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앙코르곡으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 무엇일까요?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입니다. 이 곡을 연주할 때면 음악이 흐르는 중간에 지휘자가 청중을 향해 돌아서서 지휘를 하고, 청중은 지휘자의 동작과 음악에 맞춰 박수를 치기 마련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연주회장에서 한번쯤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gFYnRqV4p4w
그렇다면 이 곡이 앙코르곡으로 널리 사랑받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해마다 1월 1일 정오에 빈 음악협회 대강당에서 열리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가 TV 전파를 타고 우리나라 안방에 소개되면서부터입니다. 빈 필은 신년음악회 때마다 이곡을 앙코르곡으로 연주합니다. 지휘자가 객석을 향해 지휘를 하고 청중들이 음악에 맞춰 박수를 치는 모습은 사실 빈 필에서 시작된 광경입니다. 이런 빈 필의 전통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라데츠키 행진곡이 만들어진 사연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빈 사람들처럼도 마냥 신나서 따라 하기에는 조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이 곡의 제목이 된 라데츠키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북부 이탈리아의 독립운동을 진압한 장군입니다. 1848년 3월, 부패한 메테르니히 전제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시민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정부의 편에 섰던 요한 슈트라우스는 정부군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해 라데츠키의 이름을 붙여 이곡을 작곡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반혁명적인 작곡가로 낙인찍혀 한때 빈을 떠나 잠시 런던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씩씩한 기상을 드러내는 행진곡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곡임에 틀림없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봐도 조금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한스트라우스(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ohann_Strauss_jr_anni_60.JPG)
사실 라데츠키 행진곡을 빼면 빈 필 신년음악회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들은 왈츠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빈 필이, 아니 빈 사람들이 그토록 왈츠를 좋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8세기가 미뉴에트의 시대였다면 19세기는 왈츠의 시대였습니다. 왈츠는 오스트리아 농민들이 즐겨 추던 랜틀러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와 대령이 무도회장 밖에서 추는 이 춤이 바로 랜틀러입니다. 왈츠의 유행은 마치 전염병처럼 온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들 말고도 여유가 생긴 중산층과 시민계급이 무도회를 드나들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녀가 함께 추는 사교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신체접촉이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의도적으로 왈츠의 열기를 고조시켰다는 설도 있습니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모인 각국 대표들을 날마다 무도회에 초대해 왈츠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자신이 의도한 대로 회의를 이끌어가려 했다는 겁니다.
출처 : http://www.dancearchives.net/2012/04/26/viennese-waltz-please-use-the-right-music-from-michael-herdlitzka/
미뉴에트가 그랬던 것처럼 왈츠 역시 춤곡으로 뿐만 아니라 기악곡으로 따로 작곡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쇼팽이 피아노 소품으로 작곡한 '강아지 왈츠'는 마치 장난을 치는 강아지의 재빠른 움직임을 묘사한 듯 경쾌합니다. 라벨이 작곡한 왈츠 "라 발스"는 장엄하면서도 풍자적인 느낌을 주는가 하면,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처럼 흐느끼는 듯한 왈츠도 있습니다. 이처럼 왈츠는 너무나도 다양한 느낌과 감흥으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왈츠로 몸살을 알았던 그 시절 유럽에서는 시골의 농부들조차 과년한 딸이 시집을 가지 못해 고민이라면 주저 없이 무도회를 열었습니다. 인근의 총각들을 다 불러들여 노처녀 딸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겁니다. 서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손과 손을 맞잡고 음악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다보면 서로의 성격과 서로에 대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유 있는 집안에서 손님들을 부르는 자리라면 당연히 무도회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초대해 먼저 다이닝룸에서 안주인이 마련한 만찬을 맛본 뒤, 식사가 끝나면 볼룸으로 자리를 옮겨 무도회를 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너나없이 무도회를 즐겼습니다. 그러니 발레는 물론이고 오페라에서도 무도회 장면이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에는 무도회 장면이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왈츠를 사랑했던 데에는 악보에 다 담을 수 없는 짜릿함도 한 몫 했습니다. 세 박자 가운데 두 번째 박자가 살짝 앞으로 당겨지는 느낌인데 한 번이라도 제대로 왈츠를 춰보면 몸으로 바로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하나, 둘, 셋, 이렇게 원을 그리면서 돌게 되면 당연히 시작은 당겨지고, 그 뒤는 쳐지기 마련이니 그렇게 흐르는 음악에 몸을 싣고 리듬을 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이 나고 흥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빈 필이 연주하는 왈츠의 리듬은 다른 나라, 다른 도시의 오케스트라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1941년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에 의해 시작되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는 빈에서 태어나 자랐거나, 빈에서 활동하고 널리 사랑받았던 작곡가들의 작품을 주로 연주합니다. 왈츠의 시대를 활짝 열어 '왈츠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그 아들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그리고 요제프 라너와 칼 미하엘 치러 등의 작곡가들이 대표적이고 여기에 빈 필의 창립자였던 오토 니콜라이의 오페라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서곡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또 자주 그 작품이 연주되는 작곡가는 단연, '왈츠의 황제'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입니다.
출처 : http://www.daeguoperahouse.org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히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그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과 더불어 거의 해마다 거르지 않고 연주되는 곡입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할 때 청중들이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는 것이 전통인 것처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연주 직전, 지휘자와 빈 필 단원들이 청중들에게 새해인사를 건넨 다음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 관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주옥같은 왈츠 곡들 가운데 왜 하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해마다 연주하는 것일까요? 1866년,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신흥강국,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렀지만 치욕스럽게도 불과 7주 만에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한 때 프랑스와 더불어 유럽의 운명을 쥐락펴락 했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패배였기에 국민들의 수치심과 상실감 또한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절망에 빠진 동포들의 상처를 달래고 사기를 북돋우고자 빈 남성합창단은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작곡을 의뢰했고 그 결과, 합창으로 노래하는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1867년 2월에 있었던 초연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슈트라우스는 합창을 빼고 관현악으로만 연주하는 개정판을 선보였고 사람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후로는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개정판이 주로 연주되었고 날이 갈수록 그 호응과 명성은 높아만 갔습니다.
당시 이 곡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요한 슈트라우스의 부인이 브람스를 만나 사인을 부탁하자 브람스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몇 마디를 음표로 그린 다음, '불행하게도 브람스의 작품이 아님' 이란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이 곡은 브람스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국민 모두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고, 오늘날에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곡은 빈 필의 신년음악회 중계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언제부터인가 새해벽두에 안방에서 TV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들으며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한해를 시작하던 일상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습니다. 방송이 온통 시청률과 그에 따른 광고수입에 매달리면서부터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빈 필의 신년음악회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누군가가 앞장 서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얼마 전부터 몇몇 영화상영관에 따로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스크린으로 중계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전국으로 그 규모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시작된 빈 필의 신년음악회는, 윈치 않는 전쟁의 악몽으로 괴로워하던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폐허 속에서 무너져 내린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다시금 일어설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신년음악회를 보고 있노라면 '음악이, 그리고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위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올 한해 역시 여러분 모두 음악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또 음악으로 서로를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출처 : http://classictong.com/artist/264
'이건음악회 Talk Talk > 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삶이란? (0) | 2018.02.21 |
---|---|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예술경영이란? (0) | 2018.02.20 |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리더십이란? (0) | 2018.01.23 |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독일은 왜 음악강국이며 문화 선진국인가 (2) | 2018.01.13 |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불굴의 의지로 절망을 이겨낸 음악사의 위대한 걸작 (0) | 2017.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