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구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Posted at 2017. 3. 23.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현대음악은 말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음악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대게는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이 모색하여 시도하고 있는 새롭고 실험적인 음악들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등장해서 유명해진 존 케이지의 “433란 곡은 아시다시피 433초간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곡입니다



악기에서 나는 소리만이 음악이 아니라 청중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물론 침묵의 순간 흐르는 시간 그 자체도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곡에서는 악기를 부수거나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음악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너무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것을 현대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조차 현대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때문에 연주회를 통해 들을 기회가 많지 않을 뿐더러 음반으로 만들어지는 일은 더더욱 드뭅니다. 그런데 1991년 이런 통념과 편견을 깨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폴란드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Henryk Gorecki)의 교향곡 3번을 녹음한 음반이 빌보드 차트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31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이 음반은 순식간에 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현대음악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작곡가인 구레츠키는 단순하면서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음악을 추구했고 이 작품 또한 그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곡은 오래 전부터 폴란드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성가와 민요의 가사와 선율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향곡이라고 하지만 3개의 악장 모두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사의 단어와 구절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이 작품의 매력은 음악보다 오히려 가사에 담긴 내용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얼핏 구레츠키가 추구한 보편적인 설득력이 슬픔이라는 정서에 모아지면서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Henryk Górecki


 

1악장의 가사는 폴란드의 수도원에 전해지고 있는 성십자가 탄식 기도문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나의 아들,

내 몸에서 태어난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상처를 나에게 나누어 다오.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너를 품고 있었던,

진심으로 너를 돌보았던 어미에게

너의 목소리라도 들려주어 기쁘게 해다오.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기막힌 심정이 절절히 녹아 있는 곡이죠. 세상의 어머니들이라면 가슴이 먹먹하게 듣게 되는 곡입니다.

 



다음 2악장은 2차 세계대전의 악명 높은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18세의 유태인 소녀가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에 남아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벽에 쓴 낙서를 가사로 삼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먼저 떠나가지만 엄마 울지 마세요.

고결하신 성처녀 아베 마리아여 저를 도와주소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토비체에서 공부를 하고 그곳 국립음악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구레츠키는 아마도 이 역사의 비극적인 현장에서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악장은 폴란드의 또 다른 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같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던 폴란드는 숱한 전쟁에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젊은 목숨들이 희생당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3악장에선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절한 슬픔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디로 갔는가 내 사랑하는 아들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내 아들은 잔인한 적에게 죽임을 당했겠지

, 너 몸쓸 인간아 가장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나에게 말해다오,

왜 내 아들을 죽였는지

이제 다시는 아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으니

내가 울고 울어 내 늙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강을 만들어도

그들은 내 아들을 살리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국경을 넘고 인종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의 마을을 움직이는 감정은 슬픔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면 누가 뭐래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공감하여 마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작곡가 구레츠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슬픔은 형벌이자 동시에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슬픔은 오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인생의 일부로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지나간 슬픔들, 그리고 앞으로 부딪혀야 할 또 많은 아픔과 슬픔들을 구레츠키의 슬픔의 노래로 그랬듯이 우리 또한 이겨내고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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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지휘자는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이탈리아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아키야마 고지 감독[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지휘자는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이탈리아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아키야마 고지 감독

Posted at 2017. 3. 21.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2014년 일본 프로야구의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한 재팬 시리즈의 패권은 퍼시픽 리그의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재팬 시리즈를 석권하자마자 우승팀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아키야마 고지 감독의 사임 소식이 들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 까닭이 투병중인 아내의 병간호 때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일본 열도는 물론 지구촌 곳곳에 잔잔한 감동이 멀리 퍼져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선수들이 전하는 바로는 일본시리즈를 앞둔 선수단 회식 자리에서도 조금도 힘들거나 흔들리는 내색 없이 승패의 책임은 내가 질테니 여러분은 스스로 어필하는 무대가 되길 바란다는 말로 선수들을 감싸고 격려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으니 문득 40년 전에 있었던 비슷한 일이 떠오르면서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의 남다른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1984, LA 필의 음악감독이었던 이탈리아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역시 아키야마 고지와 같은 이유를 들어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내를 돌봐야 하기에 더 이상 음악감독직을 수행할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단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아내가 나를 돌봐주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내를 돌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지휘자로서 이제 막 정상에 올라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에 그의 이러한 결정은 당시에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뭉클한 감동은 그로부터 11년이 더 지난 1995,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가지 밀라노 근교에 살면서 간병에 전념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LA 필의 감독이었던 당시 줄리니가 부지휘자로 발탁하여 기회를 주고 길을 열어주었던 이가 바로 정명훈이었고 이후로도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정명훈은 중요한 순간마다 그를 찾아 의견을 구했다고 합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줄리니 덕에 빛을 본 지휘자라면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1956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연주하기로 예정되어있었던 줄리니가 갑작스런 병을 얻어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이팅크가 그를 대신하여 지휘대에 올랐고 그 때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해에는 네델란드 방송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1961년 마침내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가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는 동안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장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 그가 물러나고 한참이 지난 2008년 드디어 세계적인 음악잡지 그라모폰이 세계적인 음악평론가들의 투표로 선정한 세계 최고 교향악단 톱20”에서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젖히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하였고 지금까지도 그 위치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Cherubini - Requiem in C minor


