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9)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1924년 1월 3일,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조지 거슈윈과 버디 드 실바가 당구를 치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조지 거슈윈의 형인 아이라 거슈윈은 1월 4일자 <뉴욕 트리뷴>지를 읽고 있다가 어느 대목에 시선이 머물렀다. ‘미국음악이란 무엇인가?(What Is American Music?)’라는 제목으로 펼쳐진 화이트먼의 콘서트 리뷰 기사였다. 마지막 단락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조지 거슈윈은 재즈 협주곡을 작곡 중이고, 어빙 벌린은 싱커페이션(당김음)을 쓴 교향시를, 빅터 허버트는 [미국 모음곡]을 작곡하고 있다.” “이봐, 조지, 이것 좀 보라구. 지금 재즈 협주곡 작곡하고 있는 것 맞아?”
다음날 화이트먼과 통화하면서 거슈윈은 화이트먼의 라이벌인 빈센트 로페스가 재즈와 클래식을 융합하는 자신의 실험을 표절해서 선수를 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거슈윈은 마침내 작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남은 시간은 단 5주. 거슈윈은 서둘러 작품을 썼다.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랩소디 인 블루]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1931년 거슈윈은 그의 첫 전기 작가인 아이작 골드버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기차 안이었다네. 열차 바퀴가 선로 이음새와 마찰하는 덜컹거리는 소리는 종종 작곡가들에겐 좋은 자극이 되지. 종종 큰 소음이 나는 가운데서 음악을 듣곤 하네. 거기서 갑자기 [랩소디 인 블루]의 구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번쩍 하고 떠올랐지. 마치 악보에 적혀있는 것 같았다네. 다른 주제는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 주제 선율은 이미 마음에 있었고 전체로서의 작품을 파악하려고 했다네. 그건 마치 미국을 묘사하는 음악적 만화경이나 다름없었지.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미국적인 기운이랄까. 블루스라든지 도시의 광기 같은 것 말일세. 보스턴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겐 어떻게 써야할 지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서 있었던 거야.”
미국을 묘사하는 거대한 음악적 만화경, 미국적인 기운
1월 7일 거슈윈은 작곡을 시작했다. 원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던 이 작품에 붙였던 제목은 ‘아메리칸 랩소디’였다. ‘랩소디 인 블루’라는 명칭은 형 아이라 거슈윈이 조지에게 제안한 것으로, 아이라 거슈윈은 미국의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전시회에서 [검은색과 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화가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작품) 등을 관람하고 명칭이 떠올랐다고 한다. 몇 주 뒤 거슈윈은 작곡을 마치고 화이트먼의 편곡자 퍼디 그로페(Ferde Grofé)에게 넘겼다. 훗날 [그랜드 캐년 모음곡]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는 그로페는 초연을 불과 여드레 앞둔 2월 4일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을 마쳤다. [랩소디 인 블루]는 1924년 2월 12일, 폴 화이트먼과 그의 오케스트라(Palais Royal Orchestra)가 ‘현대음악의 실험(An Experiment in Modern Music)’이란 제목으로 에올리언 홀에서 개최한 오후 콘서트에서 초연됐다. 초연은 화이트먼 밴드에 객원 현악 주자들을 보강한 가운데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연주로 진행됐다. 초연 악보에서 거슈윈은 화이트먼과 합의하여 1페이지 가량을 비운 채 진행했다. 그로페가 쓴 총보에도 ‘(피아니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연주를 계속한다’는 부분만 적어 놓았다. 이 공백 부분을 거슈윈은 즉흥으로 연주했는데,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피아노 즉흥 연주 부분을 따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초연 당시 [랩소디 인 블루]가 어떻게 연주됐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공연차 미국에 왔을 때 거슈윈은 자신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라벨에게 요청했다. 라벨은 “당신은 저절로 샘처럼 솟아나는 듯한 멜로디를 가진 사람이다. 일류의 거슈윈이 되는 편이 이류 라벨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고 거절한 일화도 유명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김연아 선수의 신들린 듯 눈부신 연기는 우리 모두의 넋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그 순간을 위해서 김연아 선수가 선택한 음악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끓었고 오래도록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바로 거쉬인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였지요. 오늘은 그 곡을 작곡한 조지 거쉬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이 막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던 시절,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인물이지요. 뮤지컬의 전성기를 살면서 주로 뮤지컬 작곡가로 뛰어난 업적과 걸작을 남겼지만 오히려 클래식 음악 쪽에서 더 크게 기억되고 있는가 하면 그가 만든 아름다운 히트곡들은 재즈의 스탠다드 넘버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거쉬인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와 함께하는 김연아]
조지 거쉬인은 1898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거쇼비츠는 유태계 러시아인으로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와 열심히 살았지만 늘 어려운 살림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정은 화목했고 자식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거쉬인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사서 집안에 들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이들이 길에서 로울러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집으로 들어섰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려 이상하다 했더니 둘째 아들 조지가 혼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아들을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는 궁색한 살림에도 그린이라는 피아노 선생을 찾아 아들을 맡겼습니다.
