트리오를 결성했는가 하면 보자르 트리오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녹음은 독주 음반보다 실내악 음반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일체의 연주활동을 중지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어 더 이상 그의 음악을 무대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때 김영욱이 독일의 테트몰트 음대에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우연히 제 여동생이 그곳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동생을 보러 가는 길에 그를 찾아가 만나볼까 망설였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고 서울대 음대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차일피일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임을 알았기에 조금이라도 그를 어색하고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에 김영욱·홍승찬·김미진

그러다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 함께 음악예술감독으로 취임하신 분이 그토록 오랜 세월 만나 뵙고 싶었던 김영욱 선생이었습니다. 제 방 바로 옆방에 김영욱 선생의 방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제 방보다 그 곳을 먼저 찾아가 보았습니다. 책상과 책장만 놓여있는 텅 빈 방이었지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결혼식을 기다리는 새신부의 심정으로 첫 만남을 기다렸습니다. 조촐한 취임식이 있던 날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초등학교 시절 추억을 말씀드렸고 김영욱 선생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손사래를 치며 웃었습니다. 이후로 직책상 함께 하는 자리가 거듭되었고 예술의 전당을 떠나고도 여태껏 가끔씩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러면서 음악을 듣고 느꼈던 그대로가 그의 모습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이 또한 큰 기쁨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꾸밈없는 음악만큼이나 소탈하고 욕심없는 성품이었고 맛깔스런 소리마냥 고상하고 섬세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튀지 않고 은은한 색상이지만 흔하지 않은 질감을 가진 양복과 셔츠, 타이를 매지 않고 포켓에 꽂은 수건과 커프스 버튼과 같은 소품으로 포인트를 주는 감각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입니다. 스스로 음식 만들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그 나름 즐기는 여유와 식사 자리에서는 가급적 일과 관련된 대화를 피하는 것까지 모두가 그의 음악만큼이나 특별하면서 친근합니다. 차가운 듯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 까칠한 점이 한없이 그를 높이 바라보게 만듭니다.

 

 

 

마음 같아선 늘 가까이서 자주 보고 싶지만 그의 일상을 조금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바이올린을 그 무엇보다 좋아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은 그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이기에 그가 바라는 그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1. Miz-Dupont
    제가 정말 좋아하는 연주자, 김영욱님에 관한 글을 읽고 정말 반가웠습니다. 국내 연주가의 공연으로는 선생님 걸 제일 많이 본 것 같아요. 예전에 선재아트센터에서 보자르 트리오의 일원으로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공연하셨을 때가 기억나네요.. 요즘은 선생님의 연주를 들을 수 없어서 참 서운해요..
  2. 정이레
    김영욱선생님이 궁금하던 차에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고 더욱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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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위기에서 빛을 발한 하이든의 유머 / 위기에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 찾는 법[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위기에서 빛을 발한 하이든의 유머 / 위기에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 찾는 법

Posted at 2012. 4. 6.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9)
위기에서 빛을 발한 하이든의 유머

 

 


 

2009년은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구촌 곳곳에서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연주회가 바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였습니다. 해마다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나 폴카를 중심으로 무대를 꾸몄지만 2009년은 아무래도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나봅니다.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봉을 잡은 이번 연주회에서 빈 필은 고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든의 교향곡 454악장을 연주했는데, 이 곡의 배경을 모르고 연주실황을 보신 분이 있다면 아마도 어리둥절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빠른 악장이 느려지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악기를 들고 무대 뒤로 사라지더니 급기야 바이올린 연주자 두 사람만 남게 됩니다. 당황해서 지휘대를 내려와 단원들 사이를 드나들던 지휘자 바렌보임은 끝까지 남은 악장 곁에 나란히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까지 하며 비위를 맞추지만 그마저 끝내 자리를 뜨고 맙니다. 그렇게 어이없이 연주가 끝이 나지만 객석에 앉은 청중들은 시종 웃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지휘자와 단원들 사이에 충돌이나 불화가 있었나 싶지만 사실은 모두 사전에 연출된 해프닝입니다. 지휘자의 연기 말고는 원래부터 이렇게 연주해야 하는 곡입니다.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고별.

