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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예술가의 후원자들 - 폰 메크 부인] 남녀간에 이성의 감정을 떠난 플라토닉 사랑.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웠던 시점에서 손을 내밀어준 사람.

by 블로그신 2015. 2. 24.

 

 

 

서양의 음악사를 통털어 작곡가와 후원자와의 각별했던 관계를 꼽으라면 아마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과의 사연이 가장 으뜸일 것이다. 1876년 12월, 차이코프스키는 어느귀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고 그 내용은 자택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작곡자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들 가운데 몇 개를 골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했던 차이코프스키는 즉시 그 귀부인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그에 대한 대가로 파격적인 보수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과의 교류는 13년이나 지속되었고 그 기간 동안 차이코프스키는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기간에 차이코프스키의 걸작들 대부분이 쏟아졌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13년이라는 세월도 아니고 또 그 기간 동안 해다마 지불된 6000루불이라는 거액도 아니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그렇게 큰 금액을 내놓으면서 전혀 그 대가를 바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평생 단 한번도 직접 만나 얼굴을 마주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이 계속되었던 13년 동안 두 사람은 무려 1100 여통이나 되는 서신을 주고 받았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히 예술가와 후원자 사이의 사연을 뛰어 넘어 연인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두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성으로 서로를 좋아했다면 왜 만나지 않고 편지만 주고 받은 것일까? 그리고 물리적인 불가항력의 장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그 긴 시간 동안 한번도 서로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폰 메크 부인. 차이콥스키를 1877년부터 1890년까지 14년 동안 후원했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부터 말한다면 물론 두 사람은 몇 차례 마주친 일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연출된 상황에서 벌어진 불가피한 경우였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서로 가까운 곳에 머물기로 하고 어차피 중복될 수밖에 없는 이동 공간을 오고 가면서 서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곳이 파리나 피렌체일 때도 있었고 러시아 안의 또 다른 장소일 때도 있었다. 서로 보이지는 않지만 편지를 든 심부름꾼이 오가기에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정했고,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상대편의 일과를 미리 확인해 두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까운 공간 안에서라면 결국은 예기치 않은 만남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서로가 마주쳤던 것이다. 그렇게 마주쳤을 때 소심한 차이코프스키는 모자를 손에 들고 꼼짝 않고 서 있었고 마차에 타고 있던 폰 메크 부인은 지독한 근시였음에도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 - 교향곡 6번 (카라얀)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먼저 폰 메크 부인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차이코프스키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부인의 나이는 45살이었고 12명의 자녀와 그보다 많은 손주들을 두고 있었다. 10살이나 연상인 철도 공무원 카를르 피오드르비치와 결혼했을 때 나데지다는 겨우 17살이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으로 시집간 그녀는 독립적인 철도사업을 하도록 남편을 설득했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어 큰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박봉의 살림을 꾸리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고 나중에는 사업을 일으키느라 더욱 궁핍한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 결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몰락한 가문도 일으켰지만 정작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접어야 했던 달콤한 사랑에 대한 환상은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젊은 기술자 알렉산드르 요르신과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그 사이에 두 딸까지 두었지만 그것이 정신적인 사랑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결국 남편에게 발각되었고 그 때문인지 카를르는 심장발작을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차이코프스키를 알게 되었을 때 부인의 나이는 45세였고 슬하에는 12명의 자녀와 그보다 많은 손주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라면 수려한 용모에다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차이코프스키보다 더 이상적인 연인이 없었을 것이고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데는 상대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편지가 더 좋은 수단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차이코프스키는 경제적인 기반이 없는 37세의 독신에다가 전도 유망한 작곡가였으니 예술적인 성취를 도와가면서 지적인 욕구도 채울 수 있는 이상적인 상대였다.

 

 

차이코프스키 가족

 

폰 메크 부인을 알고 얼마지 않아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였던 28세의 여성 안토니나 미류코바의 열렬한 구애를 받게 되었고 망설이던 끝에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차이코프스키는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결심한 스위스와 이탈리아로의 여행과 요양이 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 때 만약 폰 메크 부인의 경제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그 여행을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차이코프스키의 남은 생애와 창작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이탈리아에서 완성한 교향곡 4번을 감사의 마음을 담아 폰 메크 부인에게 바쳤고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부인에게 헌정했다. 이처럼 폰 메크 부인의 경제적인 후원은 매년 약속한 연금이 다는 아니었다. 서로 알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탈리아 여행을 위한 경비를 지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차이코프스키를 압박하고 있던 부채까지도 부인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1악장

 

처음부터 폰 메크 부인이 먼저 시작한 일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두 사람의 감정이 같을 수는 없었고 역시 폰 메크 부인 쪽이 더 적극적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원래가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기도 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부인의 호의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의 입장을 움츠려 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폰 메크 부인은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갈증을 느꼈고 그것을 조금이나 해소하기 위해 요르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딸을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내서 대신 만나게 할 생각이었지만 차이코프스키가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부인의 집요한 일념은 결국 그들 다음 세대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된다. 부인은 자신의 아들과 차이코프스키의 조카딸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했고 그것이 성사되어 1881년 1월, 부인의 아들 니콜라이 폰 메크는 차이코프스키가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의 딸 안나 리보브나 다비드바와 결혼식을 올렸다.

 

 

차이코프스키/교향곡 4 번 서곡 1812 년 CD

 

그들이 함께 한 13년의 세월은 무척이나 낭만적이었지만 그 종말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폰 메크 부인은 재정상의 파탄으로 더 이상 경제적인 후원이 불가능하니 이제 그들의 관계에 끝내자는 서신을 보냈고 그 이후로 일체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편지를 받자마자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사랑이 금전적인 지원과는 무관한 것임을 강조하는 답장을 써서 보냈지만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차이코프스키는 폰 메크 부인의 재정상태가 이전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갑작스럽게 관계를 청산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추측을 해왔지만 정확한 이유는 지금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혹자는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주변의 중상모략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가 않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인 바르바라 폰 메크는 부인이 불치병에 걸린 아들 블라디미르의 병간호를 하면서 이전에 미처 아들에게 정성을 다 쏟지 못한 죄책감에서 결별을 결심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말년에 병마에 시달렸던 폰 메크 부인이 편안한 임종을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때 이미 차이코프스키는 작곡가로서 절정의 성공을 누리고 있었고 많지는 않지만 러시아 정부로부터 매년 1000루불의 연금도 약속받은 상태였다. 결국 그 동기가 무엇이었던 간에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웠던 시점에서 폰 메크 부인의 경제적인 후원이 시작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차이코프스키는 삶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지금과 같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