이렇듯 그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오늘이 있기까지 기여를 한 여러 가지 역할을 살펴보면 당장은 음악적인 능력에서의 공헌이 두드러지겠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그 못지않게 단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결과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 때 오케스트라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단원들의 수를 줄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 했을 때 하이팅크는 그들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받는 자신부터 먼저 해고하라며 단호하게 맞서서 단원들을 지켜냈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라얀이 죽고 그 뒤를 이어 누가 베를린 필에 입성하게 될 지를 두고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수 많은 지휘자들이 거론되었습니다. 한다하는 지휘자들의 이름이 다 오르내리다 결국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택되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베를린 필 단원들이 뜻을 모아 그들의 새로운 리더로 영입하려 했던 지휘자는 다름 아닌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이팅커가 지휘자라면 누구도 뿌리치지 못할 이 달콤한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너무 많으니 더 젊고 의욕적인 지휘자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까지 덧붙였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아니지만 당시 그 과정에 참여했던 베를린 필 단원에게 직접 들은 것이고 그 자리에 다른 단원들도 함께 있었으니 아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음악적인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그렇게 뜻을 모았겠지만 무엇보다 그들 모두가 신뢰하여 의지할 만한 인품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사이먼 래틀


이제 얼마 후면 베를린 필은 지금의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을 보내고 새로운 수장을 맞이해야 합니다. 몇몇 단원들의 말에 따르면 래틀은 소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언제나 방문을 열어두고 있어 누구라도 미리 약속하지 않더라도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상임지휘자로 거론되는 인물 가운데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자꾸 마음이 기웁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에서 자란 그는 중동전쟁이 한참일 때 비행기로 날아가 포화 속에서의 연주도 마다하지 않았을 만큼 조국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조국에 맞서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유태인을 학살했던 히틀러가 그 누구보다 좋아했기에 이스라엘에서는 연주가 금지되었던 바그너의 음악을 온갖 반대와 협박까지 무릅쓰고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연주한 것도 그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부당한 박해를 가하자 그에 대한 저항으로 팔레스타인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 나라 뿐만 아니라 중동 모든 나라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중동 여러 나라의 청소년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다니엘 바렌보임


아키야마 고지 감독의 사임 소식에 이어서 또 한 사람의 일본 야구인의 소식이 마음을 움직입니다. 지난 시즌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에 뉴욕 양키즈의 선발 투수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했던 구로다 히로키가 느닷없이 친정팀인 히로시마 카프스로 돌아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양키즈는 벌써부터 히로키를 잡아두려고 설득을 했고 샌디에고 파드레즈는 198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36억원을 제시한 히로시마 카프스와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198억원을 마다하고 36억원을 선택한 까닭이 정말 흐뭇하고 뭉클합니다. 2007년 더 큰 가능성에 도전하기 위해 그가 줄곧 몸담았던 히로시마 카프스를 떠나 LA 다저스로 갈 때 그는 그를 응원했던 팬들에게 힘이 남아 있을 때 히로시마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의리의 남자´ 구로다, 日시리즈 마치고 은퇴


스포츠와 음악, 야구와 오케스트라, 같은 듯 같지 않고 다른 듯 다르지 않은 세계입니다. 같다면 그 어느 것이나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뜻을 모으고 있는 힘을 다하는 일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줌으로써 마치 그것이 스스로의 일인 듯 마음을 움직여 사로잡고 흔드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깊숙이 와 닿아 감동이 되고 위로가 되려면 이끄는 사람부터 그러고자 하는 마음을 한결같고 굳게 지켜서 그를 따르는 다른 이들의 믿음을 얻어 모두가 하나가 될 때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고스란히 그것이 전달되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데 단지 그것을 마음에 새겨 지키려는 이가 없어 이리도 어지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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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하이페츠. 음악은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하이페츠. 음악은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Posted at 2017. 3. 20. 08: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어느 여름날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몸담고 있는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경상남도 한 농촌의 마을회관으로 내려가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예술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술 하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 공연을 보여주고 들려주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학생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 예술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하려는 뜻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허설을 마치고 공연을 막 시작하려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중이라고는 일곱 명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코흘리개 다섯에 할머니 두 분이었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농번기라 휴일도 없이 모두 일하러 나갔고 일손을 거들지 못해 어린 손주라도 돌보겠다며 집에 남은 할머니 두 분이 마실을 나선 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쪽 형편을 헤아려 찾아간다는 것이 전혀 사정도 모르고 헛발질을 한 셈이었으니 처음부터 잘못 계획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서른 명이 넘는 출연진에 일곱 명의 청중이라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맥이 빠져 공연을 못하겠다는 학생들에게 공연의 성패는 청중의 수가 아니라 감동의 크기라고 말하며 여기 있는 한 사람마다 잊다 못할 추억을 남기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대 옆에 따로 의자를 놓고는 공연이 진행되는 순서마다 어린이 한 명씩을 차례로 불러 그 의자에 앉히고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크게 부르며 이제 연주할 곡을 잘 듣고 기억하라며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너만을 위한 곡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일곱 명의 청중은 머리를 무엇에 맞은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이었고 공연이 끝나고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그들을 두고 떠나는 학생들이 더 뭉클하고 뿌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관객들이 이것 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오래 전 그 누군가는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앞에 놓고서도 연주를 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였습니다. 그날 연주회는 전장의 군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이었습니다. 그것도 비가 쏟아져 진창이 되어버린 야외에서의 연주였습니다. 이런 날씨에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하지 말자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을 만큼 아프지 않은 이상 연주를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관객이라고는 객석 저 멀리 우산을 쓴 병사 한 사람이 전부였지만 그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최선을 다한 연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껏 했던 연주들 가운데 최고였다."고 말했습니다.




