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2)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일본의 작곡가 미요시 아키라가 우리나라를 다녀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를 위한 환영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전부터 그의 명성과 덕망을 알고 있었던 터라 흔쾌히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그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기까지 했습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작곡가의 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가 동경예대 교수이면서 동경도 문화예술회관 관장이고 그 밖에 몇몇 중요한 직함을 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찬 당일 서로들 명함을 주고받는 기회를 가지게 되자 엉뚱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부터 여러 번 경험한 바대로라면 그 역시 일본 사람이니 명함을 마치 자신의 분신인 양 소중하게 생각할 테고, 그렇다면 과연 그의 명함에는 어떤 직함이 박혀 있을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면 그가 가진 모든 직함을 다 넣은 명함일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칠 즈음, 불쑥 그가 내민 명함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냥 하얀 종이 위에 또박 또박 한자 정자로 쓴 검정 글씨는 단 두 줄, ‘일본예술원 정회원’, ‘미요시 아키라’가 전부였습니다.
일본 도쿄 출신으로, 현대음악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에게 피아노를 배운 미요시 아키라.
그 순간 잠시 머리가 멍해졌지만 곧 설명을 따로 듣지 않아도 여러 가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명함 주인의 단아한 인품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 예술원의 높은 위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동경예대 교수나 동경도 문화예술회관 관장보다 예술원 회원이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질적인 영향력보다는 상징적인 대표성을 우선하고 있었고 기능이나 역할보다는 명예에서 비롯된 권위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선배이자 동료이며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다른 예술가들의 인정을 받아서 주어진 자리이기에 소중하고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일본 예술원(출처 : doopedia)
우리나라에도 예술원이 있습니다. 예술원 회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각각의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고도 남을 만한 업적과 위상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예술원을 잘 모릅니다. 심지어는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누가 예술원 회원인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모른다기보다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명예와 권위에 대한 무감각이고 그로부터 비롯되어야 할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술계를 대표할 만한 또 다른 기구라면 문화예술위원회가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의회 제도에서 상원과 하원이 각각 예술원과 문화예술위원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예술원과는 달리 실질적인 기능과 역할이 중요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영향력도 크지만 과연 그에 상응할 만한 권위와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예술원] 현직 배우, 감독에게 배우는 도심형 예술학교(출처 : 씨네21)
한국예술원(KAI, Korea Arts Institute)은 1996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사립 영화 교육기관인 네오영화아카데미가 전신이다. 지난 15년 동안 영화아카데미로는 국내 최대인 1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이러한 많은 졸업생은 우리나라 영화계에 촘촘히 그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2010년 전주대학교 외 3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학교법인 신동아학원의 경영 참여로 예술원의 내실과 경영이 더욱 더 탄탄해지고 투명해졌다.
그래서 여러해 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대신하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처음 출범할 당시 초대 위원장이었던 김병익 선생에게 우리 문화계, 예술계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철학을 담은 문화예술헌장을 만들어달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원금을 나눠주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고 선생도 전적으로 동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헌장이 만들어졌다거나 앞으로 만들 거라는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화예술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도 갈등과 분열이 거듭되어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국민 모두가 마땅히 함께 추구해야 할 가치를 찾아서 서로 합의하고 널리 천명하지 못한 때문인데도 거기까지는 미처 마음이 닿지 않는 모양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돈이 아니라 가치와 철학, 명예와 권위라고 한다면 너무나 철없고 태평한 타령일까요?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외우고 또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이 머릿속에 또렷이 되살아납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억지로 머릿속에 구겨 넣느라 치를 떨었었지만 지금에 와서 뒤늦게 그 뜻을 하나하나 새겨보니 틀린 말이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 속 깊이 싸한 느낌이 밀려옵니다.
三善 晃:練習曲242b はずむ指 演奏:武田 真理
미요시 피아노 연습곡 242b번
그러고 보니 누구더러 어떻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라 나부터가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남들 따라서 허겁지겁 사느라고 결국은 진정한 나의 삶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음악가는 음악으로 평생을 살고 음악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우리 주변에도 분명히 미요시 아키라와 같은 생각으로 음악가가 있고 예술가가 있을 텐데 그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2008入賞者記念 上總 藍/三善 晃:波のアラベスク
<바다의 일기> 중 '파도의 아라베스크'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