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43)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작곡가 진은숙의 숨은 매력, 진정한 힘
지난 달 2일, 작곡가 진은숙이 호암상을 받았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지만 호암상 수상자 후보를 추천하라기에 작곡가 진은숙을 추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수상하지 못해 아쉬웠기에 이번 수상소식이 더욱 반가웠습니다. 2004년 음악계의 노벨상이라는 그라베마이어 작곡상을 수상했을 때나 2005년 작곡가가 살아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라고 하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음악상을 받았을 때도 이만큼 기쁘지는 않았습니다. 서울음대에 재학하던 시절에 벌써 국제 작곡 콩쿠르를 석권했고 이듬 해 독일로 유학간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세계무대에서 그 역량을 인정받으며 이런 저런 쾌거를 거두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그 만한 평가를 받지 못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2007년 대원음악상의 작곡상을 수상했을 때도 무척이나 흐뭇했지만 대상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우리들 가운데 자리 잡고 인정받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그의 삶을 존중하고 동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업적을 이루기까지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또 다른 힘이라면 솔직하고 무모하기까지 한 그의 열정과 자신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공은 달랐지만 음악대학 4년을 함께 보내면서 가까이서 늘 그를 지켜보았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는 잘 몰라서 그런가 보다 하며 지나갔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학교 수업에서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밥 먹고 술 마시며 나누었던 이런 저런 이야기로부터 얻었고 그렇게 수없이 많은 밤을 고민으로 지새웠습니다. 전공과 관련된 모든 수업에서 홀로 두드러졌던 그를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았고 더러는 시기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공포의 시창청음 시간, 선생님이 피아노로 치는 바흐의 첼로 모음곡 프렐류드를 딱 한 번 듣고 오선지에 고스란히 옮겨 적은 이는 진은숙 밖에 없었습니다. 남들은 2년을 꼬박 그 수업을 들었지만 그는 그날 이후 다시는 나타날 필요가 없었지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의 이런 남다른 능력은 절대로 타고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피아노를 알게 되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독학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선생님의 권유로 작곡 공부를 시작한 다음에도 악보 살 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악보를 빌려다 베껴야 했고 유독 좋아했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은 수백 번이나 베끼고 또 베꼈습니다. 여고시절 음악 감상실을 홀로 차지하고 앉아서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음악을 듣는 바람에 그곳을 관리하던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열쇠를 넘겨받는 특혜 아닌 특혜를 누렸고 당시의 LP 음반은 잡음이 나서 더 이상 틀 수 없을 정도로 혹사당했다고 하지요.
피아노도 누구보다 뛰어나 피아노 전공 학생들보다 반주자로 더 인기가 많았습니다. 처음 보는 곡도 바로 반주가 가능했고 심지어 곡의 핵심을 파악하고 풀어서 가르치고 이끌기까지 했으니까요. 언젠가 연습실에서 독일 가곡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반주로 슈베르트의 가곡 몇 곡을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약속하기를 나중에 함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로 독창회를 열자고 했었지요. 언젠가 우연히 그를 만나 그 때의 약속을 상기시켰지만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솔직하고 담백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지난 일은 지나가면 그저 그만이지 애써 돌아볼 까닭이 없는 것이고 그의 시선은 항상 앞을 바라보며 다가올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의 눈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보이는 것이지요.
언제나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오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토로했고 또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였고 너는 너였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했고 좋으면 좋다고 했지요. 남과 달라서 불편한 것도 없었고 나와 다른 남을 설득하거나 밀어내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잘난 척으로 여겨졌고 또 누구에게는 이기적이고 독단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지요. 그래도 그는 늘 씩씩했습니다. 모습도 한결같았지요. 키가 작아 언제나 높은 구두를 신었고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곳곳을 활보하고 다녔습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고 어떤 만남이나 대화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과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미친 듯이 열심히 했습니다.
그 때는 생각이 짧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요. 뛰어난 재능과 노력은 인정했지만 지나치게 솔직하고 너무나 자유로운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고 조금이나마 철이 들고 보니 전에는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들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도대체 소통이 안 된다고 난리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유롭지 못해서 서로가 다른 것을 이해하고 존중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것처럼 떠받드는 문화라는 것도 결국은 소통의 결과입니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아서 다른 것은 존중하고 같은 것은 공유하는 것이지요. 예술을 문화의 상징이나 표상으로 여기는 것은 예술이야말로 존중과 공유의 절정이자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존중하고 공유하면 공감하여 감동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정직하지 않고 자유롭지 못한 예술가가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여 감동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오래 전에, 그것도 겨우 4년을 함께 학교 다닌 인연으로 누군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언제나 앞과 뒤가 전혀 다르지 않았고 스스로 늘 거리낌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옛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당당하고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곡가 진은숙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합니다. 그 자신이 그런 것처럼 그의 작품도 거짓 없이 치열하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차세대 세계 음악계를 이끌 다섯 명의 작곡가들 가운데 하나로 그를 꼽았을 것입니다. 그런 평가와 업적을 운운하기 이전에 그를 생각하면 그냥 기분이 좋습니다. 생각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밥 한 끼 같이 하며 술잔을 권하고 싶지만 연락해서 따로 날을 잡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다가다 서로 보게 되면 혹시나 모를까 일부러 그럴 일은 아닌 까닭이지요.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뿌듯하고 흐뭇한데 그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손톱만큼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까닭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