19세기가 파가니니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누가 뭐래도 하이페츠의 시대였습니다. 하이페츠에 한발 앞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크라이슬러조차도 어린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제 바이올린을 연주할 필요가 없어졌다." 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그를 가르쳤던 거장 레오폴트 아우어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하이페츠의 이름을 뺀 까닭을 묻자 "하이페츠는 신의 제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습니다.1901, 러시아의 빌니우스에서 태어나 세 살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하이페츠는 일리아 말킨을 거쳐 러시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가 되었지만 여덟 살에 벌써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했고 열 살에는 이미 유럽을 누비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2년 어깨를 다쳐 어쩔 수 없이 악기를 놓을 때까지 평생을 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어디서든 최고의 찬사를 누렸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어느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어떤 연주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차갑다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사실 그의 가슴은 누구보다 뜨거웠고 그래서 어려운 형편의 제자들을 아무도 모르게 도왔는가 하면 자선 공연이나 위문 공연이라면 언제든 주저하지 않고 나섰습니다. 1923년 일본 공연을 불과 몇 주 앞두고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폐허가 된 일본을 방문하여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서 예정에 없던 자선 연주회를 열었는가 하면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선의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에 앞장섰고 연주회 도중 폭격을 받아 대피하는 위험을 겪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는 늘 무표정한 모습이었지만 위문공연 당시 병사들과 어울려 함께 찍은 사진에서만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Jascha Heifetz plays Tchaikovsky Violin Concerto: 1st mov.



제가 좋아하는 김사인 시인의 시 조용한 일입니다. 이제 곧 가을입니다. 여러분도 늘 음악이 이처럼 철 이른 낙엽이었으면 합니다. 슬며시 곁에 내려서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그냥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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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나의 아버지, 테너 홍춘선[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나의 아버지, 테너 홍춘선

Posted at 2017. 2. 6. 10:5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어려서 살던 집엔 대문 옆에 화장실이 따로 하나 더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홀로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 창문을 열고 담배 연기를 뿜으며 짜릿한 일탈을 만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 화장실 문을 연거푸 노크하더니 다급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엄마 깼다." 아버지였습니다. 벌써부터 알고 계셨지만 모르는 척 하셨던 겁니다. 그날 이후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입시를 앞둔 고 3 무렵도 마냥 느긋하기만 했습니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잠들어서는 해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잠결에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한참을 지켜보며 서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더니 아버지였습니다. 안방으로 건너오라 하시기에 정말이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휙 돌아서서 나가시면서 뜻밖에도 "명화극장 한다."는 말씀을 여운처럼 남기셨습니다. '명화극장'은 일요일 저녁마다 해외 명화를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혼자 살 때의 일입니다. 일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자는데 전화벨 소리에 단잠을 깼습니다. "점심 먹자." 아버지였습니다. 도착해서 전화할 테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대구에서 두시간 반만에 운전을 해서 도착하신 아버지는 골목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허름한 설렁탕집으로 들어가시더니 앉자마자 뜬금 없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니 사람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와 그리 좋아하는지 아나?"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었더니 "임마, 그건 세상에 없는 일이라서 그런기다." 라고 하셨습니다. 장남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마냥 기다릴 수가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소설과 영화에 푹 빠져 있었으니 혹시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느라 연애를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셨던 겁니다. 듣고 있는 아들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그렇다면 설마 결혼을 놓고 계산을 하느라 짝을 찾지 못하는가 싶어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니 요즘 젊은 놈들이 얼마나 한심한지 아나? 마누라가 아니라 원더우먼을 찾으니 그기 어디 있나? 날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가 좋거든 집구석에 들어가면 바깥 일은 입도 뻥긋하지 마라. 출세가 좋고 돈이 좋아서 그걸 거들어주길 바라면 마누라가 아를 안놓던지, 빨래를 안하던지, 밥을 안한다고 해도 암 말도 하믄 안된다. 간혹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여자가 있긴 있더라. 그런데 임마, 그기 니하고 무슨 상관이고?"

 

홍승찬 교수

 

70년대초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대구에서 서울을 이웃집 드나들 듯 다니셨습니다. 대구 효성여대(지금의 대구 카톨릭 대학교) 음대 학장이면서 국립 오페라단 주역이셨던 아버지는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 차를 운전해서 국립극장으로 가서 오페라 무대에 서셨고 밤늦게 다시 차를 운전해서 대구로 내려가는 강행군을 날마다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런 악조건에도 남들이 꺼리는 초연을 주로 도맡으셨고 그렇게 십년이 넘도록 우리나라 오페라 공연의 역사를 새로 쓰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몸담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행정 책임자로서 또한 믿을 수 없는 성과와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단과대학 음악학부에서 예술대학으로, 다시 음악대학으로 확대 개편하는 과정의 책임을 맡아 이끄셨는가 하면 학교 안에 여학생들만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직접 지휘자로 나서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를 오가며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u&no=22016

 

