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미디어 광고에 등장하는 한 음악가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광고의 첫 화면에 문자로 소개된 대로 그의 이름은 에사 페카 살로넨이고 현재 작곡가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러 묻는 분들이 있어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린다면 우리 식 나이로 58년 개띠이고 핀란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있는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호른과 음악이론, 지휘와 작곡을 전공했고 1979년 지휘자로 데뷔한 이후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음악계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1983년 마이클 틸슨 토마스의 대역으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들려준 말러의 교향곡 3번으로 단번에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고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과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거쳐 지금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지휘봉을 잡고 있습니다. 영국의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르헤히트는 그의 저서 “거장 신화”에서 1950년대 이후 출생한 지휘자들 가운데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지휘자로 사이먼 래틀과 리카르도 샤이, 발레리 게르기에프, 그리고 정명훈과 더불어 에사 페카 살로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작곡가로서도 지휘자 못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 “관현악을 위한 LA 변주곡”과 “색소폰 협주곡” 등의 대표작이 있고 그가 등장하는 광고의 배경음악도 그 자신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2/2) - 슐로모 민츠, 에사 페카 살로넨
에사 페카 살로넨이 그 정점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오늘날 핀란드 출신 음악가, 특히 지휘자와 작곡가들의 활약은 거의 독보적이라고 해야 할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먼저 지휘 쪽을 살펴보면 살로넨보다 두 살 위의 유카 페카 사르사테도 이미 거장 반열에 올라 있지만 오히려 더욱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들 다음 세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스칸디나비아 여러 국가의 수 많은 오케스트들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들의 70 퍼센트 정도가 핀란드 출신이라고 하니 앞으로 세계 무대에 새롭게 두각을 나타낼 신진 지휘자가 나타난다면 두 번 가운데 한 번은 핀란드 출신일 것이라는 예측까지도 가능할 지경입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음악가라면 누구나 시벨리우스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명성과 위상을 이을 만한 핀란드 출신의 작곡가는 누구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입니다. 1955년 미국의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은 90회 생일을 맞은 시벨리우스에게 그가 추천하는 핀란드 출신의 젊은 작곡가의 미국 유학 비용을 전액 부담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당시 그 행운의 주인공이 바로 라우타바라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미국 내 오케스트라들이 가장 자주 연주하고 또 자주 작품을 위촉하는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고 심지어 미네소타에서는 그의 이름을 앞세운 ‘라우타바라 음악제’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교향곡 7번 “빛의 천사”는 칸 클래식 음반상을 수상했고 “알렉시스 키비”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오페라 또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시벨리우스 음악원 교수와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총감독, 핀란드 예술지원심의회 회원을 역임했고 음악원에 재직할 무렵 가르쳤던 제자가 다름 아닌 에사 페카 살로넨이었습니다.
Rautavaara - Symphony No.7 'Angel of Light' (1995) - I Tranquillo
그렇다면 북유럽의 작은 나라 핀란드가 이처럼 클래식 음악, 특히 지휘와 작곡 분야에서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그 나라 국민들의 각별한 음악사랑을 가장 먼저 꼽아야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하고 있는 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핀란드는 인구 대비 정부의 예술지원 예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핀란드를 대표하는 교향악단과 공연장인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핀란디아 홀 연주회의 입장권은 전석이 15유로에 불과하고 그나마 경로우대석은 10유로, 학생과 실업자는 5유로에 입장권을 살 수 있습니다. 1993년부터 시행된 “교향악단법”에 따라 전국의 모든 오케스트라의 예산 가운데 25펴센트를 국가가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 오케스트라틑 창단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시민과 애호가들이 오케스트라를 만들면 우선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소요예산의 60퍼센트 이상을 확보했을 때 국가가 나서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구 500만의 나라에 22개의 오케스트라가 있는가 하면 그 10분의 1에 불과한 인구가 사는 수도 헬싱키에만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연주회를 자주 가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핀란드입니다. 그래서 핀란드 사람들은 오케스트라가 없는 도시는 도시가 아니라고 한답니다. 이런 환경에서 좋은 지휘자들이 양성되고 배출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향악단마다 상주작곡가를 두고 있어 재능과 역량을 갖춘 많은 작곡가들이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많은 지휘자와 작곡가들이 세계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산을 지원하여 음악을 연주하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든다고 해서 반드시 뛰어난 음악가들이 배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는 예술지원 정책은 뿌리가 없는 나무를 심는 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1969년부터 핀란드는 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국민들 누구나가 예술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했고 핀란드 최고의 음악교육 기관인 시벨리우스 음악원은 그 예산의 대부분을 정부가 부담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kalim.org/xe/11330
여류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와 더불어 핀란드 출신의 작곡가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작곡가 칼레비 아호는 한 때 시벨리우스 음악원 교수로 있었고 라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주 작곡가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헬싱키에 살면서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작곡가가 생계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에만 모든 힘을 쏟을 수 있는 것은 핀란드의 “예술가 연금” 제도 덕분입니다. 예술가가 역량과 업적을 인정받으면 일정 기간 생활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등의 의무조항이 없어 선정된 작곡가들은 아무런 제약과 부담이 없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작곡에만 몰두할 수 있습니다.
카이야 사리아호 & 바스코 멘동사
벌써 오래 전의 일이지만 시벨리우스는 32살 때 연금을 받기 시작했고 십년 후부터는 종신연금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여생을 헬싱키 북쪽에 위치한 아르벤파 숲속에 칩거할 수 있었고 심지어 핀란드 정부는 그 근처를 지나는 비행 항로까지 바꾸면서 그의 창작생활을 지원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결국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종신연금을 받기 전보다 그 후의 삶이 훨씬 더 길었지만 그 기간 거의 침묵하다시피 이렇다 할 작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배부른 예술가보다 오히려 배고픈 예술가가 더 낫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핀란드 정부는 지금까지 예술가의 영혼과 연금제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그것이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 핀란드를 세계 음악계의 중심에 우뚝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