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르 토스카니니] 육체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아 예기치 않았던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를 이룬 기적을 이룬 음악가[아르투르 토스카니니] 육체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아 예기치 않았던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를 이룬 기적을 이룬 음악가

Posted at 2013.04.01 13:37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47)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사를 통털어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거장들이라면 몇몇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육체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아 예기치 않았던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를 이룬 기적을 이룬 음악가는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단 한 사람 뿐입니다. 1886630일 토스카니니가 첼리스트로 몸담고 있던 로시 오페라단과 오케스트라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오페라 아이다를 공연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휘자 레오폴도 밍게스가 단원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가수들까지 파업에 들어가자 급하게 다른 지휘자를 구했지만 그마저 막이 오르기 직전에 말다툼을 벌여 느닷없이 공연장을 떠나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지휘자 아리스티데 벤츄리가 지휘대에 올랐지만 그 마저도 청중들의 야유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지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단원들이 지목한 마지막 희망이 첼리스트인 토스카니니였습니다. 지독한 근시 때문에 보면대에 놓인 악보를 읽을 수 없었던 그는 언제나 연주해야 할 곡을 몽땅 다 외우고 있었기에 그라면 혹시 하는 절박한 마음이었겠지요. 그렇게 스무살 밖에 안된 애송이 첼리스트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생애 처음으로 지휘대에 오르는 위기에 처했지만 일막이 끝나자 청중들의 기립박수를 받는 기적을 이루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아흔 살로 세상을 떠난 1957년까지 무려 70년을 지휘자로 살면서 감히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숱한 업적을 쌓았고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지휘자들이 너나없이 보면대 없이 지휘대에 오르는 모험을 감행하게 된 것은 그 옛날 토스카니니의 전설로부터 비롯된 일입니다. 카라얀조차도 초창기에 토스카니니와 흡사한 지휘 동작으로 토스카라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푸르트벵글러가 그토록 카라얀을 싫어했던 이유 중에는 이것도 들어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Arturo Toscanini

"Overture Tannhauser" 1/2


 

 

20세기 후반의 음악계를 카라얀과 번스타인이라는 두 지휘자가 이끌었다면 20세기 전반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도 거의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습니다. 토스카니니가 극복해야 했던 치명적인 장애는 근시만이 아니었지요. 저명한 고고학자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푸르트벵글러와는 달리 재봉사였던 토스카니니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했을 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 문란했습니다. 끼니조차 걸러야 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어머니의 키스 한 번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다고 했습니다. 가정교사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며 폭넓은 여행으로 견문까지 넓혔던 푸르트벵글러와는 달리 토스카니니는 누구나 받는 의무교육 말고 나머지 모두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푸르트벵글러의 음악이 학구적이고 분석적이라면 토스카니니의 음악은 직관적이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가 젊은 나이에 베를린 필에 입성하여 평생을 그들과 더불어 왕국을 건설했던 반면 토스카니니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늘 투쟁하고 개척하였습니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와 타협하면서 왕국을 지켰지만 토스카니니는 무솔리니 정권이 파시스트 당가를 연주하라고 요구하자 이런 곡은 음악도 아니다며 거부하였고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비난하며 독일에서의 연주도 거부하였습니다.

 

 

 

 

그가 치열한 투쟁으로 이루어낸 업적은 예술가의 양심을 지키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브라질에서의 기적 같은 데뷔무대 이후 토리노의 오페라 극장에서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898년부터 10년 동안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을 이끌면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습니다. 너무나도 권위적이고 보수적이었던 라 스칼라 무대에 처음으로 그 시대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베리스모 오페라를 올렸는가 하면 바그너와 차이코프스키, 베를리오즈와 같은 다른 나라 작곡가들의 작품도 공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토스카니니가 세계 초연한 작품들만도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조르다노의 몽유병 여인”, 푸치니의 라 보엠서부의 아가씨”, “투란도트등 음악사의 기념비적인 걸작들이 즐비합니다.

 

 

 

 

 

그는 또한 오페라 극장의 구시대적인 전통도 바꾸려했습니다. 여성들이 모자를 쓰고 관람하는 것을 금지했고 오페라 끝에 발레를 무대에 올리는 관습도 폐지했습니다. 무대의 막도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고 좌우에서 가운데로 여닫을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공연 도중의 앙코르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아리아가 끝나고 청중들이 앙코르를 외치면 그 곡을 다시 부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한번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서 공연할 때 토스카니니가 청중들의 앙코르 요청을 무시하자 그곳 사람들이 토스카니니에게 달려드는 아찔한 사건을 겪기도 했지요. 다행히 토스카니니의 용기를 높이 산 마피아의 두목이 말리고 나서는 바람에 봉변을 모면했지만 타협을 모르는 토스카니니의 고집에는 라 스칼라도 등을 돌리고 맙니다. 1908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 그를 불렀지만 거기서도 그의 집념과 열정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오페라 가수들을 끊임없이 다그쳤고 완벽한 무대를 위해 예산과 현실을 무시한 요구를 했습니다. 결국 1920년 다시 라 스칼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파시스트 정권과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19264월 푸치니가 미완성으로 남긴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를 그의 제자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하여 라 스칼라에서 초연하던 날,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니는 후반부에 이르러 갑자기 연주를 중단하고 청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는 여기서 펜을 놓았습니다.” 객석에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앉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모름지기 음악은 작곡가가 의도한 그대로여야 하고 그것은 악보에 그려진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그의 고집은 그를 또 다시 타향으로 내몰았습니다.

 

 

 

 

1926년부터 뉴욕 필을 맡은 토스카니니는 1930년 유럽 투어를 시도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그해와 그 다음해 바이로이트에 초청되어 그 자신은 독일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지휘자가 되었고, 뉴욕 필은 비독일 오케스트라로 바이로이트에서 연주한 최초의 오케스트라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봉을 잡았고 1936년에는 이스라엘 필의 전신인 팔레스타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인 창단 연주회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193670세를 바라보는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을 떠나자 사람들은 이제 그가 은퇴를 하는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1937년 미국의 NBC 방송은 오직 한 사람 토스카니니만을 위한 전대미문의 NBC 심포니를 창단하여 그에게 맡겼고 그들의 연주를 전파에 실어 미국 전역에 내보냈습니다. 195488세의 토스카니니가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지휘하던 중 처음으로 지휘봉이 멈추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잠시 후 의식을 되찾은 그는 끝까지 무사히 연주를 마쳤지만 그 후로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열적이었던 그는 평생을 네 시간 이상 자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아픈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80이 넘어서도 늘 두 계단을 한 번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연습을 하다 성에 차지 않으면 물건을 던지는 버릇이 있었고 어느 날 시계를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이 나자 누군가 싸구려 시계와 고급시계를 함께 선물하면서 연습용연주용이라는 쪽지를 함께 넣어두었다는 일화도 있지요. 말년에는 그 스스로도 지쳤는지 나는 분명 노인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은 17세 소년의 피를 주어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라며 탄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 토스카니니는 일생 동안 53명 이상의 작곡가가 남긴 117곡 이상의 오페라와 175명 이상의 작곡가가 남긴 480곡 이상의 관현악곡을 정복하였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1. 멋진... 지휘자네요...^^
  2. 노피나라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3. 김에송
    와... 토스카니니에 대한 일화는 익히 알고있었지만 이정도로 열정이 가득한 사람인줄은 몰랐네요..

    저는 토스카니니가 참 좋더라구요..

    푸르트뱅글러에겐 미안하지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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