날마다 오케스트라 연습이 밤늦게까지 이어지자 집에 가는 차편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학교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의 귀가를 돕겠다고 나섰고 학생들 하나하나 집앞까지 다 가서 내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명절에도 집에 없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늘 집에 있던 승합차에 고기와 떡, 막걸리를 싣고 학교로 가셨습니다. 남들 쉬는 날에도 학교에 나와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직원들을 다 불러서 가져간 음식과 술을 나누고 선물을 돌렸습니다. 학교에서 일하는 누구라도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지만 지금도 일 때문에 가끔 대구에 내려갑니다. 언젠가 동대구역에 내려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자꾸 백미러로 저를 쳐다보기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조심스럽게 "혹시 홍학장님 자제분 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개인택시 하기 전에 효성여대에서 운전기사로 일했었다며 큰 딸 대학 등록금이 없어 못보낼 형편이었는데 아버지 도움으로 졸업까지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사코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면서 이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이렇듯 열 사람이 해도 모자랄 일을 홀로 다 감당하셨기에 무쇠같은 체력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짐작할 따름이지만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쳐 더 힘드셨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 그 마음 같을 순 없었을 텐데 이미 모든 걸 꿰뚫어보시고도 안타까움과 미련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셨던 겁니다. 서른 다섯, 처음 교수가 되어서 아버지께 달려갔습니다. 소파에 앉아 저녁신문을 보고 계시기에 임명장을 내밀었더니 힐끗 보시고는 다시 신문을 펼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난 그 나이에 학장 했다."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대화는 병원 침대맡이었습니다. 마침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으셨구나 싶어 얼른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혹시 꼭 보고 싶은 분 한 분만 말씀하세요. 제가 경찰청이든 어디든 다 쑤시고 뒤져서 모셔 올게요!" 잠시 일그러진 얼굴이 펴지면서 벌어진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제서야 드디어 아버지가 마음 속에 간직한 누군가를 알게 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미소짓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바뀌더니 짧게 단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누우셨습니다. "없다."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돌아가신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출근하는 길, 꼬리를 물고 선 차 속에서 서리 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속에서 얼마나 추우실까 생각하니 어느덧 눈물이 흘러 시야를 가렸습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눈물을 닦으려는데 끝내 설움이 복받쳐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갈 땐 뭐라도 손에 들고 가게 됩니다. 끼니가 될 만한 것이 아니면 군것질 거리라도 꼭 챙깁니다. 밤에 살찌는데 왜 이런 걸 가져오느냐 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말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선술집에 안주로 나오는 갖가지 구이 종류를 따로 챙겨오셨습니다. 밤늦게 잠든 우리를 깨워서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잠이 덜 깨서 눈을 감은 채 입만 벌리고 받아먹었습니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에 고기가 불에 그을린 연기 냄새까지 뒤섞인 아버지의 체취가 코 끝을 찔렀습니다. 눈을 떠서 볼이라도 비비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습니다.

 

  1. 홍경희
    이건음악회에서 홍교수님의 진솔하고 인간적인 멘트가 인상 깊었는데,
    그 뒤에 아주 훌륭한 아버지가 계셨군요 노래도 잘 들었습니다 ^^
  2. 고은희
    동화같은 따뜻한 이야기네요.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을 많이 공유하고 있는 선생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3. 윤현준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4. 효성여고
    1977년 효성여고 2학년때.
    홍춘선 교수님을뵈었습니다.
    학교 강당에서 전교생에게 음악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 주셨죠. 그때의 그노래 중에 '오 솔레미오' 마이크 없이도 큰 강당을 가득채우던
    아름다웠던 노래의 감동은 경이로움과 충격이었고, 효성여대 오케스트라를 데려오셔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을 설명까지 해주시며 들려주셨죠.
    그 시절로서는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에 눈을 뜨게 해 준 분이었습니다.
  5. 효성여대 피아노과 81학번학번
    뵙고싶은 교수님. 훌륭하신 선생님. 참 교육자이신 교수님 소식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네요~그 옛날교수님과 수업하던 생각이나 흐뭇함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수업하시랴 오케스트라에 합창지도에... 정말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실 만큼 많은 활동하시며 손수 전체 음대를 이끌어 가시며 활동하시든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많은 학생 이끌고 경주로 연주여행 간 생각이 나네요.연주 뒷풀이로 호텔나이트로 학생들 모두 데리고 가셔서 우린 생애 처음 스트립쇼를 보며 그 놀라움을... 지금도 그때를 잊을수가 없네요.지방 여대에서 피아노밖에 모르고 교복입고 다니던 학창시절... 그래도 누구하나 위험해 질까봐 학생들 뒤에서 챙겨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 중 제일은 교수님이 부르시던 오페라곡.독일가곡들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어요. 그 큰 몸집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테너의 목소리를 우린 가까이서 듣고 공부하였으니 참 행복하였네요.이렇게 소식 접할수 있어 감사합니다.홍춘선교수님 당신은 참 멋지고 아름다우신 분이싶니다.
  6. et
    따뜻한 글들 잘 읽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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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러시아 음악의 향수, 소콜로프의 추억(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러시아 음악의 향수, 소콜로프의 추억(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

Posted at 2016. 9. 19. 11:35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지난 세기 러시아의 무대예술은 세 번씩이나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먼저 세기 초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간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과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와 라흐마니노프가 발레와 음악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나 처음으로 세상 밖에 그 모습을 드러낸 철의 장막 안의 예술가들의 기량은 아득하게 높은 수준에 있어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세기말이 다가올 무렵 결국 소비에트는 무너졌고 예술가들의 삶도 맥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살기 위해 그들은 다시 한 번 나라 밖으로 나서야 했지만 전과 달리 이번에는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술가의 긍지와 예술을 향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음악원이 문을 열면서부터 해외의 저명 음악인들을 교수로 초빙했고 그 가운데는 러시아의 클라리네티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프도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소콜로프 내외를 맞이해서 교수 아파트로 이동하던 중 해가 저물었기에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노라며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테이크라고 대답했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내외가 함께 말 한 마디 없이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러시아의 경제 사정이 어떤지를 실감할 수 있었고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들의 처지가 딱하기만 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소콜로프는 뛰어난 러시아 음악가로 러시아에 명성을 안겨준 화려한 독주자중 한명이다. 소련 국립 교향악단에 견습생 시절 당대 명지휘자 니콜라이 아노소프에 의해 파격적으로 발탁되어 주목을 받기시작하였다. 1963년 소련 연방 콩쿨에서 우승한후 전-소련 방송 교향악단과 소련 국립교향악단의 독주자로 활동하며 소련의 대표 클라리네티스트로 자리하였다. 1984년 소련 공훈 예술가로 추대되었다. 


