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의 교훈, 폴란드의 교훈
일년 365일 가운데 해가 바뀌고 때가 바뀌는 날이 아닌 다음에야 8월 15일 만큼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광복절인 그날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어 죽고 죽이고 다치고 아프게 했던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기쁘지만 기뻐할 수 없는 날이고 슬프지만 슬퍼할 수 없는 날이라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날이 바로 8월 15일입니다.
출처 : http://sharehows.com/gwangbokjeol-with-numbers
세계 어느 곳의 누구라서 해서 더하고 덜하지 않겠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서서 가장 참혹하고 처참한 일들을 거듭 겪어야 했던 나라라고 하면 폴란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독일과 러시아 양국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두 동강이 난 채로 짓밟히고 무너졌지만 전쟁이 끝나기까지 나라 안팎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펼치며 누구보다 큰 희생을 치뤄야 했던 이들이 폴란드 국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소련이었던 러시아와 중국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나라라고 하지만 국민 전체 숫자에 비례한 희생자의 수를 따진다면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출처 : http://histclo.com/essay/war/ww2/cou/pol/w2p-dev.html
폴란드의 비극은 그때 뿐만이 아닙니다.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탓에 주변국들의 흥망성쇄와 이해관계에 따라 늘 전쟁과 부침을 거듭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남의 나라 전쟁에까지 앞장 서서 용맹을 떨친 이들이 폴란드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은 끝내 되돌릴 수 없었고 마침내 1795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의 합의로 나라가 셋으로 쪼개져서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다시 나라를 찾기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무모하리 만큼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저항과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잃은 1795년부터 세계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한 폴란드 이주민들의 숫자는 오늘날 천만명을 훌쩍 넘어 현재 이천만으로 추정되는 화교 다음의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 http://www.allworldwars.com/German-World-War-I-Postcards-Part-I.html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총칼을 빼앗긴 폴란드 군인들 가운데는 다른 나라의 군대에 들어가 앞날을 도모하는 이들이 많았고 때마침 적국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나중에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나폴레옹 군대에 합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들 대부분은 나라를 잃기 직전 얀 헨릭 돔브롭스키 장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코슈추슈코 봉기에 참여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거사가 실패하자 돔브롭스키 장군은 나폴레옹과의 담판 끝에 폴란드 군단을 결성하여 롬바르디아 공화국 수비대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폴란드 망명 단체를 이끌었던 시인 유제프 비비츠키는 누구보다 이 소식을 반기며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797년 작자 미상의 마주르카 선율에 가사를 붙여 폴란드 군단을 위한 군가를 만들었고 이것이 폴란드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돔브롭스키 마주르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1927년 마침내 이 노래는 폴란드의 국가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
(폴란드어: Jeszcze Polska nie zginęła 예슈체 폴스카 니에 즈기네와 또는 《동브로프스키의 마주르카》(폴란드어: Mazurek Dąbrowskiego 마주레크 동브로프스키에고는 폴란드의 국가이다
마주르카는 폴란드 고유의 민속 춤곡으로 근대 이후 폴레네이즈와 더불어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져 폴란드를 대표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조국 폴란드를 사랑했던 쇼팽도 파리에 살면서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마주르카를 작곡하여 짧은 생애 동안 50곡이 넘는 마주르카를 남겼습니다. 오늘날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선망하는 쇼팽 콩쿠르의 참가자들이 결선에 오르기까지는 쇼팽이 작곡한 여러 장르의 소품들을 차례로 섭렵하여 기량을 겨루게 되지만 언제나 그 마지막 관문에는 마주르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폴란드인들에게 마주르카는 마치 우리 겨레의 아리랑인 듯 애틋하기까지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도 그렇고, 그래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 또한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백여년의 차이가 있지만 주변국들의 이해 관계가 맞닿아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맥없이 나라를 잃어야 했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랬지만 그들 가운데도 누구는 러시아에 기대고 누구는 프로이센에 기대어 꼴난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나라를 잃고서도 다시 프랑스를 믿고 나폴레옹을 따랐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언제나 배신 뿐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셋으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지만 일본이 청나라, 러시아와 싸워서 이기지 못했다면, 그래서 끝내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섰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디로 굴러갔을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나라를 되찾고자 일본과 싸우는 남의 나라 군대에 들어가 앞장 서서 싸워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기막힌 처지까지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옛날 고구려가 만주를 넘어 중원을 위협했던 것처럼 폴란드도 한 때는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넓고 비옥한 땅을 가진 강대국이었고 러시아를 수없이 침략하고 약탈했던 나라였습니다. 1795년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어깨를 맞대며 폴란드를 나눠가졌던 독일(당시의 프로이센)은 그 일이 있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는 처지였지만 훗날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한 나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도 다시 나라를 찾았지만 이런 역사의 흔적은 이들 나라의 국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출처 : https://www.allenrec.com/thinking-of-relocating-to-poland/
공교롭게도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국가가 처음 만들어진 것도 1797년의 일입니다. 그해 2월 12일, 프란츠 1세의 생일을 맞이한 황제 프란츠 1세에게 하이든이 바친 곡에 로렌츠 레오폴트 하슈카(Lorenz Leopold Haschka, 1749-1827)가 가사를 붙여 “신이시여, 프란츠 황제를 지켜주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라는 노래가 되었고 이후 황실의 공식행사마다 황제의 이름만 바꾸어 이 노래를 부르면서 공식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이든은 황제에게 바친 그 선율을 현악사중주(Op. 76의 3) 제 2악장의 주제 선율로 사용하였고 그 때문에 이곡은 “황제”라는 부제가 붙어 오늘날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독일에게 합병된 오스트리아는 그들의 국가마저 독일에게 빼앗겼고 한 때 오스트리아의 국가였던 그 노래는 이제 가사만 바뀌어 독일의 국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대신 오스트리아는 1946년 이후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칸타타” 1부 ‘단결의 노래’의 음악에 여류시인 프레라도비치의 가사를 붙인 “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 Land am Strom)”를 새로운 국가로 제정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는 늘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인가 하면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영원한 강자도 없을 뿐더러 영원한 약자도 없습니다. 세상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키려면 변해야 합니다. 변하려면 버려야 합니다.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어야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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