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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작곡가 로시니] 누구라도 깜짝 놀랄만한 로시니의 세 가지 비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 21.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42)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로시니의 세 가지 비밀

 

오늘날 로시니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작곡가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 꽤 많은 오페라를 작곡하여 인기를 끌고 치부도 했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을 만한 작품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요. 그리고 일찌감치 작곡가의 길을 접고 남은 생애는 음식을 탐닉하며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술이나 고귀한 가치보다는 현실에 안주하여 적당히 즐기는 삶을 살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정작 그의 삶과 음악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대의 그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면서 큰 업적을 쌓았으며 음식 또한 그저 즐기는 차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의 삶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세 가지 비밀을 밝혀 숨겨진 그의 진면목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38곡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칸타타•피아노곡•관현악곡•가곡•실내악곡•성악곡 등 여러 방면을 많이 작곡했다. 이탈리아오페라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이탈리아 고전오페라의 최후의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비밀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로시니는 베토벤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베토벤보다 훨씬 더 유명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베토벤조차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교향곡 9합창의 초연을 비인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하려고 생각했을 정도였지요. 당시 비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로시니의 오페라에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들의 발길을 연주회장으로 돌릴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1792년 트럼펫 연주자인 아버지와 소프라노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시니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열두 살에 이미 현악사중주를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볼로냐 음악원에 입학했던 열네 살에는 최초의 오페라 도메트리오와 폴리비오를 작곡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열여덟 살에 결혼 어음으로 베네치아에서 데뷔를 했고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벌써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오페라는 비인과 파리를 거쳐 런던까지도 휩쓸어버렸지요. 사람들은 희극적이고 통속적인 오페라 부파에 열광했지만 스물네 살에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한 이후로는 대중들의 기대와는 달리 비극적이며 보다 심각한 오페라 세리아에 전념을 했고 파리에 정착한 이후로는 프랑스어로 된 오페라만 작곡하더니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1829년에 빌헬름 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오페라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모두 서른여덟 편에 이르러 70을 넘긴 베르디가 평생을 쉬지 않고 쓴 오페라와 맞먹는 숫자입니다.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세원)이 오페라 부파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세종문화회관 엠씨어터 무대에 올렸다.

 

 

로시니에 관한 두 번째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름을 붙인 요리 경연대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딴 프랑스 요리가 있는가 하면 당연히 요리책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작곡을 그만 둔 이후 미식가로서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유유자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음식에 있어서도 오페라만큼이나 꽤나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단순히 즐기는 차원을 벗어나 그것을 발휘하여 새로운 음식까지도 개발했던 것입니다. 특히나 송로버섯을 좋아해서 그가 파리를 떠나 볼로냐로 간 것도 그곳이 송로버섯 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그곳에서 송로버섯을 찾는 돼지를 키우기 위해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더 심하게는 로시니가 평생 세 번을 울었는데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세비야의 이발사의 초연이 관객들의 난동으로 엉망이 되었을 때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동했을 때에 울었고 마지막으로 센 강으로 뱃놀이를 가면서 가져간 송로버섯을 채운 칠면조 요리를 물에 빠트렸을 때 울었다는 우스개말도 있습니다. 프랑스 요리에서 알라 로시니는 모두 송로버섯을 사용한 요리들로 로시니의 단골 요리사들이 로시니의 조언을 듣고 개발한 메뉴라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 요리 가운데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요리로 꼽히고 있는 투르네도 로시니 스테이크는 거위간에 송로버섯을 곁들인 스테이크로 로시니와 당대 최고의 요리사 앙토넹 카렘이 함께 개발한 요리입니다.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waiire/15860805

 

 

이렇듯 오페라와 요리에서 모두 당대를 대표할 만한 업적을 쌓았던 로시니의 마지막 비밀은 삼십대 중반에 작곡을 중단한 이후 다시는 펜을 들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오페라를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던 것이지 다른 종류의 음악은 간간이 작곡을 했고 파리를 떠나 볼로냐에 가서는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쉰 살이 되던 해에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를 작곡했고 볼로냐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파리에 정착한 1855년부터 하나 둘씩 소품들을 작곡하여 1868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노년의 과오라는 제목의 소품집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포함된 소품들의 제목 가운데는 역시 엔초비’, ‘피클’, ‘말린 돼지고기’, ‘건포도와 같은 음식 이름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7월 혁명으로 야기된 사회의 참상을 고발하는 약탈바리케이트같은 작품은 물론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은 즐거운 기차여행의 재미있는 묘사와 같은 작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시니 - 스타바르 마테르 中 아멘 - 정명훈,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시니에겐 또 하나의 비밀이 있습니다. 직업 음악가로서 로시니의 첫 출발은 작곡가가 아니라 성악가였습니다. 십대의 어린 나이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노래를 불러야 했지만 지나친 혹사로 목소리를 다쳤고 어쩔 수 없이 반주자로 일하다가 지휘자가 되었고 그 경험과 기반을 바탕으로 작곡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노래에 관한 그의 안목과 식견은 누구보다 뛰어나서 가수들을 훈련시키는 그의 능력만큼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오페라는 가수들로 하여금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기교를 요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벨리니 도니제티와 함께 새로운 이탈리아 오페라의 황금기를 열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의 오페라 극장은 19세기 백년 동안의 이탈리아 오페라, 즉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와 그들을 계승한 베르디 푸치니의 오페라가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서곡-로시니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