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일들 가운데 전쟁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끔찍한 일을 겪고도 주저앉거나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고 일어섰는가 하면 그 과정에서 참으로 놀라운 결실과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음악가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 가운데 작곡가 모리스 라벨과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출처 : 모리스 라벨 - 나무위키
라벨이라면 드뷔시와 더불어 프랑스 인상주의 악파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을 잘 아는 시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오히려 20세기 분석철학의 대가로 알고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텐데 사실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호였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후원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던 명문가였습니다. 친가쪽은 유태계였지만 개신교로 개종했고 외가는 대대로 카톨릭 집안이었으며 아버지 카를은 철강 업계의 거물이었고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피아니스트이자 예술 후원자였습니다.
출처 :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 나무위키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물론 브루노 발터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음악가들이 그의 집안을 드나들었고 덕분에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던 어린 파울은 이들과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쇤베르크와 카잘스 등 음악가를 주로 후원했지만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클림트가 그의 여동생 마르가리테의 초상화를 그렸는가 하면 막내동생 루드비히는 부모에게 받은 유산을 예술가 후원금으로 내놓아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1887년 5월 11일 비인에서 태어난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폴란드의 거장 테오도르 레세트츠키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1913년에 성공적인 데뷔 연주회를 치르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듬해 발발한 제 1차 세계대전은 전도유망한 이 젊은 피아니스트의 장래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기병대 소위로 입대한 그는 폴란드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전투에서의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지만 깨져버린 그의 꿈과 그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는 결코 아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bfmi.at/documentary_all_in_one_hand_the_pianist_paul_wittgenstein.html
파울 비트겐슈타인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초인적인 의지와 불굴의 집념은 최악의 상황에서 그를 다시 일으켜세웠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왼손만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계속 걷기로 마음을 굳혔고 끊임없이 나무 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마침 포로들의 처우를 감시하던 중립국 덴마크 외교관이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수용소에 있으면서 피아노 연습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비인으로 돌아간 비트겐슈타인은 가장 먼저 그의 스승 요제프 라보르와 함께 기존의 피아노 작품을 왼손만으로 칠 수 있도록 편곡하는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만든 곡으로 연주회를 열어 점점 알려지고 호응을 받게 되자 그는 유명 작곡가들에게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위촉하기 시작했습니다. 벤자민 브리튼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파울 힌데미트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등이 그를 위해 작품을 썼고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와 모리스 라벨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라벨의 협주곡이 가장 두드러졌고 비트겐슈타인의 이름 또한 이 곡으로 말미암아 널리, 또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s://crosseyedpianist.com/tag/paul-wittgenstein/
Paul Wittgenstein
라벨의 협주곡이 오늘날까지도 깊은 공감을 얻으며 널리 사랑받는 까닭은 아무래도 그 스스로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어 다른 누구보다 그의 느낌과 생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몸이 약해 가까스로 입대한 라벨은 비록 총을 들고 전투에 나서진 않았지만 운전병으로 전장을 누비며 부상병을 후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기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신음하고 절규하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공포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이전의 어떤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충격 때문인지 종전 이후 라벨이 내놓은 작품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www.icareifyoulisten.com/2013/03/french-composers-names-maurice-ravel/
모리스 라벨
1875년 3월 7일 스페인과 인접한 프랑스의 소도시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난 모리스 라벨의 아버지는 철도 기사로 프랑스계 스위스인이었고 어머니는 바스크 혈통의 스페인계였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파리로 이사를 가서 줄곧 그곳에서 자라고 공부했던 라벨은 상당한 수준의 음악애호가였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작곡가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화성을 배웠습니다. 열네살에 파리 음악원 피아노 전공 예비과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였고 2년 후에는 정규과정에 들어가 피아노와 화성을 배웠으며 포레에게서 작곡을 사사하였습니다. 재학 당시 작곡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벌써부터 악단의 주목을 받았고 피아노곡 "물의 유희"와 현악 사중주곡으로 일찌감치 그 이름을 드높였습니다.
비록 프랑스의 작곡가 지망생이면 누구나 동경하는 "로마대상"에 여러 차례 응모하여 우승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오히려 그 결과가 부당하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 음악원 원장이 사임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면서 라벨의 명성과 위상은 더욱 더 확고해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디아길레프가 위촉한 발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발표하여 그것이 그의 정점인가 싶었지만 피아노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과 관현악곡 "라 발스", 그리고 라벨의 상징과도 같은 "볼레로"는 물론 최후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이 모두 전장에서 돌아와서 죽기 전까지 내놓은 그의 대표작들입니다.
출처 : http://totallyhistory.com/maurice-ravel/
전쟁의 경험과 기억이 라벨에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쳤는지를 가늠할 순 없지만 그 이전의 작품들과 이후의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확실하게 달라진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감정의 개입을 자제하여 정교하고 치밀하게 짠 틀 속에 가지런히 두려는 의지는 전과 다름 없지만 촘촘한 틀 사이로 뭔가 터질듯이 삐져 나오는 싶더니 더러는 그 속이 휑하니 비어서 가슴이 시리고 허전합니다. 그러더니 끝내 그 틀마저 비틀어서 쥐어짜는 듯한 아픔이 살갗으로 스며들어 온몸이 오그라듭니다.
이런 느낌은 달랑 한 악장으로 이루어졌지만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콘트라베이스에 실린 콘트라바순의 소리는 마치 심해를 미끌어지듯 헤엄치는 고래의 울음인 듯 끝없이 가라앉아 너무나 깊고 어두운가 하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과 조각난 기억과 감정이 여기저기 흩어져 아스라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피아노의 카덴차가 나타나 흐느끼다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라벨은, 또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삶의 고통을 견디고 이겨냈던 겁니다. "가장 어렵고도 본질적인 것은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고난 중에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모든 것이며 또한 신이기 때문이며, 삶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살아서 지옥을 건넌 자만이 죽어서 천국에 들 수 있다고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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