 

하이든 시대의 음악가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의 성이나 저택에 머물면서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작곡하거나 연주했습니다. 하이든을 고용했던 에스테르하치 후작은 여름이면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 기거하면서 더위를 피했는데 이 때는 하이든뿐만 아니라 하이든의 책임 하에 맡겨져 있었던 다른 악사들까지도 함께 가야 했습니다. 주인인 후작이야 당연히 가족들을 동반했겠지만 하이든과 다른 악사들은 그 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니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1772년 여름에는 무슨 일인지 예정되었던 두 달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도대체 돌아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악사들의 불만은 턱밑에까지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이든은 조심스럽게 후작에게 이런 사정을 전했지만 후작은 오히려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명을 내릴 뿐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하이든은 다른 방법으로 후작의 마음을 돌릴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주 만에 서둘러 완성한 곡이 바로 고별 교향곡이었습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악사들은 하나 둘씩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자리를 떠났고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이 사라지면서 음악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 때서야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차린 후작은 당장 떠날 차비를 지시하였고 마침내 그들 모두 기다리는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치 후작 가문과의 계약이 끝나 자유를 얻게 됩니다. 후작에게 봉사하던 30여년 세월 동안 하이든의 업적과 명성은 바다 건너 영국에까지 전해졌고 잘로몬이라는 흥행사의 주선으로 영국을 방문한 하이든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영국민들의 거국적인 환영에 놀라게 됩니다. 이를 계기고 말년의 교향곡들은 주로 영국에서의 연주회를 위해 작곡하였는데 그 가운데 놀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교향곡 94번에 얽힌 일화에서도 하이든의 유머와 여유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귀족들과 부호들이 비록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십분 이해하고 경청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을 즐기기보다는 사교를 위해서, 혹은 남에게 과시하려는 생각에서 연주회장을 찾는 사람들은 그 때도 많았나봅니다. 게다가 푸짐한 만찬에다 디저트까지 먹었으니 음악을 들으면 졸음이 쏟아졌을 텐데 특히 화려한 의상과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귀부인들이 더했던 모양입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예술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모멸감을 이기지 못해 분통을 터뜨려야 마땅하겠지만 하이든은 이런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하게 됩니다.

 

하이든 놀람교향곡 2악장

 

느린 2악장을 아주 조용하게 시작하다가 갑자기 팀파니가 가세한 모든 악기들이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내게 만든 것입니다. 당연히 객석에서 졸고 있던 수많은 청중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겁을 했을 터이지만 결국은 청중들이나 작곡자, 심지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 가지게 된 스스로의 위상이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의식했더라면 연주회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도 있었고 점잖게 핀잔을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고 누구와도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음악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은근히 빗대어서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심각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부드럽고 유쾌하게 만들었고 다른 누구와도 얼굴 붉힐 필요 없이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면서 또한 존경할 만한 처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너무나도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열악한 환경이, 그리고 또 하이든을 평생 괴롭혔던 부인의 잔소리가 그를 이처럼 단련시켰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역경을 이겼고, 그 시대 다른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늘 성실과 겸손을 잊지 않았던 하이든은 예기치 않은 위기마다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하는 2009, 우리 모두 하이든의 넉넉한 여유를 배워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유가 생겼으면 여유로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머를 찾아서 갈고 또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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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지휘자의 리더쉽 /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리더십을 보면서...[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지휘자의 리더쉽 /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리더십을 보면서...

Posted at 2012. 4. 3.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8)
지휘자의 리더쉽

 

 

 


얼마 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은인이었다는 사실이 백건우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은 지휘콩쿠르로 바뀐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콩쿠르에 참가한 열다섯 살 소년 백건우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혼자 연습하는 모습을 발코니 석에서 지켜보던 번스타인이 주최 측에 그를 도우라고 말해 줄리어드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25년이나 지난 어느 날 백건우가 우연히 당시 콩쿠르의 조직위원장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번스타인은 20세기 후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베를린 필의 카라얀과 지휘계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매스컴을 적절히 활용하는 등 실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 스타일과 이미지는 상반된 것이 많았지요. 카라얀이 평생 사적으로 단원들과 식사자리 한번 가지지 않았던 독선적인 카리스마였다면 번스타인은 부드러운 이미지와 설득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요청이 있자 이를 거절하는 모험을 통해 종신 총감독의 지위를 얻어낸 승부사였다면 번스타인은 언제나 타협과 배려를 통해 모두의 만족을 이끌어내려 한 코디네이터였습니다.