블라디미르 소콜로프(Vladimir Sokolov)


식당을 나서면서 그는 갑자기 가르치게 될 학생들을 내일이라도 당장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개학까지는 여러 날이 남았고 여독이 풀리고 시차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는 전혀 문제 없다며 오히려 학교가 문 여는 시간이 몇 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그렇게 일찍 출근한 적이 없어 모른다고 했더니 그는 가능한 한 이른 시간에 학생들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아홉시에 연구실로 모이도록 연락하고 8시 반까지 데리러 오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다음날 약속 시간에 집으로 가 벨을 눌렀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문이 열렸습니다. 현관에는 낡았지만 깔끔한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한 소콜로프가 한 손에는 악기 가방을, 다른 손에는 악보 가방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운전석 옆자리에 탄 그는 너덜해진 악보꾸러미를 가방에서 꺼내 다시 정리를 하면서 중간 중간 악보의 음표들을 소리 내어 읽었고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몸까지 흔들어대는 백발의 이국 신사를 지나가는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신기한 듯 쳐다보았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마침내 학생들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소콜로프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내게 다가와 낮고 작은 목소리로 어떻게 악기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악기를 두고 다닐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당황하여 아마도 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라 그럴거라고 궁색한 대답을 했더니 부드럽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얼마든지 기다릴테니 각자 돌아가서 악기와 지금 연습하는 곡의 악보까지 챙겨서 다시 오라고 말하고는 이번에는 학교가 문닫는 시간을 물었습니다. 사실은 열두시로 알고 있었지만 얼떨결에 열시라고 말했고 그는 그 시간에 데리러 와주면 고맙겠다는 정중한 부탁을 했습니다. 약속한 열시에 노크를 하고 연구실 문을 열었고 거기에는 아침에 만난 학생들이 모두 붉게 상기된 얼굴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소콜로프만 아침보다 더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이 세상에 없고 단지 함께 했던 짧은 시간만 추억으로 남아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가 보여준 참 예술가이자 스승으로서의 모습만은 오늘도 흐트러지려는 나를 문득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지 않아 우리 발레 스타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톡 공연을 갈 일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수리를 못해 잿빛으로 색이 바래고 무대 바닥이 삐걱거리는 목조 극장을 가득 메운 남루한 옷차림의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했고 그 추운 날씨에도 신문지에 싼 시든 꽃을 들고 밖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가 출연자들에게 하나씩 전하면서 어떤 장면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또 얼마나 좋았는지 들려주었고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진정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을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알았습니다. 이처럼 러시아 어디를 가든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술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 예술가들을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를 그토록 놀라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았던 위대한 러시아의 예술가들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득 지휘자 페도세예프가 페테르스부르크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 첫 내한 연주회를 가졌을 때의 감동이 떠오릅니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얼마지 않아서였습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지휘자보다 나이가 더 지긋해 보이는 악장이 지휘자의 악보를 따로 챙겨 들고 나와 지휘대 위에 펼쳐놓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은 페도세예프의 손 끝을 따라 줄타기를 하는 듯 팽팽했습니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았고 주저앉을 듯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온 몸으로 흐느꼈지만 결코 소리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격변과 혼란 속에서도 페도세예프와 오케스트라는 그들의 음악과 본분을 잃지 않았고 음악가가 지켜야 할 긍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단원들은 악장을 따랐고 악장은 지휘자를 깎듯이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한 마음으로 차이콥스키를 사랑했습니다. 음악에도 국경이 있다는 걸 그날 깨달았습니다. 차이콥스키는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우리가 반드시 지키고 간직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것이 사람마다의 본분이고 책임이며 지켜야 할 긍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고 살아가는 까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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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첼로의 역사를 새로 쓴 카잘스. 역사에서의 B.C의 의미는? 그럼 테너와 소프라노, 첼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B.C의 의미는?[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첼로의 역사를 새로 쓴 카잘스. 역사에서의 B.C의 의미는? 그럼 테너와 소프라노, 첼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B.C의 의미는?

Posted at 2016. 1. 20. 10:01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역사에서 기원전을 뜻하는 B.C.는 예수 탄생 이전, 즉 Before Christ를 줄여서 만든 말이지요. 여기에 빗대서 테너들에게 B.C.는 Before Caruso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프라노들에게 있어서 B.C.라면 당연히 Before Callas라고 해야겠지요. 그만큼 엔리코 카루소와 마리아 칼라스는 독보적인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역사에서의 B.C는 예수 탄생 이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음악의 다른 분야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를 찾는다면 어떤 분야의 누구를 언급할 수 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파블로 카잘스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첼로에서 B.C.는 Before Casals인 셈이지요. 첼로의 역사는 카잘스 이전과 카잘스 이후가 있다고 할 만큼 그의 존재와 업적은 두드러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연주가 그만큼 뛰어나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첼로 연주자들의 레퍼토리 가운데 다른 어떤 작품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 세상에 알렸고 또 평생을 바쳐 이 곡의 해석과 연주방법을 연구하여 후대에 남겼다는 것이 더욱 크게 평가받은 결과일 것입니다.

 

 

첼로에서의 B.C는 파블로 카잘스 탄생 이전을 의미합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뿐만 아니라 바흐가 남긴 작품과 그 영향은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절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피아니스트들의 구약성서라 일컬어지고 있지요. 그러나 피아노의 경우 베토벤의 소나타 32곡을 신약성서라며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나란히 언급하고 있지만 첼리스트들에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함께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작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위대한 걸작은 바흐가 죽고 백년이 훨씬 넘는 동안 그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유럽의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겨우 열세 살의 어린 소년 카잘스의 눈에 띄게 된 것이지요. 그것도 우연히 말입니다. 그 해가 바로 1899년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첼로의 원년은 1899년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첼로의 역사는 1899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셈이지요.