늦은 나이에 음악에 빠져든 거쉬인은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 일대를 일컫는 틴 팬 앨리가 미국 대중음악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 일대에는 노래 악보 출판사들이 밀집해 있었고, 작곡가와 작사가도 자연스럽게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 조지 거슈윈이 직업 음악가로 발걸음을 딛기 시작한 곳도 바로 틴 팬 앨리였다. 오늘날로 치면 음대 작곡 전공생이 아니라 가요 기획사의 소속 작곡가로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불과 열다섯 살 때인 1913년 여름, 뉴욕 북쪽 캣스킬의 호텔 리조트에서 임시 피아니스트로 주급 5달러를 받은 것이 그의 첫 음악 활동이었다. 이듬해에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틴 팬 앨리로 직행해서 유명 악보 출판사 레믹에 취업했다. 열일곱 살 때인 1915년 첫 자작곡인 「당신을 잃은 뒤」를 발표했고, 연말마다 울려 퍼지는「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작곡가로 유명한 어빙 벌린을 만나서 조수 역할을 제안받기도 했다.
거슈윈에게 음악은 이론적 바탕이나 학습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장에서 체험을 통해 습득하는 본능적인 것이었다. 악보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 출발해서 뮤지컬 극장에서 오케스트라의 휴식시간에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와 가벼운 오페레타의 반주자까지 다양한 경력을 쌓던 거슈윈은 스물한 살 때인 1919년 「스와니(Swanee)」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첫해 팔려나간 악보만 100만 권에 이르렀고 거슈윈이 그해 벌어들인 돈은 1만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 곡으로 가난과 작별하고, 곧바로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진출했다.
1922년 거슈윈은 당시 ‘재즈의 왕’으로 불리던 폴 화이트먼과 만났다. 해군 군악대를 지휘하다가 제대 후에 자신의 재즈 밴드를 이끌고 있던 화이트먼은 1924년 거슈윈에게 새로운 작품을 의뢰했다. 훗날 대표작이 된 「랩소디 인 블루」였다.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랩소디 인 블루가 등장한다]
바쁠 때는 불과 닷새 만에 새로운 뮤지컬을 써내야 했고, 제작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피아노 스케치를 쓰고 나면 전문 편곡자가 오케스트라 편곡을 대신 맡아주는 시스템에 익숙해 있던 거슈윈에게 본격적인 관현악곡은 부담이었음이 분명했다. 작곡가는 화이트먼의 제안을 가볍게 여기고 잊고 있었지만, 화이트먼은 “거슈윈이 재즈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다”고 발 빠르게 언론에 흘렸다. 자신의 관현악곡 작곡이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거슈윈은 단 5주 만에 작품을 써내려갔다.
