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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톡톡/아름다운 건축

건축가와 함께 가는 여행, 부산 근대건축 - 이건 건축기행 10번째 테마. EAGON + SA (부산) - 1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25.

EAGON + SA (10)

조용필, 나훈아, 최동원

이기대, 태종대, 해운대

용두산 엘레지와, 오륙도, 동백섬으로 그리고

최근에 국제영화제로 대표되는 곳

돌아와요 부산의 이야기다.

 

답사지 부산은 대한민국의 근대에

상당히 중요하고  

재미있는 요소를 두루 가진 도시다.

 

( 근대라함은 서양의 스타일이 유입된 시점으로

 대략  1890 전후를 근대의 시작으로 

대한제국 ~ 일제강점치하의 1945년 까지로 볼 수 있다)

 

 

 

◆ 우리의 첫 여정은 옛 부산철도청장(長)의 관사로 지어진 정란각(貞蘭閣)

축조이후 숱한 세월 속에 그 운명은 관사에서

요정으로 요정에서 세월의 때만 잔득

묵어버린 한국땅에 숨어있는

남의건물(적산敵産가옥)로 남겨진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많은 적산가옥이 일본인 밀집주거지를

 중심으로 생겨났지만, 대부분 그 운명은

 이름 그대로

적국에 남겨진 쓸쓸한 건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것 이라는 화풍(和風)은 복도의 구성

방과 방의 구성이 달라

한국인의 생활방식과는 잘 맞지 않을뿐더러

,온돌 구들장 생활의 한국에서

다다미 방식의 일본 스타일은

아랫목에 등지지며

살던 우리와는

전혀 그 태생자체가 틀린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이 건물의 운명 또한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나

마지막엔 갖은 세월의 치정까지 섞여가며

무너저버린 몰락한 가문의 모습인양 다가 왔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처참히 밟혀간 망국의 한을

다시금 이 건물을 통해 전가시켜버린듯한

느낌마저 지울 수가 없다.

인과응보...?

 

정란각 그 이름은 처음에 지어진 그대로 일까?

변해버린 시간뒤에 남겨진 작부의

삶이 드리워진 그늘진 이름인가?

 남의 땅에 남아도 단정히 남아있다면 좋았을 것을.

 

가장 원형을 잘유지하고 있는 적산가옥이라 해도

 상태는 좋지 못했다.

 2007년까지 외국인 접대의 술집으로 사용이 되면서

 공간을 넓히기 위해 증축된 부분은

벤츠 지붕에 스카이라이프 뚜껑의 씌운듯

 어색함만 흐르고 차라리 완전히 색다르게 꾸민것보다

 더 못한 것과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고나 할까?

 

갑자기 제작년 한창 보수공사중이었던 군산의 히로쓰 가옥이 생각이 났다.

이왕 할거면 제대로 잘 해야할텐데 라는 생각과 함께..

한국의 문화재 복원수준은 아직도 초라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이것은 실력을 떠나

고질적인 구닥다리 행정적 사고와

아직도 우리의 의식수준이 낮음에서 오는

문제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 범어사 부부에도 결정적 장면이 포착된다, 물론 돈이 문제겠지만.)

어찌되었던 정란각은 보수가 되어

조만간에 일반에 공개가 된다고 한다.

 

◆부산은 지리학 적으로도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도시이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통신사 파견 등을 통한 교류의 관문이었고,

암울했던 국권침탈, 제국주의의 강제 개항을 격어야 했던  

아련함의 운명을 가진 도시다.

일본의 사신이 묵던 숙소지 또한 왜관이라는 지명으로

아직도 부산근교에 남아있지 않은가.

그만큼 가깝기에 아픔도 많이 간직한 곳이다.

이후 들른 근대부산역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표적인 수탈로 알려진 인적수탈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한 물자는 군산과 목포 ,

군인,노역자 및 위안부의 징용은

부산을 통해 본격적인 수탈을 진행해왔다.

 

절대 짧지 않은 현해탄, 육지의 거리 이만리보다

더 멀었을 마음의 거리 이만 리 그곳에서 이름 모르게

쓸쓸히 사라져버린 우리의 할아버지들

그들의 형제 부모에겐 어쩌면 돌아와요 부산항은

그들의 애타는 설움이 담긴

한 맺힌 절규의 제목일지도 모른다.

 

 

저녁을 먹고 숙소근처 해운대를 잠깐 나와봤다.

잠깐 상식으로 해운대에 댈해 소개해 볼까?

해운대의 뜻을 물어보면 대부분 얼버무리고

혹 누군가는 설경구,하지원이라 말할것만 같다.

해운대는 신라시대 문인 최치원선생의 호(號)이다.

1400년전 선대 문인이 남긴 명칭 이다

속설로 내려오는 얘기는 많으나 나는 이 설을 가장 좋아한다,

원래 최치원의 호는 고운(孤雲) 이였으나,

경주를떠나 부산을 거쳐 가야산 해인사를

가는도중 동백꽃 핀 이곳이 너무이뻐 누웠는데

 바다와 구름의 경계가 없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 경계가 없는 아름다움을 海雲臺 라 표현하였고

 그 후 해운(海雲)이라는 호를

자신의 아호 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합천의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서고가 있고,

그 서고옆으로 난길을 따라가면

눈에띠는 큰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하늘아래 세상의 공평치 못함과 인생의 덧 없음을

 깨닳으면 너털웃음지으며

신선이되고자 속세를 떠난

1400년전 최치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끔 부산에 내려와 누리마당이 있는 곳의 정자에 가서 누우면

내가 최치원이 되어보는 생각에 잠겨보곤 했다.

 

1400년 후손들은 모래사장에 부둥겨 않고

누워 사랑을 속삭이고  그 뒤로는 64비트 사운드로

번쩍이는 클럽들이 줄줄이 들어차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에거슬리거나

그리 나쁘지 많은 않아 보인다.

정적인 해운대는 동적인 해운대가 되었

해마다 최고의 바다패션을 보여주며

대한민국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자리매김했으니 말이다.

 

마린시티

엄청난 고층건물들과 휘황찬란한 해운대는

 "변화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단박에 보여주는

대한민국 도시계획의 최대의 이례적인 사건,혁명이다.

클럽으로 뛰어가는 20대 청춘들의 모습뒤로

동백섬이라도 남겨놓은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