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7)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피아노의 전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
지금까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연주회를 보고 또 들었지만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의 독주회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연주회는 달리 없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1994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 때의 느낌과 기억은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고 또렷합니다. 여든을 코 앞에 둔 나이의 이 거장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를 찾았고 바로 다음해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97년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유별난 요구를 받아들여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객석과 무대의 모든 조명을 끄고 단 한 줄기의 빛만이 피아노 건반과 보면대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한 공연장에서 모든 시선과 감각은 피아노에 집중되었고 마치 코 앞에서 연주를 듣는 듯한 착각 속에서 모든 청중들은 홀린 듯이 리히테르의 연주에 빨려들었습니다. 어느 일간지에 비평을 쓰기로 하고 찾아간 자리였지만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그 날의 연주는 강렬했습니다. 잠시 최면에 걸렸다가 다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리고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감히 뭐라 할 말이 없으니 차라리 지면을 비워서 경의를 표하자‘고 말했습니다.
그의 연주는 잘하고 못하고를 따질 경지가 아니었습니다. 전기 작가인 브뤼노 몽생종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나는 청중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그저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연장에서 홀로 담담하게 피아노를 쳤을 뿐이었지만 그 소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습니다. 20세기의 수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거장으로 칭송되었지만 리히테르는 그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누구와 비교해서 더 돋보이고 잘난 것이 아니라 그 누구와도 전혀 다른 그 만의 철학과 고집이 아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마치 올림푸스산 꼭대기에 제우스가 사는 것처럼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철의 장막이 걷히면서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던 소비에트의 연주자들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발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로 군림하게 되는데 바이올린의 오이스트라흐와 첼로의 로스트로포비치가 그랬고 피아노에서는 에밀 길렐스가 먼저 지존으로 등극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열광하는 미국 청중들에게 길렐스는 ‘리히테르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을 했고 드디어 1960년에 미국에 나타난 리히테르는 그 이전의 어떤 연주자들도 얻지 못했던 열광적인 반응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곧 전 세계에 그의 존재를 알리면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그만의 신화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입신의 경지를 이룬 최고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는 출발부터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조기교육이 절대적인 음악 분야에서 그는 20대가 다 되도록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으니 후일 그가 거둔 성공은 기적과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이었던 아버지는 빈 음악원을 다녔고 그리그와도 친분이 있었을 만큼 촉망받는 음악가였지만 법이 금지하는 결투를 벌인 탓에 우크라이나로 도망을 가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러다가 그에게서 배우던 제자와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바로 리히테르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잠시 피아노를 배웠으나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그 후로는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와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혁명 이후 오데사로 이주한 리히테르는 음악보다 문학과 미술, 영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듯했지만 열네 살에 그곳의 한 해군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열다섯 살에는 이미 엄청난 양의 오페라 악보를 통달하여 관현악 총보를 피아노로 칠 수 있었고 열여섯 살에 리스트의 난곡들을 정복했습니다. 열여덟 살 무렵에는 오페라 하우스에 취직하여 발레와 오페라의 연습 반주자로 일했고 이듬해인 1934년에는 오데사의 기술자 클럽에서 쇼팽의 곡으로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전에 한 번도 피아노의 기본 레퍼토리를 배우지 못했던 그로서는 실로 대담한 시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렵 오데사에서 불거졌던 반독일정서로 말미암아 리히테르의 가족들은 모스크바로 떠났고, 거기서 그는 에밀 길렐스에서부터 라두 루푸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대표하는 거장들을 길러낸 20세기 최고의 피아노 교수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리히테르는 벌써부터 오데사에서 네이가우스의 연주를 듣고 감동한 바 있었지만 1937년에야 처음으로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은 네이가우스 역시 리히테르의 재능에 감탄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리히테르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출신이면서 독일인 아버지를 두었던 네이가우스는 이후 리히테르의 삶과 음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프로코피에프에게 그를 소개하여 1940년 11월에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소나타 제6번》을 초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모스크바에서의 데뷔 연주회였습니다. 1941년에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리히테르의 아버지는 독일계라는 이유로 비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마저 독일로 떠나버리자 네이가우스는 리히테르에게 있어 아버지와도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942년부터 그는 전시하의 모스크바에서 연속적으로 리사이틀을 열었고 1945년에는 전(全) 소비에트 연방 음악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습니다. 1947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금메달을 받았고 1950년에는 스탈린상을 수상하면서 동유럽권으로 연주 여행을 시작하여 1954년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서 '현대의 리스트'라는 격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남보다 한참이나 늦게 시작하여 하나 둘씩 끝없이 쌓고 또 늘려 간 그의 음악세계는 그 누구보다 넓고 또 깊습니다. 하나도 중복되지 않는 연주곡목을 가지고 지금 당장이라도 80개의 서로 다른 독주회를 만들 수 있다는 그의 방대한 레퍼토리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경지입니다. 프로코피에프와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 리스트와 쇼팽,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베토벤과 같은 정통 레퍼토리에다가 독일과 프랑스의 바로크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 인상주의 음악과 현대음악까지를 모두 아우를 만큼 엄청난 규모입니다. 게다가 실내악 활동도 왕성하게 펼쳐 소비에트 시절을 함께 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므스티슬브 로스트로포비치와의 트리오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최고의 앙상블로 꼽히고 있고 더 나아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페터 슈라이어와 호흡을 맞춘 독일가곡의 반주 역시 역사적인 명연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젊은 음악가들과도 자주 어울려 피아니스트 졸탄 코치슈,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 등과 듀오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올레그 카간, 첼리스트 나탈리 구트만,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와 앙상블을 이루어 자주 연주를 했고 보로딘 사중주단과도 많은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말년에 이르러 독주회마다 항상 연주회장 안의 모든 불을 끄고 보면대와 건반을 비추는 한 줄기 조명만을 고집하여 기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남다른 그의 기행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해외 연주를 갈 때면 늘 호텔방 침대 바로 옆에 피아노가 있어야 했고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를 꺼리면서 자동차 운전을 즐겼습니다. 그러니 모스크바를 떠나 해외로 나갈 때면 늘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여러 날을 달려야 했고 도중에 머물게 되는 도시나 마을마다 예정에도 없던 무료 독주회를 열어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흔 한살이 되던 1986년에는 자동차 한 대로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외딴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레닌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이어진 긴 여정 동안 무려 91회의 연주회를 여는 강행군을 펼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교회나 강당이든 어떤 곳도 마다하지 않았고 낡은 피아노는 물론 심지어 조율이 되지 않은 피아노도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은 시베리아의 어떤 마을에서 한 소년이 리히테르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음악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오늘날 세계 최고의 바리톤 가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드미트리 흐브로스토프스키라고 합니다. 1995년 캐나다 뤼벡에서의 연주를 끝으로 은퇴를 한 리히테르는 2년 뒤인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살아서 늘 함께 음악과 우정을 나누었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에밀 길렐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의 거장들이 묻힌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동료들이 하나 둘 자유와 부를 쫓아 서방 세계로 망명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조국 러시아를 지켰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조국에게 받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는 대답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돌려주기 위해 끝없이 조국 산천을 떠돌며 수없이 많은 동포들을 찾아서 음악으로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독일의 이성과 러시아의 감성을 모두 지녔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극과 극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기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내친 조국마저 가슴으로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구에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뜨거운 가슴을 감추고 한음 한음에 혼신을 힘을 다하며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리히테르는 다른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혼자만의 고집과 뚝심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불멸의 크리에이터였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