1924년 1월 뉴욕 에올리언 홀의 초연 당일, 지휘를 맡은 화이트먼은 초조한 나머지 공연 취소를 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날의 초연은 “스트라빈스키의〈봄의 제전〉보다 위대하다” “재즈를 집안 부엌에서 꺼냈다”는 호평을 받으며 20세기 미국 음악사의 중요한 하루로 기록됐다. 뉴욕의 ‘히트곡 제조기’가 드디어 콘서트홀에 상륙한 것이었다. 거슈윈은 소설가 피츠제럴드가 ‘재즈의 시대’라고 불렀던 192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1925년에는 미국 출신 작곡가 가운데 처음으로 『타임』의 표지에 등장했다. 작곡가 스스로도 “재즈가 3분짜리 댄스용 음악만이 아니라 더욱 큰 주제와 의도를 지니고 있는 음악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랩소디 인 블루」이후, 거슈윈의 영역은 급속하게 콘서트홀로 확장됐다. 더불어 그는 체계적인 음악이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고, 1928년 프랑스 파리를 찾았다. 작곡가 라벨의 쉰세 살 생일파티에서 사사를 청했지만, 라벨은 오히려 “왜 일류 거슈윈이 될 수 있는데 굳이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하느냐”면서 말렸다. 작곡가 에런 코플런드의 스승이었던 나디아 불랑제 역시 비슷한 이유로 거절했다. 거슈윈이 이번엔 스트라빈스키에게 배움을 청하자, 스트라빈스키는 그에게 작곡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거슈윈이 “1년에 10만 달러쯤 된다”고 하자 스트라빈스키는 “그렇다면 나야말로 당신 제자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당대의 어떤 미국 작곡가도 거슈윈과 같은 국제적 명성을 얻은 적이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1928년 거슈윈은 음렬주의 계열에 있던 알반 베르크와 빈에서 만나 교유했다. 베르크가 현악 4중주를 위해 편곡한 〈서정적 모음곡〉을 감상한 뒤, 이번엔 거슈윈의 작품을 청하자 그는 수줍게 사양했다. 유럽에 대한 미국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대중음악의 겸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베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거슈윈 씨, 음악은 음악일 뿐입니다.”
거슈윈은 결국 1932년 당시 러시아의 음악이론가로 이름 높던 요세프 쉴링거를 만나서 뒤늦게 체계적인 공부에 들어갔다. 역시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블라디미르 드로즈도프는 “거슈윈은 20대부터 이미 유명 인사였지만, 언제나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알았고 공부하려는 의지와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라고 평했다.
1926년 뒤보즈 헤이워드의 베스트셀러 소설인 『포기(Porgy)』를 접한 거슈윈은 당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이사회 의장이었던 오토 칸에게 ‘대형 재즈 오페라’를 써달라는 위촉을 받자 이 작품을 오페라로 쓰기로 결심했다. “소수의 교양인보다는 다수에게 호소하겠다”고 마음먹은 작곡가는 단짝 작사자인 형 아이라 거슈윈, 원작자인 헤이워드와 함께 작업한 끝에〈포기와 베스〉를 내놓았다. 「서머타임」「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It Ain't Necessarily So)」 같은 명곡들이 이 오페라를 통해 탄생했다
작품이 단지 멜로디 좋은 곡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거슈윈은 이렇게 답했다. “그 노래들이 좋은 곡인 한, 나는 그 곡들을 쓴 것이 부끄럽지 않다. 베르디 오페라의 대부분은 ‘히트송’을 담고 있으며, 〈카르멘〉 역시 히트곡의 다발이다.” 『엉클 톰의 오두막집』과 마찬가지로 이 오페라 역시 백인들이 바라보는 착한 흑인 상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전설적 소프라노 레온틴 프라이스를 비롯해 많은 흑인 가수들이 이 작품을 통해 당당히 오페라극장에 설 수 있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었다.
