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딸 아이 결혼식을 치르면서 결혼식 음악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에 정착된 서양식 결혼식에서는 축가, 혹은 축하연주와 더불어 신부가 입장할 때와 신랑이 입장할 때, 신랑 신부가 함께 퇴장할 때 음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부가 입장할 때의 음악과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의 음악은 어느 결혼식에서 같은 곡을 연주하는 것이 마치 약속인 듯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음악이 정확하게 무슨 음악인지, 무슨 까닭으로 누가 언제부터 어떻게 결혼식에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아무도 묻거나 따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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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 연주하는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에서 성배를 지키는 기사 로엔그린과 엘자의 결혼식을 축복하며 부르는 ‘축혼 합창곡’입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 연주하는 곡은 멘델스존이 세익스피어의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해 작곡한 부수음악 가운데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 연주하는 “결혼 행진곡”입니다. 이 두 곡이 결혼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58년, 1월 25일,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있었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빅토리아 공주와 프로이센 왕국의 왕자 프리드리히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신부가 입장할 때 “로엔그린”의 “축혼 합창곡”을 연주한 것은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던 빅토리아 공주가 그 곡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퇴장 때의 음악으로 선택한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은 프로이센 왕실을 배려한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이자 프리드리히 왕자의 큰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연극 “한 여름 밤의 꿈”의 공연을 위해 멘델스존에게 음악을 부탁했고 그 결과 1843년, 포츠담의 궁전에서 연극과 함께 멘델스존의 부수음악 “한 여름 밤의 꿈”이 초연되었기에 프로이센 왕실 사람 누구나 이 음악을 알고 있었고 또 좋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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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세를 만방에 떨쳤던 그 당시 영국 왕실의 결혼식은 만인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된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걸 모방하려는 사람들의 열망 또한 클 수밖에 없었기에 한 동안 그 음악까지 너나없이 따라 하면서 그 유행이 유럽은 물론 전 세계로 널리 퍼진 것입니다. 추측컨대 그 유행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전해졌고 1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그 영문도 모르는 채 무작정 따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결혼식의 모양새부터가 그런 것처럼 그 음악까지도 지금껏 그래왔으니 그냥 그러자는 식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 여기저기에 저 나름 다 달라야 할 것들이, 그래서 뜻 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들이 그저 그렇게 밋밋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따라 하더라도 우리가 분명히 알고 또 기억해야 할 것은 160년 전에 있었던 결혼식의 그 음악들은 전부터 다른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연주했던 곡이 아니라 바로 그 결혼식의 당사자들이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어 선택한 음악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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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이 결혼식에 들어갈 음악만큼은 예식의 주인공들에게 먼저 물어 보고 그들에게 보다 의미 있는 곡들을 골라서 잘 알고 지내는 연주자들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을 즈음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의 지휘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초대 총장 이강숙 선생의 한자 호 “낙촌”을 우리말로 풀어 쓴 이름을 붙인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은 이강숙 선생과 작곡가 이건용 선생, 지휘자 홍준철이 앞장서고 거기에 저의 작은 힘을 보태서 창단한 아마추어 합창단입니다. 사람 사는 마을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함께 모여 노래 부르는 세상을 꿈꾸며 만든 이 합창단은 지난 20여 년 동안 그 꿈을 쫓아 하루도 빠짐없이 있는 힘을 다해왔습니다.
통화의 내용은 축하 인사와 함께 단원들의 뜻이라며 결혼식의 모든 음악 순서를 합창단에 맡겨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서 결혼식에 이 보다 더 뜻 깊은 선물이 없을 것이라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지휘자가 생각하는 대략의 곡목을 전달 받아 예식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와 의논을 했고 그 결과, 전에 없던 새롭고 뜻 깊은 결혼식 음악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식이 있던 날 합창단이 모차르트의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를 부르기 시작하자 바로 얼마 전까지 어수선했던 식장의 분위기는 한 순간에 마치 다른 곳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차분하고 엄숙해졌습니다. 이어서 원래의 곡 그대로 합창으로 부르는 바그너의 “축혼 행진곡”에 맞춰 딸 아이 손을 잡고 식장 안으로 들어섰고 축가와 퇴장까지 모두 합창단의 노래로 예식을 진행하였습니다. 축가 “여기 사람들 있네”와 퇴장 음악 “문을 열어라”는 모두 합창단의 음악 감독인 이건용 선생의 곡으로 딸아이는 물론 하객들 모두에게 특별하고 색다른 감동의 시간을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식의 축가라면 언제나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신부에게 바치는 축가를 직접 연주했습니다. 슈만의 가곡 “헌정”을 리스트가 피아노 연주용으로 개작한 곡이었습니다. 피아노에 앉기 전에 하객들을 향해 ‘신부에게 꼭 노래로 이 곡을 불러주고 싶었지만 노래를 잘 못해 피아노로 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전에 보고 들었던 김선욱의 그 어떤 연주보다 몸과 마음을 다한 연주였기에 오히려 가사가 없어 호소하는 듯 더 간절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결혼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하는 연주회가 있어 김선욱에게 결혼식 축가로 연주했던 “헌정”을 앙코르로 연주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습니다. ‘그 곡은 오직 한 사람 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쳤기에 앞으로 아내 말고 그 누구 앞에서도 결코 연주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누구나 함께 모여 노래 부르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래서 말인데 결혼식 하객들과 함께 부르며 신랑 신부를 축복하는 축가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살면서 거치기 마련인 중요한 순간마다 특별하고 뜻 깊은 음악이 늘 함께 하여 세월이 지나도 그 때를 언제나 벅차고 뿌듯했던 시간으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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