 

베를린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카라얀

 

종신을 고집하다 단원들과의 불화로 끝내 사임에 이르렀던 카라얀과는 달리 번스타인은 적절한 시기에 주빈 메타에게 뉴욕 필을 물려주고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세계 유수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돌아다니며 지휘했는데 특별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요. 빈 필과의 한 연주회가 끝나고 열광적인 박수와 앙코르 요청이 있자 무대로 걸어 나온 그는 갑자기 악장을 일으켜 악단을 이끌게 하곤 자신은 무대 옆에 조용히 섰습니다. 시트라우스의 왈츠가 흘러나오자 조금 전까지 어리둥절했던 청중들은 그제서야 번스타인의 의도를 알고 전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로 대답했습니다. 왈츠는 빈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잘 연주하는 음악이니 빈 필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지요. 번스타인의 성격이 그렇기도 하지만 다분히 보여주기 위한 제스추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팔방미인 번스타인도 뉴욕 필의 단원들과는 별로였답니다. 말이 많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언어학을 전공하고 책까지 냈으니 짐작이 가는 일이지요. 연습시간이 끝나고도 잔소리가 이어지면 고참들은 악기를 챙겨 지위자 앞을 지나쳤다는군요. 이처럼 제 잘난 맛에 사는 예술가들을 어떻게든 이끌어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야 하는 지휘자야 말로 리더중의 리더가 아닌가 싶습니다.

 

카라얀이 사임한 이후 베를린 필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독일의 자랑인 만큼 다들 독일인 지휘자인 클라이버를 예상했지만 성격 좋고 배경 좋은 이탈리아의 아바도를 선택했습니다. 카라얀에게 물린 단원들이 클라이버의 고지식한 완벽주의를 감당하기 싫었겠지요. 가능한 한 적은 시간을 연습하고 많은 자유시간을 누리고 싶었을 겁니다. 완벽이 아니면 타협을 하지 않는 클라이버에게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을겁니다. 음악 명문가 출신의 아바도에게는 후원하는 세력도 많아서 교향악단 운영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아바도가 이탈리아 마피아의 지원을 받아 베를린 필에 입성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황제 카라얀의 후임.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떠난 이후 지휘계에도 신유목시대가 왔습니다. 상임지휘자로 한 오케스트라를 도맡에 오래가기 보다 여러 오케스트라를 떠도는 지휘자가 많아졌죠. 잘하는 몇 개의 레퍼토리만 있으면 한참을 견딜 수 있고 단원들도 간섭을 덜 받으며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어 서로들 좋아합니다. 문제는 오케스트라의 개성이 희미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과거 유진 오먼디가 오랫동안 아끌었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그들만의 소리가 있어 필라델피아 사운드, 혹은 유진 오먼디 사운드라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점점 이런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지요.

 

 

 "오먼디 = 필라델피아 사운드" 라는 공식을 만든 헝가리 태생의 미국의 지휘자 유진 오먼디

 

신유목시대의 대표적인 지휘자 유형이라면 로린 마젤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가 지휘해야 할 오케스트라의 능력과 주어진 시간과 기타 여건들을 정확하게 판단하면 단원들에겐 그 안에서 가능한 만큼의 최선만을 요구합니다. 첫 만남과 연습, 마지막 리허설까지의 과정에서도 늘 유머와 칭찬을 잊지 않죠. 자신이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자신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따르는 부지휘자를 보내 연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당연히 단원들이 가장 좋아하고 신이 나서 하게 되니까 좋은 결과가 있고 또 그런 모습을 보는 청중들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현실적이면서 얄미울 정도로 영리한 리더쉽이죠.