거슈윈의 관현악은 때때로 구성적인 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는다. 이를테면 작곡가이자 비평가 버질 톰슨은 〈포기와 베스〉를 본 뒤에 “거슈윈은 오페라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하지만 굳이 단점을 꼬집기보다는 매력에 주목하는 것도 방법이다. 작곡가가 어린 시절 흠모했던 벌린의 말처럼 “거슈윈은 내가 아는 유행가 작곡가 가운데 클래식 음악 작곡가가 된 유일한 경우”였던 것이다.
‘크로스오버’라는 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그는 클래식과 대중음악, 오페라와 뮤지컬 등 장르 사이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영역 파괴에 대한 문제의식을 촉발시켰다. 작곡가는 “과거 다른 나라의 위대한 음악은 언제나 민속음악에 기반해왔다. 재즈, 래그타임, 흑인 영가와 블루스, 남부 산악 지역의 노래들과 카우보이의 노래 역시 미국 예술 음악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거슈윈은 “나는 100년 동안이나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선율들을 갖고 있다”고 자신했을 만큼 타고난 ‘멜로디 메이커’였지만, 서른아홉 살의 이른 나이에 뇌종양으로 타계했다.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거슈윈은 20여 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4편의 영화음악, 오페라 〈포기와 베스〉, 「랩소디 인 블루」를 비롯한 20여 편의 관현악곡, 387곡의 대중적인 히트곡을 남겼다. 거슈윈과 쇤베르크는 어쩌면 가장 거리가 먼 작곡가인 듯 보인다. 하지만 미국 망명 이후 거슈윈의 절친한 테니스 친구가 되었던 쇤베르크는 작곡가가 타계한 뒤 이런 추도사를 남겼다.
많은 음악가들이 거슈윈을 진지한 작곡가로 여기지 않는다. 역사가 그를 요한 슈트라우스와 오펜바흐, 레하르 같은 가벼운 작곡가로 볼지, 드뷔시와 브람스, 푸치니 같은 진지한 음악가로 판단할지 나 역시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예술가이며 작곡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표현했으며 그 아이디어는 항상 새로웠다.
본명은 Jacob Gershvin. 1898. 9. 26 미국 뉴욕 브루클린~ 1937. 7. 11 할리우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중적인 작곡가.
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음악을 썼지만, 예술음악의 기교와 형식을 대중음악·재즈의 기법과 다양하게 섞어놓은 그의 다른 작품들도 뮤지컬 음악 못지 않게 중요하다.
거슈윈은 러시아계 유대 이민 거쇼비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6세 무렵 연주현장에서 처음으로 재즈를 들었다. 어려서부터 연주회에 자주 갈 수 있었으며 12세 때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작곡가로 성공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작곡기법을 계속 넓혀 나갔으며, 한때 개성이 뚜렷하고 진보적인 미국 작곡가 헨리 코웰과 윌링퍼드 리거에게 배웠다. 그후에는 수학에 바탕을 둔 작곡으로 유명한 작곡가이자 이론가 조지프 실링거에게 배웠다.
