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팅크와 바비롤리가 보여준 희생의 리더십 - 이건 꼭 알아야하는 홍승찬의 클래식 이야기 EP.04
이건 꼭 알아야하는 홍승찬의 클래식 이야기 EP.04
이번 시간에는 음악사 길이 남을 리더십을 보여준 #하이팅크와 #바비롤리가 보여준 희생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건음악회 때 방문했던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자들을 통해 들은 내용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였습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유튜브 이건음악회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Bernard Haitink
음악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고, 1954년과 이듬해의 2번에 걸쳐 네덜란드 방송연합의 하기 국제 지휘법 강좌에서 라이트너의 지도를 받았다. 55년에 동 방송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부지휘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갑자기 병에 걸린 줄리니를 대신하여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지휘하여 성공함으로써 널리 그 이름이 알려졌다. 57년에는 방송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가 되었고, 61년에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베이눔의 후임으로 요훔과 함께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64년에는 하이팅크가 단독으로 예술감독 겸 수석지휘자가 되었으며, 67년부터 79년까지는 런던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를 겸임했다. 88년에는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에서 물러나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화려함이 없는, 그러나 실로 깊은 맛의 연주를 들려 주는 사람으로, 여러 작곡가의 교향곡 전집을 완성해 낸 업적도 위대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최신 클래식 연주가 사전, 1994. 10. 20., 이대우)
존 바비롤리 John Barbirolli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바르비롤리(Giovanni Battista Barbirolli)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4세 때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나중에 첼로로 바꾸었다. 10세 때에는 트리니티음악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12∼1916년에는 런던 왕립음악원에 다녔으며, 관현악단의 첼로 연주자 및 독주자로 활동했고, 20대 중반에는 실내악곡 연주에 몰두했다. 그뒤 오페라로 방향을 돌려 지휘자로 활동하는 데 전념하여 코번트가든과 새들러스웰스오페라단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영국국립오페라단에도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런던교향악단·스코틀랜드관현악단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1935∼1937년 시즌에는 뉴욕필하모닉의 초빙을 받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의 뒤를 이어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이 관현악단의 100주년이 되는 1941∼1942년 시즌을 이끌었다.
그후 맨체스터의 할레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으며(1943∼1968), 지휘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 휴스턴교향악단(1961∼1967)과 베를린필하모니관현악단(1961∼1970)을 지휘하기도 했다. 1949년 작위를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존 바비롤리 [John Barbirolli] (두산백과)