 

 

즐거움을 추구했던 영리한 지휘자. 로린 마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휘자 두 분의 클래스를 비교하면 리더쉽의 상반된 두 가지 유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 분은 먼저 지휘봉을 고르고 손으로 쥐는 법부터 가르치고 다른 한 분은 전혀 설명이나 준비없이 대뜸 오케스트라를 앞에 놓고 악보대로 소리 나게 해보라고 시킵니다. 쉽게 생각하거나 혹은 너무 긴장해서 실패하는 게 당연하죠. 그렇게 기부터 죽여 긴장시키는 겁니다. 수업에서까지 발휘되는 지휘자의 리더쉽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리더쉽을 살펴보았지만 여러분에게도 생소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유형의 리더쉽을 발휘하고 계신지요? 그리고 그것이 과연 여러분의 조직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같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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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의 역사/유래-[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의 역사/유래-

Posted at 2011. 11. 17. 12:5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라고 하면 무반주 합창이나 중창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계실 겁니다.

관심이 있어 이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원래는 아 카펠라 a capella', 교회에 맞게’, 혹은 교회 풍으로라는 뜻인데 지금은 반주가 없이 부르는 중창이나 합창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처음에는 교회에 맞게라는 뜻이었다가 무반주 합창이나 중창으로 바뀐 까닭이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먼 옛날에는 교회에서 노래를 불러 신을 찬양하려면 반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또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음악이 아니더라도 무반주로 부르는 합창이나 중창을 아카펠라로 부르게 되었고 오히려 교회에서는 반주를 사용하는 음악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카펠라 이렇게 만들어졌다!

왜? 초기 유럽의 크리스트교 교회에서는 왜 악기로 반주하는 것을 금지했을까요?

한 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을 무렵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할 때 원형경기장에 맹수들을 풀어놓고 온갖 악기 소리로 흥을 돋우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그 후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포교하는 과정에서 이교도들의 종교의식과 기독교의 예배의식을 엄격하게 구분 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중세의 신학자들이 기록으로 남겨 전하고 있는 교리상의 명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등급의 음악이 있는데,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은 무지카 문두스 musica mundus', 즉 천상의 음악으로 신의 섭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지카 휴마나 musica humana’, 즉 인간의 음악으로 신의 섭리가 인간 세상에 구현된 것이고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 musica instrumentalis’, 즉 도구의 음악은 인간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물리적 현상의 소리로 가장 낮은 등급의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고귀하고 오묘한 신의 섭리와 그것이 구현된 자연의 조화는 미천한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사람이 보고 듣고 느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교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교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일진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악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가치 있고 진실 된 본질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도 나타낼 수도 없다는 것이고,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일장춘몽 헛것에 불과하니 지상에 살면서도 천국과 하느님만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손바닥의 상처를 보고서야 믿었던 제자 토마스를 나무라셨듯이 보지 않고 듣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교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교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이었겠지요. 하물며 인간의 손으로 만든 악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음악 해석의 변천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다 변하기 마련이고 종교의 교리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음악에 대한 해석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천상의 음악은 신의 섭리와 그것이 구현된 자연의 조화까지를 다 아우르는 개념이 되고 인간의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의 섭리요 자연의 조화를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구의 음악은 인간이 만든 도구, 즉 악기로 내는 소리인 만큼 여전히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변화를 거쳐 사람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에는 당위성이 부여되었지만 그 후로도 한참동안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은 교회에 수용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악기로 반주하는 성가나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지만 특정 교파 경우는 아직까지도 교회 안에서 노래로 찬양을 하거나 찬송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아카펠라의 황금기!

반주 없이 노래하는 합창이나 중창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노래 부르기를 즐겼는데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마드리갈이라는 양식이 가장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 무렵부터 악보 출판이 시작되어 그것이 또한 이런 음악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에 출판된 음악들의 상당수가 기록으로 남게 되어 지금도 합창단의 레퍼토리만큼은 바로크 시대를 앞질러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무반주 합창곡이 교회 밖에서 성행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놀라운 업적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을 꼽으라면 팔레스트리나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듯이 가톨릭교회가 안팎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홀로 소신을 꺾지 않고 위대한 걸작으로 교회음악의 권위를 지켰던 거장이었습니다. 요즈음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 사회에도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팔레스트리나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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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은 삼백년마다 새로 태어난다?[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은 삼백년마다 새로 태어난다?