 

Bach : Das Wohltemperierte Clavier I - Prelude & Fuga No.1 In C Major BWV 846 (01-02)

 

Rostropovich -- BACH (DVD Completo)

 

 

카잘스는 연주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은 카잘스를 회상하며 “그의 단순함과 우아함, 고결함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파블로 카잘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엘 벤드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꽤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 지휘자였지만 살림은 늘 궁핍하였습니다. 그러나 11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음악교육에 소흘함이 없었고 그것이 훗날 카잘스에게 긍지이자 자랑으로 기억되어 늘 “나의 음악적 재능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노래와 건반악기를 배웠지만 바이올린과 첼로는 거의 스스로 터득하여 연주하였고 유랑악단과 어울려 엉터리 첼로를 곧잘 연주하는 아들에게 아버지 카를로스는 제대로 된 첼로를 사주었고 어머니는 그를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원에 입학시켜 정식으로 첼로를 배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지요.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날마다 카페 ‘토스트’에서 스스로 편곡한 곡들을 연주하였고 이를 지켜 본 작곡가 알베니스가 추천서를 써 주어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틈만 나면 들리곤 했던 헌책방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인쇄본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이후 연주자로서 그의 삶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왕실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카를로스 3세 훈장’을 받았고 유럽 각지는 물론 미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쳐 1904년 백악원 초청 연주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실내악에도 관심을 두어 1905년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1915년 드디어 첫 음반작업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1936년부터 3년여에 걸쳐 드디어 오랜 세월 연구와 연습을 거듭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첫 음반을 녹음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이어서 녹음한 베토벤 소나타 전곡과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그 해석에 있어 가장 권위있는 잣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음악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삶을 사는 가운데 1936년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과 1939년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은 너무나 큰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스페인 공화정을 지지했던 그는 1938년 10월 리체우 극장에서의 연주회를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스스로의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고향이 그리워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과 맞닿아 있는 프라드에서 살았고 1950년부터는 이곳에서 페스티발을 열어 세계적인 거장들과 명연주자들을 수없이 불러들였지만 프랑코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초청은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몬트세라트 수도원에 있는 카잘스의 동상

 

그 뿐만 아니라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에서도 연주회를 갖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코르토와도 절교를 했다가 1958년에야 다시 화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신념과 고집으로 말미암아 미국에서의 연주도 거부했지만 그가 호감을 가졌던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다시 한 번 백악관 연주회를 가졌고 당시의 실황을 담은 음반은 시대의 유물로 남았습니다. 특히 앙코르로 연주한 카탈루냐의 민요인 ‘새의 노래’는 동포와 인류의 자유를 염원한 카잘스의 상징으로 남아 지금도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많은 첼리스트들이 앞다투어 연주하고 있지요.

 

Folklore Catalan : Εl Cant dels Ocells - Pablo Casals

카잘스의 1950년 프라데 페스티벌 연주

 

카잘스는 죽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습했고 이것이 그에게는 날마다의 명상이자 기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처음에는 기술적으로 연주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도 하나 둘 극복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음악적인 해석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10월 22일 카잘스는 푸에르토 리코의 산 후안에서 수도자와도 같은 96년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토록 그가 기다렸던 프랑코 정권의 종말이 찾아왔고 1979년에는 비록 시신으로나마 그의 고향 카탈루냐의 엘 벤드렐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베를린 필 12 첼리스트들’은 연주여행을 다닐 때마다 틈을 내서 벼룩시장의 중고음반 가게를 들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은 오래된 무명 가수들의의 음반에서 좋은 곡을 찾으면 그것을 새롭게 편곡해서 연주회마다 들려준다고 하지요. 첼리스트들은 다 그런가봅니다. 첼리스트는 아니지만 저도 유럽의 대도시, 특히 파리를 방문할 때면 어김없이 벼룩시장을 찾습니다. 카잘스처럼 엄청난 보물을 찾는 요행을 바래서가 아니라 손 때 묻은 책 학 권, 빛 바랜 엽서 한 장을 버리지 않는 그들의 생각과 삶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딱히 벼룩시장을 찾지 않더라도 거리마다 사람마다 묵어서 은근한 멋을 풍기는 무엇인가를 걸치고 있어 흐뭇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2첼리스트(출처 : 다음 블로그)

 

 좋은 것은 당장은 드러나지 않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지요. 클래식 음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그렇고 카잘스의 연주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걸까요? 카잘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1.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근데 마지막 동영상은 카잘스가 아니라 마이스키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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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공연장의 CEO는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 벤슨 푸아[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공연장의 CEO는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 벤슨 푸아

Posted at 2015. 11. 17. 15:14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싱가포르에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과 같은 복합문화공간인 에스플러러네이드(Esplanade)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서 봐야지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함께 경험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방학을 이용하는 계절학기 과목으로 “세계 문화현장 탐방”을 열고 에스플로네이드의 CEO 벤슨 푸아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메일을 보내는 사람은 누구며, 몸담고 있는 학교는 어떻고, 이러저러한 이유와 의도로 학생들을 인솔해서 그쪽을 방문하고 싶은데 제공할 수 있는 정보나 편의가 없는지, 혹시 학생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 등등을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메일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연구실로 돌아왔더니 벌써 답장이 와 있었습니다. 알게 되어 반갑고 참 좋은 취지의 계획이라 그 자신도 기꺼이 돕겠다며 그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세부사항의 제안과 결정은 비서를 통해 진행할 테니 조교나 학생 대표가 서로 연락을 주고받도록 하자는 제안을 덧붙였습니다.

