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 경기에서는 투수가 마운드에 오를 때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면 그 선수만의 음악을 틀어줍니다. 대게는 해당 선수의 취향이나 이미지에 맞는 음악을 고르기 마련인데, 힙합이나 록 음악, 혹은 라틴 음악과 댄스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지만 지금껏 클래식 음악을 쓰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피츠버그의 지역 언론 ‘피츠버그 포스트 가제트’의 클래식 음악 전문 칼럼니스트 리즈 블룸은 “야구보다 더 클래식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칼럼을 통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선수들의 등장 음악으로 어울릴 만한 클래식 음악을 제안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건너가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강정호 선수에게는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니진스키가 안무한 <봄의 제전> 발레 장면(출처 : http://blog.daum.net/spdjcj/2524)
1913년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이 초연한 발레 "봄의 제전"은 막이 열리고 얼마지 않아 객석이 술렁이고 야유가 쏟아지며 더러는 도중에 나갔는가 하면 심지어는 관객들 사이에 언쟁과 폭력이 벌어져 경찰까지 나서야 했던 희대의 화제작이었습니다. 봄을 맞이한 원시부족의 젊은이들이 남녀가 서로 어울리는가 싶더니 짝을 찾는 약탈이 벌어지고 뒤이어 등장한 원로들은 그들 가운데 순결한 처녀를 골라 봄의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설정부터가 파격인데다가 갈등과 반전도 없이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라는 것도 전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막이 오르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나른하고 몽롱한 파곳 소리에 이어 갑자기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들이 선율도 화성도 팽개치고 마치 태고의 전사들이 결전을 앞두고 흥분하여 방패를 두들기며 발을 구르는 듯 도발적이고 충동적인 리듬을 거듭 반복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당시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짱 다리로 걷다가 제자리에서 뜀박질까지 하는 부족 처녀들의 군무는 우아한 발레는 고사하고 아무리 봐도 도저히 춤이라고 할 수 없는 기괴한 몸짓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연을 준비한 당사자들은 이런 파장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주목을 받으리라 기대했다는 사실입니다. 소동이 벌어지자 디아길레프는 객석의 조명을 켰다가 다시 끄기를 반복하며 관객들을 진정시키려 했다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알고보니 그것이야말로 디아길레프가 의도했던 치밀한 각본이었다는 정황과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야말로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노이즈 마케팅'의 원조였던 셈입니다.
출처 : https://brunch.co.kr/@yoonballet/36
"봄의 제전"은 발레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기존의 통념들을 뒤집으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태초의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리듬이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면서 선율과 화성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게 되었고 기존의 규칙적인 박자에서 벗어난 다양한 리듬들이 시도되고 수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원시주의"라 일컬어진 새로운 음악의 선구자로 떠올랐고 한 옥타브 안의 12 반음을 빠짐없이 사용한다는 "12음 기법"의 창시자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더불어 20세기 현대음악의 가장 중요한 창시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출처 :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1111)
비단 음악이나 발레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이 처한 상황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중이었고 더 이상 타협이나 절충으로 늦추거나 돌이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음악에서 쇤베르크의 선택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새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고 스트라빈스키의 대안은 지금까지에 연연하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의 이런 생각은 내면에 잠재된 천성이나 본능도 아닐 뿐더러 자라면서 다져진 신념이나 철학도 아니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갔다고는 하나 사실은 시대의 흐름을 먼저 읽고 그 길목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전작인 "불새"와 "페트루슈카"에서는 러시아의 설화와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했는가 하면 1차 세계대전으로 대규모 공연이 어렵게 되자 고전주의 시대 이전의 실내악을 되살리는 "신고전주의"를 내세웠고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12음 기법"을 활용하는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창작은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이자 삶의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작업할 때도 그는 마치 직장인처럼 날마다 같은 시간에 작업실로 들어갔다가 같은 시간에 나오는 습관을 지켰으며 기존의 다른 음악에서 무엇인가를 가져다 쓰는 일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표절과 인용에 관한 한 음악사를 통털어 헨델과 쌍벽을 이루는 경지라고 하지만 서로가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표절에 대한 인식이 후대로 갈수록 엄격해졌음을 감안하면 스트라빈스키가 단연 한수 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1882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러시아를 대표한다고 할 만큼 뛰어난 베이스 가수였던 페드로 스트라빈스키의 아들로 태어난 이고르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대에 진학했지만 타고난 피는 속일 수 없어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음악에만 온통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러다 당대를 대표하는 러시아 작곡가이자 명교수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눈에 든 그는 스승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가르침을 받아 나날이 성장했고 마침내 20세기 발레의 모든 것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개척했던 제작자이자 흥행사 디아길레프의 인정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과 함께 파리를 정복하고 세계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마치 아버지라도 되는 듯이 스트라빈스키를 끔찍이 아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였건만 그토록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디아길레프에게는 간절한 꿈을 접도록 냉정하게 충고했다고 하니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를 일입니다.
러시아의 작곡가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출처 : http://blog.daum.net/2102023/2)
"봄의 제전"의 기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어낼 능력을 가졌던 스트라빈스키가 있었고 그에게 재능의 씨앗을 심어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마침 같은 시대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준 림스키코르사코가 있었는가 하면 역시 그의 가능성을 인정하여 마음껏 그 능력을 펼칠 기회를 준 디아길레프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에는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예술가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무모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순 없지만 강렬하게 그들을 이끄는 본능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것은 지성에 길들여져 오래도록 숨죽이고 있었던 야성이었습니다. 야성을 깨워 지성을 마주하니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찾았습니다. 리즈 볼룸이 강정호의 등장음악으로 "봄의 제전"을 추천한 까닭을 짐작해 봅니다. 메이저 리그에 주눅들지 말고 야구의 기본과 스스로의 본능에 충실하라는 말이겠지요. 그리고 스트라빈스키가 저 혼자 이국 땅 파리를 정복하지 않았듯이 그 나머지는 동료들의 능력과 도움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겠지요. 꿈보다 해몽이었나요? 음악이든 야구든 사람 사는 게 어디 다를 리가 있을까요? 힘들수록 복잡할수록 근본을 찾아 초심으로 돌아가야겠지요. 혼자가 아니라 함께 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러질 못하니 그게 또한 사람이겠지요. 그러니 날마다 기억을 하고 또 다짐을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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