Posted at 2011. 11. 3. 18:1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 음악이 300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 인간의 역사가 늘 되풀이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문명도 그러려니와 나라도 그렇고, 한 인간의 삶도 부침을 거듭하기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드물지만 그 가운데 어떤 일들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거듭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대표적으로 서양 음악의 역사가 그렇다고들 합니다. 음악의 기원을 따지자면 까마득한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기록으로 남은 음악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보편적인 역사라는 것이 문자 기록이 있고난 다음부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역사를 제대로 언급하자면 음악의 기록, 즉 악보가 남아서 그것을 지금에 와서 고스란히 되살릴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서양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레고리오 성가를 먼저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악보로 남아서 오늘날에도 재현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그의 재위 14, 즉 서기 590년부터 604년 사이 동안 유럽 각지의 성가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작업의 방대함을 생각한다면 교황이 시작했지만 그의 사후에 한참이나 지나서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라고 하는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름을 따서 붙인 성가 형태이다. 물론 교황께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모두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고, 그분께서 당시의 성가들을 정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그것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을 백년쯤 뒤로 생각한다면 700년경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약 삼백년쯤이 지나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에다 다른 선율을 붙여서 동시에 부르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또 삼백년쯤이 지난 천 삼백년 경부터는 교회 밖에서 부르던 노래나 악기로 연주하던 춤곡들까지도 기록으로 남겼는가 하면 리듬이라는 것이 음악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게 삼백년이 지난 1600년경 우리가 흔히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지금의 우리가 들어도 생소하기까지 한 현대음악이 탄생한 것이지요.
라틴어로 기록된 오래된 문헌을 보면 1300년경에 시작된 획기적인 새로운 음악을 아르스 노바신 예술이라 일컬었고 이전 300년 동안의 음악을 이와 구분하여 아르스 안티쿠아’, 구 예술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바로크라 부르게 된 1600년경의 음악도 라틴어로 누오베 무지케’, 신 음악이라 했고 20세기의 현대음악은 영어로 뉴 뮤직이라 부르고 있으니 결국은 1300년경부터 300년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음악들의 이름이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아르스 노바는 新 예술이었으며, 바로크는 新 음악이고, 현대음악은 New Music 이다.


| 묘한 것은 1300년대 이후 백오십년마다 또 다른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인데, 1450년경에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고 1600년과 1900년 사이의 1750년경에는 고전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시기가 바로 1750년대 이후의 백오십년입니다. 그 백오십년 사이에 고전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지금 우리가 즐겨 듣는 클래식 음악의 명곡들 대부분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클래식의 어원은 고대 로마시대의 계급을 가르키는 라틴어로 잘 정돈된, 품위있는, 영구적이며 모범적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후 예술사에서 고전주의 시대를 일컫는 말로 클래식이 사용되다가 지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클래식 음악이라 하는 영역까지 아우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이라면 당장 그 말이 가지는 의미에서부터 찾을 수 있겠지만 고전주의 시대 이후의 음악이 클래식 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까지 나라마다, 혹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던 서양의 음악이 고전주의 시대 이후 점점 하나의 질서로 통일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통합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질서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이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입니다. 그래서 그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1750
년은 다름 아닌 바흐가 세상을 떠난 해입니다. 한 시대의 종말과 한 시대의 시작을 한 작곡가가 생애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의 역사는 늘 위대한 작곡가의 전기로 채워져 있는 모양입니다. 어찌 보면 바흐는 바로크 시대에도 속하지 않고 고전주의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작곡가입니다. 속한다기 보다는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토벤의 위대한 업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바흐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고전주의 시대를 완성하여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대게는 그를 고전주의 시대의 작곡가라 하지만 좀 안다는 사람들은 낭만주의 시대의 선구자로 그를 자리매김합니다. 그러나 그도 바흐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시대가 아니라 두 시대를 다 포용했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1. 교수님 어제 계명아트센터에서 함께 있었던 최인규입니다.

    명쾌하고 즐거운 설명 갑사합니다.

    내년에 북구에서 뵙기를 희망하고 이건콘서트에서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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