일단은 서로 모르는 사이의 외국인에게 메일을 보내서 이렇게 빠른 회신을 받은 일이 없어 놀랐고 그쪽 입장에서는 성가시고 귀찮은 일일 뿐 그다지 이익이나 덕을 볼 일이 아님에도 성의 있고 뜻밖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출처 : 서울시청

 

 

그런데 그것은 겨우 시작이었을 뿐 이후의 감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서로 메일을 주고받은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로부터 다시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아마도 이런 저런 사정을 핑계로 협조가 불가하다는 내용이겠거니’ 생각하며 메일을 열었더니 그게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학생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나이 많은 비서보다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신입사원이 더 적격이라는 생각에 그런 직원 한 사람을 지정해 이후 연락과 진행을 그 담당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세안 문화예술포럼에서 싱가포르의의 벤슨 푸아(Benson Puah)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대표의 연설

(출처 : 해외문화 홍보원)

 

 

일면식도 없는 외국 사람이 뻔뻔하게 메일로 부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인데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서 배려하는 마음씀씀이를 대하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고 불과 몇 분 전의 삐딱했던 짐작이 너무나도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정했고 마침내 우리 일행은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일찍 서두른 탓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흩어져 사방을 둘러보다 약속시간이 가까울 무렵 로비에서 모이라는 지시를 하고 혼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일행 중 한 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로비에서 우연히 벤슨 푸아와 마주쳤는데 일찍 도착했다는 말을 듣더니 일정을 앞당기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학생들을 불러 모아 예정된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직원들이 배석한 가운데 벤슨 푸아와 그를 보좌하는 간부들이 직접 진행하는 PPT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걸 보는 순간 또 한 번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정된 서로의 상견례와 공연장 소개라는 것이 이런 것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놀랄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에스플로네이드 곳곳을 둘러보는 투어까지 벤슨 푸아가 직접 나섰는가 하면 예정에 없던 저녁 초대와 공연관람까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깔끔한 음식이 준비된 저녁식사 시간 동안 벤슨 푸아는 학생들이 앉아 있는 모든 식탁을 빠짐없이 돌며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업무가 바빠서 PPT를 발표하는 자리에 배석하지 못했던 직원들은 퇴근하면서 그 자리에 잠시 들러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건넸습니다. 정말이지 그 대표에 그 직원들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고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놀랍고 감동적인 경험이 더하게 되자 이날의 마지막 순서인 공연관람은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스스로 클래식 음악, 특히 오페라를 좋아한다고 했고 투어를 하면서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중이라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아마도 그 공연에 초대하려니 예상했는데 정작 벤슨 푸아가 초대한 공연은 야외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는 민속음악 공연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누구나가 구경할 수 있는 무료공연이었기에 실망이 더 컸는데 야외공연에 초대한 까닭을 듣고 나니 또 한 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싱가포르 국민들 대부분은 아직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에 큰 관심이 없기에 당장은 그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연을 부담 없이 쉽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것이 바로 에스플로네이드의 현재이고 당면 과제이기에 그 현장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꾸 이 공간을 찾다 보면 언젠가는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른 종류의 공연들에도 점차 호기심을 두게 될 것이고 그때는 또 그것을 관심과 호감으로 바꾸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안동 탈춤 페스티벌

 

 

이 말을 듣고 보니 이곳의 이름을 에스플로네이드라고 지은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산책‘이라는 말 뜻을 우리식으로 푼다면 ’마실‘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저녁 먹고 하릴없이 거닐다가 문득 찾아가는 이웃집처럼 늘 궁금하고 정겨운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 당시 ’싱가포르 아트센터‘였다가 개관 무렵 널리 공모하여 채택된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싱가포르에 복합 문화센터가 생긴 것은 일본보다 늦고 그에 앞선 우리보다는 한참이나 늦었지만 정작 그 고민과 모색을 시작한 것은 아시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먼저였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술의 전당처럼 있으면 남들 보기에도 그럴듯할 테니 일단 만들어 놓고 보자는 것이 아니라 요모조모 따지고 심사숙고한 끝에 만들기로 했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준비하고 마련했던 것입니다.

 

 

 

두리안을 형상화했다는 에스플러네이드, 싱가포르의 핫 스팟! 

 

 

전에 없던 것이 처음 생겼으니 그 책임자를 물색하는 일도 쉽지 않았겠지요. 경험이 있는 경력자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남다른 생각과 선택을 했습니다. 상식과 원칙을 앞세운 것이지요. 공연장과 전시장은 물론이고 여기에 식음료장까지 더한 복합문화센터라는 것이 결국은 이용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니 이와 유사한 서비업에 오래 종사하여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전문가들 가운데 문화 예술 전반에 관한 관심과 소양, 애정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적임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바로 벤슨 푸아였고 이전에 그는 싱가포르 최고의 호텔 경영자였습니다. 다양한 예술 장르와 문화 전반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PPT로 준비한 발표를 듣는 동안 어쩐지,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그랬구나 했는데 질문응답시간에 한 학생이 민망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호텔 경영자였던 당시와 지금의 연봉을 비교해달라는 것이었고 전에 비하면 지금의 연봉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다시 질문하기를 그런데 왜 지금의 자리를 선택했느냐고 물었고 그의 대답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그는 호텔 경영자로 있으면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긍지와 자부심이 컸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서비스를 늘 특정의 소수에게만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불특정 다수, 즉 원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그들 모두에게 서비스의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에스플로네이드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 서곡

 

 

지금도 누군가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주저 없이 벤슨 푸아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공연장이나 전시장, 혹은 복합문화센터의 경영자로 어떤 사람이 적합한지 의견을 물어올 때면 호텔과 같은 서비업에 오래 종사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고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전문가들 가운데 문화 예술 전반에 관한 관심과 소양, 애정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적임자라고 말해줍니다. 에스플로네이드를 방문했던 날 공연중이었지만 결국은 보지 못했던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가운데 피가로가 부르는 아리아 ‘이제는 못날으리’ 들으며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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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동영상]배드민턴 저항과의 싸움이다.(하이클리어 궤적)[배드민턴동영상]배드민턴 저항과의 싸움이다.(하이클리어 궤적)

Posted at 2015. 10. 14. 13:46 | Posted in 직장인 톡톡/심심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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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동영상]강한스매싱을 위한 하체운영체제[배드민턴동영상]강한스매싱을 위한 하체운영체제

Posted at 2014. 9. 28. 23:06 | Posted in 직장인 톡톡/심심타파!