1914년 제롬레믹음반회사에서 광고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전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년 뒤 최초로 음반녹음된〈When You Want'Em You Can't Get'Em〉을 출반했다. 그 노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몇몇 저명한 브로드웨이 작곡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오페레타 작곡가인 지크문트 롬베르크는 〈The Passing Show of 1916〉에 거슈윈의 노래를 1곡 포함시켰다. 그동안 계속 피아노·화성·관현악법을 공부했으며, 연습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1918~19년 거슈윈의 노래 중 여러 곡이 브로드웨이 공연에 포함되었고 〈신바드 Sinbad〉에서는 가수 엘 졸슨이 부른〈스와니 Swanee〉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맨 처음 쓴 뮤지컬은 〈라, 라 루실 La, La Lucille〉(1919)이었다. 1920~24년 1년에 1편씩 공연된 〈조지 화이트의 스캔들 George White's Scandals〉에 수십편의 노래를 제공했는데 이 곡들은 모두 1920년에 작곡한 것이었다. 1922년 공연된 〈조지 화이트의 스캔들〉을 위해 단막 오페라 〈우울한 월요일 Blue Monday〉을 작곡했다. 나중에 〈135번가 135th Street〉로 이름이 바뀐 이 곡은 〈스캔들〉의 지휘자이자 악단장인 폴 화이트먼의 주의를 끌었으며, 그는 거슈윈에게 재즈 양식으로 된 교향곡 1편을 의뢰, 그 유명한 〈랩소디 인 블루 Rhapsody in Blue〉(1924)를 탄생시켰다. 이 곡은 원래 재즈 밴드와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으나 화이트먼의 편곡자인 작곡가 페르드 그로페가 여러 차례 관현악곡으로 재편곡했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1924년 뮤지컬 코미디 〈숙녀여, 선량하라 Lady, Be Good〉로 브로드웨이에서는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작품에는〈환상적 리듬 Fascinating Rhythm〉·〈오, 숙녀여, 선량하라 Oh, Lady, Be Good〉(이 작품을 위해 작곡했으나 포함되지는 않음)·〈내가 사랑하는 남자 The Man I Love〉등의 노래가 있다. 이 뮤지컬은 또한 거슈윈과 친형제인 서정시인 아이라 거슈윈이 처음부터 쭉 함께 작업해서 눈길을 끌었다. 거슈윈 형제는 그후 10여 년 동안 브로드웨이 극장가에서 일급 노래 작곡팀이라는 명성을 쌓았다. 그들은 〈발끝 Tip-Toes〉(1925)·〈오 케이 Oh, Kay〉(1926)·〈밴드를 시작하라 Strike Up the Band〉(1927, 개작 1930)·〈우스운 얼굴 Funny Face〉(1927)·〈들뜬 여자 Girl Crazy〉(1930) 등 뮤지컬을 함께 제작했으며 그중 〈그대를 위해 노래부르리 Of Thee I Sing〉(1931)는 미국 정치체제를 대담하게 풍자한 것으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다. 거슈윈의 노래는 그의 삶을 다룬 〈랩소디 인 블루〉(1945)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영화에도 쓰였다. 듀보즈 헤이워드의 소설 〈포기 Porgy〉에 기초한 최고 야심작인 오페라 〈포기와 베스 Porgy and Bess〉(1935)는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오페라 대본작업은 아이라 거슈윈과 같이 함). 그는 이 작품을 쓰기 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연안의 한 섬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그 지역 흑인들의 음악과 관습을 익혔다. 그러나 이 작품은 행상들이 떠드는 소리를 빼고는 민속적 선율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민속 오페라'라기보다는 본격 오페라에 가깝다. 그는 이 오페라에서 원하는 극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대중가요 양식, 재즈 리듬, 오페라 아리아, 특유의 관현악법을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사용했다.
그의 고전 작품들로는 〈피아노 협주곡 F장조 Piano Concerto in F Major〉(1925),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Preludes〉(1926), 교향시풍의 〈파리의 아메리카인 An American in Paris〉(1928),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위한 〈두번째 랩소디 Second Rhapsody〉(1931)가 있다.
그는 머리카락이 유난히 많이 빠져 고민했습니다. 머리카락을 나게 한다는 냉장고만한 기계를 사서 하루 30분씩 치료를 받았지만,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면 벌써 우리나라 곳곳에도 ‘머리카락방’이 있었겠죠?
그는 고무 타는 냄새를 느끼면서 ‘정신 줄을 놓는’ 일을 되풀이해서 병원에 실려 가곤 했습니다만, 그때마다 의사는 “스트레스 탓”이라며 돌려보냈습니다. 거슈인은 계속 쓰러지다가 마침내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39세의 한창 나이였습니다.
거슈인은 늘 “내 머릿속에는 100년 동안 악보에 옮겨 적어도 될 만한 곡들로 꽉 차 있다”고 자랑했지만, 더 이상 그 곡들을 악보로 적을 수 없게 됐습니다. |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