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나카토오와 리히테르의 인연
일본 굴지의 공연기획사 재팬아츠의 나카토오 회장을 초청하여 특강을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지만 일본의 공연예술산업과 예술경영의 현황이 주제였기에 특별히 예술경영전공 학생들의 참여와 관심이 컸습니다. 아마도 학생들은 이 강연을 통해 일본의 공연예술, 그리고 예술경영 현장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보와 데이터를 얻으려 했겠지만 나카토오 회장은 두 시간이 넘는 강연시간 내내 어떤 예술가와 어떻게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그것을 어떻게 지속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Japan Arts 홈페이지 캡쳐
그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20세기의 전설과도 같은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와 나카토오 회장과의 인연입니다. 리히테르를 아는 누군가의 주선으로 두 사람이 함께 그 대가를 만날 수 있었지만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그에게는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을 뿐더러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속으로는 상당히 기분이 언짢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정중하고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그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만났더니 전과 달리 먼저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고 그 자리에서 전속 계약을 수락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리히테르는 그런 식으로 상대를 시험한 것이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시종 여유와 평정을 잃지 않는 그를 평생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피아노 연주자
리히테르는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대 비행기를 타지 않았는데 일본공연을 갈 때면 늘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요코하마까지는 배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가 직접 자동차를 운전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던 중에 그만 그 자동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괴팍한 거장은 달리 손써 볼 생각도 않고 바로 일본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카토오 회장에게 사태의 해결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말도 안 되는 억지일 수 있었지만 회장은 곧바로 리히테르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정비공장을 물색해서 수리를 끝낼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지 않아 또 고장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러자 이번에는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자동차 대리점에 연락해서 숫제 새 자동차로 바꿔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성으로 쌓은 신뢰 때문에 회사가 정작 어려움에 처했을 때 리히테르는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적은 액수의 출연료를 자청하여 전보다 더 많은 무대에 기꺼이 서 주었고 그 덕에 회사도 결국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난국이라 일컬었던 IMF 사태가 벌어졌을 때였고 그로 말미암아 예정되었던 초청공연들이 무더기로 취소되었습니다. 이미 계약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공연을 성사시키는 것보다는 계약서에 명시된 위약금을 무는 것이 이익이라는 얄팍한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손실을 감수하면서 예정된 공연을 강행한 사례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공연 가운데 하나는 출연자 스스로가 약속된 출연료의 상당 액수를 포기하였는데 뜻밖에도 그 공연이 매진되어 기획사를 살렸다는 미담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아마 취소된 공연들도 주최 측이 성의를 다해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했다면 출연자들로부터 양해와 양보를 얻어내고 더불어 신뢰도 얻고 수익까지 올렸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찾은 해외의 유명 아티스트들 중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액수를 요구하는가 하면 올 때마다 기획사를 바꾸기는 경우도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특강이 끝나고 질문을 받는 순서가 되자 강연 내용과는 무관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질문의 대부분 구체적인 수치들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공연에서 얻은 전체 수입 가운데 티켓 판매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냐, 혹은 해외 아티스트들을 초청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가를 묻는 질문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나카토오 회장으로부터 흥행의 비법을 듣고 싶었습니다. 현실에 그대로 대입하면 입맛에 딱 맞는 해답이 나오는 마법과도 같은 공식을 원했던 것입니다.
출처 : https://www.giggabpodcast.com/2017/09/05/multiple-bands-weather-issues-tip-jars-giggab-130/
질문을 받은 나카토오 회장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의 회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와 수치를 요구하는 질문이 있을 때마다 배석한 관계자를 불러 확인하거나 대신 답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개별적인 공연기획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대신 각 팀 별로 구체적인 기획안이 모아지면 회의를 통해 가부를 결정하거나 조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때 자신은 다만 조정자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각각의 공연은 철저하게 각 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며 재원이나 인력 등 여러 가지 필요한 제반 사항은 관리부서의 협조를 얻어 충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난세를 평정하여 에도 시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 등급으로 사람을 나누어 그 됨됨이를 따졌다고 합니다.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은 어떤 일에 임할 때 스스로가 앞장 서 그 능력을 다 소진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그보다는 낫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힘 뿐만 아니라 지혜까지 활용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날 나카토오 회장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떠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