강한스매싱은 강한하체에서 나오게 됩니다.

강한하체를 만들어 어떻게 운용을 해야하는지 함께 보시죠^^

  

                       


  1. 배드민턴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즐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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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스매싱]이용대선수 스매싱 따라하기[배드민턴스매싱]이용대선수 스매싱 따라하기

Posted at 2014. 9. 28. 23:00 | Posted in 직장인 톡톡/심심타파!

현역선수 스매싱 따라하기

 

현역선수의 스매싱은 동회인들과의 스매싱 괘적과 팔동작이 많이 다릅니다.

스매싱 메카니즘을 설명하기 참 어렵습니다. 현역선수의 스매싱 폼과 메카니즘이

바른것임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동호인들의 폼과 메카니즘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현역선수의 스매싱 동작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당부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 동작을 분석해 보긴 하겠지만 여러분들이 익히기엔 무리가 많이 따르는 동작이라는 것.

부상의 위험이 높다는 것입니다.

 

동호인분들은 대부분 짧게는 3달에서 많게는 2년이라는 시간동안 레슨을 하시고

나머지는 배우는 단계는 끝내고 운동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배우는 시간도 현역선수들과 비교하면 정말 얼마되지 않는 시간이죠.

그리고 몇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미 자신의 스윙이 있으신 분들이 무리하게 선수들의 스윙을

따라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수들의 경우 어린시절부터 운동을 시작했기에

근육과 뼈...몸 전체가 배드민턴에 맞게 발육이 되어, 배드민턴을 위한 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선수들이 하는 스매싱 동작을 따라하는 것은 많은 리스크가 따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20대초반이고 하루에 적어도 3시간이상 이 운동에 투자할수 있다면 조금은

비슷하게 구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선수들의 스윙메카니즘을 알아보도록 하죠.^^

팔 동작의 마지막 부분만을 보게 된다면...

아래 사진처럼 그립에 캡부분이 위로 올라왔죠?

 


이 동작의 기본적 메카니즘은 이렇습니다.

점프동작or몸의 중심을 올리면서 어깨를 둥글게 회전합니다.

어깨회전이 끝나는 점에서 라켓과 셔틀콕은 만나있습니다.

이 순간 강한 손목회전을 이용하여 스매싱을 구사한다.

 

강한 손목의 회전이 걸리면서 자연스럽게 팔꿈치와 어깨는 상대적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팔 전체를 짜주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동작에서 부하가 걸리는 부분은 날개뼈(어깨죽지)와 팔꿈치 안쪽입니다.

자칫 저런 마무리 동작을 하려고 하시면 어깨와 팔꿈치에 긴장이 걸리면서

반복된 동작으로 부상을 입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하가 많이 걸리는 부분은 근육을 강화시키고 장기간에 걸쳐 자연스러운 스윙동작이

되어야 부상을 방지할 수 있으나, 동호인들의 경우 어렵습니다.

날개뼈의 부상은 적은편입니다. 큰 근육이기에 일상으로도 일반인들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인데요. 팔꿈치의 경우는 치명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배드민턴을 그만 두셔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죠.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 감싸으면 안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위가 가장 많이 다치시는 부위입니다. 주요 증상은 인대파열이나

근육이 찌저지는 것입니다. 밥 숟가락도 못들정도로 아프다고 하더군요.(하지만 주사맞고

다시 라켓은 잡으시죠.^^당신이 그렇다면 이미 중독이십니다.^^)

 

이러한 스매싱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셔틀과의 거리 즉, 타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동호인들이 사용하는 스매싱의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셔틀을 내 앞에 둔채 어깨를 이용하여 앞에있는 셔틀에 접근하여 스매싱을 하죠.

이런 방법은 접근하는 과정에서 이미 어깨의 회전이 걸리기 때문에 순간적인

손목회전은 어렵습니다.

 

선수들의 스매싱의 타점...셔틀과의 거리를 아래 왼쪽그림처럼 상당히 접근시킵니다.

셔틀과 가깝게 한 후, 아래 오른쪽그림처럼 손목의 강한 회전을 걸어 셔틀을

집어 삼키는 것입니다.밀어주는 힘없이 순수한 회전만을 걸어주는 상당한 고급기술입니다.

그럼 강한 파워는 어떻게 내는지 생각이 드실텐데요.

그래서 남자선수들은 점프를...여자선수들은 타점은 밑으로 끌어당겨서 스탠딩 스매싱을

구사합니다.


 




 

그럼 동호인분들의 스매싱은 어떤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동호인들의 이상적인 스매싱은 선수들의 스매싱과 동회인들의

스매싱의 중간...팔꿈치를 이용한 파워와 손목의 회전을 이용한 각도...

사진처럼 그립읜 끝부분이 뒤로 향하게만 해도 스매싱의 완성도는 높아질 것입니다.

상당히 긴 글이 되어버렸군요.

정리를 하면 너무 무리하게 강한 스매싱을 연습하여 부상을 입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스매싱을 하는 동호인들은 5%도 않됩니다.

깅한 스매싱에 얶매이시지 말고, 전체적 기술...하이클리어, 스매싱 리턴, 백핸드 클리어

등의 실력을 키우는 노력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치지 말고 행복한 배드민턴 하시기 바랍니다.^^  

  1. 민턴
    사진이 오류가 있는지 컴퓨터, 모바일...둘 다 안보이네요. 사진 다시 올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2. 배드민턴초짜
    재가 찾던 글인데 사진 수정좀 부탁드려요 꼭 보고싶어요
    • 2015.03.15 08:43 신고 [Edit/Del]
      수정하여 업로드 했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필요하신 자료가 있으면 덧글남겨 주시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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