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이루지 못한 금호문화재단 이사장 (고)박성용 회장의 꿈
오래 전 브리태니커 사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최소한 그 사전을 만든 사회와 문화권에서는 예술의 후원자들을 예술가들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예술 후원자들의 이름과 업적이 사전 안에 수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떤 이가 여기에 해당될까 생각해보지만 그다지 많은 사람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음악 분야로 좁혀 보면 그 숫자는 더 줄어들고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박성용 회장입니다. 금호그룹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금호현악사중주단을 창단하여 지원했고 무엇보다 금호문화재단과 금호아트홀을 통해 우리의 음악영재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박성용 회장의 잘 알려진 삶과 업적이 아니라 그 분을 직접 만나서 보고 들은 것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고 박성용 회장(출처 - http://www.ohmynews.com)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문을 열고 얼마지 않아 발전재단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금호그룹의 박성용 회장은 재단의 이사로 추대되었고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저와의 인연은 그때부터였습니다. 늘 재단 회의에서만 뵙다가 금호그룹 회장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선 회장실이라면 당연히 꼭대기 층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낮은 층에 자리 잡고 있어 의아했습니다. 비서실을 찾았더니 한 사람의 비서가 회장실뿐만 아니라 부회장실까지 다 담당하고 있어 당황했고 회장실로 들어섰더니 너무나 단촐하고 소박한 집기를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출처 : http://www.kartsfund.kr/
그 다음 만남은 어느 어색한 회의에서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수출 천억불을 달성했다고 해서 그 업적을 널리 알리고 자랑하는 문화행사를 만들자는 자리였습니다. 주무 장관과 관계 기관 종사자, 그리고 재계의 몇몇 분들이 참석하였고 그 가운데 박성용 회장도 있었습니다. 회의라기보다 정부의 의지와 행사의 내용을 전달하고 협조를 구하는 모임이었기에 다들 별 다른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고 주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모양새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제가 자연스럽게 국가 경제와 기업 경영으로 모아지자 다들 한마디씩 거들면서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마침내 박성용 회장에게 순서가 돌아가자 그는 돌연 정부의 경제 정책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박 회장 스스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앉은 식탁 위에 흩어진 빵부스러기를 손바닥으로 긁어 모아 입안에 털어 넣는 행동까지도 전혀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한 적이 있지만 참 잘 먹었다 싶은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점심은 주로 광화문 회사 근처의 평범한 이탈리아 음식점이었고 그는 늘 똑 같은 파스타를 주문했기에 초대 받은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그랬듯이 식탁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입안에 털어 넣었고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이렇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지만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대기업 회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린다 싶은 화려함이나 위압감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검소하고 소탈한가 하면 고지식하기까지 한 성격이 마치 학자를 보는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만난 자리에서 '경영자보다는 교수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꺼냈더니 금방 손사래를 치며 '짧지만 공직자로도 일해보고 다른 일도 해봤지만 대학에서 교수로 있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말하길 '한 시간 강의를 준비하려면 일주일을 꼬박 연구실에 틀어박혀 준비를 해야 했다'며 '그 때는 정말 잠잘 시간도 없었다'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출처 : http://www.dailian.co.kr/news/view/36120
어느 해인가 금호문화재단이 선정하는 "금호음악인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의 일입니다. 열띤 토론으로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겨우 수상자를 결정할 수 있었고 바깥은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진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전하길 그때까지 박성용 회장이 퇴근하지 않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박 회장의 관심과 열의에 감탄을 했고 어느 심사위원은 '진즉에 말하지 그랬느냐'며 '그랬으면 좀 더 일찍 끝냈을 텐데'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심사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에야 그 자리에 잠시 들린 박 회장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는 것처럼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담당자에게 심사비가 적으니 더 올리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에게 저녁식사까지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따라 나서면 어느 식당을 갈지, 가면 무슨 음식을 먹게 될지를 너무나도 잘 일고 있었기에 사양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dailian.co.kr/news/view/36120
마지막 식사 초대는 너무나도 뜻밖이었습니다. 한 동안 보지 못했고 딱히 만나야 할 일도 없는데 함께 저녁 하자는 전갈이 왔고 그렇게 불려 간 자리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고급 식당이었습니다. 이 분이 어쩐 일인가 싶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혹시나 어려운 부탁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 동안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얼마지 않아 미국에 다녀 올 텐데 돌아오면 온갖 꽃과 나무를 다 가꾸는 식물원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미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진행 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분의 관심은 오직 음악이었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재능 있는 어린 음악도를 발굴하여 그 성장을 돕는 일을 무엇보다 큰 기쁨으로 여기는 분이었는데 느닷없이 식물원을 만드는 데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전에 음악 이야기를 나눌 때만큼이나 신이 나서 눈빛이 반짝이는 걸 보면 틀림없이 뜻한 바 그대로 이루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도 채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는 식물이 왜 좋은지 속마음을 살짝 비추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다해 아끼고 보살펴도 그걸 몰라주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식물은 언제나 정성을 들이는 만큼 크게 잘 자라서 보답을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부고가 날아들었습니다. 그제서야 미국으로 간다는 일이 암수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며 그 꿈을 이루려는 뜻을 꺾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때는 그를 보며 학자나 교수가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잘 맞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가끔씩 그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는 호미를 들고 모습입니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